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봉(藥峰) 서성(徐성)은 이황(李滉)의 문인이었던 서해(徐?)의 아들이다.
선조 19년 별시문과(別時文科)에 급제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암행어사(暗行御史)로서 삼남(三南)을 순찰하고 돌아와
제용감정(濟用監正)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경상도(慶尙道) · 강원도(江原
道) · 함경도(咸鏡道) · 평안도(平安道) · 경기도(京畿道)의 관찰사(觀察使)
를 역임하고, 뒤에 호조(戶曹) · 형조(刑曹) · 공조(工曹)의 판서(判書)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계유옥사(癸酉獄事)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으로 풀려나 형조(刑曹) ·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학문(學問)에 능했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서성(徐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서경우(徐景雨)는 우의정
(右議政)에 오르고 네째 아들 서경주(徐景?)는 선조의 딸 정신옹주
(貞愼翁主)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둘째 아들 서경수(徐景需)의 증손 서종제
(徐宗悌)의 딸이 영조비(英祖妃)가 되었다. 이 아들들 중에서 넷째 아들
서경주(徐景?)의 자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만사(晩沙) 서경우(徐景雨)는 선조 3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
로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정주목사(定州
牧使)가 되었으나, 광해군(光海君) 5년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
고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大司
憲), 형조(刑曹) · 이조참판(吏曹參判),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 형조
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고, 인조 21년 성절겸진하사(聖節兼進賀使)가
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하고 기로소(耆
老所)에 들어갔다.
서경주(徐景?)는 선조 25년 정신옹주(貞愼翁主)와 결혼하고 달성위(達城尉)
에 봉해졌다. 이 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환도(還都)할 때까지
왕(王)을 호종(扈從)했고, 그 후에도 항시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총관(摠管)과 상의원제조(尙衣院提調)를 겸했고, 인조 때 상의원(尙衣院) ·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와 총관(摠管)을 겸했다.
만사공(晩沙公)의 아들인 서원리(徐元履)는 인조 5년 생원(生員)이 되어,
세마(洗馬)를 거쳐 왕자사부봉림대군(王子師傅鳳林大君)을 심양(瀋陽)에서
시종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뒤에 호조(戶曹) · 공조정랑(工曹正郞)을
거치고 천안군수(天安郡守)로 나가 새로 실시되는 대동법(大同法)을 잘 시
행하여 치적을 올렸다. 그 후 장령(掌令), 승지(承旨), 강화부유수(江華府留
守) 등을 거쳐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동지중추부사겸총관(同知中樞府事
兼摠管)이 되고, 이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이르렀다.
몽어정(夢漁亭) 서문중(徐文重)은 서원리(徐元履)의 아들이다.
효종 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현종 14년 학행(學行)으로 추천을
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이어 승지(承旨) · 경상도관찰사
(慶尙道觀察使) · 어영대장(御營大將) 등을 거쳐 숙종 13년 형조판서
(刑曹判書)를 지내고, 다음해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숙종 15년 기사환
국(己巳換局) 때 노론(老論)의 중신(重臣)으로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廢位)를 반대한 뒤 금천(衿川)에 은퇴하였다가 다음해 동지부사
(冬至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와 안변부사(安邊府使) 등을 지냈다.
숙종 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
府事)에 등용되고,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에 올랐으나, 이때 탄핵을 받아
다시 금천(衿川)으로 은퇴했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숙종 24년에는 사은사
(謝恩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후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
(領議政)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평생 독서(讀書)에 힘써 역대
(歷代)의 사적(事蹟)에 정통했으며, 저서(著書)도 많이 남겼다.
서종제(徐宗悌)는 서경수(徐景需)의 증손으로 숙종 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숙종 30년 딸이 연잉군(延잉君)이 영조로 즉위하여 딸이 정성왕
후(貞聖王后)가 되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에 추봉(追封)되었다.
서종태(徐宗泰)는 숙종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다음해 검열(檢閱)이 되었다.
숙종 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숙종 28년 공조판서(工曹判書) ·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숙종 29년 정조사(正朝使)로 청(淸)나라에 다녀
와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그 후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지냈고, 숙종 37년 영의정
(領議政)에 승진했다.
문익공(文翼公) 서명균(徐命均)은 서종태(徐宗泰)의 둘째 아들로
숙종 36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관(史官)에
뽑혔다. 경종 4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영조 1년에 동지중추
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동지사(冬至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와서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고, 이어 우참찬(右參贊) · 판돈녕부사(判敦寧府
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후 영조 8년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그 후에 진주사(陳奏使) · 주청사(奏請使)로 두 차례나 청(淸)나라에 다녀와
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그의 아들 서지수(徐志修)는 영조 16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사서(司書), 대사간(大司諫)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대사헌(大
司憲)이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비행을 조작한 김상로(金尙魯) 등을
탄핵했다. 시강원빈객(侍講院賓客)으로서 세자(世子)의 면학(勉學)을 도와
크게 존경을 받았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 · 우의정(右議政) · 좌의정
(左議政) · 예조판서(禮曹判書) ·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등을 거쳐
영조 42년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죽은 뒤 문청
(文淸)의 시호가 내렸다.
이상과 같이 서경주(徐景?)의 집안에서 서종태(徐宗泰)(영의정(領議政))-
서명균(徐命均)(좌의정(左議政))-서지수(徐志修)(영의정(領議政))의 3대(代)
에 이르는 재상이 배출되었는데, 그 자손에서 다시 서유신(徐有臣)(대제학
(大提學))-서영보(徐榮輔)(동(同))-서기순(徐箕淳)(동(同))에 이르는 3대
(代) 대제학(大提學)이 배출되었으니, 즉 6대(代)에 걸쳐 3대(代) 정승 ·
3대(代) 대제학을 배출, 서문(徐門)의 골격을 이루었다.
순오(舜五) 서유신(徐有臣)은 영조 48년 문과에 급제하고 대제학(大提學)
에 이르렀고, 순조 초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그의 아들 서영보(徐榮輔)는 정조 1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고,
정조 14년 진하사은사(進賀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순조 초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내고 대제학(大提
學) ·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수원(水原)의 지지묘비문(遲遲墓碑文)을
지었고,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 ‘사례사전문(射禮謝箋文)’을 편찬하고
썼다.서기순(徐箕淳)은 순조 26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대사성(大司
成)을 거쳐 이(吏) · 형(刑) ·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
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대제학(大提學)을 여러 번 역임했으며 청렴
한 관리로 명성이 있었다.서종태(徐宗泰)와 사촌형제간인 이조판서(吏曹判
書) 서종옥(徐宗玉)의 집안에서는 자손 3대(代)에 걸쳐 학자가 배출되었으
니, 곧 서명응(徐命膺)(대제학(大提學))-서호수(徐浩修)(직제학(直提學))-
서유구(徐有?))(대제학(大提學))가 그들이며, 그 중에서도 서유구(徐有?))
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농정가로 이름이 높은 인물이다.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은 영조 3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
고, 정언(正言) · 수찬(修撰) 등을 거쳐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
나라에 다녀왔다.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예조참판(禮曹參判),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한성판윤(漢城判
尹), 지경연사(知經筵事), 각 조(曹)의 판서(判書) 등을 지내고, 정조 1년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역임했다.
역학(易學)을 두루 섭렵하고 실학(實學) 연구에 전념한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며, 학자(學者)로서 명망(名望)이 높았다.
서호수(徐浩修)는 영조 4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고 영조 46년
홍봉한(洪鳳漢) 등과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했다. 영조 52년 사은부
사(謝恩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와서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이 되었
다. 정조 15년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가 되었고, 정조 23년 ‘홍재전서
(弘齋全書)’ 속편을 편찬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세자부빈궁(世子副賓
宮)을 지냈다.풍석(楓石) 서유구(徐有?))는 정조 14년 증광문과(增廣文科)
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헌종 때 좌(左) · 우참찬(右參
贊),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정조 21년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편집했
다.실학(實學)에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백가서(百家書)에도 통달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다. 순조 34년 호남순찰사(湖南巡察使)로 노령남북(蘆嶺
南北)을 돌아보던 중 기근(飢饉)을 겪고 있는 백성들의 궁핍을 목격하고
나서,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 편에 부탁하여 고구마 종자를 구입,
각 고을에 나눠 주어 재배를 장려하고, ‘종저보(種藷譜)’를 저술하여 그 재
배법을 널리 알렸다. 농정(農政)에 대한 경론과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營農
法)의 개혁(改革)을 누차 역설했고, 만년에는 친히 농사(農事)를 지으며
농업(農業)에 대한 백과사전(百科事典)인 ‘임원경제(林園經濟)16지(志))’
라는 저술(著述)을 남겼다.
‘임원경제(林園經濟)16지(志))’는 서목(書目)이 8백여 종에 달하는 방대한
것으로 다른 문집류에 비해 실생활과 직결되는 문집이란 점에서 높은 평가
를 받고 있다. 서명선(徐命善)은 보만재(保晩齋)의 동생으로 영조 3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영조 50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세손(世孫)(정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여 시행케 했다. 2년 뒤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고, 영조가 승하하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
를 지냈으며,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정조 1년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다음해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영중추부사(領
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서매수(徐邁修)는 서경주(徐景?)의 셋째 아들 진리(晋履)의 4세손이다.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신녕현감(新寧縣監) 등을 지낸 뒤, 정조 11년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정조 23년 형조(刑曹) · 예조(禮曹)의 판서(判書)에 이어 우참찬(右參贊)으
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온 후 좌참찬(左參贊)이 되었
다. 순조 3년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했으며,
2년 뒤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이 때가 대구서씨(大丘徐氏)가 조정의 고관에 가장 많이 포열했던 때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서유방(徐有防), 서유린(徐有隣), 서능보(徐能
輔), 서경보(徐耕輔), 서공보(徐恭輔), 서유보(徐裕輔), 서희순(徐喜淳),
서형순(徐衡淳), 서헌순(徐憲淳),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서유대(徐有大),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서좌보(徐左輔), 서재보
(徐在輔), 서영순(徐英淳), 이(吏) ·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판중추부
사(判中樞府事)에 이른 서준보(徐俊輔)를 들 수 있다. 시기는 이보다
조금 뒤떨어지지만 개항 후 고종조에 형(刑) · 공(工) · 예조판서(禮曹判書)
를 지낸 서상우(徐相雨)가 있다.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현손인 심재(心齋) 서용보(徐龍
輔)도 순조조에 영상(領相)에 올랐다.
영조 5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정조 7년 규장
각직각(奎章閣直閣)으로 등용되었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에 승진했다. 순조 3년 좌의정(左議政)에 오르
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가 순조 19년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했
다. 서당보(徐堂輔)는 좌상(左相) 서명균(徐命均)의 증손이다.
현종 1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고종 17년 이조판서(吏曹判書)
를 거쳐 다음해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고종 19년 영의정(領議政)에 오
른 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달성서씨(達城徐氏)로 고려조에 인물로 가장 이름있는 이는 정평공(貞平
公) 서균형(徐均衡)이다. 그는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의 인물로 ‘신증동국
여지승람’에 실렸다. 서진(徐晋)의 증손이며 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 간관
(諫官)으로 있으면서 공민왕 15년 신돈(辛旽)이 왕과 나란히 자리에 앉는
등 권세를 떨치자 “신(辛)을 죽여야 한다”고 직언(直言)하였다. 그는 왜구
의 잦은 침입에 대비, “주함(舟艦)을 구축하고 기구를 갖춰 적의 침입로를
막아야 한다”는 등 국방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공양왕 1년에는 상의문하(商議門下)로서
사부(師傅)에 임명되었다.
그의 증손인 서섭(徐涉)은 조선 초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서응시
(徐應時)는 조헌(趙憲)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따라 분전했
으나 7백의사(義士)와 함께 금산싸움에서 순절했다.
서변(徐?)은 인조 1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서학교
수(西學敎授)가 되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김상헌
(金尙憲) 등과 함께 주전파(主戰派)로서 청(淸)나라와의 화의(和議)를 극력
반대했다. 뒤에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지내고 효종 7년 천안군수(天安
郡守)가 되었다.
판도공파(版圖公派)의 시조 서진(徐晋)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손자인 서이(徐이)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
러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세종조의 인물 둔암(遯菴) 서한정(徐翰廷) (진사(進士))도 판도판서(版圖判
書) 서진(徐晋)의 후예이다. 단종 손위(遜位) 때에 가족을 이끌고 남하(南
下), 순흥(順興)땅에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
대구서씨(大丘徐氏)의 근대(近代) 인물로는 서광범(徐光範), 의병장 서상렬
(徐相烈)과 서재필(徐載弼)이 있다.
서광범(徐光範)은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개화파의 소장정치인이었다.
조선이 개화하기 위한 힘을 일본에서 구하여 일본의 지원하에 우정국사건
(갑신정변)을 일으켜 3일 동안 정권을 잡기도 했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에 망명했고, 뒤에 일본의 압력하에 이루어진 갑오경장 뒤
2차 김홍집내각에서 법부대신(法部大臣)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제국주의국
가로 조선을 병탄하려는 일본의 세력을 끌어들여 비판받고 있으며, 그 당시
에는 문중인들이 그가 대구서씨(大丘徐氏)의 항렬자를 쓰는 것을 부끄러워
하여 이름을 고치기도 하였다.
서상렬(徐相烈)은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제천
(堤川)에서 의병장 이춘영(李春永)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으로 싸웠다.
다음해 예천에서 회맹소(會盟所)를 조직, 대장이 되어 낭천(浪川)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서재필(徐載弼)은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와 사귀고 일본
에 건너가 동경육군유년학교(東京陸軍幼年學校)를 마쳤다. 조련국(調練局)
사관장이 되었다. 이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하
였다.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귀화,필립 제이슨이 되어 의학공부를 하고
1896년 귀국, 중추원(中樞院) 고문이 되고 독립협회를 조직,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국내의 압력으로 다시 출국하여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상해임시
정부의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광복 후 미국정청 하지의 초청으로 입국, 과도정부 최고
정무관이 되기도 했다.
구한말 이후의 인물에는 대구서씨(大丘徐氏)로 서화가 서병오(徐丙五)와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상일(徐相日)을 들 수 있다.
서병오(徐丙五)는 서화 뿐 아니라 가야금, 의약에도 통달했으며 군수(郡守)
를 지냈다. 대구에서 서화연구회를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고, 조선미술
전람회 심사위원을 지냈다.
동암(東菴) 서상일(徐相日)은 1909년 안희제(安熙濟), 김동삼(金東三),
윤병호(尹炳浩) 등과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 독립운동을 전개했
다. 그 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창당(創黨)에 참여하여 총무에 선임되었
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에 당선, 헌법기초위원(憲法起草委
員)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 제(第)5대(代) 민의원(民議員)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