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밤>-결국은 '설득력'이다
프롤로그,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사체 보관실.
메탈 느낌의 긴 복도, 푸르스름한 조명.
……
우리는 너 나 없는 나그네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
경비원(현봉식 분)은 TV 볼륨을 높이며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른다.
(심수봉의 '젊은 태양',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라는 노랫말에 집중하자)
20:10
갑자기 전기가 나가고 사체 보관실 캐비닛 하나가 열려 있다.
공포에 질린 경비원이 휴대전화를 떨어뜨리자 꺼졌던 전등이 다시 켜지고 TV 소리가 울려 퍼진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가격당하고 쓰러지는 경비원.
진한(김강우 분)은 눈에 인공눈물을 넣고 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친척들이 떠나자 그는 바로 집을 빠져나와 혜진(한지안 분)의 오피스텔로 간다.
아내가 죽은 날 애인을 찾아가는 진한.
아내의 죽음에도 슬퍼하지 않는 남자.
보편적인 상황은 아니다.
"목말라, 마실 것 좀 줄래?"
두 연인의 표정은 왠지 불안해 보인다.
국과수.
형사 중식(김상경 분)의 등장이 요란스럽다.
주차장의 쓰레기통을 들이받고 정차하는 낡은 차.
그러고 보니 중식이 가진 것들은 모두 낡았다.
(그의 시간은 과거 어디쯤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경비원은 '귀신'을 봤다며 횡설수설하고 건물에 외부인 출입 흔적은 없다.
사라진 시체는 45세 윤설희(김희애 분), 바론 홀딩스 회장이다.
그녀의 1차 소견에 의한 사인은 심근경색.
임신 7주차인 혜진은 입덧을 하지 않는다.
(정작 그녀는 6주차인지 7주차인지 헷갈려 한다)
그들이 막 늦은 저녁 식사를 끝냈을 때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
아내의 시체가 사라졌다!
22:50
어느샌가 비가 내리고 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불법주차 딱지를 떼고 있는 진한의 손이 떨린다.
죄의식일까?
그는 아내를 죽였다.
아내 설희의 집착과 독선은 이미 선을 넘었다.
그 날 입을 의상까지 지시하는 그녀의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고압적이다.
그녀는 진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 받는다.
"왜 자꾸 당신 혼자서 결정해, 내 생각도 좀 해야지"
"내 회사니까"
"당신은 내 일이 우습지?"
무기력하게 아내의 멸시와 독선을 견디던 진한은 결국 아내를 살해하고 만다.
설희는 진한이 따라준 독이 든 와인을 마셨다.
이제 8시간 후면 그녀의 몸은 서서히 마비되고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이다.
국과수에 도착한 진한은 형사 석원(이지훈 분)의 설명을 듣고 있다.
"누군가 시신을 훔쳐간 것 같습니다"
당황하는 진한에게 내내 옆에서 졸고 있던 중식이 갑자기 끼어들며 말한다.
"정확히 윤설희 씨 시신을 노린 범죄입니다"
부검의인 차박사(김지영 분)는 설희가 살아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중식은 법의학의 원칙을 운운하며 자연사가 아닌 살인사건으로 잠정 결론 내린다.
"모든 죽음은 증명되기 전까진 살인이다"
진한의 자동차 와이퍼에서 주차위반 스티커 조각을 찾아낸 중식은 그의 알리바이를 의심한다.
23:30
자정 무렵부터 진한의 심리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불리한 증거가 발견되면서 그의 불안은 증폭되고 설희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커져 간다.
차박사의 입을 통해 중식의 뼈아픈 트라우마가 표면화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도 과거에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고, 그것이 지금 그의 '아드레날린'을 과도하게 분출시키고 있는 원인인 것이다.
또다시 정전이 되고 진한은 아내의 빈 시신함에서 그녀를 살해한 약물인 'TH-16'을 발견하게 된다.
다 파기한 약물이 왜 아내의 유품함에 남아있는 것일까.
과거, 약속을 지키지 않은 진한에게 설희는 진행중인 신약개발사업을 중단하라고 지시했었다.
"니가 지금 잘나서 그 자리에 있는 줄 아니?"
"미안해"
무엇이 진한을 그토록 비굴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재벌 아내와 결혼했다는 과시욕? 혹은 출세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었을까?
"자긴 날 떠날 수 없다는 거 알지? 근데 정말 당신 갖기 힘들다"
변호사인 설희 동생(공민정 분)에 의해 진한의 굴욕적인 결혼계약서가 공개된다.
(동생 부부의 대화에서도 고압적인 아내의 태도가 쉽게 읽힌다. 부부간의 수직 관계는 이 집안의 공통점인 듯하다)
벽에 걸린 고장난 디지털 시계의 숫자를 본 진한은 크게 당황한다.
2007, 7, 20
십 년 전 여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설희가 살아있는 듯한 증거가 계속 발견되자 진한은 그녀의 생존을 확신하게 된다.
"윤설희가 이렇게 쉽게 끝낼리가 없어...설희가 살아있어...다 알고 있었던 거야, 처음부터"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순간부터 환상은 현실이 된다. 중식의 말대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어느덧 시간은 세 시를 향해 가고 있다.
이제 진한은 꿈과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너무나 혼란스럽다.
사체 보관실에서 발견 된 휴대 전화(경비원이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에 찍힌 설희의 문자.
-우리 비밀을 묻은 곳에서 기다릴게 2007년 7월 20일-
설희는 죽지 않았다.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지금 살아있다면...혜진이 위험하다.
진한은 결국 혜진의 존재를 중식에게 실토하게 된다.
혜진과는 1년 전 교양수업 강의 중 처음 만났다.
신약개발사업 중단 이후 설희에게 염증을 느끼던 진한은 혜진으로 인해 잊고 있던 '꿈'을 떠올리게 된다.
유능한 연상의 아내 옆에서 하나의 장식품처럼 무기력하게 존재하던 진한.
'강하고 남자답고 열정도 많은 사람'이라는 혜진의 한마디는 잠들어 있던 그의 자의식을 흔들어 깨운다.
진한은 그녀로 인해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설희는 그의 마지막 꿈인 '학교'마저 빼앗고 회사로 들어오라고 '지시'한다.
진한은 설희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치명적인 약점이 그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혜진의 오피스텔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중식의 말에 진한은 울부짖는다.
"당신들은 윤설희란 여잘 몰라!...혜진이가 죽을지도 몰라, 제발..."
마침 그의 변호사가 도착하고 진한은 십 년 전 '그들의 비밀을 묻은 곳'으로 미친듯이 차를 달린다.
4:10
강원도 숲 속 별장.
(이곳저곳에 걸려있는 결혼사진과 설희의 사진이 눈에 띈다. 사진 속에서조차 그녀의 자세는 위압적이다. 설희의 진한에 대한 집착과 감시의 시선이 느껴지는 설정이다)
2007년 7월 20일.
진한은 음주 상태로 교통사고를 냈고 설희의 종용으로 죽은 지영(중식의 약혼녀/경수진 분)의 시신을 별장 뒤 숲에 암매장 한다.
"괜찮아, 나만 따라오면 돼"
우유부단한 진한은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설희에게 구속되어 버리고 만다.
경황이 없던 두 사람은 언덕 아래로 튕겨져 나간 어린 화영(최명빈 분)의 존재를 미처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화영은 잊지 않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중식 역시도.
죽어가면서도 혜진을 걱정하는 진한의 모습은 분명 용서할 수 없는 악인임에도 일말의 연민을 자아낸다.
사랑하는 혜진의 실체가 언니의 복수를 위해 일부러 그에게 접근한 화영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최고의 형벌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말 한 적 없는데...사실은...아니야, 아무 것도"
혜진의 무릎을 베고 누운 진한의 눈에 고였던 눈물은 어쩌면 그의 마음 속 깊이 감춰진 죄의식이었을 것이다.
그가 혜진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러나 그는 결국 입을 다물었고 진심으로 사랑하던 혜진이 준 독약을 마시게 된다.
"우리 지옥에서도 마주치지 말자"
예상과 달리 중식은 진한을 살려둔다.
진한의 손으로 설희를 죽이게 유도하고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지영의 유골을 되찾는다.
다음날 아침 설희의 시체는 지영이 묻혀 있던 바로 그 곳에서 발견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통렬한 복수인 셈이다.
아다시피 <사라진 밤>의 원작은 스페인 영화 <더 바디>이다.
흔히 원작을 뛰어넘는 리메이크작을 만나기 쉽지 않다고들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의 변주는 성공적이다.
익숙한 언어가 주는 공감일 수도 있지만 결국 관건은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설득력일 것이다.
줄거리는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정서상 '남편과 딸'이 '약혼자와 동생'으로 바뀐 정도다.
사고사를 은폐하고 아내를 살해하는 비정한 남자 진한이 연민을 자아내는 이유는 그의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성격과 아내 설희와의 수직관계가 주는 극한의 스트레스를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룻밤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서서히 피폐해져 가는 진한의 내면을 적절하게 표현해 준 배우 김강우의 섬세한 연기력도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마지막 극적인 반전과 극 초반 시시각각 변해가는 국과수 내부의 상황을 빠른 템포로 엮어낸 이창희 감독의 연출도 흥미롭다.
글/배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