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 기획특집
이재창 시인, 남도문학 현장을 가다 (14) - 시인 문도채
“봇도랑물에 흰고무신 헹궈 신고 꽃잎 다칠세라…”
“민들레꽃 핀 언덕길을 수레 타고 올 젊음아…”
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외유내강의 선비형 시인
광주와 수몰된 실향의식 생의 원형으로 존재
세상살이의 辛酸 내면화 삶속에 진솔히 묘사
인생을 보는 눈, 생각의 깊이 원숙의 경지로
2003. 05.21(수) 14:06
문도채(75) 시인은 외유내강의 선비형 시인이며 교육자로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시와 시조 모두 등단한 이 지역의 원로급 시인에 속한다. 그를 만나면 아버지같은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인자한 인간으로서의 문도채시인, 교육자로서의 문도채시인, 선비로서의 문도채시인이라고 거침없이 밝히기 때문이다. 교육자로서의 자상한 성격과 누구보다도 강한 책임감의 소유자로 무슨 일이든지 맡으면 열과 성의를 다하는 생활인으로도 나무랄데 없는 시인으로 통한다.
요즘같은 한국문단의 풍토에서 우리 조상 대대로 지켜온 선비사상을 갖고 행하는 문인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그를 대하면 그 해답이 나온다.
그는 어쩌면 문학가이며 시인이기 전에 교육자라는 자부심과 신념을 지닌 선비형 시인이기를 원하는 지도 모른다.
평생을 그리던 교육에 열정을 쏟다가 문단 또한 뒤늦게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가 문단진출은 나이에 비해 늦게 등단했지만 그 이전에 많은 지면에 글을 발표해 그 이름은 문단에 이미 알려졌었다.
그는 이미 20대 초반인 1952년 ‘쌈지’라는 조그마한 첫 시집을 냈다. 전쟁통에 발간돼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집이다. 이 시집엔 33편의 시가 실려있는데 젊은이가 사는 생활과 현실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또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젊은이의 꿈으로 가득차 있다.
또한 1940년대의 암흑과 광명을 뜨거운 정열과 갈등 또 희망과 실의 속에 성장해온 해방의 세대가 겪은 심리적 혼미와,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 그리고 이상과 현실간의 소망과 좌절이, 벽지에 묻혀 사는 그에게까지 파급되는 관념과 몸부림으로 표현돼 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처음 써보는 사랑의 시’에서는 그가 몸담고 있는 교직을 통해 쓴 시들이 눈길을 끈다.
“쓰다 남은/차마 버리지 못할,/분필 토막과 함께 敎壇을 내려선다.”(‘미련’)
“긴긴 복도를 거닐다 멎은/나의 다리에 경련이 인다./분필 토막의 이마에 땀이 솟는다.”(‘未練의 끝‘)
꼭 하고 싶은 말, 꼭 해야 할 말이 남았는데 수업을 끝맺어야 하는 아쉬움이 묻어 있는 시다. 그 아쉬움에 쓰다 남은 분필 토막을 차마 놓을 수 없다. 다하지 못한 마음을 풀 길이 없다. 그러나 교실을 나서면서 시인은 자기의 생을 생각한다. 살아야 할 인생이 있는데 그 인생이 분필토막처럼 미련을 남긴채 자꾸만 從天命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그의 충직한 생활과 인간, 그것이 시적 지혜로 형상화하고 있다.
“훈훈한 바람, 걷히는 안개/숨을 몰아쉬며 들길을 간다.//봇도랑물에 흰고무신 헹궈 신고/꽃잎 다칠세라 비켜서 간다.//자운영밭 빨갛게 널린 봄 봄/휘파람을 불다말고 앞산을 본다.//아아 저 고갯길 넘은 애들 어디에 가 있을까./못에 와 걸리는 깔끄러운 보리이삭//민들레꽃 핀 언덕길을 수레 타고 올 젊음아/노고지리 지지배배 혼자 듣기 아깝구나//송홧가루 보오얀 장구배미 못자리,/논둑길을 걷다가 구름이 된다.”(‘4월 들길에서’)
봄은 계절의 시작이자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의 시간이다. 보릿고개의 추억이 묻어있는 이 시는 굶주림과 고통만이 아닌 민들레꽃 핀 언덕길을 수레타고 올 젊음이라는 재생의 이미지를 불어넣고 있다. 그의 고통이 고통극복의지로 전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이미지의 생성은 시인의 현주소인 광주에서 일어났던 80년 5월 민중항쟁이며, 또다른 하나는 시인의 고향에서 행해진 주암댐공사로 인한 실향의식에서 발현한 것으로 보인다. 주암댐 부근 산골의 적빈한 장남으로 태어나 여러 형제들을 자립시키고 올망졸망한 5녀1남의 자녀들을 말없이 키워낸 그의 삶의 회한이 묻어나 있다.
“거리는 아직도 싸움이 한 창,/돌멩이가 날은다. 불꽃이 튄다/이리 몰려 왁자지껄 저리 가서 와- 와-/쓰러졌다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는데도/좁혀질 것 같지 않은/가진 자와 빼앗긴 이와의 머나먼 거리”(‘빗길을 걸어가며’ 2연)
그는 또한 80년대의 데모현장을 지나치다가 한국사회 갈등의 일단을 날카롭게 포착하기도 한다. 그의 시선이 어버이의 관점에서 보는 늘 자식걱정 하는 바로 그 심정으로 대사회적인 발언을 표나지 않게 묘사하고 있다.
“시집간/딸이 보낸/돋보기를 코에 걸면//집사람 흰 머리칼/사이 사이/돋는 젊음//남주기/서러운 새 봄//한 송이/또/꽃이 핀다”(‘春蘭․1’)
“미움쯤/눈을 감아/발 아래 꽃밭 일구고//이 두메 푸르름 속을/다시 살핀/東方의 빛//그 햇살/눈이 부시어/그림자로 남는다”(‘미륵불3’)
“따스한 봄 아녀도/바람따라 걷는 들길//아무나 맘 맞으면/말을 놓고 지내는 情//영산강/흐르는 젖줄/물고 사는 나의 사랑//술 한 잔 기울이고/홍어 한 점 집어들고//길가는 나그네를/불러모아 다둑거린//무등산 峯 구름 둥실/웃고 사는/내 사랑아.”(‘南道戀歌’)
그가 펴낸 시조집 ‘남도연가’에 실린 몇편의 시조를 추려보았다. 그의 시도 시이지만 그의 시조작품 또한 완전한 하나의 틀을 이루고 있다. 그는 하나의 어깨에 두 개의 짐을 얹을 수 없어 시 창작에 전념했노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의 문학적 역량이나 위상은 그의 시조작품에서 더 돋보인다.
진실한 자기 생활이 연약한 ‘춘란’의 시심에서 인생을 보는 눈, 생각하는 깊이가 원숙의 경지에 승화되고 있다. 남주기 서러운 새봄을 안은 원숙의 연륜은 한 송이 피는 꽃잎에서 다시금 시인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또한 불심의 세계로 눈을 돌린 무아의 경지를 넘나들고 있다. 원광의 만리에서 빚는 불심과 시심의 조화에 의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음도 득도하는 불자처럼 의연하게 관조하는 있는 시인의 심행을 엿볼 수 있다. 불이 어디에 있는가. 마음속에 있고 곳곳에 있듯이, 시인도 동향이 아닐까.
전라도의 젖줄인 영산강과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은 지난 수백년, 수천년 동안 많은 시객들의 노래 속에 새로운 전라도인의 생활과 인정을 노래하게 한 詩情의 원천이기도 한 곳이다. 문도채 시인도 남도연가에서 그 시정의 대맥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그는 전라도인의 마음씀씀이와 이웃사람들에 대한 넘치는 인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처럼 문도채 시인의 시들은 세상살이의 신산(辛酸)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진솔하게 언어로 묘사한다. 그의 모든 시집에서 고향과 교육이라는 현실의 장, 가족사랑으로 편지워진 것도 그가 태어나고 성장하였던 고향(지금은 이미 수몰된)이 생의 원형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의미작용으로 역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현실의 편에서 보면 시인의 고통스런 삶이 어머니인 고향을 부르고 그 너그러운 품으로 달려가서 안식과 평화를 얻을 뿐 아니라 밤의 잠이 아침의 활력을 마련해 주듯이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아 각각의 시를 형상화해 온 것으로 보인다.
임동확 시인은 그를 가리켜 “모진 국권(國權)과 부권상실(父權喪失)의 천붕지상(天崩之喪)을 한꺼번에 당한 세월의 비바람을 방패막이 하나 없이 받아내면서도 정작 그 자신들을 기꺼히 희생하여 또다른 방패막이가 되고자 했던, 그러나 어디서나 정당한 대접이나 자리매김을 받지 못했던 불행한 세대를 대표할 수도 있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결코 직립하고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결정적으로 휘어지거나 꺾이지 않았던 한국 땅의 무수한 소나무 형상같은 아버지상을 느꼈다”고 말하고 “유달리 조로현상을 보이는 한국시단 풍토 속에서 마땅히 그럴법한 노장자적(老莊子的) 허세를 극히 경계해왔던,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한 가정의 지아비로서, 또는 문단과 지역사회의 어른으로서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고 덧붙인다.
그는 이제까지 시인이며 교육자로서 살아온 길을 회상하며 겸손해 한다.
“돌이켜 살펴보면 교직생활 45년, 그동안 나는 무슨 일을 했을까. 시인이라는 단어는 당치도 않는 단어이고 선생이라 불러주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말한다.
어린시절 자연 소재로 詩語 표현
대학때 김기림 시인 만나 문학적 역량 키워
문도채 시인은 1928년 6월6일 순천시 승주읍 남강리에서 태어났다. 장남인 그는 주로 유평리에서 자랐는데 그 마을이 지금은 주암댐 수몰지구가 돼 실향민이 됐다.
그는 어릴때부터 총명해 여섯살때부터 마을 서당에서 추구(推句), 사자소학(四字小學), 명심보감, 소학, 통감까지 배우고 소학교에 입학한 신동이었다. 그가 서당에 다니던 어느날 점심식사 후 서당아이들 모두가 모여 파접(罷接;글짓고 책을 읽는 모임, 지금의 방학)이라는 글제를 놓고 한시 짓기를 겨뤘는데 7살이었던 그가 청년들까지 모조리 제치고 장원을 해 집에서 떡시루를 쪄오는 등 한 바탕 잔치를 치루기도 했다.
아마 문도채 시인은 그 어릴적부터 타고난 시인이었는지 모른다. 또 초등학교 2학년때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입상했는가 하면 6학년때엔 ‘나의 모형기’란 동시가 경성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그때 그는 시가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된다는 문학수업 보다는 닥치는대로 자연을 소재로 읊조리기도 하고 또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이며 체험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과 솟구쳐오른 감정을 그대로 적곤 했는데 그러한 시작 태도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범학교 시절과 대학시절에 이 지역 신문인 호남신문과 전남일보, 동광신보 등에 시를 비롯해 많은 글을 발표하며 문학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가 문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김기림 시인과의 만남이었다. 그가 습작시 몇 편을 들고 김기림 시인을 만났을 때 “시란 웅변원고나 연설문이 아니므로 격한 표현의 시어로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숨기세요. 숨겨 두어도 독자들이 알아서 다 찾아내게 될 것이니 말로 표현되기 이전의 아름답고 값진 세계를 담도록 하라”는 그 말 한 마디가 나이가 지긋한 지금까지도 귓가에 쟁쟁하다고 말한다. 그 “숨기세요” 말 한마디가 그로 하여금 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줬다.
그가 광양농고 교사로 있던 1952년에 비로소 처녀시집 ‘쌈지’를 발간, 시인의 길로 들어간다. 그후 그는 이 지역에서 수많은 글을 왕성하게 발표하면서도 쉽게 말하면 소정의 절차를 거치는 문단 등단을 하지 않고 있다가 1964년에야 ‘시조문학’지를 통해 시조를 등단하기에 이르렀고, 1969년 ‘원탁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월간 ‘시문학’을 통해 시로 등단, 한국문협의 회원이 됐다. 그는 1960년대 한국 시조문단의 대표적 동인회인 시조예술동인회 ‘영산강’ 활동을 허연, 송선영, 정소파씨 등과 함께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원만한 성품과 지도력으로 15년동안 ‘원탁시회’ 대표를 역임했으며 1980년도에는 한국문인협회 전남지부장과 예총 전남지부장을 맡아 왕성한 활약을 했다.
그는 1995년 45년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광주상고 교장직에서 정년퇴임 했다. 그동안 그는 시집 ‘처음 써보는 사랑의 시’, '남도연가', ‘달력을 넘기면서’, ‘무등산 너덜겅’, ‘산은 산대로 나는 나대로’, ‘황혼, 벤치에 앉아서’를 내고 지금 8시집을 준비중이다. 이밖에 에세이집 ‘진흙과 모래’, ‘조용한 강자’를 펴냈다. 그동안 전라남도 문화상, 제3회 평화문학상, 광주교육대상, 국민훈장 동백장, 무등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남도문학 사진
문도채 시인은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시인이다. 그의 내면에는 광주와 실향의식이 생의 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문학가이며 시인이기 전에 교육자라는 자부심과 신념을 지닌 선비형 시인이기를 바란다.
글 ; 이재창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