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3. 31. 토요일(날씨 : 비 온 후 흐림)
1310 한국도로공사 수원지사 집결
- 다랑쉬 : 염충, 전익요, 송정석, 박장철
- 답사안내 : 한국전통문화학교 김영모 교수
0325 수원지사 출발
- 남쪽 회원(정명렬, 박수미) 부여 도착(백제역사재현단지 앞)
- 신진섭 1시간 후 부여 도착 예정
1335 경부고속도로 기흥휴게소 도착
- 회장님과 가족 합류
- 점심식사 및 휴식
1400 기흥휴게소 출발
- 부여 백제역사재현단지 2009년 완공 계획(당초 2004년 완공예정이었으나 연기)
- 재현단지 현장의 목장 : 최기영 대목장
- 명활산성(경주 보문단지) : 복원 및 정비계획 추진 중
- 안흥사터 : 이천 미란다 호텔 뒤편 주공 아파트
1510 천안논산고속도로 남공주인터체인지 도착
- 부여 : 수박,딸기,방울토마토,메론,마,양송이 등 생산하는 농업지역
- 전국 2위! - 다방 수
1540 백제역사재현단지 도착(정명렬, 신진섭, 박수미 합류)
1550 재현단지 공사현장 도착
- 안내자 : 금성건축 정창준 차장(감리)
- 왕궁과 능사(사찰) 건축 시행 중이며, 공방 등은 민자를 유치할 계획
- 백제역사문화관은 2006년 3월 개관
- 현재 왕궁의 정전부분만 완성
하앙식구조(백제양식) : 조선시대 사찰인‘화암사’1개소만 잔존하고 있는 양식
- 백제의 궁궐터 발굴하지 못함(공방지, 창고지 등은 발굴)
- 팔문양전, 무문전 등 포장재
- 궁궐 회랑지에 문이 있었던 흔적(창덕궁은 일부, 경복궁 등은 없음)
- 치미는 익산 미륵사지의 형태, 처마는 겹처마 형식
- 숫막새는 발굴되었으나, 암막새는 발굴되지 않아 지두문 기와 사용
- 단청(문양)은 고구려 고분벽화, 백제유물, 팔문양전, 만용문, 인동문 등에서 유추
- 보주는 민흘림, 평주는 배흘림 기둥 사용과 처마의 바깥기둥의 귀솟음과 처마선의 안쏠림 등은 착시를 보정하기 위함
1650 능사 재현 현장
- 능산리사지 발굴(백제 금동대향로 출토)
- 사비천도(성왕) 불교국가, 미륵사지는 무왕 시대
- 작년 고도보존법 시행으로 장기적으로 외곽으로 주민 이주계획
- 2010년 백제문화 EXPO 개최 예정
- 일본의 사천왕사(백제 양식)와 비슷
- 5층목탑(27m + 상륜부 9m) : 전체 공사비 70억원(1층 10평, 전체 50평)
- 팔상전 5칸, 능사목탑 3칸
- 목탑의 심주는 지름 81cm 나무기둥 3개 연결(상징성과 구조적 문제) : 하부에 사리보관 대신 공사참가자 명단과 도면 보관
1740 백제역사재현단지 답사 종료
1750 재현단지 출발
1810 성흥산성 도착
-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호
- 이 성은 본래 가림성으로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백제의 도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금강 하류의 요충지인 이곳에 돌로 쌓은 성으로 옛 지명과 축성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백제시대의 대표적 산성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성의 둘레는 1,500m이고 성벽 높이는 대략 3~4m이며 성의 외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호를 파서 그 흙으로 석축의 경사지에 붙여 쌓았다. 금강하류 일대를 한눈에 관망할 수 있는 요충지로 서기 662년 백제 부흥운동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도 성이 견고하다고 두려워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성내에는 3개소의 우물과 군창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초석 등이 남아 있으며 성흥산의 동남쪽 중턱에는 고려 초기 천연암석을 이용하여 만든 높이 10m의 미륵보상입상(보물 제217호)과 황금새의 전설로 유명한 대조사가 있다.(출처 : 부여군 안내간판)
1820 성흥산성 정상 도착
- 가림 : 가리다, 가림수, 임수 등의 은폐 엄폐를 뜻함, 가림문화권
- 백제 : 부여 정림사 5층석탑(부여의 중심의미 추정), 익산 미륵사지 석탑 뿐 나머지는 목탑
1855 성흥산성 하산
1900 대조사 도착
-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 : 이 석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거대한 미륵불이다. 크기에 비해 세부 묘사가 없으며, 조각기법이 세련되지 않은 점과 신체의 비례가 어울리지 않는 점 등이 관촉사 미륵보살상과 비슷하다. 특히 충남 지방 일원에 이 같이 거대한 양식을 가진 석불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은 이 지방에 유행한 미륵신앙에서 연유한 듯하다.(출처 : 안내간판)
1920 대조사 출발
1740 산장식당 도착(저녁)
- 우어회, 장어구이, 매운탕
2225 식당 출발
2230 한국전통문화학교 도착
- 김영모 교수 연구실 방문
- 안행준 합류
2325 한국전통문화학교 출발
2425 만수산 자연휴양림 도착
2007. 4. 1. 일요일(날씨 : 흐림)
0700 만수산 자연휴양림 출발
1715 만수산 무량사 도착
- 만수산 기슭에 자리잡은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서기 839-856)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고려 초기에 대중창하여 대웅전, 극락전, 천불전, 응진전, 명부전 등의 불전과 30여동의 요사와 12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고 조선 인조(서기 1623-1649) 때 진묵선사에 의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 경내의 극락전을 중심으로 5층석탑과 석등, 미륵 괘불 등의 국가지정보물과 사천왕문, 명부전, 영산전, 천불전, 산신각, 극락전 후불탱, 동종과 당간지주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현 사찰의 동쪽에는 최근 고려 초기의 사찰터가 발견되어 당시 커다란 가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은 조선 세조 때 생육신의 한 분인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와 영정이 있어 더욱 뜻 깊은 사찰이라 할 수 있으며, 주변에 도솔암과 태조암, 무진암이 있다.(출처 : 안내간판)
0815 만수산 무량사 답사 종료
- 무량사 입구 삼호식당에서 아침 : 된장국
0835 무량사 출발
0910 부소산성 도착
- 안내자 : 부여군청 문화재계장 여홍기
0920 부소산성 답사
- 부여 관북리 백제 유적
이곳은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부소산성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982-83년 발굴조사 때 백제시대의 연못이 발견되었고, 1992년 발굴조사 때 건물터, 하수도, 도로 유적 등이 발견되어 이 일대가 왕궁이었을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연못은 동서가 긴 사각형으로 할석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쌓았다. 연못 내부에는 많은 연꽃무늬수막새, 토기, 금동제 귀걸이, 나무판에 글씨를 쓴 목간, 등잔, 철창, 철촉, 대바구니, 목제품 등 백제유물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백제의 것으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며, 당나라 동전인 개원통보가 발견되어 연못의 축조연대에 참고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관아가 자리잡고 있었다.(출처 : 안내간판)
- 와적기단(기와재료) : 암채취 곤란에서 연유, 계단은 할석으로 마모되지 않게 함
활석, 흙 등의 기단사용 아스카문화로 전래
- 판축기법 : 점토와 모래를 일정간격으로 판으로 다져서 토성의 성곽을 만드는 기법
- 삼충사, 군창지
- 사자루 : 백제, 고려, 조선시대 주춧돌 양식이 공존
- 백화루 : 낙화암 정상의 정자
- 고란사, 고란초
1150 유람선 승선
- 망개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1200 구드래(구들애) 선착장 도착
- 왕실 선착장으로 왕흥사지에서 돛대가 보이면 홍수
- 부산, 일산, 오산의 삼신산
1210 민속관(점심)
- 전, 두부김치 등
1315 식당 출발
1320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 발굴 현장
1405 정림사지 도착
- 박물관, 사지
-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
이 탑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에 세워진 석탑이다. 탑의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 기둥이나 넓은 지붕돌 등을 따로 만들어 짠 탑으로 부분재료를 보면 목조건축의 구조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정돈된 형태나 장중하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백제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백제탑의 시원 양식으로 이를 본뜬 탑이 충남지역에 많이 만들어졌다. 1층 몸체돌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그 공적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출처 : 안내간판)
1525 정림사지 출발
1530 궁남지 도착
1600 궁남지 출발(답사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