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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대회 우승의 패도 부처님의 손에 있는가
요란한 굉음에 놀란 새벽의 꿀잠이 달아나버렸다.
어떤 부지런한 헨로상의 SUV(Sports Utility Vehicle)차가 날이 밝기도 전에 된비알을
올라오느라 힘이 겨운지 소리를 많이 질렀기 때문이다.
35곳 후다쇼(札所)를 거쳐오는 동안 확인된 것은 납경 마감시간은 사찰에 따라 조금
다르기도 하나 납경소가 문 여는 시각은 하나같이 아침 7시다.
그러니까, 이 헨로상도 나처럼 납경소에는 볼 일이 없는 이라고 보면 될까.
환해 가는 시각에 경내를 살피는데 한 기념비가 눈에 띄었다.
1985년 봄, 이 고을 이노상고(高知縣立伊野商業高等學校)가 57회 선발고등학교야구
대회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세운 석비다.(2014년은 86회)
봉납과 무관한 비(碑)라 생각되는데 왜 절에 바쳤으며 시코쿠헨로88개영장 중 16개가
고치현 안에 있는데 왜 키요타키지를 택했을가.
통칭 '봄의 코시엔(甲子園)' 으로 불리는 꿈의 야구장에 서는 것만도 영광인데 우승을
했으니 오죽 기뻤을까.
코시엔야구장은 일본 프로야구선수 공급원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선발고교야구
대회를 비롯해 유수한 야구대회의 결승전이 열리는 구장이다.
이 구장에 서는 것 만으로도 자신의 찬란한 야구인생이 절로 예약되는데 우승했다면
그 인생의 등기를 마친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피땀의 훈련이 밑거름이 된 우승도 부처와 코보대사의 은덕이라고 믿는가.
95%가 불교도인 일본에서 승리의 패가 부처의 손에 있다면 스포츠 정신은 어디에?
정신치료학과 심리학계에서는 TM(Transcendental Meditation/초월명상)이 심신의
안정과 집중력, 경기력의 향상에 어떤 효과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각종 제도권 종교는 물론 황당한 미신들까지도 나름의 기능을 하지만 과도한 의존은
심각한 역기능을 한다.
입시철을 비롯하여 어떤 경쟁상황에 직면하면 나약하고 무력한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신에게 매달린다.
그래서,어느 손을 들어줘야 할지 부처님도 하느님도, 말단 잡신까지도 모두 난처하게
하거나 무력(無力)을 드러내게 한다.
잘못된 절대의존으로 인해 일시에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시험을 앞둔 신학생이 시험공부 대신 밤새워 기도만 했다.
하느님이 정답을 가르쳐 주거나 아는 것만 출제되게 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지 답안지를 낸 학생의 독백은 "하느님 위에 시험이 있다, 하느님도 시험 앞
에서는 무기력하다"였다잖은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한국기독교 초기에 있었던 실화란다.
키요타키지를 택한 이유는 쉬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 학교소재지인 고치현 아가와군 이노정(高知県吾川郡いの町)과 키요타키지가 있는
고치현 토사시 타카오카정은 니요도강을 사이에 둔 인접관계다.
고치현의 16개 사찰 중 가장 가깝기 때문으로 이해하고 길 떠날 채비를 했다.
경로와 선망의 뜻이 담겼다는 코카콜라
한 눈에 펼쳐지고 있는 토사시.
14km쯤 되는 쇼류지를 향한 아침 일과(걷기)가 시작된 시각은 아침 6시 30분.
토사 시가를 내려다 보며, 올라왔던 산길 대신 차로를 통해 내려갔다.
아직은 헨로상들의 여러 차가 오를 시간이 아닌데다 다행히 납경소 직원과 일꾼들의
차를 만나면 작별인사를 하려고.(너무 일찍 내려왔기 때문인가. 아무도 못만났다)
출근시간이라 복잡한 교차로와 건널목에서 교통안전 봉사를 하는 기관직원 또는 모범
운전자들(?)에게 길을 물으며 헨로미치를 찾아갔다.
기이한 것은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현 위치에서 목적지를 향하는 길을 안내하지 않고
역(逆)으로 목적지에서 현재의 위치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려 한다.
그래서 목적지 부터 확인하고 간단한 안내도 복잡해지고 말이 많아진다.
과잉 친절이라 할까.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어렵게 39번도로에 진입한 후의 36번 쇼류지 길은 순조로웠다.
키요타키지에서 남서방향을 겨냥하고 갈 때 이미 지적한대로 순방향과 역방향이 구분
되지 않는 빨간화살표로 인해 더욱 헷갈렸기 때문이지만.
까미노 마드리드길에서 처럼 화살표 찾느라 헤매지 않고 방향만 바르게 길을 만들어
가면 어김 없이 화살표가 나타나는 괴이쩍은 체험을 이어간 아침이었다.
외곽의 마을 용수로 길로 가다가 서진하는 39번도로를 따라 야쿠로교(弥九朗橋) 보도
교로 하게강(波介川)을 건너면 쓰카지(塚地) 마을이다.
마을 끝 터널 직전, 쓰카지공원의 헨로휴게소에서 잠시 쉬려 하였으나 아직도 한밤인
텐트가족 때문에 '대사의 샘' 석주 옆 바위에서 쉬고 있었다.
코보대사와 관계된 어떤 사연이 있을 법 한데 "음료수로는 적합하지 않으니 주의하라"
는 안내판 외에는 아무 말도 없는 샘이다.
지나온 어느 절에서 본 듯 낯이 설지 않은 한 승용차 헨로상이 자판기에서 콜라 1캔을
꺼내들고 내게 다가왔다.
한국인임을 알 리 없는 이 중년은 내 나이가 가장 궁금했던가.
자기 아버지 보다 연장이지만 더 젊다며 내가 부럽단다.
경로와 선망의 뜻이 담겼다는 코카콜라를 마신 후 휴게소를 떠났다.
헨로미치는 이 지점에서 잠시 둘로 나뉜다.
다이쇼7년(大正/1918)에 개설했다는 요코세산(橫瀬山) 길과 쓰카지고개 터널길로.
전자에는 해발296m 요코세산 중턱(140m)을 넘어가는 840m의 쓰카지 고갯길이 있고
후자는 837.5m 쓰카지고개터널이 뚤린 39번도로다.
터널이 개통된 1998년 3월 이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산길, 외길이었겠지만.
나는 후자를 택했다.
140m에 불과한 고개에 겁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수일 전에 하기모리씨(萩森善根宿)가
한 단언적 권고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곧, 우사만(宇佐灣), 우사어항에 당도했다.
24시간도 못되어 다시 태평양으로 진출.
우사초 후쿠시마(宇佐町福島)다.
우사항 해안로를 따라 남하해 우사만의 서~동을 연결하는 645m우사대교를 건넜다.
우라 내만(浦ノ内湾) 만구(灣口), 우사어항과 동쪽 요코나미(横浪)반도를 잇는 다리다.
이 다리가 건설된 1973년(昭和48) 이전에는 나룻배를 이용했단다.
코보대사도 쇼류지 창건 때 배로 건넜는데 대동한 제자 8명을 그 곳에 남겨놓았다.
잔류한 그들은 '류노와타시'(龍の渡し)라는 도선을 띄웠는데 그 후손들이 대교가 건설
될 때까지 대를 이어왔단다.
다리를 건넌 후 '옛 헨로미치 450m' 안내판을 따라갔으나 다니는 헨로상이 없는가.
사라진 산길(옛길) 미련을 버리고 47번도로를 따랐다.
우사대교에서 시작되는 요코나미쿠로시오라인(橫浪黑潮line)이다.
1.5km정도의 해안로에서 남국의 정취를 한껏 느낀 후 700m쯤 걷는 마을길 끝 쇼류지
(靑龍寺)에 당도한 시각은 정오를 지난 30분.
황금대사 유감
코보대사는 당나라에 건너가 장안의 청룡사에서 밀교를 배우고, 혜과화상(惠果和尙)
으로부터 진언의 비법을 전수받고 진언 제8조가 되었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일본에 사찰 건립을 결심한 대사.
유연 승지(有緣 勝地)를 기원하며 동쪽 하늘을 향해 던진 독고저(独鈷杵/密敎 佛具의
하나)가 자운(紫雲)에 쌓여 하늘 높이 날아가버렸다.
806년(大同元年)에 귀국한 코보대사가 이 지역을 순교(巡敎) 여행중일 때였다.
당에서 던진 독고저가 오원(奥の院/현재의) 산 노송에 있음을 감득한 대사는 당시의
천황(嵯峨/재위809~23)에게 주상했다.
대사는 815년(弘仁6)에 이 땅(土佐市宇佐町龍)에 당우(堂宇)를 세우고 석조 부동명왕
상(不動明王像)을 안치하여 창건, 사명을 은사와 연관된 청룡사(青龍寺)라고 지었다.
먼 이국 땅에서 던진 '독고'를 산호로 하여 독고산(独鈷山)이라 했고.
36번 톳꼬잔 쇼류지의 창건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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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시절까지 4개의 말사와 6개 협방(脇坊)을 거느린 토사7대사찰이었다는 쇼류지.
본존(波切不動明王像)은 대사가 당에 갈 때 부닥친 폭풍우를 진압해준 것으로 전해져
지금도 항해의 안전과 풍어, 세간의 거친 파도까지 막아준다는 신앙이 있단다.
산문에서 본당까지의 170계단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참배하지 않을 것이면서도 올라가야 하는가" 자문에 "10번 키리하타지의 333계단은
참배하러 올랐던가" 반문 속에 답(지침)이 들어있지 않은가.
쇼류지에서 37번 이와모토지로 가는 길도 둘로 나뉜다.
우사대교로 되돌아가서 우라노우치만의 우안(右岸)을 타고 가는 23번도로와 쇼류지
에서 요코나미쿠로시오라인, 일명 요코나미스카이라인(橫浪skyline)인 47번도로로.
후자는 산길이지만 전자보다 1.7km 짧은 이점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전자를 택했다.
현지의 일본 노파도, 젊은이도 위험부담이 있는 길을 홀로노인이 어찌 가려 하느냐며
말렸지만 아무리 퇴물이라 해도 명색이 山나그네다.
해발130m에 불과한 산길을 두려워할 리는 없지 않은가.
산길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에서도 하기모리의 단호한 압력(?)을 받았다 할까.
아무튼 이유가 분명치 않은 선택이었다.
되돌아가는 2km는 버스가 있다면 아마 탔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교통(버스)이 뜸한 노선인데 조금 전에 떠났으며 다음 버스는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단다.
복로(復路)라 해서 2km를 버스 타기 위해 2시간 이상 기다릴 만큼 어리석은가.
갈 때는 무심히 보았지만 되돌이 길에서 길가의 대문짝 같은 간판이 눈에 거슬렸다.
오헨로상 환영의 온천과 여관, 삼양장(三陽莊)이 금빛 간판 '黃金大師'의 소유자다.
불교에서 大師의 사전적 의미는 고승의 높임말이다.
대사가 고유명사가 아니므로 위법은 아니다
그러나 시코쿠에서 '大師'는 코보대사의 약칭 수준이며 다른 몇몇 대사도 중생 제도를
위해 몸 바친, 범접할 수 없는 고승들임을 감안하면 사용에 신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사를 기독교의 목사, 신부로 대치하면 황금목사, 황금신부가 된다.
시코쿠헨로에는 헨로미치가 너무 많다
우사대교를 되건너 이와모토지로 가는 해안로(23번도로)를 걷기 시작하기는 14시 반.
쇼류지에서 60여km 되는 이와모토지의 도중 어느 지점에서 하루를 마감할 지는 나도
모르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코치해양고등학교 앞을 지나고 오카와교(大川橋/萩谷川)를 건너 있는 투박한 시멘트
창고 같은 헨로휴게소에서 잠시 쉰 후 곧 토사시에서 스사키시(須崎)로 넘어갔다.
만내(灣內) 순항선(巡航船)이 물길을 가르고 있는 우라노우치만(浦ノ內灣).
고치현해양어업센터 앞을 통과해 하이가타(灰方)마을을 지나면 만은 이쪽(북)과 저쪽
(남)이 바뀐다.
쓰나미에 하도 많이 당한 일본이기 때문인지 대비도 철저하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해안을 마치 댐의 둑처럼 축조해서 둑 위에 오르지 않으면 근거리 바다는 보이지 않는
지역도 수두룩하다.
그랬으면서도 더 높은 곳, 산 중턱에 대피소들이 있다.
대부분의 재해는 무비유환의 인재다.
우리가 일본을 따라야 하는 것은 인재를 막는 유비무환의 철저한 실천일 것이다.
U턴 하듯 방향이 바뀐 23번도로 따라 순항선의 도선장(谷村渡船場)을 지났다.
후카우라(深浦)마을을 지나 헨로휴게소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16시 반.
낚시터가 있는 해안인데 주말(금요일)이기 때문인지 강태공들이 몰고 온 차들이 주차
되어 있는 곳이다.
무리하지 않고 1박하기 무난한 곳인데 이런.
그저께 다짐했건만 또 배낭 안에 먹을 것이 없다.
낚시 온 중년에게 가게를 물었으나 인근에는 없단다.
마치, 가게까지 태워다 주기라도 할 듯이 묘하게 말을 돌리며 잘빠진 허우대와 달리
이죽거리는 사람과 말 섞고 있을 만큼 시간이 여유롭지 않아 대꾸하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기(氣)가 많이 빠진 늙은이 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수년 전만 해도, 산에서도 하루 굶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고심거리가 되지 못하였건만
2끼도 참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 야숙 리스트가 틀리고 지도가 맞다면 약 7km 전방에 코야가 있다.
리스트에는 없으나 지도에는 있기 때문이다.
없다면 대안인 통비닐이 있으므로 걱정은 되지 않으나 코야가 있다는 오시오카(押岡)
마을까지 7km쯤 더 걸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또 원치 않은 밤길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빨라진 걸음이 길지는 않으나 위험천만인(노폭이좁아) 우라노우치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터널 위 산이 기상(氣象)의 경계선인가 말짱하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으니.
무엇보다, 비를 피할 장소라야 하기 때문에 통비닐 사용 폭이 좁아진 것이다.
비가 저녁시간을 빨리 불러오는 듯 곧 어두워져 갔다.
17시 20분쯤 타치메스루기(立目摺木) 마을앞 길가에서 디카를 깊숙히 감추고 판초를
입는 등 비 대비를 강화했다.
밤6시에 도착한 우라노우치시가시분(東分) 마을에서 다시 둘로 나뉘는 헨로미치.
까미노에서도 누누이 지적했지만 갈래가 많은 길은 혼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성가(聲
價)와 신빙성만 떨어뜨리는데 헨로미치에는 길(헨로미치)이 너무 많다.
코보대사가 이 여러 갈래 길을 다 걸었을 리 없으며, 그렇다면 여러 길은 도리어 아무
길도 걷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먹혀들게 할 뿐이다.
시가시분 마을에는 민슈쿠도 있으나 콘베니(convenience store)에서 당면한 문제인
도시락과 빵 등을 사는 것으로 끝내고 밤길을 재촉했다.
다음 마을 니시분(浦ノ內西分)은 요코미네 스카이라인 길(47번도로)과 만나는 우라노
우치만의 서쪽 끝이다.
두 길의 합류점 삼거리의 주유소에서 스사키코야(須崎小屋)가 2km쯤 전방에 있음을
확인했으나 비내리는 칠흑 속에서 지나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공차증(恐車症)을 자극하는 밤길, 또 하나의 터널을 지나 가도가도 보이지 않는 코야.
마주오는 소형트럭을 세우고 지나치지 않았나 물었다.
아직도 1km쯤 더 가야 한단다.
안심하고 걷는 밤길이 멎은 시각은 밤(2014년 9월 19일) 7시 30분경.
1시간 반 가량의 먹통 길이 종료되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