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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學의 자료 스크랩 매월당 김시습
소강이명주 추천 0 조회 28 10.10.24 14: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시습
출생 1434년
사망 1493년
홍산의 무량사
사인 병사
국적 조선
별칭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학력 1447년 중시에 장원
직업 학자, 문인
배우자 남씨
부모 김일성 / 선사 장씨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김시습(金時習, 1435년~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세조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승려로 생활하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생애 [편집]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시절 세종대왕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비단을 선물하자, 비단들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듣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六臣)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안응세(安應世)·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상처한 후 재취하지 않았고 홍산무량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뒤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저서 [편집]

  • 《유금오록(遊金鰲錄)》
  • 《관동일록 (關東日錄)》 100여편의
  • 《매월당집 梅月堂集》김시습 사후 18년에 중종의 명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10년이 걸려 3권의 문집으로 처음 완성되었다.
  • 《매월당시사유록》

 

 

금오신화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조선 초기에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집.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로 인정되고 있다. 완본은 전하지 않으며,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 등 5편이다.
창작 당대부터 희귀본이어서 옛 문헌에 이따금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 한말 이래 현품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 ≪금오신화≫를
최남선(崔南善)이 발견하여 잡지 ≪계명 啓明≫ 19호를 통해 1927년에 국내에 소개하였다. 이 목판본은 1884년(고종 21) 동경에서 간행된 것이며, 상·하 2책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32장으로 서(序)·〈매월당소전 梅月堂小傳〉·〈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 등이, 하권은 24장으로 〈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발문·평(評) 등이 실려 있다. 〈매월당소전〉과 발문 2편 가운데 1편은 한말의 정계 및 종교계에서 활약했던
이수정(李樹廷)이 쓴 것이다. 하권 끝에는 이 책을 ‘갑집(甲集)’이라고 한 기록이 있어, 본래의 작품 수는 5편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목판본 ≪금오신화≫는 1653년(효종 4)에 일본에서 초간되었던 것을 재간한 것이며, 초간의 대본은 오쓰카(大塚彦太郎)의 가문에 오랫동안 전하여 오던 자료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동경판 ≪금오신화≫가 소장되어 있다. 한편 1952년에는 국내에서도
정병욱(鄭炳昱)에 의하여 필사본으로 된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이 발견되었다.
이 작품이 창작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30대의 어느 작자가 경주의 금오산 용장사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이 작품의 창작배경으로는 우선 문학사적 전통을 들 수 있다. 나말·여초의 문헌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전기(傳奇) 또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에 의해 마련된 서사문학적 전통이 그것이다. 또한 창작 당대에 있었던 사회사 및 사상사의 새로운 전개가 창작배경이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건설자들은 주자학을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채택해서 지배질서를 확립하고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집권층의 생활기반을 확립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역사적 운동의 과정에서 이른바 신진사류로 불리는 일련의 소외된 지식인들은 민중의 처지에 동조하면서 새 왕조의 이념적 모순과 사회적 폐단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김시습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이(理)를 만물의 본질로 보는 주자학의 주리론(主理論)이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론이라고 공격하면서 기(氣)를 만물의 본질로 보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주기론(主氣論), 곧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사상을 수립하고, 이에 입각하여 만물을 객관적·합리적으로 인식하고자 했다.
여기서 개인과 사회의 대립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면서 그것이 작품 창작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 제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상적인 면에서는 불교사상 및 도교사상 등 다른 사상과의 관련성도 무시될 수 없으며, 따라서 크게 보면 유자(儒者)·선승(禪僧)·방외인(方外人)으로서의 김시습이 상호 이질적인 다양한 사상적 근거 위에서 나름대로의 글쓰기 방식을 개척하고 정립하는 과정에서 ≪금오신화≫가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외래적 요인으로서 명나라 구우(瞿佑)가 지은 ≪전등신화 剪燈新話≫의 영향도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향설은 한때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어 ≪금오신화≫는 ≪전등신화≫의 단순한 모방작품 정도로 처리되기까지 했으나, 계속된 새로운 연구에 의하여 그러한 영향설은 크게 극복되었다.
≪전등신화≫의 영향이 있기 이전에 이미 우리 문학사 자체 내에 ≪금오신화≫가 창작될 수 있는 충분한 여건과 요인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금오신화≫는 ≪전등신화≫의 수준을 크게 능가하는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전등신화≫와 ≪금오신화≫ 사이에 소재 및 내용상의 유사성이 있어 영향이 일단 인정되지만 유사성을 모두 영향의 결과로 볼 수는 없다. 한편 ≪금오신화≫는 일본 소설 〈가비자 伽婢子〉에 영향을 주었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다섯 작품이 지닌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을 등장인물로 하여 한국인의 풍속·사상·감정을 표현하였다. 둘째, 소재와 주제가 특이한 관계로 결합되어 훌륭한 문학적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소재에 귀신·염왕·용왕·염부주·용궁 같은 비현실적인 것이 많은데, 이러한 소재가 작품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수단으로 작용하면서 오히려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구실을 한다.
김시습은 귀신이 산 사람처럼 나타나서 행동한다든가, 현실 밖에 별도의 세계가 존재한다든가 하는 민간 속신을 논설을 통해 일체 부정했을 뿐 아니라, 작품구조에서도 그런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그는 작품에서 귀신을 통해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별세계를 통해 별세계의 존재를 부정했다.
비현실적 소재를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현실적인 것의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고, 거기에 내포된 주인공과 세계의 대결을 더욱 날카롭게 부각시켜 문제의식을 부여했다.
이러한 방법은 고도의 창작기교의 하나인 역설법이며, 그것은 주인공의 요구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계의 횡포와 거기에 맞서 세계를 거부하고 개조하여 세계와의 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주인공의 간절한 소망을 동시에 반영한다.
≪금오신화≫는 작자가 신비주의적·미신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합리주의적·과학적 세계관을 수립하면서, 그의 현실주의적 사상체계와 철학적 투쟁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셋째, 결말의 처리방식이 특이하다. 주인공들은 끝에 가서 하나같이 세상을 등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고전소설에서 종결부가 행복한 결말로 처리되어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주인공이 세상을 등지는 것은 운명에 대한 순종이나 패배가 아니라 그릇된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단의 표현이다. 여기에 작품의 비극적 성격과 초월의 의지 같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넷째, 표현형식에 있어서 유려한 문어체 문장이나 시에 의해 대상이 서정적으로 미화되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구성 또한 단편소설적인 정교함을 지니고 있다.
다섯째, 시가 대량 삽입되어 인물의 심리와 분위기 표현에 독특한 효과를 낳고 있다. 시의 대량삽입은 서정시가 국문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선 전기의 문학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의 삽입이 소설에 있어서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서사적 성격이 강한 서정시가 있을 수 있듯이 서정적 성격이 강한 소설도 있을 수 있으니, 시의 삽입이 장르 자체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여섯째, 이 작품은 작자의 생애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자 김시습은 학문적 능력은 탁월하면서도 정치·경제적 기반은 취약한 15세기 후반의 신흥사류로서 현실과의 심각한 갈등 속에서 극히 불우하고 고독한 생애를 보냈는데, ≪금오신화≫는 그러한 그의 생애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자서전적 성격이 농후하다.

한편, ≪금오신화≫는 이른 시기의 소설인 만큼 소설장르로서의 한계 또한 없지 않다. 경이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전설적 요소가 남아 있다든가, 소설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작품 외적 요소, 이를테면 기자조선의 멸망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나, 용궁·염부주 같은 특정한 민속적 사실이 생경하게 개입되어 있다든가, 서정시의 과다한 삽입과 갈등의 미약성이라든가 하는 것은 초기소설이 지닌 장르적 불안정성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금오신화≫는 내용·기교·작가의식에 있어서 훌륭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론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한국소설의 출발점을 이룬다는 점과 후대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梅月堂集, 金鰲新話(李家源 譯註, 通文館, 1959), 梅月堂金時習硏究(鄭泄東, 新雅社, 1965), 韓國小說의 理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7), 조선시대의 애정소설(박일용, 집문당, 1993), 韓國傳奇小說의 美學(박희병, 돌베개, 1997), 金鰲新話解題(崔南善, 啓明 19, 1927), 金時習의 生涯와 思想(鄭炳昱, 國文學散藁, 新丘文化社, 1959), 現實主義的世界觀과 金鰲新話(林熒澤, 國文學硏究 13, 서울大學校, 1971), 金鰲新話考察(金一烈, 朝鮮前期의 言語와 文學, 螢雪出版社, 1976), 金時習 글쓰기 방법의 사상적 근거 연구(崔貴默, 서울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9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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