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독교는 어디로?
이경래 베드로 신부(서울교구/天津商務學院) 1. 중국에 제7일 안식일교가 있다? 없다? 15년 전 필자가 남경에서 중국어를 배울 무렵, 제7일 안식일교 한국 신학생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선 삼육대학교와 삼육우유, 삼육어학원으로 꽤 알려진 교단이다. 한국 안식일교단에서는 중국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미국 안식일 교단과 협력 하여 2년에 한 번씩 중국 각 도시마다 신학생을 파송하여 중국어를 배우고 파송된 지역사정을 익히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은 두 사람씩 보내는데 기간은 2년이고 한번 보냈던 도시는 안 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학비를 비롯한 모든 경비는 한국과 미국 안식일교에 부담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의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워서 자주 여행도 다니는 모습이 참 부러웠었다.
그런데 이 신학생들은 매주 토요일이면 중국교회에 가서 중국인 신도들과 함께 안식일 예배를 참석하였다. 당시 막 중국에 온 나는 전에 한국에서 책을 통하여 중국교회는 교파가 통합되어서 없다고 배웠기에 토요일마다 중국교회에 안식일 예배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었다. 그래서 하루는 이들에게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이 친구들은 나에게 “중국에 안식일교가 없지만 있어요.”라고 알듯 모를듯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는 당시에 이들이 말한 알쏭달쏭한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면 도대체 없다는 것은 무엇이며,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뜻을 알기 위해선 먼저 1949년 이후 중국교회에 걸어온 길에 대하여 간단히 알 필요가 있다.
2. 1949년 이후 중국기독교가 걸어온 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 기독교는 크게 문화대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1. 문화대혁명 이전(1949~1978)
오늘날 중국의 많은 드라마에서 방영하는 단골소재는 항일전쟁이다. 아시다시피 일본과의 전쟁은 현대중국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실 일본군과 가장 치열하게 싸운 것은 중국 드라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공산당의 인민군이 아니라 중국 국민당의 정부군이었다. 오히려 국공합작으로 인민군은 어떤 의미에선 약간의 숨쉴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중국 공산당 입장에선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론적인 명분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구동존이(求同存異: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통점을 추구한다)’라는 통일전선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 공산주의와 자본주이라는 이념적 차이보다 현재 당면한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동존이’원칙은 1949년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통치이념 중 하나가 되었으며, 특별히 종교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배경 하에 중국 공산당은 종교의 자율성을 일정 정도 보장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중국군의 참전으로 중국은 서방국가들의 비판으로 수세에 몰렸고, 이에 대한 반발로 중국 내에 있는 모든 외국인 종교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기독교의 예를 들자면, 모든 교단들을 강제로 통합하고 이와 관련된 재산 중 학교는 국유화하고, 순수 종교시설은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로 귀속시켰다. 여기서 ‘삼자(三自)’란 외국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재정을 독립해야 한다는 ‘자양(自養)’, 외국교회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전도해야 한다는 ‘자전(自傳)’, 그리고 외국인에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이 치리해야 한다는 ‘자치(自治)’를 의미한다. 원래 삼자이론은 영국교회의 양대 선교기관 중 하나인 CMS(Church Mission Society)의 선교이념이었다. 삼자정신은 대한성공회 헌장 및 법규 서문에도 ‘삼자’가 명시되어 있을 정도로, 비단 영국교회의 선교이념에만 국한되지 않고 많은 세계성공회 공동체의 선교정신이기도 하다.
1949년 이후 중국교회가 통폐합될 때, 이러한 삼자정신은 중국의 각 교파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자, 중국공산당의 ‘구동존이’원칙과 상응할 수 있었기에 오늘날 중국 기독교를 소위 ‘삼자교회’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비록 교단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통폐합할 수 밖에 없었으나, 예전이나 신학적 차이점이 공존할 수 있는 약간의 자율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렵게 확보한 종교적 자유도 문화대혁명의 광풍으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모든 종교시설은 빼앗기고, 종교인들은 직책을 박탈당하고 강제노동과 갖은 멸시를 당하는 기나긴 박해를 받아야 했다.
2-2. 개혁개방 이후(1979~)
등소평의 재등장으로 중국은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게 됐다. 종교 역시 기나긴 박해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 빼앗긴 종교시설과 신학교를 다시 돌려받았고, 성직자들은 다시 공적으로 예배를 집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기나긴 단절로 인해 신학, 영성, 사목 등 교회 전 영역에 걸쳐 황폐화가 심각하게 되었다. 비록 박해를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심은 열렬해 졌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신앙으로 쉽게 이단으로 빠질 우려가 있었고, 성직자들은 신학적 소양의 부족과 정치이념의 영향으로 정치적이며 행정적인 관료주의의 위험에 빠질 우려가 높아졌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띵광쉰(丁光勳)주교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중국기독교협의회를 설립하고, 각 성에 신학교를 세워서 건전한 신학교육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개혁개방정책이 시행되고 종교자유를 되찾은 지 30년이 넘으면서 중국 기독교는 이제 천주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등 다른 이웃종교들과 함께 급속한 성장을 하고 있다. 개혁개방 초기만 해도 중국기독교 신자의 대부분은 저학력자, 농민 위주였다. 그래서 쉽게 이단에 빠졌고, 중국당국으로 하여금 또다시 탄압을 받는 빌미가 되었다. 이른바 ‘가정교회’라고 부르는 허가 받지 않은 대다수 농촌교회에 대하여 중국당국은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한 이유로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교회는 이른바 ‘제3의 교회’, 혹은 ‘도시형 가정교회’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신자들이 도시의 중산층이고, 고학력자이자 전문직 종사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들 중 일부는 해외유학내지 해외주재원 경험을 갖고 있는데, 이들은 서구문명의 원동력이 된 기독교 문화에 관심으로부터 출발해서 신앙을 갖게 되거나 혹은 현대 중국사회의 지나친 배금주의와 물질주의 풍토에 대한 염증으로 종교적 안식을 갈망하고 있다.
이처럼 자발적 도시 기독교인들의 발생은 21세기 중국사회에 새로운 종교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유물사관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다. 중국당국은 마르크스 이념이 갖고 있는 한계성을 인식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유교적 이념을 강화하고 있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초월에 대한 근원적인 갈망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종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작년 가을 필자가 알고 있는 중국인 목사가 자기 지역 교회를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는 SNS를 보내왔다. 중국의 지방정부에서 절강성 온주시에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강제로 철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를 막는 신도들과 물리적 충돌이 있었고, 많은 신도들이 피를 흘리며 다치고 잡혀갔다는 것이다. 절강성 온주시는 한국의 개성상인처럼 중국에서 상인도시로 유명한 곳이며, 이곳에 교회가 아주 많기로 유명해서 ‘중국의 예루살렘’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20년 전 중국의 장쩌민 주석이 온주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밤에 붉은 십자가가 많은 걸 보고서 “여기가 사회주의 국가가 맞는 건가?”하면서 탄식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그 지방관리들에게 온주시의 기독교는 늘 불편한 대상이었다. 그러던 차에, 새로 부임한 관리가 온주시에서 제일 큰 교회의 십자가를 철거하라는 지시를 했고, 신자들은 이러한 지방정부의 방침은 불법이라고 맞섰던 것이다. 다행이 나중에 그러한 행정명령이 불법이었다는 사과를 받아내었다고 한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중국교회 신자들의 규모나 역량이 커지면서 더 이상 중국당국도 자의적인 탄압을 할 수 없게 되고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대외적으로 중국정부와의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적으로도 해결해야 될 과제가 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 성직자들의 신학적 교양, 사목적 역량이 새롭게 신자층을 구성하고 있는 도시 크리스천들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른바 ‘지식인 신자’들은 자체적으로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목사를 초빙해서 설교를 듣거나 양육프로그램을 수입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볼 때, 농촌의 ‘가정교회’는 무식하며 원리주의적이고, ‘삼자교회’는 종교적 정체성을 지닌 기관이라기보다는 정부당국의 행정명령을 이행하는 ‘종교관청’같다고 느끼고 있다. 사실, 중국당국이나 삼자교회 지도부에선 중국의 종교정책에 위배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예전, 사목프로그램, 신학적 특색이든지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지금 중국대륙의 교회에는 전통적인 말씀중심의 예배, 안식일 예배, 찬양예배, 심지어 성공회식 성만찬 예배 등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자고로 중국교회는 지금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3. 중국 기독교는 어디로?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중국에 귀속되었다. 중국은 홍콩, 마카오, 그리고 대만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원칙하에 고도의 자율권을 부여하여 하나로 통합하려고 한다. 이미 중국에 귀속한 홍콩과 마카오는 50년 동안 대륙과는 다른 체제로 운영되다가 대륙의 사회주의 시스템 안에 흡수될 예정이다. 현재 홍콩이나 마카오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처럼 교단이 독립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약 30년 후에는 중국의 종교행정 시스템 안으로 통폐합되어야 할 것이다.
성공회의 예를 들어보자. 홍콩 성공회는 장차 없어질 것인가? 필자가 보기엔 없어질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없어진다는 것’은 지금과 같이 대륙과 별도의 독립적인 행정형태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50년이 지나면 홍콩의 모든 행정, 사회 시스템은 철저하게 중국대륙에 흡수되어 더 이상의 자율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종교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있을 수 있다’. 즉, 교회의 행정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은 중국기독교 협의회에 흡수되거나 종속적인 부서로 편입되겠지만, 신도들의 살아 있은 예배나 사목적 특성은 어떤 면에선 더 확장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재 대륙에 있는 교회 중 일부에서 이미 성공회 스타일에 관심을 갖고 성공회식으로 예전과 교회운영을 시작한 성직자와 일군의 신도층이 생겼고, 향후 이들과 홍콩 성공회가 하나의 제도 하에 조우한다면 홍콩이라는 밀알이 대륙이라는 밭에 떨어져 큰 열매가 맺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예측하고 작동하는 교회행정조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닐까 한다.
어쩌면 중국교회의 미래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의 몸 된 교회가 역사를 통해 갈라져 나간 것을 다시 하나로 만날 수 있는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몸이면서 다양한 지체가 되듯이 말이다. “다양성 안의 일치!”- 중국교회의 미래를 상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