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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로 구성된 중국 지도부의 교체 방법과 삶의 현장
1. 앞으로 맞이할 우리의 국가와 국민의 모습
2. 국가의 구성요소인 국민
3. 자원과 에너지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4. 미국은 에너지 확보에 최우선 하는 지도부를 갖고 있다.
5. 미래를 지배하는 국가는 어떻게 변화할까?
6. 중국을 들여다 본다.
7. 중국의 지도부와 권력 이양
8. 작은 중국 이야기들
8-1 진산(금산)
8-2 상하이(상해)
8-3 광쩌우(광주)
8-4 승조우(승주)
8-5 동광
8-6 수저우(서주)와 덩저우(등주)
8-7 중국의 유교문화
9. 한국의 지도자와 4대강 살리기
1. 앞으로 맞이할 우리의 국가와 국민의 모습
우리의 학창시절에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3국은 세계 최고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라고 상당히 부러워했다. 국가는 국민이 안전하며, 풍요로우며, 자유로우며, 행복해 하는 나라를 만들어 주면 더 완벽한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해서는 때로는 순서가 있을 수 있다.
국가에 대해 때로는 민족, 왕정, 종교, 사상에 의한 과거의 그 많은 모습을 가진 역사를 지금 여기서 거론할 필요는 없다. 우선 내용이 광대하고, 이야기는 한정된 범위(울타리)를 정하고 시작해야만, 나름대로 문제 제기와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고, 미래의 후손들에게 어떠한 국가를 넘겨주느냐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대한민국은 재편성 된 21세기의 국제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국민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가 지금 우리의 최대 과제이다. 당신은 진정한 애국자이고, 당당한 국민의 한 사람인가?
국가는 국민이 사용할 자원과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 및 유지와 계속적으로 개발하여 경제를 안정시켜 국민이 풍요로움을 가지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결국은 자원과 경제라는 대 명제를 풀어갈 국가의 지도부가 강력하게 요청 되는 것이다.
냉전시대의 소련에서는 계획 생산에 의한 빵으로 인민이 고루 빵을 배급 받았다. 그러나 개방과 자본주의 도입으로 더 많은 빵을 생산하고 있지만, 빵을 못 먹는 인민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는 일시적 현상이고, 시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의미나, 국부의 증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국가의 강력한 지도부에 의한 국민의 연속적인 안전과 풍요를 자유롭게 즐기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힘과 경제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역사적인
작금의 한국의 지도부는 역사의 한 장에서 후세에 진정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남기는 자신을 갖고 있어야 하며, 대부분 비록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도 자신에게 당당한 국민임을 자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국민 개인 삶의 진솔 된 가치와 삶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몇 해 전에 나는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학자가 소공동 롯데호텔 포럼에서 한 말이 기억이 난다.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없어도 조국은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조국을 떠나고 싶다’ 왜 그는 대한민국에서 각종 최대의 혜택을 받고 있으며 연구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러한 말을 공개석상에서 해야만 했을까? 한국의 정치 지도부를 질타한 이야기이다.
작금의 거대 중국은 “Parag Khanna”의 “제2세계”에 나오는 ‘중국, 새로운 슈퍼파워의 등장’에서 언급한 이야기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미국의 주요한 두뇌 유입원이었다. 중국 스파이들이 미국에서 수십억 달러 상당의 기밀을 훔쳐가는데.../James Lilly의 “Nine Decades of Adventure, Espionage, and Diplomacy in Asia”
한국의 지도부는 국가의 미래에 국민을 위해서, 과학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역사에 대해 진정 스스로 애국자 임을 자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애국자들을 계속 발굴, 육성, 지원해야만 한다. 지도부의 역할은 국가의 미래를 설정하고, 국민과 함께 자랑스럽게 가야만 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우리 대부분의 국민이 소리 없이 그러나 정열과 애국심으로 국내와 국외에서 목숨을 바쳐 이룩한 것을, 마치 과거의 연속선상에 있는 민주화 정치 지도부의 산물로 착각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그 후퇴한 시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왜 그들로 인하여 대대수의 국민이 고통을 더 받아야 하는가?
성경의 한 마리의 양을 구하는 그러한 논리는 국가와 국민에 적용을 한다면, 대 다수의 국민의 희생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작금의 모 목사는 이북에 가서 찬양을 하고 대한민국을 그렇게도 비난하고 왜 대한민국으로 다시 넘어오는가? 이는 과거 정부 지도부의 사생아다.
나는 엔지니어이고, 해외에서 달러를 벌어서 우리나라에 들여오는 회사원이다. 나름대로 상대 국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 할 때도 많다. 물과 음식의 차이로 나의 건강도 너무 많이 해쳤고, 나의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내 할 일을 못해 많은 미안함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나의 조국에 대해 나 나름대로 진정 열정과 애정으로 나를 희생해 왔고, 그를 한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의 자식들은 나의 걸어온 길을 잘 알고 그들 또한 자부심과 전문성으로 국가에 이바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외국 사업주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경제인이기 때문이다. 경제와 종교는 상담에서 최대의 금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국가의 정체를 생각하여, 그에 맞는 국가를 준비하고 만들어 가야 한다. 현재도 수 많은 나라가 나름대로 안전을, 때로는 경제를 내 세우며 국민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수없이 세계를 돌아보며 보이는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를 보면서 그들의 지도부가 항상 경제의 뒤에 있기에 국가와 국민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실, 가족도 하나의 국가라 할 수 있는데, 이 조그만 울타리도 내 마음대로 이끌어 나가지 못하면서, 국가라는 화두를 가진 것에 문제가 있음을 충분히 인지한다. 그러나, 답답한 현실을 그대로 넘길 수만은 없어 몇 자 적어본다. 사실, 가족이라는 나의 작은 문제도 나름대로 복잡한 경우수가 있음을 어찌할 수 없다. 이유는 가족이라는 혈연 관계가 다른 요인으로 결합된 사회와 국가와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2. 국가의 구성요소인 국민
그러나 조직이라는 관점에서 가족이나 국가는 같은 범주에 속하고, 구성 요소가 인간이니 함께 이야기 해 보았다. 그렇다. 나는 가족에 대해서는 말을 피하고 거창하게 국가와 국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국가에 있어 구성요원인 인간은 복잡성이 많고, 혈연의 감정이 아닌 이해집단이다. 그렇다 보니, 최적의 국가 운영이나 정체성에 대해서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인간 구성의 연결고리나 목적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를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신이 인간을 불평등하게 만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왜 선과 악을 동시에 만들었고, 천당과 지옥은 왜 분리해 놓았나? 신은 이 화두에 있어 완벽을 만들 수 없는가? 신 자체가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종교는 유일신임을 포교하고, 회개를 기본으로 한다.
회계하는 국민으로 이뤄진 국가가 참 된 모습으로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국민은 회계가 아니라 국가의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고, 행복한 자신과 가족의 삶을 이어나가는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한다. 복지국가, 국민이 행복한 국가는 어떠한 나라일까?
인도의 힌두교처럼 유일신이 아닌 너무 많은 신을 모시는 국민이나, 빈곤한 국민이 많은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대쉬 같은 국가의 국민들이 선진국보다 행복지수가 높다는 공식발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3. 자원과 에너지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많은 빈곤 국가나 전쟁에 휘말린 국가는, 국민 중의 일부 종족에 의하거나 장기 독재자를 맞게 되는 운명을 타고난 국가도 있겠지만, 종교간, 지정학적 인접국가와의 힘의 불균형에 의한 국가 경영이 어려운 나라도 있다.
문제의 국가 중에는, 작금의 세계는 자국민의 의지와 관계 없이 결과적으로 자신이 보유한 자원과 에너지로 인한 타국에 의한 심각한 피해를 받는 국가가 평화나 민주주의 의 이름아래 엄청난 전쟁이라는 비극을 자국 국민의 의사에 관계 없이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국가의 경영은 자신들의 자주적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세의 힘에 의해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자원은 외국으로 국부 유출이 되고, 미래에도 계속 유출이 되도록 한 다음에 자국민의 꼭두각시 같은 자국민에 의한 정부를 세우는 서글픈 모습이 마냥 남의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현세에는 세계는 각국의 독립성의 우선보다 자원과 에너지의 강제적 획득에 관한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세계지도를 에너지 국가의 실제 개발권, 실제 보유와 실제 사용국가, 미래까지의 사용권한의 기간이라는 요소로서 근대, 현재,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변화를 보면서 그려보면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누가 에너지의 보유자이고, 누가 실제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면서, 에너지 보유 국가의 국민의 생활을 보면 무엇인가 잘못된 생각이 든다.
순니파와 시아파로 대분 되는 이슬람교 국가는 사막과 척박한 국토를 가졌지만 전 세계의 에너지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엄청난 석유와 가스를 가지고 있다. 이 에너지가 이슬람교 국가들의 운명을 스스로에게 맡겨두게 하지를 않는다.
4. 미국은 에너지 확보에 최우선 하는 지도부를 갖고 있다.
순니파가 주도하는 사우디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 최대의 산유국인 중동의 왕정국가는 왕실이 미국의 보호를 받아오고 있다. 미국의 국방경제는 국가재정의 17%를 담당하고 있어, 이의 지속 확대는 군사무기 협력과 판매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에 그 많은 대가를 받고 무기를 파는 것으로 왕실을 보호하는 유일한 이유일까?
시아파의 대부격인 이란은 계속 이스라엘과 미국의 적대적 견제와 제재에 지금도 심각한 국제적 불안정한 기폭제 상황하에 있다. 왜 미국은 이란에 대해서도 팔레비 왕정 시절에 그렇게도 이란을 지원하였는데 반하여, 혁명 이후에 강력한 제제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에 대한 핵 공격을 말살하기 위해서라는 명분뿐일까? 이란은 현재도 에너지 발굴을 거대한 국토의 1/10정도만 했다고 한다. 무엇을 위해 개발을 서두르지 않을까? 지금의 생산량만 해도 세계적인 에너지부국인데 경제봉쇄를 당하고 있다. 이란은 페르샤 문명국임을 자랑하고, 아랍과 거리를 두고 있다. 아랍에 속하는 이라크, 순니파인 이라크의 장기 양국 전쟁에서 무기의 절대적 열세에서도 이란은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걸레빵과 버터 한 개면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그 후 장기적인 미국의 제반 경제제재에도 현재까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있다.
한편 미국이 반하는 이라크와 같은 나라는,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의 적극 지원을 받다가 미국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자 군사적 공격을 받게 되었다.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미국은 이라크가 미국을 공격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어, 전쟁방지와 자국 보호를 위해 이라크를 침공하여 수 많은 국민을 죽게 만들었는가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진정 이라크 침공의 이유는 무엇인가? 최신 헐리우드 영화 “그린존”도 고발성 영화로 히트를 치고 있다.
후세인의 폭정에 대해서 이라크 국민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부여하기 위해 세계경찰로서 응징했다고 해도 이는 내정간섭 일뿐이다.
미국은 2010년 수십만의 투입된 전투병력을 다 철수 시켰다. 이라크 국민의 그 많은 불행을 안겨주고, 대다수의 순니파에서 소수인 시아파로 정권을 넘겨주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이미 에너지 자원의 개발권은 참전국의 몫으로 나눠졌는지 모르겠다.
지금 세계는 에너지 관련의 국지전을 제외하고는 1945년 2차 대전 후 세계대전이 없다. 3차 세계대전이 언제 올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원인은 에너지에 있다.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은 동남아 국가를 위협하는 일본의 국부의 원천이 동남아의 자원 유입이었고, 이 고리를 미국이 끊는 시점에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통계나 진실을 알 수는 없다. 어느 기관에서 발표 되었건, 언론기관의 조사에 나왔건 진실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있다.
미국의 가채 석유매장량은 현재 소비량으로 계산하면 5년 이내에 미국은 석유가 완전히 고갈된다. 우선 석유가 없는 미국은 어떤 모습일까? 작금의 해양부분의 BP의 석유누출로 석유생산량도 급격히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은 자동차나 냉난방의 소비량이 어느 나라보다 큰 나라이다. 미국의 지도부는 지금 중국과의 자원 전쟁에서 밀리고 있다. 우주의 자원까지 미국의 고유 자산으로 자신하던 사이에 중국은 이제 미국의 통제 대상에서 벗어나고 있다.
5. 미래를 지배하는 국가는 어떻게 변화할까?
역사를 뒤돌아보면,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의 중심은 해상을 장악한 나라로 바뀌었다. 로마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그리고 이제는 미국이다. 미래학자는 이야기 한다.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는 미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옮길 것이고,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중국도 먼저 해양대국이 되어 세계를 먼저 식민지화 할 기회가 있었었다. 15세기 초에 7번 대 항해를 한 정화(鄭和) 장군이 콜롬버스나 마젤란보다 먼저 중국의 세계화를 할 뻔 했었다. 그는 명 나라의 사절로 아프리카의 케냐까지 수 많은 국가에 화교의 씨를 뿌렸고, 무역과 조공을 받았다. 만약 주고치 (朱高熾) 황제가 원정을 중단하지 않았으면 이미 중국은 세계를 먼저 손 안에 넣었을 것이다.
내가 말레이시아 멜라카에 가 보았을 때, 정화 장군의 후손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화교의 영향력을 보았다. 그는 메카를 순례한 모슬렘이 되었다. 그 역시 무역뿐 아니라 때로는 힘으로 방문 국가를 제압해 나갔다.
해상국가의 실제 위력은 지났지만, 지난 역사가 해상 장악이 세계 장악임을 보여주었고, 아무리 현대 병기가 국방력을 좌우하지만, 현실에서 해상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는 곧 전쟁의 최후의 승자는 보병이 만든다는 이야기처럼, 해상 즉, 자국의 섬의 위치까지 영토임을 주장하는 때로는 억지의 힘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현대전의 해군력 중에서 잠수함의 위력은 이미 2010년도의 한국에서 천안함 사건에서 보듯 흔적이 없이 우리는 당했다. 현재 일본은1976년부터 지금까지 18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향후 2척을 늘리기로 하였으나, 이 18척을 신형으로 계속 대체해 나왔다. 그러나 최근 2척을 더 늘리겠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62척과 대등하다는 입장이지만, 일본은 중국의 적수기 되지 못한다. 중국은 이중에 7척이 핵 잠수함이고, 최근 대양해군으로 나가겠다고 2010년 4월 칭다오에서 선언하고, 하이난 섬에는 최근 잠수함 기지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해군에 대해서 남중해에 있어서 중국의 영유권 문제는 내가 보아도 중국의 주장에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하이난섬과 베트남 삼각점에 있는 파라셀(시사, 西沙)군도는 중국과 베트남 영유권문제, 중국대륙과 아주 먼 해상의 스프래틀리(난사, 남사(南沙))군도는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르나이,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당사국이며, 다오위따오(大約島), 센가꾸) 열도는 중국과 일본 당사국 문제 등 중국이 주장하는 영유권 범위는 각국의 연해를 포함 전 남중국해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점이다. 이는 경제력과 국방력에 자신을 가지고 패권주의로 나가는 중국 지도부의 의지 표출이라고 본다. 중국 지도부는 엘리트의 집단이기에 우리의 감정이나 단순한 분석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중국을 방문할 때 그들의 정부 지도자들이 TV에서 주장하는 차분하고 힘이 있는 정견발표나 중국의 방향에 대해서 논하는 모습을 본다.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지도자들이 발표하는 의지와 힘, 아니 쉽게 말해서 지도부의 눈에서 강력하고 소신 있는 그의 의지와 소신을 읽지 못하겠다. 부디 우리나라도 국가와 정부를 강력하게 지키고 국민을 위하는 지도자가 나오길 기대한다.
이스라엘이나 많은 국가가 조난이나 문제가 해외에서 자국민에게 있을 때, 그 정부들이 그 많은 자금과 시간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모습에서, 한국인이 해외에서 문제가 있었을 때 우리 정부의 보다 과감하고 국민을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한 조그만 것이 모든 국민의 단합을 이루게 하고, 국가의 저력이며, 미래의 국가를 만들어 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한국은 이미 세계 12권의 경제대국이기에 더욱 그러한 저력이 있다고 본다. 이제 UN사무총장에서부터 많은 국제 기국의 수장 자리도 오르는 자랑스러운 한국이 아닌가? 국가 지도부의 강력한 소신과 의지를 기대해 본다.
사실 역사를 통하여 보면 미래는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 물론 몇 십년 단위나 몇 백 년 단위로 보면 확실한 변화가 있었던 사실은 증명이 되지만, 현실은 이를 예측할 수 없다.
미래 학자에 의하면, 앞으로의 변화는 미국이 캘리포니아주의 독립 등 4개로 분활 되고, 중국은 역사이래 현재 가장 넓은 국토를 보유하고 계속 해역도 무리하게 확대하면서 국제분쟁의 열쇠를 쥐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도 인도나 제3의 세계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6개 국가로 분열 될 것이라는 세계 재편성설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미래는 아무도 정확하게 예측을 할 수도 없다.
단 하루인 내일의 환율과 주가만 확실히 안다면 모두가 확실히 부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예측을 전문적으로 잘하고 실제 대부분 예측대로 다음날 결과를 같지만 그 누구도 올인 투자를 하지는 않는다. 돈이 필요 없어서일까? 아니다. 예측은 예측이고 내일은 오직 신만이 아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가 이러한 국가와 에너지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체계적인 조사나 사실에 입각한 고급정보에 손이 닫는 위치에 있지도 않다. 아니, 나의 집안일도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서 이러한 화두를 언급한다는 것이 무리임을 안다.
그러나, 그러한 돌파구로 나의 영역이 아닌, 나에게 실질적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이 분야에 몇 자 적어보는 것은, 나의 삶이 그래도 세계를 무대로 살아왔고, 그 수많은 나라를 다니며, 회사와 조국을 생각하며 뛰었기에 일종의 자위로 볼 수 있다. 겉핥기라고나 할까? 나는 이것을 즐긴다고 보면 된다. 소설도 아니고, 사실도 아닐 수 있고, 미래를 보는 점장이도 아니다.
단지, 국가의 지도부는 적은 부분의 최고가 아니라, 노벨상을 받는 유명인이 아니라, 국가를 생각하는 철학자가 되어야 하고, 강력한 소신을 가지고 역사에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올려 놓는 그러한 지도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의 모델로 중국을 잠시 살펴 보았다. 감히 이야기 한다면 나의 대리 만족의 멋진 지도부의 변화나 탄생을 말하고 싶다.
6. 중국을 들여다 본다.
세계의 국가는 나름대로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국가 중에 하나가 중국이다.
수천 년 역사에서 통합을 위한 전쟁으로 이제 중국 역사이래 가장 큰 국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계속 확장을 위한 영토 분쟁 중에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인근 국가를 압박하고 있다. 중국은 국토가 비슷한 미국의 5배의 인구와 유럽의 3배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왕조의 몰락과 상해로 시작한 영국의 진출과, 결국 일본에 침략을 당해 유린당한 빈약한 국가로서 근대사에서 중국국민은 많은 고초를 겪었고, 그리고 이어진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하였다. 정통성을 가졌다고 하는 대국의 국민당은 조그만 대만이라는 섬으로 도망을 가서 별도 독립은 하여 양국이 현재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중국은 이제 세계의 군사대국이 되었다. 경제규모가 조만간 세계1위의 미국을 앞 지를 것이라 한다.
과거 대부분의 공산국가가 식량이 부족하여 생존에 문제가 있었고, 특히 중국은 13억 인구의 식량만도 해결의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가 다민족의 내부 갈등 등 화합의 문제 등으로 경제발전은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이 중국이 1980년대 초부터 대대적인 개방과 자본주의 도입으로 30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 경제 2위에 이르고, 막대한 미국 달러를 보유하게 되어, 미국 국채의 최대 보유국이 되었고, 전 세계의 자원과 에너지를 블랙홀처럼 사들이고 있다. 물론, 식량은 자급자족의 국가로 변화 되었다.
이러한 중국이 대한민국의 인근 국가이고, 아세아를 비롯하여 많은 국가들은 이제 미국이나 유럽에 의지에서 중국으로 향하면서 세계는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사실 이미 대부분 아세안연합 국가들은 자체의 국방, 경제의 결속기구긴 아세안보다는 중국과의 상방 조약을 더 중시하고 있다. 이미 놀랄만한 변화는 시작이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놀랄만한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 되었나를 되돌아 본다.
7. 중국의 지도부와 권력 이양
1980년 이전까지는 중국은 마쩌우동(모택동(毛澤東))과 등샤오핑(鄧小平)의 1세대와 2세대를 거치면서 내부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 되었다. 이때 중국은 너무나 가난하고 힘이 없었다.
공산정치 이념으로만 인민의 이름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죽의 장막 국가였다 여러 번의 등극을 반복한 등샤오핑은 중국의 죽의 장막을 과감히 열었고, 심천을 중심으로 과감히 국민의 국가의 복지를 지향하는데 앞장을 섰다.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 4부분의 내부개혁과 대외개방을 단행하였다.
그래서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겪고, 1980년대 초의 3세대 장쩌민(江澤民)이 주석이 되면서, 중국의 경제발전은 급속히 시작 되었고, 이때부터 30년간 중국은 평화적인 정권교체 관행을 만들었다. 정권교체는 주석을 미리 준비시키고 이들은 모두 엘리트들이다.
과감히 50대 초반의 차기 최고지도자 후보를 미리 최고 권력집단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발해 충분한 수업시간을 갖도록 한 뒤, 권력을 넘겨주는 방식이다.
결국, 내가 이야기 하자는 것은 국가는 누가 경영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중국은 성공하였고, 앞으로도 강력한 국가로 지속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국의 지도자는 13억 인구 중에서 선발 된 최고의 엘리트가 모이는 상해와 북경대학 출신들이다. 최고의 통치자로 역시 절대권력을 가진 주석은 사전에 충분히 준비된 엘리트들로서 이들은 엘리트로서 충분한 기간을 가지고 국가 지도자로서 훈련을 받고 나서 대권을 이어받고 물려 준다. 강력한 공권력을 가진 엘리트가 중국을 현재로 만든 지난 30년간의 중국의 정치 흐름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중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아프카니스탄, 방글라대쉬, 라오스, 캄보디아 등과 같이 빈곤국으로 현재까지 왔다면, 한국 역시 현재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을까 하는 생가도 해 보았다.
중국의 지도체제는 현재 공산당 17기(2007~2012)로서 5년 임기의 9명 정치국 상무위원이 국가를 운영하고 있고, 2년 뒤인 2012년 제 18기(18차 전당대회에서 결정)가 시작된다.
2007년 구성된 중국의 4세대인 17기의 최고 지도부 5명은, 서열 별로 당 총서기이며 최고 지도자인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1992년 50세 나이에 14기 상무위원, 1999년 군사위 부주석, 2000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이다.
이어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회의(국회) 상무위원장,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행정부) 총리, 지칭린(買慶林)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국정자문회의) 주석, 그리고 리창춘 (李長春)선전담당 상무위원이다. 여기에 4명의 상무위원이 있는데, 차기 18기는 상위 5명이 과거와 같이 순연하여 퇴임하고, 나머지 4명 중에 후계자가 나온다.
예정 최고 후계자는 현재 서열 6위인 시진핑(습근평, 57세, 2007년 54세에 17기 상무위원) 국가 부주석이다.
17기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
조선일보
이러한 양상은 3세대 장쩌민의 후진타오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도 유사한 권력장악에 관한 문제는 있었지만, 중국은 실제 평화적인 교체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고지도자의 권력은 절대에 가깝고, 그 힘은 정치보다는 경제의 급성장에 최적의 드라이브를 주고 있다.
후진타오의 임기 동안의 행적은 국방과 경제 특히 전 세계의 자원확보를 위한 엄청난 투자와 중국인의 해외진출의 현상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8. 작은 중국 이야기들
8-1. 진산(금산, 1995.8.)
중국 내륙을 가기 위해서는 홍콩에서 비자를 받아야 했다. Hong Kong의 Conrad Hotel에 일박하며 비자를 취득 후, 상해로 가서 차량으로 이동하여 진산의 Yangtze Hotel에 투숙하였다. 진산의 숙소는 관리들의 사용했던 숙소로 보이며, 내 침실이 방이 3개에 거실이 있는 빌딩이어서 놀랐다. 이렇게 큰 스위트 룸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일단 편하게 사용하였다. 중국의 손이 큰 것인지 아니면 손님 접대에 손이 큰지는 모르겠다.
내가 본 상해에서 진산까지 가는 도로에 펼쳐진 농촌의 풍경은, 획일적이고 특색 있는 집들로 나열 되어있었다. 대개 2층의 벽돌집에 아래층에는 헛간과 다용도로 사용하고, 2층은 주거형태로 사용하고 있다.
동반한 미국 Phillips 사람들과 합동으로 중국측과 회의를 하였는데 중국측은 참석 인원은 참으로 많았으나 영어가 전혀 되지 않았다. 중국의 개방화에 큰 걸림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 진행이 참으로 어려웠었다.
그러나, 식사는 아주 풍족하고 다양한 음식 종류를 맛 보았다. 역시 먹거리는 중국이다. 이후에, 한번 더 출장을 가서 계약을 하고, 큰 접대를 받았다. 우리 업무에 따른 계약금은 오천만불이었다.
8-2 상하이(상해, 2006.4)
오랜만의 중국 출장은
지점 경리가 차를 가지고 포동 International Airport에 나왔다. 그로부터 업무 외에 중국의 변화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조선족으로 중국에서 고분자 공학을 전공했고, 부인은 공산당 고위층이었다. 본인의 적극성에 놀랐다. 모든 생각과 행동이 함흥 사람들과 비슷했다.
이어 상해 시내를 구경하며, 동방민주 탑 (465m)등을 관광하였다. 한국식당 진달래에서 저녁을 순두부와 맥주로 하였다.
나는 중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먼저 보았다. 생각보다 주변이 좋지 않아 기분이 안 좋았다. 북한식당 “청류”에도 가 보았다.식사를 하면서 관람한 이북 젊은 여성들의 공연과 서비스는 좋은 편 이었다.
黃浦江 가에 나가 맥주를 마시면서 중국인들의 생활을 보았고, 투숙은 내 친구의 숙소인 골프장 내에 있는 주택에서 했다. Tomson Golf 장에 붙은 집들은 홍콩에서 돌 벌어서, 상해시와 협의하여 땅을 받아 개발하여 돈을 또 엄청나게 벌었으며, 고급 빌라가 있고, 수영장 등 시설은 외부 손님을 안 받으며 경영하는 골프장안의 고급 주택 빌라이다.
빌라는 아파트처럼 많은 가구수로 구성되어있는데, 150헤베에 방3, 주방, 화장실 2개에 15,000RMB/헤베이며, 관리비는 100불 정도이나, 전기비는 별도. 골프장은 200RMB(회원)이다. 다음날 아침 골프장 일주 등을 하고, 인근의 자기부상열차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시속 430 km로 7분이 소요 되었다.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곳 상해는 한국의 성형의사들이 많이 와서 몇 년 전까지 많은 돈들을 벌었으나, 근년에는 너무 많이 와서 경쟁도 심하고, 이는 외국인의 병원 법인 설립이 쉬워, 외국인 의사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에 많이 몰려와서라 한다.
다시 출장의 연속으로 홍차우 국내공항으로 나가서,
이번 출장은 내가 수의 추진 중인 이란 석유화학공장의 수주를 앞두고, 상세설계를 이제 한국이 아닌 저렴한 중국에 하청을 주기 위한 방문이었다. 이제 중국은 경쟁력을 갖추고 한국과 경쟁이 본격적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중국은 영어 소통이 어렵다는 점에서 국제 사회의 용역분야 진출에는 분명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과 회의 중에 점심은 구내 식당에서 하였는데, 포도주나 술을 좀 과할 정도로 하였다. 식사 후에 다시 회의실로 가지 않고 휴게실에 안내를 하였다.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궁금했는데 2시간 낮잠을 관습상 잔단다. 이들의 근무조건에 대해서 빨리 빨리의 우리 정서와 맞지가 않는다. 이해가 좀 안 되는 부분이었다.
한편 저녁에는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의 해산물 식당에서 정식으로 먹고, 각종 고급 술을 소개 받았다. 귀한 차도 선물을 받았는데 비싼 차 외에 야생 차라고 하며 고급 간부가 따로 주는 선물에 이들의 영업력을 다시 보았다
다른 사업 건으로 동전호(東錢湖)에 있는 최고의 휴양지호텔에 가 보았다. 회의실을 별도로 빌려서 진행 된 회의 역시 이들에게 나는 많은 여유가 있음을 보았다. 회의 후에 함께 호숫가를 거닐면서 이들은 중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있어 이들로부터 계약 제의를 받았고, 이들은 계약금을 바로 지급하는 놀라운 속도에 나는 감탄을 하였다. 지금 중국은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지난 10년 전의 중국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과 이들의 급격한 산업화와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어, Yantai Wanhua Polyurethane Co., Ltd.를 방문하였다. 완화는 MDI 세계 최대 생산회사임을 자랑하는 규모대로, 연태의 공장에 이어 이곳에 신설된 이곳 MDI공장은 최근 준공한 Sweden Perstop기술로 완공한 120,000 MTP의 Formalin 공장, 발전소, 대형의 부두설비가 가동 중에 있었는데, 모든 것이 최신 설비에, 정말 대단히 큰 부지였다. 예상부지 등이 잘 정리 되어있었다.
공장에서 회의와 현지조사 후에, 인근의 최고급 호텔인 Delus Hotel에서의 점심식사 대접은 최상급이었다. 화려한 대리석에 고급스런 각종 음식과 Dynasty 포도주를 마셨다.
이번 출장을 통해 시간을 내어 부도산 (普陀山) 방문하였다. 이 섬 안의 절은 중국 5대 사찰 중에 하나란다. 닝보에서 고속도로로 2시간, 그리고 섬간 배로 두 번 정도 총 4시간 걸렸다. 이곳에는 대형 43m 높이의 황금 관음보살상이 있다. 바닷가 산 위에 높이 “南海 觀音立像”으로 유명하다.
8-3 광쩌우(광주, 2006.10)
중국 남쪽의 광쩌우(광주)는 인천공항에서 비행시간은 3시간 반 정도 소요 되었다. 거대한 신공항은 최 첨단 시설에 방대한 주변 설비 및 조경에 이것이 진정 중국의 변화된 모습의 진상이 아닌가 하니, 두려움이 엄숙하였다. 한편, 중국은 중국은 공자(유교), 도교 및 불교의 3가지가 혼합된 사상으로, 불교의 영향이 그 중 큼. 즉, 가족과 효를 중시하는 독특한 나라이다.
환율은 131.98원/RMB이며, 호주는 751원/호주 달러 이었다. 밤에 시간을 내어 수강(殊江/Pearl River)에서 야간 유람관광을 한 시간 반 정도하였는데 인상적이었다. 강 양변에 각가지 빛과 레이저로 꾸미고 수많은 유람선이 오갔다. 가로수는 초록색 조명으로 되어 있고, 다리의 조명, 건물마다 레이저와 빛으로 장식한 장관이, 이러한 화려한 곳이 다른 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너무나 휘황찬란하다.
이 나라가 과연 공산주의 국가인가? 한강변은 왜 이리 못할까? 사회주의가 그대로인 중국에서도 자본주의 냄새가 이리 물씬 나는데.
지금 2006년 11월. 중국의 거대 물결이 흘러가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변신이다. 중동에서 아프리카와 남미로 자원 확보를 위한 큰 걸음은 자본과 후진타오가 뛰고 있다. 1조를 넘는 외환에, 이제는 고도의 부가가치 산업에 어느새 최첨단의 대열에 서고 있다.
광동성의 주도인 광저우는 8백만 시민이 살고 있으며 (중국은 1백만 인구 이상의 도시가 100개가 있고, 미국은 10개, 유럽은 30개가 있다고 한다. 샨샤댐 중심의 중경은 계
신구가 잘 결합되어 있으면서 계속 개발의 크레인이 가득하다. 5개 지하철이 있으며, 시내 교통은 별로 막히지는 않는다. 주강 터널은 러시아워에 체증이 심하다. 주강을 사이에 두고 도시가 발달하였으며, 5개의 연결다리와 한 개의 연결 터널 있다. 추가로 한 개 터널 건설 중이다. 공항에서 시내 순환고가도로까지는 싱가폴 공항에서 시내까지의 모습과 같이 조경이 잘 되어있고, 새로운 고속화 도로로 시원함. 시내는 고가순환도로로 연결되어 있고, 전기버스가 다닌다.
관광에 대해서는, 중국 3대강인 주강 (주지앙/Perl River)은 역시 물류 운송에 상당한 기여를 하면서, 밤에 야경선상놀이가 아주 잘 발달되어 있음. 강 양편에 아열대의 나무 (롱수이, 으이에용)들이 줄지어 있고, 여기에 각각 녹색 등으로 치장하고, 각 다리는 한강다리보다 치장이 더 되어있고, 양측의 고층 건물은 옥상 조명 외에 전체를 레이저로 현란하게 조명하는 것 등,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광동 사람들의 말에 의미가 깊은 의미를 느낀다.
상해의 야경 해상놀이와 유사로, 한강의 유람선 관광문화는 비교가 절대 안 된다. 시내 택시 아주 많고, 처음 7 인민폐로 시작 대개 15 인민폐 미만. 2시간 차로 가면 홍콩이고, 홍콩의 출입은 자유이나 인두세를 내야 한단다. 마사지는 전신이 150에서 250 인민폐, 발마사지는 50인민폐. 스페샬은 200~300인민폐 추가 한다.
광저우 시내가 거의 한자(간체자 사용, 홍콩은 번체)와 영어알파벳을 병기하는 간판으로 지리 인식 등이 쉽다. 국제화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음. 즉, 한국은 한자, 영어 등을 병기하는 것 다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음식문화에 관하여서는 대부분 외식문화이며, 주부가 쉬는 토일(5일제임)은 가족, 친척과 함께 다 외식을 주로 하며, 외식 비용은 싼 편임. 평일에는 노부부(65세 이상)가 아침에 운동 후 외식을 주로 하는데, 양을 보니 좀 많은 편으로 보이나, 다정한 모습이 인상적이고, 가족과 함께하는 모습이 부러워 보인다.
광동성 요리는 생선이 위주이나, 일반적으로 위에 요리의 대 분류 하에 홍콩요리, 차우조우요리 (광쩌우에서 동쪽으로 4시간 거리의 해안도시), 광동요리 등 각 지방도시 요리가 있음. (중국말에는 요리라는 말은 일본요리, 한국요리에만 요리 단어 사용하고, 중국 등은 차이라고 말함) 대표적 차우조우 요리는, 생선, 조개, 게, 채소, 숲, 거위, 계란과 굴, 고구마 등의 요리가 순차적으로 나온다.
접대문화에 대해서는 대부분 선물을 받아도 답례는 하지 않으며, 음식은 상당히 적극적으로 대접함. 그러나 이들이 절실히 필요한 고객이 되면,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접대도 함. 선물도 최 고급으로 준비해 줌. 통상은 저녁에 백주 (요새는 Dynasty나 Great Wall의 두 가지 대표적 포도주 접대도 유행함) 후에, 노래방에 간다. 고급에서 저급 KTV등 종류가 많다.
2007.4월11일에 중국 강소성 농약회사 사장 및 부사장2명 등 8명이 서울을 방문하였다. 민속촌 안내 차, 일요일 아침에 호텔로 가는 중 지하철에서 스위스 모방 10가지 기능을 가진 등산 칼을 샀다. 예전보다 훨씬 품질이 좋다. 가격은 일천 원이다. 이는 불가능한 가격이다. 그것이 중국이라는 모습에 섬뜩해졌다.
숙소는 방당 할인하여 15만원선인 노보텔을 하지 않고, 회사 근처의 제법 깨끗한 모텔 방당 4만5천원으로 하여, 2인1실을 사용케 하였다. 이들에게 대접한 식사는 삼계탕, 삼겹살, 삼겹살, 갈비, 불고기, 비빔밥, 중국음식 등이며, 회 종류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잘 먹는 식성이다.
술은 대부분 고위직과 영업직을 제외하고는, 전회도 많은 중국 팀을 보아왔지만, 안 마시는 사람도 예외로 많다. 한국소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래방 아주 좋아한다. 의자 및 침대 문화라서, 방석 집은 절대 사절이다. 주로 계약부속서들의 기술적 사항에 대해서, 회의를 진행하였으며, 주관자 외에는 각자 담당이 확인이 되기까지는 주관자가 통과를 하지 않아,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고, 답답한 경지에 도달도 하였다. 이들은 세세한 것까지 필기는 아주 열심히 하였다. 한국의 대충 대충은 엿볼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얼마나 알고 적었는지는 미지수다.
회의록은 영문을 쓰니, 중문으로 하자고 제안을 받았다. 다음 계약일을 명시키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우선, 이들과의 상담에서, 과거 대형회사인 경우 전문통역에 의해 전혀 불편을 못 느꼈던 것과 달리, 대부분의 중국회사 직원은 영어가 안 된다. 통역을 써도, 전문어에 막혀, 보통 문제가 아니다. 금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본인이 중국어가 충분히 안되고, 영어는 이들 통역 담당이 제대로 못해, 결국 일어가 이들 통역과 본인과 합치점으로, 3일간 연속 일어상담이었고, 4월15일 민속촌 관광도 일어 아는 죄로 본인이 안내를 하였다. 물론 성공적인 상담 위해서라도 내가 나가는 것이 당연도 하지만......
회의 중 이들은 사장의 권한이 절대적인 것 외에, 움직임에서도 사장이 없으면 회의 시작 또는 휴식 등도 안 된다. 과거 공산권 시절 상담시에는 5인1명 감시자가 항시 일안하고 감시만 하는 것과 또 다른 대조적인 면이다. 이는 민속적 관광시도, 적게 시킨 이들이 좋아하는 돼지고기 일정부위를 사장에게 직간접으로 넘겨주는 모습에서도 이들의 상하 관계는 우리보다 못하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물론 이들 사장은 관광 내내 직원 배려의 모습이 곳곳에 배어났다.
이들은 2박3일 제주도 여행은 일인당 40만원인데, 이는 이들 급여에 비해서 아주 큰돈인데, 거침 없이 쓰고, 거의가 디지탈 카메라를 사는 등, 전회에도 다 그렇듯이, 이들 씀씀이는 급여와 전혀 관계 없이 큰 소비욕과 실제 부자처럼 돈을 쓴다. 이해가 좀 어려운 부분이다.
이들과 함께, 화살던지기, 그네타기 등 하면서 함께 호흡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집 초청 (다음으로 사양)하여, 차 한잔 하며 한국문화의 생활의 이해를 돕고자, 개인적 우의 신경도 썼고, 이들도 고맙게 받아들여, 역시 같은 동양문화권임을 재 인식하였다. 향후 다가올 거대한 중화 물결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8-4 승조우(승주, 2007.9.)
내가 방문한 곳은 녹차 공장의 자리에 옥수수 전분용기 제조공장으로 개조 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네오엠씨씨가 이곳에서 대부분의 비발포 전분용기를 수입하여 왔다.
나는 회의 도중 전분 비발포 원료인 시트에 폴리프로필렌 석유화학 원료가 20% 전후 첨가하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어, 본 친환경 사업이 한국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중대한 결론을 지었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완전한 전분 및 친환경 소재로만 만든 일회용용기 제조 기술인 줄 사기 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WAFA Guest House에 투숙하였으며, 시설은 괜찮았다. 그 유명한
중국은 모든 회사들이 젊은 사람들에 의해서 운영 되고 있다. 문화혁명의 결과이다. 이것이 이들의 큰 성장 동력이 되었다.
8-5 동광 (2008.1.)
추운 겨울날씨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봉고 승합차들이 마이크로 목적지를 소리치며 호객행위를 한다. 어릴 적 우리나라의 모습이 떠올린다. 그래도 다들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인구 70만 명의 창주
다음날 점심은 삽겹살, 오징어를 불에 굽는 한국식에 마늘과 고추를 겯 들였다. 백주와 함께 먹었는데, 중국에서는 이렇게 구워 먹는 것은 드문 경우란다. 저녁은 닭, 콩나물과 두부, 자장면, 강냉이 죽과 빵으로 하면서, 칭따오 백주를 하였다.
작금의 중국은 2007년도의 6회 금리 인상과 2008년도에도 금리 인상이 예상 되면서, 심각한 경제 재도약에 대한 시험무대가 북경올림픽을 앞두고 심판대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년에 노동 후생 및 조건의 강화, 수출환급이 13%에서 5%, 법인세 혜택이 중국 기업과 동일하게 급변하는 등의 이유로, 부쩍 늘은 야반도주 한국회사의 기사가 자주 나온다.
하지만, 중국에 진출한 한국 시계업체 200개 가운데 현재 30개가 남아있고, 이중에 일부 회사는 대단한 성장을 하고 있다. 상해를 비롯해 많은 한국 모터제작회사가 중국에 진출했고, 가까운 지인도 초소형 모터 공장을 천진에 착공 중이다. 이들은 중국은 아직도 한국에 좋은 산업기지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2008년 춘절을 앞둔 1월말 하북성 내의 인구 70만 명의 창주시 인근의,
금회 방문의 목적 중에 하나가, 중국의 무한한 곡물자원 그 중에서 옥수를 활용한 “일회용 전분용기 제조기술”을 정부의 지원 등으로 상당히 앞서 있기에, 이에 대한 기술협력 차원에서 방문을 하였다.
인천에서 천진으로 가는 편은 인천공항에서 매일 천진 또는 연태 가는 비행기가 있는데, 천진공항이 좀 편리한 것으로 보이며, 아시아나, 대한항공, 및 중국항공이 있다.
비행기표 가격은 한국비행기가 310,000에 약 130,000원 Tax가 붙고, 중국항공은 265,000원에 Tax가 95,000원 추가 된다. 중국비자 및 보험료에 관해서는 1년짜리 중국복수비자는 가장 빨리 받는데(1박2일 소요) 220,000원을 여행사에 지불하면 된다. (부가세 포함) 여행자 보험은 기본적인 것은 3,000원 정도이며, 날짜 별로 다르나 대개 공항에서 만원 정도하면 된다.
한편, 천진에서
특이한 것은 가변도로가 대부분 폭이 넓어 추월선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실제 140~160km 시속으로 달리는 소형차가 많다. 차는 중고차들인데, 아찔하다. 보험을 두 가지 새로 가입하고 온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 되었다. 2시간 반 질주하는 동안, 산은 보이지 않고, 평야의 연속이다. 과수나무 단지를 지나는데 몇 십 분을 지나도 과수원이다. 한국인 맛에 맞는 배 과수원을 어마어마하게 경작을 시작했다는데…. 이러한 나라와 작금의 대형 중공업 경쟁은 제외하더라도 한국의 농업의 경쟁성은 어디서 찾을까 참으로 깊은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사는 모습은 1월말의 날씨는 참으로 춥다. 모든 사람들이 움추리고, 바람은 세다. 일상생활은 현의 인구는 적은 편은 아니나, 공업도시이고 유락시설은 거의 없다. 아침에는 가장 번화한 곳 네거리에 봉고차들이 행선지를 마이크로 소리쳐 대며 승객을 찾는 진풍경이다. 한국의 60년대 모습 이랄까. 대부분 근로자들은 퇴근 후 바로 귀가한다. 외국인들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놀기 위해서는 연태로 간다. 연태는 한국 유흥업소의 축소판이란다.
상점 및 숙소는 시내에 대형 쇼핑몰이 가장 크다는 부상(富翔/Fuxing) 호텔과 함께 있는 것이 전부랄까. 호텔가격은 평균 200위안 정도로 저렴한 편이다. 대분의 물가는 상당히 저렴하다. 그 이외는 음식점들이 한 지역에 몰려 있다. 각기 음식점이 음식 종류별로 특색이 있는데, 아주 저렴한 음식점은 접시, 공기, 숟가락, 젓가락, 화장지가 전체를 하나로 비닐 팩킹 되어 있다. 참 실용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없다고 알려진 한국 자장면도 있고, 만두 종류가 많다. 삼겹살에 상추와 마늘과 함께 백주를 마시니 한국에 온 기분도 났었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이내시티가 유명하지만 이곳은 천진 포도주도 많이 마신다.
노동력에 관해서는 인건비는 내륙으로서 아직도 아주 싸고, 사람들은 다 순진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근무자들은 고위직을 포함 어느 공장이나 상당히 젊다. 이점이 중국의 성장 가능성은 앞으로도 무한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많은 회사에 나이 먹은 간부들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8-6 수저우(서주, 2009.9)
오랜만의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서주(徐州/Xuzhou) 돌아 보왔다. 서주에서 한 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리니, 산동성의 등주(滕州)시
이른 아침 시간에 비료공장의 공장장, 부공장장, 연구소장 들과, 닝보에서 온 중국 제2 설계원 부사장과 책임엔지니어와, 서울에서 간 우리와 함께 조식을 하였다.
번번히 느끼지만, 지금 중국의 모든 산업과 공장을 실질적으로 끌고 가는 사람은 40대 이하의 무서운 젊은이들이다. 한국의 공장에는 50세 미만이 별로 없는 것과 너무 대조적이다. 새로운 사업에 대해 서로가 진지한 논의와 함께 계획을 심도 있게 협상에 임한다. 이들은 통상
등주시는 인구 160만 명에 6개 진(鎭)이 있는데, 제일 큰 진이 탄광이 있는 곳이고, 이곳 목석(木石)은 3번째 큰 진이나 오염환경이 아주 안 좋은 곳이라고 등주 시청에 근무하는 조선족 설명이 있었다. 중국은 작금의 초고속 발전에 따라 환경오염이 대단하며, 세계 오염이 가장 심한 10개 도시 중에 6개가 중국에 있다고 한다. 중국도시의 1/3은 참을 수 없는 대기오염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한편, 중국은 오염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하기 위해서 태양광 등 대체에너지의 최대 개발국 중에 하나가 되었다.
점심은 모든 참석자들과 2층 식당에서 함께 하였다. 반주로 백주(白酒)가 나왔고 이 지역 특유의 건배가 계속 되었다. 주빈이 3번 건배하고, 연구소장이 3번 건배하고, 다른 직원이 건배하면서, 우리의 건배는 기다리란다. 그러다 보니 모두 취하여 간다. 다행인 것은 맥주 마시는 사람은 계속 맥주를 채워주고, 백주를 마신 사람에게는 계속 백주를 채워주나, 처음만 가득 채워주고 그 다음부터는 아주 조금씩 따라 준다. 건배하면 책상 앞을 술잔으로 한두 번 치고 마신다.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다.
11번째 건배 제의를 한 사람은 한자를 위에서 내려 쓰면 길할 길(吉)자가 되어 또 한잔을 하자고 건배 제의를 한다. 모두에게 건배 제의가 끝나면, 제2부로 각자 다른 사람에게 가서 건배를 하며 마신단다.
술은 “금연춘(今緣春)”으로 춘의 발음을 술인 주의 발음과 같은 성과 한자를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이 술은 어디를 가나 선전을 많이 하고 있다. 점심과 술을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갔다. 좌석 배치가 술 마시는 사람을 몰아주는 것과 높은 사람을 주빈 옆으로 배치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고 있었다. 건배는 많이 하였지만 주최측의 대부분이 운전을 하여 집에 가는데, 음주운전 벌금이 너무 커서 아무도 술을 마실 생각을 하지 않아 주로 우리측에서만 백주와 맥주를 마셨다.
식사는 이곳 지방의 특색 있는 3가지 음식이 소개 되었다. 만두는 길게 만들어 자른 사각형(5cm x 7 cm)이고, 양고기 수육 형식의 삶은 육수와 함께한 것, 그리고 매운 닭이다.
이 유명한 음식 외에, 자라탕 등 30여가지가 나왔다. 전반적으로 타 지방과 음식 종류가 조금 다르고 술 마시는 법은 전혀 다르다. 중국인들은 손님을 접대하길 즐겨 하는 것 같다. 함께 하는 것이 부담스럽지가 않다. 그런데 저녁 후, 운전으로 대부분 술을 마시지 않아 한국사람들만이 계속 마셨다.
식사 후에, 이어 식당 2층에 초대형 노래방이 있었다. 그 규모에 있어 놀라울 뿐이고 이것이 중국이구나 새삼 느꼈다. 무대에는 한국의 가야금과 비슷하게 생긴 21줄의 고쟁(古箏)이 있어 만져보았다. 궁중에서 연주하는 악기란다.
노래방에는 술은 없었다. 과일을 가져다 주는데, 특색 있게 비슷한 크기의 파란포도, 갈색포도, 방울토마토에 귤을 내 놓는다. 파란 포도는 집사람이 무척 좋아하는 것이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술은 없다. 노래 가사집에는 중국노래와 일본노래가 있다. 여자 도우미는 없었다.
8-7 중국의 유교문화
중국의 유교문화는 창조보다 전달에 중점을 둔다고 한다. 중국의 거대 경제 대국이 된 밑바닥에는 중국 정부 지도부의 과감한 대외개방과 투자보장에 따라 풍부한 노동력과 함께 엄청난 투자가 몰렸다.
전 세계의 기업은 중국에 생산 시설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엄청난 투자가 진행 되었다. 중국은 그로 인해 엄청난 국부를 창출하게 되었고, 자체의 기술과 자본을 충분히 형성하였다. 어떠한 공장이건 건설 후에 얼마 되지 않아 똑 같은 화학공장, 자동차, 육상조선 기술 등이 중국 자체의 기술로 제조 된다.
초기의 조악한 품질과 디자인이 이제는 세계를 이끌어 나간다. 내가 추진 중에 있는 미국의 촉매 공장도 지금 중국에 충분한 기반시설과 시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한국 여수에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토지와 혜택이 상대적으로 중국보다 아주 안 좋은 한국에 건설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공장제조기술의 기밀유지 때문이다.
이들 각종 기술의 획득은 사실 중국 정부의 묵인 하에 이뤄지고 있고, 이의 정점에 인민해방군이 있다고 한다. 한편, 이제는 중국은 자신의 기술이 외국에 도용 당할 때는 아주 철저한 대응을 하고 있다. 중국은 거대한 나라이다. 외국의 어떠한 규제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 저변에는 중국은 자체의 모든 생활필수품을 자제적으로 조달하기에 충분히 발전된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 지도부는 당근과 채찍을 아주 유용하게 국민에게 활용하고, 종교에서도 그 뿌리가 있다. 유교(Confucius)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 대부분 젊은이들은 역시 교과서에서 배우기는 했어도, 사상적으로도 유가(儒家)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관심도 별로 없어 한다. 그것은 나이 먹은 사람들의 몫이란다. 세상은 젊은이들의 디지털의 세계로 계속 가고 있다. 물론 붓글씨는 아직도 많이 활성화 되었으나 이 역시 젊은이들의 몫은 아니란다.
한국도 어느덧 유가라는 말이 많이 퇴색 되고 있다. 유가는 특히 예를 중시하며, 이는 조상숭배와 주군을 예를 다하여 받드는데 기초를 하고 있다. 이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면서 절을 올리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한다. 우리집안은 부친께서 유교를 중시하셨다. 물론, 갓끈을 매시고 제례를 올리시지는 안았지만 이북 고향에서 참석하셨던 시제를 포함하여 조상에 대한 각별한 예를 항시 마음에 가지고 계셨다.
유가의 공자는 산동성 곡부(曲阜/Qufu)가 고향이다. 노자의 제자인 공자는 춘추전국시대 주 나라의 제후국인 노(魯) 나라의 몰락한 군인 집안에서 평민으로 태어났고, 3살에 부친을 여의였다. 15살에 공부하여 30세에 사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모든 일의 중심에 인과 예를 가장 중시하였다. 그 중 6예는 예, 악, 사(활쏘기) 어, 서, 수(수학)인데 이를 완수한 제자가 참으로 많았다. 관직에는 늦게 진출해 50대에 대사구(재판장으로 최고 지위)에 이어 인근 제나라와 협곡 평화협상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얻게 되면서 노정공이 왕권의 부활을 위해서 공자를 중용하였다. 그러나 노나라 세력을 쥔 제후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56세에 조국 노 나라를 떠나 각국을11년간 방황을 하면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면서 떠돌다가 67세에 노 나라로 다시 돌아와서 73세에 운명을 한다.
50세 이후에 관한 삶에 대한 부분은 영화배우 주연발 주연의 “공자-춘추전국시대”에 이 부분을 대작으로 영화가 출시 되었다. 나는 부인과 함께
중국의 유가는 공자(B.C. 552~479)에 의해서 주장 되었다. 덕치주의와 인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춘추를 저술하였다. 사후 8개 학파로 나눠지며, 묵자(B.C. 476~390)와 양주(B.C. 440~330경)의 사상이 지배를 하였고, 이후에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제자에게서 사사 받은 맹자(B.C.371~289)가 묵자의 사상에 전면 도전을 하였다.
중국의 성인에게 성에다가 아들‘자(子)’를 붙이는 것은 일가를 이룬 학식 있는 스승에게 존칭으로 붙인다. 따라서 ‘논어’에 나오는 ‘자왈’은 ‘선생님이 말씀하기를’ 의미이다.
공자의 본명은 공구로 성인 공에 자를 붙여 공자이다. 도가의 노자, 법가의 순자와 한비자, 병가의 손자 등도 그렇다. 이의 더 존칭은 ‘부자’로 공자를 ‘공부자’로 부르기도 한다. 자는 원래 포대기에 싸여있는 귀여운 아기모습이 스승이라는 극존칭으로 변했고, 갑골문자에서는 귀족의 자재 등을 의미하다가 공자 시대에 들어와서 “자”는 교양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게 쓰이기 시작하였답니다.
공자가 인과 예로서 왕권을 확립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묵자는 집산주의에 의한 겸애사상으로 사랑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논리였다. 즉 유가에서 주장하는 차별애로서 사랑에 층차를 두는 것으로 사랑에 순서가 있다는 것으로 겸애설은 이를 정반대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상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후에, 맹자는 평등 사상에서는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는 불효라 반박을 하고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사람은 선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스스로 완전해 진다는 철학적인 성선설이다.
성선설은 선한 마음에는 4단(端)이 있는데,
곤경에 빠진 사람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남을 공경하고 사양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마지막으로 옭고 그름은 판단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갖고 태어난다고 한다.
이 마음을 갈고 닦아 4덕인 군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도달하는 것을 교육에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이도 유가의 다음 세대인 순자에 의한 성악설로 반박을 받게 되는데,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하게 된다. 갑자기 내 입 속이 허전하다.
한국에 공자의 후손이 들어온 것은 고려 공민왕 때 중국에서 노국 공주와 함께 올 때 공자의 후손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이후에 공자의 후손들은 벼슬도 했지만 대대로 임금의 선생을 하는 등 주로 학문에 주력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조의 정조 때는 어떠한 공자의 후손도 아무리 죄를 져도 중벌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학문과 존경의 표시라고 했다. 이들은 수로 수원 인근 용인에 머물렀고, 이들의 사당은 중국 공자의 곡부의 원 사당과 같은 이름이라 한다. 공자 탄신일에는 왕이 직접 제문을 써서 내려 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유교는 한국의 사회에 묻어 들었고, 그들의 후손은 지금도 한국의 한 맥을 잇고 있다.
중국의 지도자는 정국의 변혁마다 유가의 유명한 말들을 인용한다. 중국은 사상의 중심지로서 그들의 시귀나 유가의 인용구는 정치 대변화의 시발점을 예고하는 것이다.
9. 한국의 지도자와 4대강 살리기
조선왕조 후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건국 초기의
그리고 위대한
이후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경제와 관련 없는 민주화 대통령의 연속이었는데, 과연 엘리트였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민주화라는 미명 하에 대한민국은 지금 다시 잡기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대통령 같은 국가의 지도자는 공자 맹자나 종교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을 평등과 민주화에 굶겨서는 안 된다.
강력한 국가는 튼튼하고 미래 자원과 에너지를 해결하는 경제를 아는 엘리트가 해야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 인도 등의 계속적인 부상과 달리 계속 정체하는 한국은 미래가 불확실하다. 다시 바로 잡는데 그 숙제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만 하는 잘못을 고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의 실정에서 엘리트 대통령보다 한국은 엘리트가 아닌 대통령들이 만들어 논 소위 민주화의 미명하래 엄청난 국부의 손실과 분열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미래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아갈까 상당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나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기치아래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의 주력 사업 중에 하나인 4대강 운하 대역사가 야당과 환경단체 등에 의해 중단되고, 결국은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전환되어 추진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환경단체나 NGO단체가 주장하는 운하사업도 분명 아닌데, 이미 시작한 4대강 살리기는 강의 준설과 일부 보를 설치하는 것이 전체 예산의 30% 정도이고, 나머지는 강변의 생태계나 제방 정지 사업이다.
국민의 갑론을박에도 4대강을 한꺼번에 하지 말고, 우선 한 개만 하자는 등 일종의 국론의 분열의 상태에까지 가기도 하였다. 국민들이 얼마나 4대강 살리기에 대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일단 정부의 홍보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현장에 가 보면 홍보관을 비롯하여 건설 책임자들이 자신 있게 사실과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성의를 보이는 국민은 적고 말은 많다.
홍보관도 있고, 현장 설명장도 있지만, 대형건설회사 소속의 현장소장이 직접 설명을 하겠다고 하였다. 동 영상이나 4차원 홍보물에 앞서 애로를 먼저 이야기 한다. 생태계나 환경을 보다 생각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환경단체나 종교단체가 정말로 대한민국 사람인가 의구심이 간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야생들국화인 쑥부쟁이가 일제시대에 변종이 생겨 이름을 “단양쑥부쟁이”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 꽃이 2급 멸종 식물에 속한다고 한다. 충주댐에서 한강 끝까지 엄청난 개체수가 있고, 17 km의 이 4공구에도 150만 포기의 단양쑥부쟁이가 있다고 한다. 가을철 2주 정도 보라색 꽃을 피우는 2년생 식물로 죽어 버리고, 씨는 잘 퍼지고 자란다고 한다. 공사 중에 150만 포기 중에 7포기가 크레인에 뽑혀 죽었다고 방송에 고발되고, 크레인 기사를 포함하여 최고 현장소장 포함하여 5명이 검찰에 계속 불려 다닌다고 한다.
다른 동식물도 마찬가지로 5가지가 현장 소장이 고발되어 검찰에 자주 나가야 한다고 한다.
한국의 국민의 정서가 국가 운영의 강력한 리더십이나 공권력이 이렇게 된 이유는 어디서 나왔을까? 이는 엘리트 국가 운영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NGO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보조를 받아 국가 중대사업에 발목을 잡고, 노조는 회사의 경영진이나 회사의 돈으로 회사의 발전에 발목을 잡는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의 반대나 미군 철수의 촛불 시위에 젊은 부부들은 간난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위험한 현장으로 나갔다. 이들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소수의 의견도 국민의 의견이라는 등 그들의 의견에 조금도 귀를 귀 울이고 싶지가 않다. 이 나라에도 얼마나 많은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이 많은지 안는가? 그러면 그러한 힘든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젊은이들이 거리에 나섰던 것인가?
젊은이들이 이 나라에 일자리가 없다고 한탄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제는 세계 속에 무한 경쟁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 대한민국 내에서 안정된 직장이나 사업 터만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광부나 요리사가 되건 엔지니어가 되건, 사업가 되건 세계 속에 당신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 엘리트 대통령은 세계를 향해 나가는 젊은이들은 최대한 최우선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
이제 중국은 대행진과 문화혁명까지 7천만 명을 희생하고, 이후 현재까지 30년간 장쩌민 이후, 후진타오를 거쳐 시진핑의 3대, 4대 그리고 5대의 평화적이고, 준비된 최강의 엘리트들의 권력 이양으로, 지속적인 강력한 권한의 지도부를 중심으로 세계 제1의 경제대국에 다가서고 있다. 이들은 전 세계의 자원과 에너지를 확보하고, 외교를 장악하고 있다. 진정한 세계의 중심국인 중국으로 가고 있다.
이들을 견제할 나라는 이제는 없다. 인근국가의 경제를 불랙 홀 마냥 빨아들이고 있다. 정치, 경제, 국방, 국토를 무차별 공격하고 있다. 중국은 그 어떠한 것도 자원화가 가능한 상태에서 가장 많은 자체의 자원도 가지고 타국의 자원까지 흡수하고 있다.
자원과 에너지의 문제는 비단 일본의 미국 하와이 침공에서부터, 몇 년 전 러시아의 유럽으로 대량으로 가는 천연가스관의 일시 차단과, 근년의 센가꾸열도의 문제로 인한 중국의 희귀금속(희소금속)의 대 일본 수출 중단과, 일본 무역 제품의 전수검사에서 일본도 더 이상 중국의 상대국이 아니다.
그러면, 앞으로 한국 정부의 지도부는 어떠한 엘리트가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지도부나 젊은이나 내국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아니 세계 속에 한국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데 국민의 선택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번 늦으면 영원한 패배자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가는 역사에서 현실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좀더 많은 엘리트의 육성과 지도자가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관계 없이 중국은 급속도로 진화하고 있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제까지 세계를 향해 뛰어왔고, 그 와중에 가정에도 미안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1달러라도 해외에서 돈을 벌고, 쌀 한 톨이라도 국내에서 생산된 것은 내 입으로 들어가지 않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진정 당신이 어느 상황에 있건 진정한 애국자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면 당신도 또 한 분의 국가 엘리트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첫댓글 5세대 지도부를 실질 확정하는 17기5차 대회(2010.10.15)를 앞두고, 3위 원자바오 국무원총리가 "정치개혁"을 들고 나섰다. 분권, 복수정당, 직선제가 도입되면 중국은 과연 더욱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분열의 길로 갈까? 정치개혁의 기치를 내건 것은 내분은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