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바이스, 독점 전력업체 분할로 ‘킹 메이커’ 자리 노려 … 소액주주들 반발로 일단 주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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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산업의 부(富)가 재분배 과정을 거치고 있다. 러시아의 우량 정유·금속 기업들이 실질적으로 내부 인사들, 이른바 ‘올리가르흐’(과두 지배세력)에게 무상 분배된 1990년대의 ‘썩은 민영화’ 이후 이제 독점 전력업체인 ‘통합에너지시스템’(UES)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52%, 외국 포트폴리오 투자자들이 20%의 지분을 갖고 있는 UES는 간단히 말해 세계 최대 전력업체다. 지역 자회사들을 모두 합칠 경우 UES의 발전용량은 15만6,000MW에 이른다. 이는 독일과 영국의 발전능력을 합한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그런 매머드 기업이 현재 분할되고 있는 것이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크렘린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UES의 소액주주들이 구조조정에서 공평히 대우받을 수 있도록 장기적인 투쟁에 나서면서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3년 동안 전개된 투쟁의 한 복판에 아나톨리 추바이스가 우뚝 서 있다. 그는 결점투성이인 러시아 시장경제의 전환을 기획한 주인공이다. 논리적·정열적·실용주의적 성격의 추바이스는 러시아 신흥시장에서 기린아로 통했다. 그러나 서방 투자은행들이 그에게 돈을 쏟아 붓고 서방 정치인과 언론들이 그의 의견을 대변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러시아 금융체계는 98년 붕괴됐다. 민영화 프로그램은 전례 없는 ‘정실자본주의’로 얼룩졌다. 추바이스는 자신이 기획한 민영화 프로그램으로부터 어떤 경제적 이득도 챙긴 게 없지만 당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그를 공직에서 해임했다.
추바이스는 스스로 다시 일어섰다. 그러자 옐친은 그를 즉시 UES의 회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막강한 권한을 지닌 자리였다. 추바이스는 러시아의 대규모 발전소와 송전망 대부분을 관장했다. UES는 러시아 2대 지역 전력업체의 대주주(평균 지분 49%)다. 따라서 추바이스가 러시아 시장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추바이스는 애초 전력생산 자산을 송전 및 난방공급 사업과 분리시켜 독점을 깰 생각이었다. 목표는 여러 전력업체가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전력 도매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추바이스는 “사회주의경제의 마지막 유물인 에너지 부문에서 지금도 과거 계획생산과 가격통제가 통용되고 있다”며 에너지 부문에서 시장이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자들로서는 안심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UES 소액주주들은 추바이스 계획의 초안을 접한 뒤 UES의 분할이 부패한 내부자 거래로 변질될 수 있다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논쟁이 길어지면서 UES의 주가는 하락했다. 오늘날 상승세를 타고 있는 러시아 주식시장에서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추바이스의 분할 안이 처음 발표됐던 2000년 3월 이래 러시아 증시를 대표하는 ‘RTS 지수’가 48% 오른 반면 UES 주가는 43%나 떨어졌다. UES는 적절한 실적(지난해 총매출 150억달러에 수익 1억달러)을 기록했으나 시가총액에서 겨우 50억달러로 평가된 것은 추바이스의 구조조정 목표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추바이스의 초기 계획은 단순했다. 송전망을 그대로 유지하되 나머지 UES 자산은 작은 수백 개 회사로 분할, 매각하는 것이었다. UES의 소액주주들은 격분했다. 그들이 분할기업의 주식을 받을지라도 실제 거래되는 대형주를 거래가 어려운 주식과 맞바꾸는 꼴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추바이스가 최우량 UES 자산을 매각, 실제가치 가운데 일부만 얻게 되는 최악의 경우에 대해 우려했다.
스웨덴 펀드 그룹인 프로퍼티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이사이자 UES 이사회의 소액주주 대표이기도 한 알렉산데르 브라니스는 추바이스 안에 대해 “자산가치를 깎는 조치”라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UES 자산 매각에 대한 우려를 서신으로 전달할 생각”이라고 밝혔다(추바이스는 자신의 계획이 초안일 뿐이라며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이윽고 푸틴이 전력 부문 구조조정 검토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사태에 개입하고 나섰다. 검토위원회는 84년의 미 AT&T 분할과 유사한 안을 내놓았다. UES를 수백 개가 아닌 30여 개 회사로 분할하고 UES 주주들에게는 지분에 따라 주식을 배분한다는 내용이다.
추바이스는 구조조정 안의 실행을 기다리지도 않고 UES 개별 매각에 나서기 시작했다. 올리가르흐와 재계 거물들은 이런 움직임에서 경쟁의 피비린내를 감지했다.
대형 석유·알루미늄·석탄 업계 거물 등 전략투자자들은 적어도 UES 지역 자회사 가운데 3분의 1로부터 방어지분(25%+1%)을 인수했다. 심지어 떨어질대로 떨어진 UES 주식까지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매입한 주식을 UES의 발전소나 기타 인프라, 이른바 ‘하드애셋’과 교환하려는 속셈이다. 추바이스는 자산을 ‘매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간단히 주식 담보대출 계약이나 주식발행 혹은 자산교환 공약으로 지배권을 넘길 수 있는 것이다.
추바이스의 주특기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해 그는 막강한 권한의 소유자인 모스크바 시장에게 전력·난방 공급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거대 석유업체 유코스는 시베리아 서부 톰스크 전력회사의 발전자산 지배권을 약속받았다. 러시안 알루미늄사는 대출금 1,000만달러의 대가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보구찬스크 수력발전소에 대한 투자를 보장해달라고 추바이스에게 요구했다. UES의 한 임원과 연결된 로스토프 남부 소재 어느 회사는 소규모 발전소 한 기를 4년에 걸쳐 250만달러에 매입했다.
지난해 여름 UES의 소액주주들이 이런 협상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들은 정부 지원 아래 50만달러 이상의 모든 거래는 이사회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결의안까지 통과시켰다. 브라니스는 “전력산업을 자신의 통제권 아래 두고 싶어 한 추바이스가 결의안 통과에 반대하고 나섰지만 결국 통과됐다”고 전했다. 추바이스는 UES의 결정에 이사회가 참여하는 것은 환영한다고 밝혔다.
어쨌든 이후 UES 이사회는 유코스와 러시안 알루미늄의 거래를 중단시켰다. 하지만 추바이스는 전력업계의 개혁을 밀고 나아가는 데 필요한 거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구조조정 우려로 주가도 급락
추바이스는 UES가 지분 100%를 보유한 이른바 ‘연방 발전소’들에 대해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 연방 발전소는 UES 발전용량 가운데 반을 차지하는 근대적인 대규모 발전소들이다. 추바이스는 연방 발전소들을 10개 경쟁사로 통합, UES 주주들에게 넘길 생각이다. 모든 주주에게 동등한 조건이 적용될 경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지난해 여름 추바이스는 연방 발전소의 관리권을 이탈리아 전력업체 에넬 등 외국 업체에 맡겼다. 게다가 외국 관리업체들에 앞으로 적지 않은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옵션까지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UES 주주들에게 추바이스의 의도는 95~97년의 주식 담보대출 방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당시 올리가르흐들은 주식 담보대출 방식으로 일방적 경매에서 국유 석유업체를 1년 간 관리하기로 계약했다. 그 뒤 외부 입찰자들이 군침조차 흘리지 못하도록 엉터리로 1년 간 회사를 경영한 다음 결국 헐값에 매입했다. 추바이스가 외부 관리회사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최근 소액주주들은 그에게 주식옵션 부여 안을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브라니스는 “관리사는 주주와 회사 사이에 완충요소로 기능할 뿐”이라며 “그 결과 회사 자산에 대한 주주의 지배권이 약화된다”고 설명했다. UES 주주이자 모스크바 소재 투자 펀드 허미티지 캐피털의 최고경영자(CEO)인 윌리엄 브라우더도 브라니스와 같은 생각이다. 브라우더는 “관리 전문가를 영입할 생각이라면 듀크 에너지나 AES, 프랑스전력 경영진 가운데서 10명 정도 채용하라”며 “대형 러시아 석유업체가 바로 그런 식으로 회사를 관리해 왔다”고 말했다.
UES의 구조조정을 둘러싼 공방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소액주주들은 위험천만한 추바이스의 제안을 일단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추바이스가 UES 발전소를 일방적으로 매각하러 든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UES 이사들은 주요 협상에 대한 거부권을 확보했다. 자산을 UES 주주들에게 비례 배분한다는 개념이 구조조정 안의 핵심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그러나 추바이스에 대한 불신감이 너무 뿌리 깊은 나머지 많은 주주가 그에게 어떤 권한이라도 돌아갈 경우 질색한다.
푸틴의 수석 경제보좌관으로 오랜 동안 UES를 둘러싼 추바이스안에 대해 비판해 온 안드레이 일라리오노프는 이렇게 지적했다. “연방전력을 장악할 경우 절대독점이 될 것이다. 송전망 접근은 모든 사업, 인구, 지방정부에 매우 중요하다. 전력이 없으면 사람들은 말 그대로 죽고 만다. 이는 제임스 본드 영화 <살인번호>(Dr. No.)를 연상시킨다. 영화 속에서 한 사내가 문명에 필수불가결한 어느 자원의 독점소유자가 되려 한다. 이것이 추바이스 안의 주요 목적일 듯 싶다. 나머지는 연막에 불과하다. ” 그러나 추바이스는 연방전력 장악에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라리오노프는 추바이스가 마구잡이식으로 밀어붙이는 전력시장 규제 철폐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UES의 구조조정은 올바른 질서 속에 이뤄져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에너지 사태는 소매전력의 가격 상한선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도매시장 규제만 철폐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줬다. UES 경영진이 제안한 현 계획은 캘리포니아 같은 에너지 사태를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시킬 것이다. ”
일라리오노프는 도매전력 시장의 규제철폐와 함께 천연가스 가격, 공동주택 임대료, 소매전력 가격의 철폐도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 당국이 이를 시행할 태세인 판에 추바이스가 너무 서두르고 있다”며 “다른 개혁 부분이 준비될 때까지 왜 못 기다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했다.
추바이스는 왜 서두르는 걸까. 그는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다. 가능할 때 즉각 조처를 취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진 않다” 고 말했다.
푸틴은 점진적 민영화 추진
추바이스가 의욕적인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옐친 집권기의 일부 정치인과 달리 추바이스는 거액을 착복하러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의심 많은 UES 주주들은 정치권력이야말로 추바이스의 주요 관심사라고 말한다. 그가 UES 구조조정을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 권력 브로커로 자신의 위상 강화에 활용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퀴에 기름을 치는 방법이다. 앞서 가게 될 경우 많은 사람이 추바이스의 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많은 러시아 사업자가 그와 친분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바이스는 중심에 서고 싶어한다. 모든 이가 만나 대화하고 싶어하는 인물이 되고 싶어한다. ” 브라우더의 말이다.
추바이스의 목적이 정녕 그것이라면 그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푸틴 정부는 현재 세부적이고 투명한 구조조정안과 점진적인 전력부문 민영화를 추진중이다. 지금은 옐친 시대가 아니다.
추바이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결국 그에게 너무 심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그는 지금까지 UES 주주들 권한을 터무니없이 침해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추바이스 비판자들이 편집증을 갖고 있거나 그를 지나치게 경계했던 것일까. 어쨌든 소액주주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된데다 푸틴 정부가 그들을 전폭 지지했다는 사실은 러시아에 희소식이랄 수 있다.
상황이 좋지 않은 쪽으로 바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올리가르흐들이 UES 자산을 인수하는 것으로 사태가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UES 구조조정을 둘러싼 논란이 현재로서는 주주 권리에 대한 기념비적인 승리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