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발의 정신과 작가
-신 창작이론의 구체화를 위하여
金南天
1
박영희 씨 등의 사상적 경향의 변천과정과 그것의 사회적 근거를 천명(闡明)하는 단문 중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일찍이 어느 기회에 기술한 일이 있다.
“문학운동이 균형된 보조를 가지고 나아갈 때에는 자아의 문제는 거지반 집단의 문제에 종속되었고, 당파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과의 사이에 모순이 생긴다든가 운동전부와 개인과의 심리의 사이에 어떠한 간격이 생길 때에는, 그것은 전자에 따라서 후자는 두말없이 귀속될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일종의 생활의 일원화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배후에 확대되는 세력의 몽상을 잃고 열광적인 행진의 앞에서 상상치 않았던 심연이 그를 들이켜 버리려고 할 때에 자아의 탐구와 인간에의 귀환은 드디어 인테리겐차 예술가의 폐엽(肺葉)에 좀먹기 비롯한 것 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운명을 집단의 거대한 운명에 종속시키고 자기의 표현을 이 속에서만 발견해 오던 시대에 있어서는 집단과 개인과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문화사상상의 불일치는 표면화될 여유가 없었고, 각 개인은 사소한 불일치를 실천과정 속에서 해결하여 그곳에는 일정한 객관적 방향과 영향 밑에서 일치하여 자기를 이끌고 나가는 통일된 방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었다. 작가는 이것으로부터의 일탈을 경계하면서 창작활동에 종사하였고, 평론가와 비평가는 이 통일된 방침의 엄정한 수립을 위하여 작가와 긴밀하게 협동하였다. 설혹 이러한 작가와 비평가의 지도력이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그곳에서 아직도 저미(低迷)하고 있는 위험한 상태를 과정(過程)하고 있을 때에도 이 예술가들의 방향의 과오를 사정하고 이것을 그릇된 길로부터 구출하여 줄 명확한 영향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있었다.
그러나 하루 아침 역사의 행정(行程)이 이러한 것의 일반적인 퇴조적 현상을 우리의 앞에강요할 때에 집단성의 밑에 종속되었던 작가와 비평가는 자신의 출신 계급을 따라 일개의 독립된 자기로 귀환하고 말았다. 이들은 그 전날 집단성 밑에 종속되었던 것에 대하여 그것을 역사적으로 정당히 평가하는 대신 소시민적 자의(恣意)위에 눌려있던 제주력(制肘力)을 일방적으로 그릇되게 회상하여 금일의 향유된 자유를 찬가(讚歌)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저주할만한 압제」로부터 해방된 작가와 비평가와 시인은 아무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소위 「자유인」이 되어 일찍이 그들이 경멸하여 침 뱉고 또한 저항의 대상으로 삼았던 「문단」이란 시민적 개념 밑에 자신을 종속시킴에 이른다. 상실된 자유탈환을 위하여 그들이 전개한 성전은 거룩한 「문단인」의 명패 획득에 의하여 단원을 지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나 혹은 지식인이 집단성 속에서 자기 표현을 발견하려고 한 것은 백철 씨 등에 의하여 오해되는 것과 같이 지식인 자신이 해결하여야할 문제를 헛되이 남에게 의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자신의 자멸을 인식하고 이 자멸로부터 구출되는 길을 집단성에의 종속 속에서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인 소시민이 자신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여 자멸을 방어하는 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집단성의 가운데서 자신을 살리는 방도 이외에는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집단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이 획득하였다고 하는 이른바 「자유」라는 것이 결국 「문단」에의 종속을 가르킴에 불과하고 저널리즘과 출판자본에의 자기 종속에 지나지 않는 것을 지적하면 문제의 해명은 스스로 명백할 것이다.
이러한 시민적 집단 개념인 「문단」과 출판자본의 밑에서 「자유」를 향락하는 작가와 비평가들이 그의 「자유로운」 시민 생활의 속에서 제작하는 문학에는 그러므로 통일된 방향이란 것이 없어지고 사상문화의 영역에는 착잡한 개인적 경향의 난조(亂調)가 특징적으로 되었다. 물론 이러한 통일된 방향의 포기와 개인저거 경향의 난조 상태가 작가와 시인의 예술적 독창성과 무연(無緣)인 것은 이곳에서 주위를 환기하여야 할 문제일 것이다. 문학은 각 개인에 의하여 독창적인 것으로 되어야 하고 작가는 그의 창작적 실천 속에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유의 성격을 구비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은 결코 사상 성향의 개별적인 분열과 문학의 일반적 성격으로부터 작가가 일탈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아름다운 자료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문학적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는 각자 계급의 지식적 분자이었다. 시민문학은 시민계급의 지식적 분자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조선의 시민문학도 그의 물질적 토대가 되어야 할 시민적 사회질서의 기형적인 발전과 한가지로 역사가 그들에게 부여하는 임무를 자신의 힘으로 감당치 못하고, 그 뒤를 이은 새로운 문학적 유산보다도 더 많이 부채를 상속하여 주었거니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시민계급의 지식적 분자에 의하여 산출된 것임에 틀림은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그러나 이렇게 순조로울 수는 없었다. 근로계급의 상대적 유약과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의 혜택이 태무(殆無)에 의하여 이들은 자기계급출신의 지식 분자를 문학의 영역에 보낼 수는 없었다. 간혹 육체적 노동에 체험이 있는 소수의 작가가 등장하였다고 하여도 그들은 노동자 계급의 출신이라기보다는 더 많이 시민계급의 서자(庶者)이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문학의 계승과 그 제작과 활동은 양기(陽氣)하려는 인테리겐차의 손에 의하여 행하여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시민계급의 방탕한 불효 자식들은 이 과분한 그러나 남자 일생의 천직으로 할 만한 새로운 문학의 개척자의 임무를 띠고, 역사의 위에 등장하면서 장구한 시일 동안의 생활적 교양과 관습으로 인하여 뼈와 살을 이루고 있는 시민적인 혹은 소시민적인 자의성과 우유부단성을 그대로 가져다가 집단성의 밑에 종속시키고 이 문학적 실천을 통하여 완전히 자기 자신의 고유한 유약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에 전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 전심하기 십 유여 년, 오늘날의 이 개인적 문학경향의 혼란 상태를 앞에 놓고 엄정히 자기 자신을 검토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 문학가들이 파지(把持)하였다는 문화사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약한 것이고 또한 우리들이 입으로 지껄이던 문학이론이라는 것이 온전히 빌려온 물건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맹이 해산 된 지 만 2년. 일찍이 이에 소속되었던 비평가, 작가들에 의하여 수많은 문학적 이론과 허다한 문학작품의 배출을 보았으나, 이것은 거개가 집단성으로부터 소시민이 일탈하는 전형적인 현상을 문화적으로 구현하여 주었을 뿐으로 그곳에서는 하나의 통일된 문학적 방향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인간 묘사론에서 비롯하여 인간탐구론, 문예부흥의 대망론(待望論)등을 거쳐가며 유물사관의 수정에 여념이 없던 백철 씨는 무진장의 정력과 예의 그칠 줄 모르는 요설을 가지고 금춘(今春)초두에 문단의 주류로서 휴머니즘을 환영하면서 장광설을 피력하였었는데, 이것은 곧 전통주의를 거쳐 국수주의(國粹主義)에로 통하는 면면(綿綿)한 씨의 행정(行程)중의 일야숙박(一夜宿泊)에 불과한 것임을 폭로하여, 결국 그것은 문단의 주류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백을 토로함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면, 씨에 의하여 적어도 프로문학보다도 일층 더 포괄성이 있고 넓은 지향(志向)을 가졌다 하여 문단의 주류로 환영되었던 휴머니즘은 ‘조선적인 것’의 탐구를 거쳐 전통주의에로 하향(下向)하는 씨의 여행 도중에 하룻밤의 침구(寢具)를 제공한 것에 그치고 만 것이다. 휴머니즘에 일야기우(一夜寄寓)를 청하였던 백철 씨는 여장도 채 풀기 전에 총총히 조선 문학의 전통을 탐구하여 신화시대로 걸음을 바삐하였다. 씨는 『사해공론』과 『조광』에 각각 「문화의 조선적 한계성」과 「동양인의 풍류성」이라는 기상천외의 논문을 발표하여 상식 있는 이를 놀라게 하고 있다. 씨가 이곳에서 기도하고 있는 바는 명백하다. 또는 조선 문학의 전통적 성격으로 풍류성을 발견하고 현대의 작가를 이끌어 황막한 신대(神代)로 들어가게 하자는 것이다. 과학적 섭취의 방법이 아니고 역사의 왜곡과 혈통이론에 의한 이같은 고전에의 귀환은 벌써 조그만 불만도 발견할 수 없는 전통주의의 진품(眞品)이다. 전통주의란 통제주의의 별칭이고 복고주의의 일면이다. 그는 곧 국수주의의 주막(酒幕)에 도달하여 그의 장구한 여행을 종료함에 이를 것이다.
3
그러나 우리들이 이 휴머니즘 환영의 희비극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문단의 주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이미 개인적 경향과 취미를 따라 갈래갈래 찢어진 문학적 현상은 그러한 처방전에 의하여는 구원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혼란은 결국 인간에의 귀환과 문학에의 귀환이 선물로 주고 간 것이므로 이러한 귀환론 속에서 다시금 문학을 찾아 돌리지 않는 한 조선의 프로문학 더 나아가서는 리얼리즘문학은 자멸로부터 자신을 구출할 수는 없다는 것 등이다.
집단성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탈환하여 인간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결국 소시민의 이탈과정을 자기 표현한 것에 지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정치로부터 문학을 분리하여 문학에의 귀환을 외친 것도 작가에게는 결코 행복된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즉 그들의 문학을 비속한 리얼리즘으로 추락시킴에 유용하였을 뿐이다.
소셜리스틱 리얼리즘을 싸고돌던 격렬한 논쟁은 어느 새에 어떻게 되었는지 유야무야(有耶無耶)하여 논쟁의 무원칙성을 폭로하였고, 작가는 이 논쟁이 제기한 여러 가지 과제에 의하여 자신의 창작 행동을 이(利)하려고 하지 않고 ‘춘풍태탕(春風駘蕩)’식으로 리얼리즘 일반의 범위를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다.
물론 소셜리스틱 리얼리즘의 토론자들이 작가들에게 희망한 것이 결코 이러한 일반적 리얼리즘에의 퇴영이 아닌 것을 필자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그의 생명을 좌우할 창작방법의 논쟁에 하등의 적극적 관심도 표하지 아니하고 일년이 넘는 토론과정에서 결국 날카롭게 발전된 성격을 가지고 제출된 신창작이론으로부터 중요한 사회적 계기를 빼버리고 소박한 사실적 수법밖에는 맞아들이지 아니하였다면 그 죄는 과연 누구에게 있을 것인가.
물론 작가들의 나태와 사회적 무관심이 이곳에서 단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평론가 자신에게 중요한 결함이 있었던 것도 또한 간과하지 못할 사실이다. 위선 그 중요한 것에서 하나 둘을 들자면,
①논쟁의 토대를 조선의 작가와 작품과 조선의 문학적 현실에 두지 않은 것. 평론가들은 신창작방법의 가(可)냐 부(否)냐를 토론함에 소련적 현실(사회주의적 현실)과 조선적 현실(자본주의적 현실)을 일반적으로 운위함에 그쳤을 뿐으로, 조선의 문학적 현실에서 토론의 자료와 물질적 기초를 구하기에 인색하였다. 이곳에서는 신문학이 있은 지 이십 여유(二十餘裕)년의 문학적 성과가 논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프로문학 십 년의 역사도 간과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쟁은 이 땅의 작가들을 그 속에 유도하지 못하였다.
② 리얼리즘 위에 붙은 ‘소셜리스틱’이란 말이 조선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침인가가 불문에 붙여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 창작이론이 조선에서는 구체적으로 여하히 발전되어야 할 것인가를 문학적 정세의 면밀한 분석 속에서 규정하지 못하고 사회정세 일반에서 기계적으로 추출(抽出)되었던 때문에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 당시에 ‘유물변증법’에 손을 다친 작가들은 다시금 신창작이론에 대해서도 그것이 그들을 삼켜버리려는 마귀라도 되는 듯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리얼리즘을 구체화하는 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지 못하였었다.
논쟁의 이 같은 무원칙성이 하등의 결말도 짓지 못하고 그대로 잠적해 버릴 때에 팽배한 세력을 가지고 엄습한 것이 우리들이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인간에의 귀환’과 ‘문학의 탈환’등이 형성한 예의 조류이다. 작가는 곧 신창작이론이란 조직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정치로부터 떠나서 문학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리얼리즘 위에 붙은 ‘소설리스틱’의 개념은 떼어버리고 그대로 평속(平俗)한 리얼리즘의 권내에서 안한(安閑)한 활동을 계속함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비속한 리얼리즘에 의한 문학적 활동을 이론적으로 옹호하고 합리화한 논문 중의 가장 최근의 것은 전일(前日) 본란에 게재된 「문학의 건강성과 퇴폐성」이다. 김용제 씨는 이 논문 중에서 ‘소셜리스틱 리얼리즘’을 경유한 금일의 조선 문학에게 범연(泛然)하고 비속한 신경향파 직후의 사실주의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씨가 흥분과 기쁨을 가지고 사용한 ‘리얼리즘의 승리’니 혹은 ‘건강한 리얼리즘’이니 하는 등의 명랑한 어구는 그것을 샅샅이 분석해보면 결국 신창작이론의 구체화의 임무로부터 작가를 퇴영(退嬰)시키고, 새로운 비약 없이는 구할 수 없는 프로문학의 위기에 처(處)하여 작가를 누란(累卵)위에 수면(睡眠)케 하는 ‘불건강한’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씨가 논문 첫머리에서 내건 ‘문학평론의 기준적 방법’이란 것도 이미 혼란 속에 분열되어 있는 금일의 문학을 끌고 갈 만한 구체성을 띤 것이 못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 아닌가. 대체 ‘건강’이니 ‘퇴폐’니 하는 범연한 개념으로 금일의 문학적 현상을 개괄해 보려는 것이 너무 낙관적이다. 오랜 문학적 활동의 경험을 가진 씨인 만큼 작가들에게 경고를 발하여야 할 시에 ‘건강’등으로 그들을 도취케 하는 것이 여하한 영향을 가질 것인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일보」, 1937. 6. 3)
4
물론 필자도 이 땅의 프로문학에 대하여 결코 비관적 태도를 가지는 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낙관을 가지고 말할 만한 훌륭한 상태에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아니 우리는 그가 지금 빠져있는 위기에 대하여 낙관 대신에 경고를 발하여야 할 것을 절실히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어느 일개인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 프로문학을 치렀다는 모든 작가에게 있어 그들이 지금 커다란 암벽 앞에 마주 서 있다는 것은 뚜렷한 사실인 때문이다. 작가 자신들도 그것을 몸소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방향으로 그들의 문학을 발전시킬가에 대하여 명확한 창작적 신조를 잃고 있다.
이러한 필자의 관찰이 결코 황당한 헛소리가 아닌 것은 예맹 해산 이후 그들이 걸고 있는 창작적 방향을 일별(一瞥)하면 명백하여질 일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이기영 씨를 보자. 씨가 「고향」에서 도달한 수준을 그 뒤에 얼마나 더 높이고 있는가. 그리고 씨에 있어서 새로운 창작이론은 어떻게 섭취되어 있는가. 그리고 씨에 있어서 새로운 창작이론은 어떻게 섭취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씨 자신 아마 ‘이렇다’고 내세울만한 성과가 없음을 유감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시민적 작가가 최근의 「수상(隨想)」모양으로 ‘작가에게 사상을 권하지 말라. 제 재조대로 나가리라’하고 무교양스런 반발을 기도할 것인가.
1. 이기영 씨 자신도 우리가 이러한 경우에는 어떠한 잔인한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충분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씨는 냉정하게 최근의 씨의 작풍(作風)을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할 때에는 씨 자신씨의 걸어온 길이 「고향」으로부터의 퇴보인 것을 느낌에 이를 것이다. 그 곳에는 이씨나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 ‘시대적 감각’이란 것이 얼마나 결핍되어 있는지를 발견할 것이다. 사상성의 저하. 평속(平俗)한 윤리관의 지배, 평탄한 자연주의적 수법에의 일탈, 그것은 「도박」에도 「맥추」에도 「배낭」에도 그리고 최근의 「산모」에도 있다. 더구나 지난날의 고도의 사상성이 평속한 윤리관으로 대치된 것은 특별한 주의를 환기하여야 할 문제일 것이다.
엄흥섭 씨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하다. 「고민」등에 나타난 통속화한 세계관 그리고 초창기적인 계급적 갈등의 예술적 설정 특히 「숭어」같은 데는 최서해의 재판을 연상케 하는 것이 지배적 경향이다.
다시 송영 씨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리얼리즘의 집요한 추급(追及)도 없고 낡은 30년대의 공식주의가 그대로 남아 있다. 약간 변한 것은 사상성의 저하뿐이다. 테마를 취급하는 방식, 소설이나 혹은 희곡을 구성하는 태도, 건둥건둥 뛰어넘다가 안이하게 주워 붙이는 처리, 인물도 인물의 성격도 모두가 구태의연하다. 「눈썹달」「숙수치마」「춘몽」「음악교원」등의 제작(諸作)을 보라.
한설야 씨에 있어서는 문제가 다소 다르다. 고도의 사상성을 추궁(追窮)하려는 노력, 평속한 시민 생활이 아니라 앙양된 특수한 테마를 잡아보려는 노력 이러한 것은 씨의 플러스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편 「황혼」이나 「임금」「태양」「후미끼리」등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테마와 사상성이 훨씬 풀어져서 예술적으로 구상화되지 못하고 생경하여 신판 공식주의라는 감이 없지 않다. 씨에게 있어서도 새로운 창작이론의 구체화의 방향은 예술적으로 이해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오랫동안 공장 안의 생활을 희작적(戱作的)태도로 써오던 이북명 씨에게 있어서는 약간의
진전이 있다. 사상 청년에 대한 귀여운 공상적 영웅화도 청산되는 빛을 보이고 있다. 「한 개의 전형」중에서 주인공에 대한 무자비한 태도, 또는 「답사리」에서 씨가 비로소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는 사실적 수법의 획득, 이러한 것은 이씨에게 있어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점일 것이다. 그러나 「연돌남(煙突男)」등에서 아직도 구투를 떨어버리지 못한 희작적 태도와 씨의 소설의 태반을 점령하는 공장과 공장 노동자의 생활의 평탄한 억양 없는 기록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유진오 씨만은 몇 개의 단편으로 이 시기에 대한 약간의 문제를 예술적으로 설정하였으나 이러한 문제의 맹아(萌芽)도 씨의 지적 귀족주의에 연유되었음인지 그 뒤의 발전을 찾아볼 수 없음은 유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작가들보다도 일층 유감된 것은 윤기정 씨의 창작 태도이다. 씨는 의식적으로 사상성을 포기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결과가 작가적 정열의 비속화를 낳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 밖에 시문학에 있어서는 방향 없는 관념적 낭만주의가 침윤되고 리얼리티는 대단히 희박하다. 임화 씨의 제작도 사실성이 너무 박약하여 위험하기 짝이 없다. (「조선일보」, 1937. 6. 4)
5
우리들은 흔희 좌담으로나 혹은 수상(隨想)같은 데서 고민과 불안과 회의를 이야기 한다. 그것을 혹은 현대인의 특징으로 이론화하기도 하였다. 도대체 과거에 쓴 물 단물 다 본 사람이 미끄러지는 과정에서 맛보는 고민이나 불안은 사회적으로 그리 높이 평가할 것이 못 되는 줄 안다. 그러나 털어놓고 말하면 입으로나 붓으로는 고민이니 불안이니 하지마는 우리들 자신 그것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쓰는 작품을 보면 명백하다. 어디에 시대적 중압이 있고 그 밑에서 고민하는 생활이 있는가. 적어도 ‘불안하는’ 사람들의 생활 양태는 그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들에게 만일 불안이나 고민의 심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나 예술적으로 구상화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는 돌과 같은 침묵, 요설(饒舌)과 바꾸어질 것이다. 우리는 불안 위에 안정하여 고민을 값싸게 향락하고 있지나 아니한가.
필자는 이기영 씨의 「고향」평에서부터 한 개의 방향을 고집해 왔다. 그것은 ‘자기폭로’‘자기격파’등의 문구로 표현되어 있었다. 나는 이것이 이 시대 이 땅에 있어서 리얼리스트 작가들의 갈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최정희 씨의 「흉가」평에서도 이동규 씨의 「신경쇠약」평에서도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자비하고 잔인할 것을 강조하였다.
적어도 필자는 이것으로 인하여 자기변호의 문학이나 자조적(自嘲的)문학이나 자기 은폐의 문학에서 리얼리즘을 역설하고 그것을 이 시대적 감각의 구상에서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였다. 고민, 회의, 불안 지식인의 유약성과 양심 이런 것이 이 창작적 기준에 의하여 샅샅이 부서지고 그것이 문학적 정열로 튀어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창작이론의 구체화의 길 그것이 만일 나라를 따라서 변하고 시대를 따라서 발전하여 정지할 줄을 모르는 방향이라면, 이 땅에 있어서는 이렇게 하여 시대와 함께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명백함과 같이 이것은 작품의 테마를 우리의 주위에서 취하여 올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작자 자신과 육체적 연관성을 가진 작중 인물을 설정할 때에만 이 기준은 유용할 것이다. 단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이 땅의 리얼리즘문학을 이끌고 나가기에는 너무 협착하였다는 것이다. 리얼리즘문학은 결코 사소설(私小說)과 정사(情死)하여서는 안될 것이 때문이다.
여기에 필자는 지금 이것의 발전으로 고발정신을 생각하고자 한다. 이 땅의 사실주의 작가들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그와 동시에 혹은 앞서서 걸어가기 위하여 그의 기준이 될 것으로, 그리고 신창작이론의 이 땅에 있어서의 구체화의 길로서 고발의 정신을 지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체를 잔인하게 무자비하게 고발하는 정신, 모든 것을 끝까지 추급(追及)하고 그 곳에서 영위되는 가지각색의 생활을 뿌리째 파서 펼쳐 보이려는 정열-이것에 의하여 정체되고 퇴영한 프로문학은 한 개의 유파(流波)로서가 아니라 시민문학의 뒤를 낳는 역사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추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을 예술적으로 실천하는 곳에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리얼리스트 고유의 정신적 발전에 불과하다. 신창작이론에서 날카롭게 제창된 모든 예술적 성격과 그의 사회적 기능-이것이 이 땅 이 시대에 있어서 구체화되는 방향에서 작가가 당연히 가져야 할 정신임에 불외(不外)한다.
이 정신 앞에서는 공식주의도 정치주의도 폭로되어야 한다. 영웅주의도 관류주의도 고발되어야 한다. 추(醜)도, 미(美)도, 빈(貧)도, 부(富)도 용서없이 고발되어야 한다. 지식계급도 사회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시민도 관리도 지주도 소작인도 그리고 그들이 싸고도는 모든 생활과 갈등과 도덕과 세상관이 날카롭게 추궁되어 준엄하게 고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서 진지한 휴머니티와 작가가 일체로 될 수 있으며 그의 예술이 그것을 구현함에 이를 것이다.
지면 관계로 결론으로써 겨우 제의(提議)를 봄에 그쳤으나 고발정신의 구체화를 위하여는 다시 논급할 기회를 엿보려고 한다. 그리고 옛날과 달라 혹 논술 중에서 인용된 작가와 비평가가 나의 글에서 불손을 느낄는지도 알 수 없으나 사소한 어구에 구니(拘泥)되지 않기를 희망하고 글을 놓는다.
(「조선일보」, 1937. 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