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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완계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沙月
셋째 날 오늘은 어제보다 이동거리가 더 많은 날이다. 그러나 가이드 말이 이쪽은 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되어 있어서 실제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은 어제보다 덜 걸릴 것이라고 하였다. 역시 호텔 뷔페식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희끄무레한 북경의 스모그를 헤치고 목적지로 향하였다. 나가는 길에 가이드가 북경의 주요 건물들을 설명하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불타버린 CCTV 신청사였다. 올 2월의 정월 대보름 불꽃놀이 때 타버려 전세계의 이슈가 되었던 그 건물을 내 눈으로 현장에서 직접 목격을 하다니 정말 믿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양방향으로는 북경에서 가장 높다는 건물 주위로 삼성, SK, LG의 북경 사옥이 포진해 있어서 새삼 중국에서의 우리네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번의 불꽃놀이로 너무나 큰 댓가를 치른 CCTV 신사옥. 아직 복구를 하지 않고 있다.
어느덧 차는 고속도로로 진입해 있었다. 같은 점은 어제보다는 평탄하게 닦여진 길 양방에 보이는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옥수수 밭이었고, 다른 점은 역시 도로 사정이었다. 가는 길에는 트럭이 한 대도 보이지 않았는데 가이드 말이 북대하 해수욕장에 중국의 고위 인사가 휴가를 가는 중이어서 도로를 “청소”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한다. 실제 중간중간에 경찰들이 트럭은 고속도로 밖으로 유도하는 장면이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서방의 국가 지도급 인사들은 이동을 할 때 거의 에어포스 원(공군 1호기)나 헬리콥터 같은 항공편 등을 이용하는데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는 오로지 육로를 이용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김정일은 러시아를 갈 때도 1주일에 걸려 시베리아 황단열차를 이용한다면서. 이게 모두 안전성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권력만 있으면 무소불위의 나라가 바로 중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겉으로만 유지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의 현실인 듯 느껴졌다.
곳곳에서 대형 트럭은 고속도로 밖으로 인도하는 경찰들
어제까지는 맹송맹송하게 다녔던 게 좀 그래서 내가 자리를 앞으로 옮겨 마이크를 잡고 간단하게 명목상이나마 단장을 뽑는 일과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였다. 그래도 “교장선생님”인 큰형님을 단장으로 추대했고, 먼저 이 여행이 성립된 동기 등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그 다음에 각자 나와 소개를 하였는데 분위기가 그냥 끼리끼리 앉아서 제각각 잡담만 하고 갈 때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자다가 졸지에 단장으로 추대된 고헌 형님이 마이크를 잡고 있다.
11시 조금 넘어서 차는 진황도(秦皇島)시에 도착하였다. 도자가 도시를 나타내는 都가 아닌 섬을 나타내는 島임에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도시의 이름이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고자 세 섬인 삼신산으로 방사들을 보낸 데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이드의 말대로 이동 거리는 더 먼데 도착 시간은 어제보다 일렀던 것이다. 역시 현지 가이드를 태워서 대동하였다. 이름이 장위(張羽)라고 하였는데 아주 호남형 스타일이었다. 빠른 교통편 때문에 식사 전에 먼저 한 코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진황도서 우리를 안내하기 위하여 탑승한 가이드 장위(張羽). 여태까지 본 현지 가이드 중 가장 멋있었고 꾸미지 않아도 세련되고 깔끔한 것 같았다.
식사 전에 간 곳은 진황구선입해처(秦皇求仙入海處)였다. 말 그대로 풀이를 하면 진시황이 신선이 되기를 추구하여 바다로 들어간 곳이 된다. 사실 진시황이 직접 바다에 들어가지는 않았고, 서복(徐福: 또는 서불)이라는 방사(方士: 道士)의 꾐에 빠져 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동방에 있는 영주, 방장, 봉래라는 삼신산에 동정 남녀 5000명을 딸려 보낸 곳이다. 이 삼신산은 바로 동방의 제주도, 지리산, 금강산이었다고 하니 우리나라와도 무관한 곳이 아닐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당시에는 그냥 이쯤 어디에서 방사와 동정남녀를 파견하였다는 기록만 보일 뿐 유적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상술이 어떠한가? 그럴 듯하게 시설을 만들어 관광객들을 꾀고 있었다. 특히 입구의 진시황 행렬은 아주 볼만했다. 안쪽은 구역별로 당시 7국의 생활이나 특징을 묘사한 테마 파크처럼 꾸몄다. 제일 첫 코스는 제나라인가 그랬고, 마지막 코스는 진나라로 꾸며져 있었다. 진나라 코스는 진나라의 궁전에서 진시황이 바다로 향하는 거대한 석상이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규모도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의 완만한 경사로는 바다까지 이어져 정말 보기에도 속이 탁 트일 정도였다. 그 끝자락에 거대한 진시황의 석상이 있었는데 작(爵)을 들고 아마 본인 생각에 불사약을 마시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서복은 아마 중국 역사상 황제를 상대로 가장 큰 사기를 친 인물일 것이다. 그는 이 사기로 한 몫을 단단히 챙겼고, 진시황은 영생불사를 추구하여 사료에 거의 최초로 중금속 중독으로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남게 되었다. 이런 모습들은 최근에 나온 영화들, 이를테면 감독으로 더 유명해진 장이머우(張藝謀) 주연의 <진용(秦俑)>이나 <붉은 수수밭(紅高粱)>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스타로 부각한 쟝원(姜文) 주연의 <진송(秦頌)> 등에도 보인다.
이곳 진황도로 행차하는 진시황의 행렬을 묘사한 조형물
면류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진시황이다
진시황이 작을 들고 발해쪽을 바라보고 있는 조형물
점심은 만두집[餃子: 쟈오쯔]에서 했다. 중국의 식당이 밥도 요리의 일부, 만두도 요리의 일부여서 그게 그거지만 다른 곳에서의 식사와는 달리 만두 두 접시가 나왔고 먹을 만했다. 그리고 식사를 한 곳이 2층이었는데 모든 룸이 8로 시작되는 것을 보니 중국인들의 재산에 대한 집착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은 빠이허위엔쟈오쯔. 쟈오쯔(餃子)는 물만두라는 뜻이다.
식사 후 처음으로 찾은 곳은 노룡두(老龍頭)였다. 이곳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다. 말하자면 장성이 이곳에서 시작하여 서쪽 끝의 가욕관까지가 만리라는 말이다. 실제 만리가 훨씬 넘는 거리지만. 한국 사람들은 거의 찾지를 않는 곳이었지만 중국인들에게도 이곳은 아주 즐겨 찾는 유원지인 듯 싶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플라타나스 나뭇잎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징해루(澄海樓)라는 큰 누각이 있었고, 거기에는 다시 웅금만리(雄襟萬里)라는 현판이 있었다. 명나라의 모 대학사의 글씨라고 밝혀놓았다.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에게 호되게 당한 후 되찾은 한족 왕조를 지키고자 만리장성을 전면 리빌딩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명나라 사람의 필체가 있는 것이 일견 당연해 보였다. 그보다 안쪽에 쓰인 금박 글씨는 건륭어필(乾隆御筆)이라는 낙관이 있었는데 원기혼망(元氣混茫)이라는 글씨였다. 원기가 끝이 없이 아득하다는 뜻이었다. 사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막아놓았지만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원기혼망'이라는 기상을 느낄 만도 했다.
징해루(澄海樓)
징해루와 웅금만리라는 현판
건륭제의 어필이라는 원기혼망이라는 현판
노룡두는 정말 멋졌다. 많은 사람들이 용머리 모양의 성벽 끝 쪽으로 갔지만 나는 그곳은 대충 보고 용머리가 발해의 바닷물을 들이키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파도가 잔잔하여 평화로워 보이는데 바람이 거세어져 파도가 치면 정말 볼만하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 모두들 그늘에서 쉬면서 늦게 오는 일행들을 기다리기도 하였고. 좀 늦은 일행은 사과의 표시로 빙곤(冰棍: 하드)을 하나씩 돌리기도 했지만 물론 이걸 사과의 표시로 받아들이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일행에 대한 일종의 애정의 표시랄까? 나오는 길에 보니 중국의 전통 혼례 때 쓰는 가마 체험 등으로 떠들썩하다. 정말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 바로 이곳 중국이다.
용이 바다에 머리를 박고 물을 들이키는 듯한 형상의 노룡두
다음은 산해관(山海關)으로 향하였다. 해수욕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노룡두만큼 찾는 사람이 없는지 꽤 유명한 유적지 치고는 조금 한산해보이기도 하고 관리도 좀 소홀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들어가는 곳이 좀 지저분했고(오죽하면 세하가 바닥에 고인 물을 보고 중국에 와서 제일 깨끗한 물이라고 했을까?) 중국인들 특유의 유적지 내 상행위가 심한 곳이었다. 해자로 보이는 곳에는 비닐 수상놀이 기구가 있었고. 산해관 입구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조금 듣고 관외에서 관내로 들어가니 비로소 산해관의 위용이 드러났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보기에도 웅장한 현판이 굽어보고 있었다. 이곳의 제일(第一)이라는 말은 물론 best가 아니라 first라는 뜻일 것이었다.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산해관. 천하제일관이라는 현판의 글씨에 힘이 넘친다.
산해관. 한족들에게나 우리 조선으로나 불행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명나라 마지막 왕 숭정제는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당하자 경산공원에서 목을 매 자실하였고, 명나라도 서서히 그 운명이 끝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자성이 대순(大順)이라는 중국 왕조사상 수없이 명멸해간 하루살이 같은 왕조를 세우고,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에게 합류하라고 권한다. 오삼계가 이자성에게 합류하기 위하여 기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여 이자성과 명나라를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밀어부쳤다. 이자성의 부하 장수 중 한 사람 유종민이란 사람이 그만 오삼계의 애첩인 진원원을 가로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격분한 오삼계는 말을 돌려 산해관의 문을 활짝 열어 만주족을 끌어들였다. 물론 명나라는 이미 부패할대로 부패해 이것이 명나라가 직접적으로 망한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난공불락의 산해관을 열어줌으로써 어쩌면 한족 왕조로 이어갈 수도 있었을 상황에 마지막 숨통을 죄인 곳이었다. 우리 조선에서 축출되어 관내로 눈길을 돌려 동정을 살피던 만주족이 이곳을 통해 입성하여 청나라를 세우고 조선에게 조공을 요구했을 때 우리 사대부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조선이 오랑캐로 규정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사람들이 이 관문을 지날 때의 심경은 또 어땠을까? 지금까지도 당시 행장이 남아 있는 문인들이나 지식인들의 기록을 보면 청나라가 수립된 후에 자실한 사람이 그렇게 많았고, 그 어이없는 행위를 하나같이 절개라는 부질없는 명분으로 포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곳 삼국의 역사가 소용돌이 치던 격랑의 현장은 이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나 기다리는 곳이 된 지 오래다. 모두들 그 아픔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로 찍은 사진이나 확인하며 즐거워하는 것을 보니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알 수 있겠다. 산해관의 망루인 천하제일관 위로 올라가서 한 바퀴 돌아보고 내려왔다.
천하제일관 현판
다음 행선지는 맹강녀(孟姜女)의 사당이었다. 그런데 맹강녀묘(廟)에 도착한 순간 이장휘 선생이 산해관에 지갑을 두고 왔다고 하며 가이드 현용남과 함께 부랴부랴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첫날에 이은 두 번째 큰 사건이었다. 다행히 하나의 분실도 없이 지갑을 고스란히 찾아 해프닝으로 끝나가는 했지만 다른 일행들은 시행사와 시공사측의 연속 실수에 마음깨나 졸였을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빙그레 웃으면서 회상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맹강녀묘 매표소 앞에서 지갑을 분실하여 찾으러 간 이장휘 선생을 기다리는 일행. 찾으러 간 사람 기다리는 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을 포함해 7명이 못 들어간다고 하였지만 입구와 출구가 다르대서 결국 모두 들어갔다.
제법 오랜 기다림 끝에 입장한 맹강녀묘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사실 그 이상의 기대도 않았지만. 맹강녀는 진(秦)나라 때 남편을 만리장성 축성으로 부역 보낸 전설적인 열녀이다. 남편이 성을 쌓으러 떠난 지 여러 해가 되어도 오지 않자 겨울옷을 만들어 남편을 찾아 나섰다가 결국 찾지 못하게 되자 절망감에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자 장성이 무너지면서 남편의 시신이 나타났다는 열녀이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처럼 벽돌로 쌓은 성이 아니고 황토흙으로 쌓은 통담이었기에 붕괴의 가능성은 지금보다 컸을 테지만 그렇다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열하일기』에 보면 조선의 사신들은 꼭 맹강녀의 사당을 참배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국의 국가대표급 열녀인 맹강녀에게 절의, 충성을 생명보다 중시했던 우리 사대부들이 꼭 찾아 참배를 했다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맹강녀가 탄생하는 모습이라든가 남편과의 만남, 이별, 찾아 나섬 등을 묘사한 형상물들은 다소간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할 정도로 유치하였다. 요즘 개념으로 보면 나름 테마 파크를 조성한 것인데.
맹강녀 사당. 만고에 향기가 전해진다는 현판이 보인다.
다시 이별의 시간이 왔다. 진황도측 안내를 맡은 가이드와 이별하고 다시 북경으로 향하였다. 중국도 이제는 처음 왔을 때의 중국이 아니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고속도로에는 차도 거의 없었고 특히나 승용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차도 많고 사고도 많이 나는 것 같다. 오는 길에 차가 좀 밀려 보니까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운전자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요즘 불고 있다는 마이카 열풍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 셈이었다.
고속도로에서의 사고. 경찰이 바삐 수습을 하고, 운전자의 상태가 궁금해지는 장면.
북경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으려면 시간적으로 많이 애매하다고 하여 중간 휴게소서 먹었다. 올 때 쉬었던 위티엔(玉田)휴게소였는데 맞은 편이었지만 우리나라의 휴게소처럼 건물 배치 등이 똑 같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동쪽 하늘에 희끄무레하게 달이 솟아오를 때였다. 식사는 이곳 휴게소의 자조찬(自助餐: 뷔페)으로 했는데, 휴게소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한 것이 처음이라는 색다른 경험을 빼면 별로 말할 게 없었다. 가이드가 나름 전화로 미리 조치를 해놓았지만 돈을 계산하기 전까지는 식판(접시가 아닌)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복무태도(서비스)가 아주 안 좋았다는 생각. 음식도 아주 짜거나 맹탕이거나…… 국수는 우리네 칼국수랑 맛이 거의 같았지만 맹탕이었는데 소스를 얹으니 짜서 못 먹을 정도였고…… 야튼 또 한번 잊지 못할 경험을 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일행들도 이것 때문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녁을 먹은 위티엔 휴게소[服務區]
상대적으로 어제보다 많이 일찍 도착했고 내일 출발시간은 늦추어져 시간이 좀 생긴 편이었다. 그래서 한 잔 안 할 수가 없다고들 난리다. 막상 술이 떨어져 호텔 주위의 술 파는 곳에 나가서 술을 사왔다. 맥주와 고량주로. 결과론이지만 새형님 같은 경우에는 본인 객실에서 호스트로 접대를 하다보니 그랬는지 약주가 과해져서(?) 다음날 관광에 차질을 빚을 정도까지 되어 고생을 많이 했다. 그곳에 계속 있기가 뭣한 용진을 재우고 돌아가 보니 모임이 파해졌다.
비교적 일찍 마친 일정 때문에 한 잔 하며 환담하는 일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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