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항의 뒤를 이은 영의정은 조선초기의 개국공신 명재상 남재(南在)의 후손 남구만이었다. 한동안 뜸했던 의령남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걸출한 정치가 남구만은, 현령 일성(一星)의 아들로, 충청도 충주 누암(樓岩) 외가인 안동권씨 댁에서 태어나, 부호군이던 할아버지 남식(南식)의 고향 충청도 홍성 구항면 내현 거북이마을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진다.
남구만은 당대의 성리학자 송준길(宋浚吉)문하에서 배워, 효종7년(1656) 28세때 문과에 올라, 첫 관직으로 가주서(假注書)를 받았다. 가주서는 승정원의 정7품관 주서직에 사고로 자리가 비었을때, 보충하여 앉혔던 직위였다. 이리하여 관직을 시작한 남구만은 출중한 자질로 승차가 매우 순조로와, 정언·교리·이조정랑·승지·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 등, 촉망 받는 자리를 두루 섭렵하고, 안변부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는데, 나이 불과 30대 초반이었다.
현종3년(1662) 기근이 심해진 영남지방의 영남방어사로 나가, 적극적인 진휼사업으로 백성들을 구제하였고, 현종15년(1674)에는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변방 수비를 튼튼히하는 한편, 학문적 바탕이 낮은 관북지방에 유학을 보급 진흥시켜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애를 썼다.
숙종즉위년(1675) 다시 대사성으로 내직에 들어와 곧 형조판서를 거쳐 한성부좌윤이 되어서는, 정적 윤휴(尹휴) 등의 방자함을 들어 탄핵했다가, 반대파 남인들의 거센 공격에 밀려 끝내 남해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정치판이 헤까닥 뒤집어지니, 남구만은 도승지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후 대사간 등을 거쳐 두 번이나 대제학을 역임하고,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개혁에 괄목할 훈적을 남겼다.
이 무렵 나라 형편은 경신년(1680) 대흉년이래, 민생이 파탄 지경에 이르러 국가 재정도 텅 비어버렸다. 전국의 가구는 134만2,528호, 인구는 524만6,972명으로 나타났는데, 통계에 빠진 도적패들도 상당했다. 조정은 빈민구제청인 진휼청(賑恤廳)을 세워, 재원 마련책으로, 명부에 없는 빈관직 사령장인 공명첩(空名帖), 실직(實職)없는 중추부사 앞에 첨지(僉知) 또는 동지(同知)를 부쳐 당상관 벼슬을 준 가설첩(加設帖), 양반이 아니라도 향교나 서원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으면 유생대접을 해주던 대상자들에게, 돈을 받고 교육을 면해주는 교생면강첩(校生免講帖), 재물을 받고 노비신분을 벗겨준 노비면천첩 등을 남발하니, 나라 기강이 엉망으로 무너졌다.
더러운 오리(汚吏)들은 재물을 긁으려 백성 쥐어짜기에 눈에 핏발이 섰고, 힘잃은 서민들은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팔아 연명 수단으로 삼으니, 저자거리는 팔려가는 아이들의 손을 마주잡고 울부짖는 민초들로 가득했다. 형장에서 죄수 목을 치는 망나니가, 칼을 잘 갈아 죄인의 목을 단칼에 잘라 고통을 덜어 주겠다며, 가족들로부터 뇌물을 챙겨, 그렇게 모은 재물로 일약 양반으로 둔갑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혼돈기의 숙종10년(1684) 남구만은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고, 숙종13년 7월 59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는 당파에 들지 않으면 자리 보존이 안 될 때라 남구만은 자신도 모르는 새 소론의 영수가 되었는데, 이듬해 터진 기사환국으로 그만 실각, 그해 7월 강능에 유배당했다가 11월에 풀려났다.
숙종20년(1694) 4월, 숙종의 폐비 민씨 복위문제로, 소론과 남인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숙종이 민씨의 복위를 주장한 소론편을 들어, 큰 정변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남인들이 패하자, 남구만은 두 번째 영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7월 물러났다가 그해 10월 다시 세 번째 영의정이 된 뒤, 숙종22년(1696)년 영중추부사로 실직에서 물러났다. 뒤에 장희빈을 죽여버린 숙종과 뜻이 달라 고향에 은거해 버렸더니, 끈질긴 정적들의 공박이 뒤따라 파직당하는 수모도 겪었으나, 숙종은 그의 인품을 헤아려 원상으로 삼았다.
숙종33년(1707) 남구만은 모든 관직을 벗고자 했으나, 왕은 그를 대접하여 봉조하로 기로소에 들게하니, 그는 집에 가만히 앉아서 대신급 봉록을 받을 수있었다.
숙종37년 3월, 마침내 남구만은 파란만장했던 이승에서의 삶의 끈을 놓으니 향년 83, 왕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으로 시호를 내리고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피폐한 강토, 목숨을 건 파쟁 가운데서 나라를 붙들려고 애쓴 남구만은, 숙종의 묘정에 배향 되고, 오늘날 경기도 용인시 모현 초부리에 부인 동래정씨와 합장으로 된 그의 묘소가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있다.
그는 학명(鶴鳴)·학성(鶴聲)·학청(鶴淸)·학정(鶴貞) 등 네 아들이 있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칠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시조!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시조이면서 이 시조의 배경과 풍경이 서린 곳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 현대인도 감흥에 빠지면 한 번 읊어 보는 시조가 ‘동창이 밝았느냐- - - “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다 불쑥 학창시절 배운 시조 한수를 외워보라면 어떤 작품이 먼저 떠오를까? 많은 이들은 남구만이 지은 이 시조를 생각해내지 않을까. 남북교류의 전진기지로 떠오른 금강산 관광 1번지 동해시에 한국문학의 대표적 장르인 시조(時調) 유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재너머 사래 긴 밭은 지금은 드넓은 담배밭으로 그 옛날 경지 정리가 없던 시절엔 엄청나게 큰, 말 그대로 긴밭(長田)이었다. 농경문화 사회에서 근면성과 농촌의 봄철 풍경을 잘 표현해 우리에게 친숙한 이 시조의 배경은 동해시 망상동 심곡마을.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조선 숙종때 사람으로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이다. 효종 2년(1651)에 과거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노론 소론 양파의 거센 당쟁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상 속에 약천은 1680년 대제학을 지낸 후 1684년 우의정, 1687년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까지 오른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화를 입어 강릉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된 약천은 숙종 당시 격동의 정국을 이끌다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약천 남구만이 망상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689년 4월. 이때가 그의 나이 61세때였다. 우리가 지금도 애송하는 ‘동창이…’는 유배된 이듬해인 1690년 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심곡마을에는 남구만의 호와 같은 약천(藥泉)이란 샘이 있어 더욱 정겹고 친근감이 간다. 심곡마을에는 시조에 등장하는 ‘재넘어’와 ‘사래긴밭(장밭․長田)’이 실제로 소재한다. 약천 샘에서 산쪽으로 약 50m 올라가면 약천사(藥泉祠)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약천사는 심곡마을에서 1년여를 머물다 한양으로 되돌아간 남구만이 세상을 떠난후 그의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격에 반한 마을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여 영정을 모시던 곳이였다. 약천선생의 영정을 모신 마을이라 이곳을 ‘영당(影堂)마을’이라고도 불렀다. 검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동해휴게소 한켠엔 약천을 기리는 시조비가 1994년 이 고장 뜻있는 이들에 의해 건립돼 잊혀져가는 남구만과 동해의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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