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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남 편집전달>
*콜로세움에 숨은뜻을 살펴 볼까요?/푸른화원*
로 마황제들의 정치무대 콜로세움(Colosseum) 2000년전 로마 역사상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는 콜로세움이 8년 공사 끝에 개장을 하였다.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그의 공연에 관한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집트인들아 피라미트를 자랑하지 마라. 아시리아인들아 바빌론을 입에 담지 말라 황제의 새 원형 경기장 앞에서 그것들의 설자리는 없을 것이다. 모든 명성은 이를 위한 것. 모두가 이 그림자에 가려 지리라 !" 시인이 비길데 없이 위대하다고 일컬은 황제의 원형 경기장. 그것이 바로 - 콜로세움이다 - 로마에서는 시간이 길을 잃는다. 천년이 넘는 제국의 역사는 아직도 이 도시에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만나는 찬란한 예술과 문화, 놀라운 기술 혁신의 흔적들, 역사가는 말한다. "고대의 모든 문화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왔고 근대의 모든 문화가 그곳으로 부터 흘러나왔다."고. 로마는 말 그대로 서양 문명의 어머니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로마문명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첫 손가락을 꼽는 것이 콜로세움이다.
지금 남아있는 콜로세움은 겨우 원형의 1/3 규모다. 그러나 당대의 이 건축물은 명실상부 로마의 최고, 최대를 자랑하는 원형 극장형 경기장이었다. 또한 이곳은 황제들의 정치 무대이기도 했다. 서기 80년 바로 이곳에서 콜로세움의 개장을 축하하는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축제는 무려 100일간 예정되었고, 날이면 날마다 진기한 구경거리가 예고 되어 있었다. 축제의 주인은 '피투스 황제' 마트 위에 오른 새로운 황제가 시민들에게 배픈 대향연이다. 이곳에서 해전을 했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100일 축제를 기록한 '마르티알리스' 시인은 이렇게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 먼곳에서 처음으로 이 성스러운 공연을 보러 온 당신, 바다같은 물, 배들의 전투를 보고 놀라지 마라.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이곳은 원래 육지였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 콜로세움 내에 100개가 넘는 음수대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배수로가 연결되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경기장 내부에서 그 단서를 찾아 볼 수 있다. 경기장 내부를 둘러싸고 있는 도랑의 형태가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수로에는 물이 을러 나갈 수 있는 서른개의 배출구가 똟려 있다. 이 배출구로 흘러 나간 물이 경기장 아랫쪽 지하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개장 당시 콜로세움의 지하는 지금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유적의 바닥에 빼곡이 자리잡은 지하 구조물들은 후일 경기장을 개축하면서 건설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경기장은 어떤 구조였을까 ? 콜로세움에서는 티투스 황제 당애의 모습을 추정하여 목조로 된 무대를 일부 복원해 놓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모의 해전을 위해서는 경기장 바닥과 나무 기둥을 철거하고
방사형으로 된 경기장 내 수로와 지하로 이어지는 서른개의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했다. 지하 공간에 물을 가득 채우는데는 약 2시간 ~ 5시간이 걸렸를 것으로 추정한다. 물의 양은
65,000L
그 인공적인 호수에 戰船을 띄운다. 모의 해전은 원래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로 강이나 호수에서 전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면서 범죄자나 노예들을 배에 태우게 되고 한편이 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피비린내나는 구경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100일 축제에 또 등장한 것은 맹수 사냥이다. 경기장에 맹수를 풀어놓고 사람들과 싸우게 하는 것이 경기의 내용이다.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어느 날 '맹수 사냥 경기'를 이렇게 시로 읊었다. "그는 짐승의 왕으로
불리는 저 곰을 칼로 찔렀다. 그는 헤라클라스가 대적할 거대한 사자를,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죽였다." 콜로세움 제2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이 뼈 중에는 로마에는 서식하지 않는 열대 동물들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들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 당시 로마는 세계 제국이었다.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스클들랜드, 남쪽으로는 지중해를 휘돌아 이집트까지 걸펴 있었다. 그 광대한 지배 권역의 아프리카에서는 코끼리, 루비아에서는 하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자. 그런 방식으로 수많은 이국의 동물들을 공수해 온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00일 축제 중 첫날 하루에 죽어 나간 맹수의 수가 무려 5,000 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런 엄청난 축제가 10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 티투스 황제는 재체 무엇 때문에 이런 어마어마한 축제가 필요했던가 ?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티투스의 아버지였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시대로 돌아가 봐야 한다. 서기 69년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로마의 변방 유대 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로마의 민심은 내전으로 흉흉했다. 네로 황제가 반란군에 좇겨 자살한 후 1년 사이에 세명의 황제가 바귀는 대 혼란이었다. 로마의 동쪽 방어선을 맞고 있는 동방군단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를 로마의 9번째 황제로 추대했고 원로원이 공식 승인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동방전선을 아들 티투스에게 맡기고 로마로 귀환했다. 새로운 황제에게 주어진 과제는 내전으로 황폐화된 로마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또한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일은 황제로서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는 이전 황제들과는 달리 황족도 귀족도 아닌 평민 출신이었다. 그가 황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폭군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던 네로 황제와 자신은 분명히 차별화해야 했다. 학정과 전란에 지친 로마 시민들에게 무어을 주어야 할 것인가 ? 그때 베스파시아누스가 내놓은 가장 큰 선물이 콜로세움 건설이었다.
사실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제국 곳곳의 도시에 모두 경기장을 건설하였다. 어떤 공공시설보다 검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을 건설하는 것이 민심을 얻는데는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혈통의 정당성이 부족했던 베스파니아누스에게 그것은 절실한 문제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검투사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승률이 높은 검투사들은 어디를 가나 주목을 받았다. 검투사들은 대개 전쟁 포로 출신이었던 노예들이었으나 신분과 상관없이 그들은 당대 최고의 스타들었다. 그들의 땀은 향수로 팔렸고 여자들은 돈까지 내며 검투사들을 만났다. 검투는 로마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베스파니아누스가 검투 경기장을 건설하고자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아주 특별한 무엇이 되기를 원했다. 어느 황제의 경기장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건축물이 되기를 ….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경기장을 짓는 위치부터 특별했다. 베스파니아누스 황제가 주목한 위치는 市街 중심에 자리한 네로 황제의 궁전 자리였다. 바다처럼 보이는 인공 호수와 150개의 방을 거느린 초대형의 호화 궁전으로 그 이름도 화려한 황금궁전으로 불리던 곳이다.
서기 64년 로마에 큰 화재가 일어나 도시의 2/3가 불타고 수천명의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때 네로는 일반 시민들의 주거지였던 화재 지역의 80만㎡를 몰수해 자신의 개인 소유로 만들었다. 바로 그 자리에 지어진 것이 황금궁전이었다.
네로 개인만을 위해 지어졌던 궁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시민 모두를 위한 공공시설을 짓게 했다.
그것이 베시파니아누스가 택한 방식이었다.
콜로세움이 다른 경기장들과 달리 로마 시가 한복판에 자리잡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서기 72년 마침내 황금궁전의 물을 빼고 건설공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콜로세움 건설은 하나의 커다란 도전이었다. 두개의 원형극장을 합쳐 놓은 것 같은 이런 형태의 경기장은 처음이었다. 둘레가 527m, 길이 180m 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를 건축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52m에 달하는 높이였다. 이 높이는 오늘날 아파트 17층이나 18층에 맞먹는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돌로 짓는 건축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구조적 발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취의 발명이었다.
아취를 만들 때는 우선 목재틀을 지지대로 만들어 돌을 쌓고 꼭대기에 쐐기를 박는다.
쐐기돌이 돌의 무게를 양쪽으로 분산시킴으로써 아취 위에 더 많은 돌을 쌀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콜로세움 건축은 아취들의 교향곡이라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없는 아취들이 연속되고 이런 아취들이 마치 벌집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 경기장 모습
아취는 로마 건축의 공간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재료는 적게 들이고 무게는 줄이므로서 고층의 건축을 가능하게 한 핵심 기술이었다.
그러나 아취만으로 52m의 높이를 지탱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또 혁신적인 발명품이 등장한다. 콜로세움 유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웁게도 오늘날 현대 건축에 흔히 쓰이는 건축 재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벽돌과 콘크리트이 흔적이다.
그들은 후에 '시멘트'라는 단어의 유래가 된 '시멘텀(Caementum)'이라는 물질을 만들어 썼는데 여기에 모래와 자갈을 혼합한 것이 콘크리트다.
시멘텀은 석회석에 물과 특별한 재료를 함께 섞은 것이니 이 특별한 재료가 바로 화산재였다.
돌을 대체하는 또 하나의 건축재는 벽돌이었다. 이 벽돌은 콜로세움 건축에 100만개가 넘게 사용되었다.
로마인들은 서로 다른 자재들을 교묘하게 혼합해 크고 높은 구조물의 건축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보다 가볍고 견고한 건축재를 발명하고 활용함으로써
로마 건축의 혁명을 가져 왔고 콜로세움 건축을 가능하게 한 열쇠였다.
콜로세움은 최첨단 건축재와 건축 기술의 전시장과 같았다.
당대 로마인들이 고안해 낸 최신 기계 장치로 기중기도 그 하나였다.
콜로세움 건축 현장에는 도르레를 이용한 기중기가 동원되었다.
무거운 건축재를 위층 작업대에 들어 올리기 위해서는 기중기가 필수였다.
베시파니아누스는 자신의 작품에 심혈을 기우렸다. 콜로세움은 그가 원하는 만큼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데 충분한 위용과 아름다움을 갖추어갔다.
콜로세움의 외벽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각층을 지탱하는 기둥들은 각각 다른 그리스 양식이 채택되었다. 1층은 간소하고 중후한 도리아식 2층은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이오니아식 3층은 화려한 코린트식이었다. 1층 도리아식(doric style) 그리스 미술양식의 하나로 주로 건축양식에 쓰이며 간소한 장중미가 특징이다. 기둥은 기반부가 없는 형상이며, 수직방향의 흠은 매우 얕고 모서리는 각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목조건축양식을 석조건축에 응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폴로(Apollo), 파르테논(Parthenon), 헤라(Hera) 신전 등이 대표적인 도리아식 건축물이다.
그리스 고전 건축양식의 한 가지로, 이오니아로부터 일어나 아테네 전성시대 이래 한 세기 동안을 지배하였다. 기둥에 주춧돌이 있고 곡선상의 소용돌이 모양을 한 기둥머리에 그 특색이 있는데 우미(優美)·경쾌한 느낌을 준다. 고대 그리스 건축의 주두부(capital) 장식의 한 양식으로, 아칸서스(acanthus)의 잎을 디자인 한 것.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가 채워지고 5만여명이 앉을 수 있는 계단식 관중석은 대리석으로 완비되었다.
'벨라리움' 이라 부르는 차양막을 설치하기 위해 세운 나무 기둥.
콜로세움 맨 위층에는 나무기둥을 박아 '벨라리움' 이라 부르는 개폐식 차양막을 설치했다. 수병 1000여명이 줄을 당겨 필요할 때마다 차양막을 결고 닫았다. 덕분에 햇빛이 뜨거운 날에도 관중석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콜로세움의 성격을 단적으로 들어낸 것은 아취의 장식 등 조각품이었다. 베스파니아누스는 네로의 개인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던 조각품들을 공공의 것으로 돌려 놓았던 것이다.
네로가 자신의 모습을 본따 황금궁전 앞에 서웠던 거상은 없애지 않고 태양신으로 변조했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베스파니아누스는 콜로세움을 통해 자신이 로마의 본질인 공공성을 회복시킨 황제로 기억되길 바랬다.
그리하여 공사가 시작된지 8년만에 마침내 들어난 콜로세움의 그 모습을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이렇게 찬양했다. "황제의 지도력 앞에 로마는 본연의 모습을 회복했다. 폭군 개인의 쾌락이었던 이 공간이 이제 시민들의 기쁨이 되었도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에게 콜로세움 건설은 큰 의문이었다. 당시 네로와 3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로마 재정은 파탄 상태였기 때문이다.
베스파니아누스는 이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을 짓는데 드는 재원을 대체 어디서 마련했던 것일까 ?
단서는 콜로세움 내에 있었다. 이것은 콜로세움 남쪽에서 발견된 비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이 글자들은 후대에 수정된 것으로 돌에 남아있는 못자국을 이어보면 전혀 다른 원문이 들어났던 것이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베스파니아누스 황제는 전리품으로 세 원형 경기장을 지었다." 콜로세움을 건설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 아버지 대신 유대 전선을 지키고 있던 티투스가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것이다.
로마에 있는 티투스 게선문은 티투스의 예루살렘 정벌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기념물이다.
이 문에는 개선장군 티투스의 귀환이 잘 묘사되어 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한 병사들이 유대 신전에서 약탈한 신성한 보물들. 탁자와 나팔과 일곱갈래 촛대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모습이다.
당시 티투스의 귀국길에는 수레가 끝이 없었다고 전한다. 이때 수레에 실려온 수많은 전리품들이 콜로세움 건설 비용에 총당되었고,
3만여명에 달하는 노예들은 현장 노동력으로 투입되었다.
콜로세움은 정복자의 경기장이었다.
서기 79년 베스파니아누스 황제는 세상을 떴다. 자신의 야심작인 콜로세움 완공을 누앞에 둔 시점이었다.
콜로세움 개장은 새 황제 티투스의 몫이 되었다.
콜로세움은 티투스에게도 중요한 정치 무대였다. 새 황제는 아버지의 대경기장에 버금가는 거대한 스팩타클을 펼쳐 보이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100일 축제로 100일나 계속되는 축제 프로그램이었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刻石으로 된 콜로세움 입장권부터 받아야 헸다.
출입구 번호(32) 입장권에는 경기장에 있는 76개의 출입구 중 자신이 입장해야 할 번호가 쓰여 있어 그곳으로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러한 설계는 사람이 많이 몰려도 효율적인 입퇴장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었다. 5만여명의 관중이 30분이면 다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각각의 출입구마다 입장할 수 있는 좌석이 정해져 있었다.
귀족들은 맨 아랫단의 좌석이 지정석이었다. 그 뒤는 기사들이, 그 뒤는 평민들이 앉았고 시민권이 없는 사람과 여자들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 가장 불편한 위쪽 좌석에 앉아야 했다. 대신 그들은 돈을 내지 않았다.
황제의 입장 경로와 황제의 자리는 경기장 어디에서나 잘 보일 수 있겠끔 신중하게 설계되었다.
황제가 로마 사회의 정점임을 한눙에 들어내고 있는 위치였다. 민중들에게 황제의 권능을 과시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무대는 없었다.
100일 동안 콜로세움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어디까지나 검투 경기였다.
검투 경기는 로마인들의 피를 끓게하는 것이었다. 검투의 승패는 한 순간에 삶과 죽음을 가른다.
삶이냐 ? 죽음이냐 ? 패배자의 생사는 황제에게 달렸다. 그러나 그것을 황제 마음대로 한 것만은 아니었다. 황제는 군중의 의견을 받아들여 패자의 생사를 선택했다.
불행이도 오늘 군중의 선택은 죽음이다. 경기장의 권력 최정상인 황제가 민중의 소리를 직접 듣는 자리였다.
콜로세움은 그 규모나 구조에서 황제가 한 눈에 관중을 보고 의사를 파악하는데는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또한 이런 공공 오락 시설은 황제가 시민을 직접 만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민중의 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티투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깨달음을 위해 뼈아픈 댓가를 치뤄 보았기 때문이다.
티투스가 유대 전선에 머물던 시기.
그는 사랑에 빠졌다. 당시에 로마에 협조적이었던 유대왕 아그리파 1세의 딸 베레니케가 그 상대였다.
이민족의 딸이었으나 그들의 사랑은 뜨거웠다.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니아누스 황제가 있는 로마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별은 길지 않았다. 연인을 뒤딸아 베레니케가 로마로 왔기 때문이다.
실로 꿈같은 상봉이었다. 이제 그들 앞에 끝없는 행복만이 펼쳐질 것 같았다.
두 연인은 티투스의 저택에서 함게 살았다. 티투스는 공식적으로 케레니케와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로마 시민의 격한 반대에 부딪혔다. 로마 민중들은 유대공주가 미래의 황후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서 로마가 전쟁에 휩쌓였던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티투스에게는 당시 많은 정적들이 있었다. 스켄들에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베레니케를 유대땅으로 돌려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티투스는 후일 그가 황제가 된 후에도 어떤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고 죽을 때가지 독신으로 지냈다.
그들의 목소리를 귀를 기울였기에 티투스는 로마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집정은 단 2년만에 끝났다.
서기 81년 티투스 황제가사망했고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새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콜로세움의 사실상 완공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때에 이루어졌다.
도미티아누스는 당시까지 3층밖에 완성되지 않은 콜로세움의 맨 위층인 4층을 올려 공사를 마감한다.
더욱 큰 변화는 새로운 지하 시설을 만들어 전혀 다른 차원의 쇼를 제공한 것이다.
지하 6m. 모이 해전에 물을 채우기 위해 텅 비어있던 공간을 각종 경기를 위한 복잡한 대기 공간으로 바뀌었다.
우리에 갇힌 각종 동물들과
처형을 기다리는 죄수들.
몇 분 뒤면 서로 싸워야할 검투사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공간
이 어두운 지하 세계는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 할 존재들끼리 함께 숨죽이며 경기를 기다리던 곳이었다.
지하에는 아직도 그 긍강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케스턴'이 있던 자리다.
승강장치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노예들이 달라 붙어서 케스턴을 돌려 승강 장치에 동력을 만들어 냈다. 당시 콜로세움에는 적어도 28개의 승강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이런 승강기를 움직여 각종 무대 장치와 맹수들을 경기장으로 들어 올렸다. 지상의 경기장에서 앞 순서가 진행되는 동안 지하에서는 다음 경기의 출전자들이 승강기로 이동한다.
케스턴이 돌아가고 승강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간. 지하에서 지상으로 주인공은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고 마치 마법처럼 땅 속에서 홀연히 솟아나듯 모습을 들어냈다. 도미티아누스가 대규모 지하 시설 공사를 한 것은 이런 지하 연출 효과를 위해서였다.
그는 콜로세움에 야간 경기를 도입함으로로써 극적 효과를 더했다.
그 역시 아버지와 형님을 이어 상상을 초월하는 이런 깜짝 쇼를 주재함으로써 자기의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민중과 통하려는 황제들의 강력한 정치적 목표가 있었기에 콜로세움은 비로소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 콜로세움은 뼈대만 남았다.
그러나 괴테는 말한다. "로마를 볼 때는 육체의 눈으로 보지말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고
콜로세움도 그렇다. 지금 우리가 보는 콜로세움은 원형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으로 보면 그 속에서 실로 거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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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샘,감사 이렇게 깊고 어머어마한 상상력 = + 창의력 실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