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순천
캐치프레이즈라고 해야할까요?
그 지역을 널리 쉽게 알리려고 지역특징을 살린 상징하는 문구들이 있어요.
대나무의 고장 담양, 나비의 고장 함평, 녹차수도 보성하듯이요.
대한민국 생태수도는요?
네 순천에서 쓰고 있는 문구이지요.
그리고 도시 초입에 들어서면 순천은 도시가 아닙니다. 정원입니다. .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순천을 관광지로서 알리겠다라고 하면 그 대표적인 곳이 순천만과 순천정원박람회장이지 싶습니다.
적어도 행정관청에서 주력으로 삼는 것은요.
순천만이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얼마되지 않았지요. 우리가 환경을 중시하게 되면서지요.
생각나요. 거기가 조금씩 보전개발의 열풍이 불어나면서
관광객이 조금씩 오고, 제가 거기 처음 갔을 때 들었던 말.
뭣 볼거 잇따고 여까지 왔는지 몰것네...
대한민국 생태수도 순천은
순천만과 정원박람회를 배경으로 도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개장하고 몇 백만이 다녀갔다는 기사가 나오고요.
입장료도 다른 데 에 비해 상당히 비싼데도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갑니다.
지금은 AI 방지로 인해 문을 일시적으로 문을 닫고 있지요.
대한민국생태수도라는 말을 쓰기 전에 순천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라는 말을 썼었습니다.
이게 여수에서 돈자랑, 순천에서 인물자랑, 벌교에서 주먹자랑으로 연결되는 멘트거든요.
순천 인물자랑.
흥선대원군이 전라도 지역을 유랑하며 전라도 각지역을 표현한 ‘팔불여’가 있거든요.
여덟가지 최고.
중간에 한자로 쓰인 ‘불여(不如)’가 백문이 불여인견 할 때의 그 불여인데,
앞에 것보다 뒤가 낫다라는 표현이거든요.
그리고 어떤 것이 최고이다 라는 표현으로도 쓰입니다.
문불여장성, 문장은 장성이 최고요.
관불여나주, 관청은 전주가 최고요.
산불여구례, 산은 구례가 최고요.
지불여 순천이라 그러거든요, 지주
땅 넓기는 순천이 최고다. 순천은 지주들이 많다.
호남삼대갑부가 순천에 있었고, 천석군이 열은 넘었다고 하니 갑부들이 많았나 봅니다.
그리고 이 지주들의 부가 쭉쭉 이어져 일제강점기에는 고급 포목점이 순천에 제일 먼저 생기고,
여기에서 포목으로 옷을 멋지게 차려 입은 순천사람들.
그리고 또하나의 설은
예전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했는데 티브이 중계에서 고향이 순천으로 소개된 이가 진을 먹었나 봅니다.
방송에서 대구네 충주네 전주까지는 알아도 순천이라고 했으니 조금은 생소했고,
그때부터 순천에서 인물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요.
그다음은 제가 가장 믿는 내용인데 순천에 있는 학교 출신들이 중앙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생겼다는 설입니다. 전국에 검사가 2천명이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검사동문회라고 해야할까요?
같은 고교 출신으로는 대원외고 다음으로 순천이 44명으로 두 번째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번 벌교 주먹자랑 할 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인근 고향이 있지만 순천에서 상급학교를 다닌 이들이
중앙에서 활동을 할 때 어디가 고향이냐고 물으면 그냥 순천이라고 얘기한다는 것.
그래서 순천에서 인물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 순천”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순천에서 산적이 있어서 아는데
순천을 상징하는 문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팔마의 고장”이라는 표현입니다.
팔마의 고장.
여수쪽에서 순천 들어가는데 커다란 경기장이 있어요.
거기도 팔마경기장입니다.
팔마(八馬).
여덟 팔에 말 마입니다. 말이 여덟마리.
고려말로 올라갑니다.
이 지역 수장, 최석이라는 분이 순천 당시 승평입니다. 순천 사또를 역임하다가 중앙으로 승진해 올라갑니다.
백성들과 향리들이 관례에 따라 좋은 말 여덟 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당시 전별금이었나봅니다.
최석은 여덟 필이나 되는 말이 필요 없다고 사양하다 마지못해 받아 이삿짐을 나눠 싣고 왔어요.
그리고 개경에 돌아와 중간에 새끼 낳은 말까지 아홉 마리를 돌려 보냈습니다.
순천 사람들이 감동먹은 거죠.
그리고 은연중에 다음 사또에게 압력을 넣었을수도 있었을 겁니다.
백성들 쥐어짜지 마세요 라면서요.
그 내용을 새겨놓은 비석이 팔마비입니다.
몇 번을 훼손되고 없어지고 하다가 조선조에 새로 세우고, 지금은 시내 교보문고 앞에 있습니다.
팔마의 고장 순천이라고 하면 공직자들이 청렴하다 라는 상징이었는데
지방자치단체 선거후 1 2 3기 시장이 아마 뇌물수수 혐의로 시장직에서 쫓겨났을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팔마의 고장 -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 대한민국 생태수도.
도농 통합으로 1995년 승주와 통합된 후 순천의 면적이 굉장히 넓어졌어요.
당연 꺼리가 많지요.
우리나라 대표사찰인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고..
순천 조계산에 들어선 두 사찰 - 선암사와 송광사 .
저는 역사여행을 테마로 업을 하고 있고 직접 안내도 나섭니다. 그 시초가 있었겠지요.
문화관광해설사 제도가 처음 시작될 때 제가 그 활동을 했는데, 첫 안내지가 바로 송광사입니다.
송광사를 바탕으로 공부를 시작한 셈이고, 그 연으로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송광사나 선암사 그리고 불교 유적에 대해 말해 보려고 하는데 20여회 다되어가는데
아직 그 얘기는 안했네요. 나중에 기회되면 송광사와 선암사를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처럼 박제화 되어 있는 읍성이 아닌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낙안읍성,
우리지역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곳이지요.
순천에는 여행 주제가 광범위합니다.
순천만의 자연환경부터 사찰, 그리고 전통마을 등등요...
그런데
제가 역사여행 주제로 순천을 가게 되면 코스에 자주 집어 넣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곳을 사람들이 잘 몰랐는데 제가 넣고부터 광주에서 체험학습 하는 단체들이 집어 넣어서 가더라구요.
순천왜성입니다.
듣기에도 좀 생소하지요.
순천에 있는 일본성입니다.
임진왜란 - 1592년의 사건이지요.
우린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이지만,
이게 한중일 삼국이 연계되어 있는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는 전쟁이었거든요.
일본이 먼저 단숨에 한양을 점령하고 한반도 전체를 점령했었지요.
임금은 북쪽 땅끝 - 중국 경계까지 피난을 갔었구요.
그리고 명나라 군사가 들어오고 일본이 다시 후퇴.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
협상결렬.
다시 재침입.
그것이 정유년의 일본재침입인 정유재란입니다.
1597년이지요. 올래가 정유년이니 7갑자 420년 전의 사건이네요.
어쨌든 일본인들이 다시 침략을 했을 땐 전라도 지역을 유린합니다.
지난 임진년땐 전라도를 놓쳤기에 전쟁이 실패했다며 전라도를 치고 올라가요.
그리고 남해안에 30여개의 일본식 성을 쌓습니다.
경상도에 여러 곳이 남아있고요.
전라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성이 바로 순천에 있는 왜성입니다.
거의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순천시에서 다시 정비하고 지금은 성 문 몇 개와 그 흔적들을 몇 개 다시 쌓아 놓았습니다.
고증이 가능한게 명나라 화가가 전쟁에 참여했을 때 그려놓은 그림이 있습니다.
정왜기공도 라고 순천왜성의 그림이 남아 있거든요.
당시 쌓았던 성은 성문이 열두개이고, 길이가 2.5키로예요.
왜성의 특징은 뱃길을 통해야 한다는 것.
지금은 그 앞도로가 매립되어 있지만, 당시엔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거든요.
장수가 머무는 공간은 마치 오사카 성의 성채를 상징하듯 최고 높은 곳에 올라 있습니다.
그리고 성 둘레를 파내어 바닷물을 들여 해자 삼아 놓았지요.
누가 쌓았을까?
인근 조선인들이 쌓았겠지요.
종군 승려로 참가했던 일본인의 기록에 “지옥이 있으면 이러 모습이었을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나라를 빼앗기면 자기를 보호줄 이 없는 백성들은 이리저리 피해를 당하는 거지요.
여기 왜성에 누가 머물렀는가 하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들이 여럿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장수가 고니시유키나가, 가토기요마사
- 우리말로는 소서행장, 가등청정.
이 둘이 선봉장이었는데.
고니시가 바로 순천왜성에 있었습니다.
일본 토요토미가 죽고 일본군 철수 명령이 내려져요.
경상도 지역은 그냥 빠져 나가면 되지만, 순천은 돌아서 나가야 합니다.
순천에 머물던 고니시가 이제 왜성에 갇히게 됩니다.
고니시가 뇌물을 써서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길을 터줄 것을 요청하지요.
당시 조명 연합군이었으니 조선 명나라 연합군.
명나라의 진린이 이순신에게 그냥 조용히 애들 보내주면 어떻겠냐고 하자
이순신 장군이 단 한명도 보내줄 수 없다면 길을 막습니다.
이때 연락선이 사천쪽으로 연락이 닿고 그 쪽에서 고니시를 구하러 출동.
고니시가 구원병들의 도움으로 열려진 틈을 타고 도망을 갈 때
이순신이 출격합니다.
그 싸움이 노량해전입니다.
노량 - 이순신 장군의 최후가 있는 곳이죠.
노량해전의 출발이 바로 여기 순천왜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