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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기방장하던 청춘의 한때, 나는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질했다. 고향 사오싱(紹興)을 배경으로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루쉰이 “(사오싱을) 신이 노하여 홍수로 쓸어가 버려도 좋다”며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은 바와 같이,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에 대한 사랑과 증오, 애착과 결별의 모순된 감정은 많은 작가의 공통된 업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살게 되면서, 나는 그토록 선망했던 익명의 대도시 속에서 문득문득 바다가 `고파' 외롭고 괴로웠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막상 고향에 오면 답답함과 왜소함에 진저리를 치며 또다시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변덕과 가탈이 연민과 회한으로 변하는 분수령이 바로 대관령 정상의 신사임당 시비(詩碑)였다.
늙어 백발이신 어머님을 고향에 홀로 두고
홀로 한양길 가는 외로운 이 마음
돌아보면 북촌마을 아득하고
해 저문 산에 흰 구름만이 날아 내리는구나.
생트집을 잡아 부모님께 신경질을 부린 일, 나 자신의 내력과 과거를 부정하고픈 요망한 마음이 축축한 안개구름과 함께 고스란히 후회와 자책으로 밀려와 결국 눈물 한 방울을 찔끔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휙휙 쌩쌩 스쳐 지나는 곳이지만 `아흔아홉 굽이' 구절양장으로 일컬어지던 옛 대관령을 걸어 넘으며 사임당도 나처럼 몇 번이고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을 것이다.
딸만 다섯인 집안의 둘째로 태어나 `아들 노릇(기실 `자식 노릇'이라 말해야 옳겠지만)'을 하며 늙은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건사했던 사임당은 1541년 서른여덟 살이 되던 해에 마침내 고향 강릉을 떠나 한성으로 삶터를 옮긴다. 강릉에 머무르는 동안 사임당은 파주 출신 이원수와 결혼했고,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렀으며, 셋째 아들 이(珥:율곡)를 포함한 여섯 아이를 낳았다. 결혼한 다음다음 해 한성에서 시어머니 홍씨에게 신혼례를 드린 후 10년 동안을 파주와 강릉과 봉평으로 옮겨 다니며 살기는 했지만 사임당의 마음은 언제나 고향인 강릉 북평촌에 머물러 있었다.
푸른 동해와 울울창창한 수풀과 드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고향은 사임당에게 깊은 지성과 너른 감성, 씩씩하고 굳은 기개를 북돋우는 원천이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외조부 이사온 공의 교훈과 비록 여자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재능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 부모의 가르침은 사임당을 여느 규방 처자들과 전혀 다른 여성으로 성장시켰다. 안견의 화풍을 본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고, 유교의 경전에 통하고 글씨와 문장에 능숙했으며, 바느질과 자수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어린 시절 꽈리 나무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려 친척에게 선물했는데 그 친척 어른이 그림을 펼쳐 두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닭이 와서 그림 속의 메뚜기를 쪼아 버렸다는 이야기나, 동네 혼인잔치에 놀러 갔다가 빌려 입고 온 치마에 단술을 쏟아 난처해하던 아가씨를 위해 치마폭에 포도덩굴을 그려 얼룩을 감춰주었다는 이야기 등은 사임당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과 인간적인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탄생 오백 년이 막 지난 2007년 11월, 신사임당은 한국 여성 인물 사상 최초로 5만원권 지폐의 초상 인물로 선정되었다. 한국은행은 신사임당을 화폐 인물로 선정한 이유를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자녀의 재능을 살린 교육적 성취를 통하여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등의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발표한 사임당의 업적 부분에서는 `양성평등의식', `여성의 사회참여' 등과 별반 연관성이 없는 효성, 내조, 영재교육 등 이른바 `현모양처'의 덕목이 강조되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실제로 여성계 일부에서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신사임당의 화폐 인물 선정을 반대한다”는 온라인 서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마침 강릉 출생으로 `치마폭에 꿈을 그린 신사임당(창비, 2004)'이라는 어린이 책을 펴내기도 했던지라 내게도 의견을 묻는 요청이 쇄도했다. `자식에게는 어진 어머니이고 남편에게는 착한 아내'라는 말뜻 그대로의 현모양처라면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라는 말은 맞고도 틀리다. 스스로 지어 부른 사임당이라는 호가 성군의 대표 격인 중국 주나라 문왕의 훌륭한 어머니 태임을 배우고 본받는다는 뜻인 만큼,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을 포함한 4남 3녀의 자식들에게 사임당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어머니였다. 실로 사임당이 우리 역사 속에서 `희귀'하다시피 한 여성 인물로 우뚝 자리 잡은 데는 율곡 이이가 쓴 `어머니의 일대기'(先行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율곡은 아버지 이원수의 행장은 쓴 적이 없지만, 어머니 사임당에 대해서는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행장뿐만이 아니라 모친상을 당한 직후 슬픔과 허무감에 빠져 금강산에 들어가 칩거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처럼 사임당이 `현모'였음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틀에 꼭 들어맞는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율곡의 행장에서 드러나는 사임당의 모습은 놀랍게도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던 여성상에 부합하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임당은 남자 집안 중심의 중국식 친영례가 자리 잡아 가던 조선 중기에 전통 혼례 방식으로 오랫동안 고향에 머무르며 친정 부모를 봉양했고, 좋게 표현하자면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남자'지만 실제로는 학문이나 재능이나 의지의 측면에서 사임당에게 턱없이 부족했던 남편 이원수에게 여필종부하기보다는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다”하였다. 아내의 투기는 칠거지악의 하나로 꼽히지만 사임당은 병약한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을 예감하며 남편에게 자식들을 위해 새장가를 가지 말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모친이 편찮을 때 몰래 외조부의 사당에 가서 기도했다는 율곡의 일화로 미루어볼 때 사임당의 자식들 또한 부계보다는 모계에 더 큰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실제 모습을 알면 알수록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라는 전통 여성상에 묶일 수 없는 독립적이고 진보적이며 강한 자의식을 가진 여성임에 분명하다.
사임당은 사임당이다. 대학자 율곡의 어머니이자 남편 이원수의 아내이기 이전에 이미 사임당은 사임당이라는 확고한 인물로 존재했다. 물론 사임당은 그녀가 살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엄연한 계급적, 사상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임당의 일대기는 그녀가 그저 의존적인 봉건시대 여성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사임당은 자식들에게 교사로서 삶의 올바른 길을 제시했다. 자기보다 부족했던 남편을 격려하며 정도를 걷도록 북돋웠다. 그러면서도 시대의 질곡과 한계에 맞서 자신의 예술적인 재능을 살려냈다. 나는 그녀가 그려낸 나비와 곤충, 꽃과 들풀들을 보면서 세상 밖을 향해 솟구치지는 못하지만 작은 것들로부터 우주를 찾는 고상한 영혼과 강건한 여성성, 그리고 자존심과 자신감을 읽는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강원도 강릉을 대표하는 이 두 여성 인물은 삶의 내력과 행보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자들이다. 또한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을 사랑했고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감당했으며 숨 막히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도 아름다운 재능의 꽃을 피웠다. 그들이 남긴 시와 그림 등은 권력과 부와 발언의 기회를 모두 가졌던 남성들에 비하면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강강한 의지와 예민한 감성은 작고 여린 것들 속에서 크고 깊게 빛난다. 나는 그녀들과 같은 고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처럼 한없이 기쁘고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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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전문가 지상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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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이자 율곡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년)은 48세를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로서, 그리고 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였다.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상징하는 인물로 5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는 사임당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본다.
유성선 “매사 공평 … 전인교육의 모범 실현한 조선 초 실천적 교육자” 정문교 “율곡 선생 母 강조되면서 사임당의 재능·예술혼 이미지 축소” 정성희 “당대엔 산수화가로 큰 명성 … 모성·부덕의 상징 후대에 형성”
-우리 현실적 삶에서 제기될 수 있는 근본적 철학들과 연계해 신사임당이 추구한 효행과 예술 정신은 무엇인가요
유성선 강원대 교수=오늘날 신사임당은 예술인으로서, 율곡과 같은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 부모에게 효행을 다한 자식으로, 남편을 성심껏 내조한 현모양처로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여성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현대적 의미로는 그 시대가 요구했던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전통가치관인 효는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신사임당은 일찍이 유교의 경전에 통달하여 높은 학문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특히 기품있는 가문과 문향으로 이름난 강릉에서 자라났다. 더구나 자신의 아호를 사임당이라 지은 배경에서도 사임당은 자녀교육에 있어서 몸소 실천하며 가르침에 엄격했으며, 사임당이 당시 사대부 부인들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내훈'을 즐겨 읽어 모두 암송한 것으로 보아도 태교에서부터 양육에 이르기까지 몸소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임당이 자녀 4남 3녀를 모두 한결같이 이름난 학자요 철인으로 그리고 예술가요 뛰어난 부덕을 함양한 여인으로 길러낸 것을 보면 사임당의 모습과 인품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사임당은 그 천품과 자질이 순정하고 효성이 지극하면서도 매사 공평한 어머니로서 전인교육의 모범을 실현한 조선 초기의 실천적 교육자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초충도는 대부분 사임당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친근한 소재와 섬세하면서도 정감 있는 사임당의 표현기법은 조선 초기 중국으로부터 영향 받지 않은 우리의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조선 초기뿐 아니라 한국미술사에 있어서도 신사임당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녀는 우리나라 초충도의 선구자이며 최고로 손꼽히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에는 너무 작아 잘 볼 수도 없는 미물과 보잘 것 없고 결코 미적 대상물이 아닌 소재가 등장한다. 이는 미물에까지 남다른 애정을 지닌 사임당만이 가질 수 있는 `인(仁)의 마음'인 것이다. 이 `인(仁)의 마음'은 만물을 감싸고 배려하는 사단지심의 본체이며 사랑의 원리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물들의 움직임에서 자연의 섭리 및 생명의 경이로움을 몸소 실천했기에 가능한 그림세계였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이렇게 생명의 경이로움과 소박미, 그리고 여성다운 섬세함이 살아있는 작품으로서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예술정신이 특별했다고 할 수 있다.
-신사임당을 다시 보기 위해 무엇을 살펴야 봐야 하나요
정문교 율곡평생교육원장=한국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으로 우리는 신사임당을 앞세운다. 여기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업적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율곡 선생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강조되면서 사임당의 재능과 예술혼, 교육자로서의 이미지가 상당 부분 축소된 면도 없지 않다.
일각에서는 신사임당이 율곡 선생의 어머니이기에 위대하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이는 그동안의 시대상이 다만 정숙하고 현숙한 여인의 이미지만 칭송하고 그 이미지만을 지속적으로 부각해온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신사임당이 태어나 살았던 시대는 조선이 개국하고 100여년 후부터 시작된 1498년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신사임당이 태어난 해인 1504년 갑자사화 그리고 1545년 을사사화까지 1551년에 세상을 떠난 신사임당은 이 시대를 몸소 지켜보고 그 혼란과 갈등의 격랑을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불안하고 가슴 아픈 일들이 권문세가는 물론 일반 국민에게도 그칠일이 없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시대의 소용돌이 속을 살아간다는 것은 사회는 물론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가치관의 혼란이나 사회동요도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어려웠던 시대를 온 몸으로 부딪치면서 여성의 몸으로 시대의 질곡을 깨치며 은근히 천시되던 여성의 지위를 세상이 놀랄 정도로 뒤바꿔 놓은 여인이 신사임당이다.
우리는 힘든 환경을 극복하고 율곡을 비롯한 7남매의 학문의 기초를 잡아주고 스스로 그림과 글씨, 자수를 익히고 시문을 남긴 의지와 불굴의 여인, 그리고 시대를 앞서 미래를 준비한 여인 신사임당이 남긴 지행(知行)의 가르침을 되새겨서 자신에게 놓인 환경과 여건을 굳센 의지와 실천으로 이겨내는 자랑스러운 후손이 되어야 한다. 신사임당은 현숙하고 시대에 순종만 한 나약한 이미지의 여인이기보다 의지와 소신의 여인, 용감하고 강건한 여인이었다.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부덕(婦德)의 상징으로서 존경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 없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세종 때 안견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의 산수화를 보면서 모방해 그렸고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할머니 최씨와 더불어 오죽헌에 살면서 아버지 신명화보다 시와 그림, 글씨 등을 외가를 통해 전수받았다.
사임당은 아들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현모양처로 인품과 재능을 겸비한 여성이다. 오늘날 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동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던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신씨의 그림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安堅) 다음가는 화가'라 했다.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모성과 부덕의 화신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사후 100년이 지난 17세기 중엽이다. 물론 사임당이라는 당호에는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뛰어난 부덕을 갖추었다고 일컬어지는 태임(太任)을 본받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때문에 사임당 스스로 훌륭한 어머니가 되고 싶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조선 유학을 보수화로 이끈 인물인 송시열(宋時烈)이 사임당의 그림을 찬탄함과 동시에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 이이를 낳았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면서 그녀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됐다. 더욱이 율곡이 후대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은 천재 화가로서의 유명세보다 그를 낳은 어머니로 만인의 칭송을 받기 시작했다.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더욱 올라 마침내 그녀는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다. 말하자면, 사임당의 이미지에서 갖고 있는 모성의 신화화는 당대에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생산되고 18세기 와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신령스런 천지의 기운을 받아 율곡을 잉태한 여성이었고,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통해 율곡을 기른 어머니 사임당으로 더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임당의 일생을 돌아보면, 현모양처 이전에 화가로서 그리고 효녀로서도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전통시대에 남성 지식인들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이었고, 따라서 화가라는 자기 자신의 일생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이 더 부각됐다. 이는 사임당을 부덕의 상징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게 한 긍정적 측면이 있으나, 한편으로 사임당의 정체성을 고정화했고, 다양한 렌즈로 그녀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앞으로 신사임당은 어떤 여성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는지, 그녀의 부덕보다는 화가로서 추구했던 한 여성으로서의 삶이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정리=김상태기자 stkim@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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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예술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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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해 `안견(安堅)의 다음에 간다' 평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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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초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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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 여섯 살 되던 해 신사임당이 친정인 강릉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대관령에서 지은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유대관령망친정시)'와 `어머니 그리워(사친)' 등은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그녀의 재능으로 미뤄 수많은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이 두 편의 시문과 낙구() 1편이 전부라고 한다.
사임당의 글씨 또한 유명한데 1868년(고종 5년) 강릉부사 윤종의가 사임당의 글씨를 판각해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적은 발문에는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말발굽과 누에머리(蠶頭馬蹄)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한 편의 해서(楷書)와 유명한 초서(草書) 6폭 병풍, 한 편의 초서와 4자의 전서가 전한다.
사임당의 그림은 풀벌레, 포도, 화조, 화초어죽(花草魚竹), 매화, 난초, 산수 등을 주된 화제(畵題)로 삼아 천재적인 재능을 선보였다.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고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했다고 할 정도로 사임당의 그림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섬세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 명종 때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했다.
오석기 기자 sgtoh@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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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을 만나러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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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 그 아름다움에 반해 조선 최고의 여류화가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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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북촌리 `오죽헌' 생가터
어린시절 신사임당이 뛰어 놀았을 경포호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면서 그가 태어난 오죽헌으로 향했다. 대관령이 한없이 높았을 조선시대, 강릉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돼 이곳을 찾은 선인들의 풍류가 느껴지는 듯했다.
신사임당이 보여준 예술적 재능과 감각은 이곳 강릉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법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사임당은 조선시대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또 현모양처였다. 아들 이이를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로 키워낸 인물이다.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인 인물로 선정될 만큼 존경받는 인물, 신사임당의 생가는 강릉 경포호를 앞에 둔 강릉시 북촌리 오죽헌(烏竹軒)이다. 오죽헌은 뜰 안에 검은 대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오죽헌은 입구에 연못이 있는 초충공원이 조성돼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자경문을 들어서면 오죽헌과 문성사가 맞이한다. 개인이 살던 가옥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그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워낙 깔끔하고 시원하게 정리가 돼 있어, 여유로움과 한가함마저 느껴졌다.
신사임당의 외조부 이사온의 집이었던 오죽헌을 무남독녀였던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부인이 상속받았다. 이씨부인이 나은 다섯 딸 가운데 둘째가 바로 신사임당이다.
조선초기 지은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 전승돼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별당)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됐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곳이고 바깥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곳인데, 바깥채의 툇마루 기둥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이 새겨져 있다. 오죽헌에는 강릉시의 시화이기도 한 사임당 배롱나무가 있다. 꽃피는 기간이 100일이나 된다고 해 백일홍이라고도 불린다. 이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이므로 나이를 합치면 600여년이 넘는다고 한다.
사임당과 율곡 모자가 어루만졌을 배롱나무는 율곡송 율곡매와 함께 오죽헌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랑채는 강릉지방 주택의 특징으로 커다란 문을 많이 두고 있어 동해 일출과 월출, 그리고 경포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신사임당의 예술적 감각이 자연스럽게 물들어 갔을 것이다. 장자 우선이던 조선 후기 상속제와는 달리 조선 전기는 모든 자녀에게 재산이 고루 분배되고 부부간에도 상속받은 재산을 따로 관리했다고 한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다섯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둘째 딸의 아들 율곡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기와집과 전답을 줬다. 권처균은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집 주위에 까마귀와 같은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고 했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오죽헌이 됐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오죽헌에 인접한 율곡기념관에 들어서니 풀과 벌레를 생동감 있게 묘사한 신사임당의 대표작 초충도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사물을 사실적으로 바라본 섬세한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7세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리며,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던 그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오죽헌의 별실인 몽룡실은 신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뜻 깊은 곳이다. 신사임당이 이곳에서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태몽을 꿨다고 해서 몽룡실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몽룡실은 조선 전기 민가의 별당에 해당하는 건축물로 4면을 굵은 댓돌로 높이고 그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배치, 네모 기둥을 세운 모습을 하고 있다.
1788년 정조가 율곡의 `격몽요결'과 어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를 직접 보고 격몽요결 서문과 벼루 뒷면에 글씨를 써 돌려보낸 `어제어필(御製御筆)'의 글귀를 보고 있자니 신사임당이 몽룡실 마루방에서 율곡 이이에게 글을 가르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 내어 / 공자의 도를 본받아 / 널리 베풂이여 / 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 / 구름은 먹에 뿌려 / 학문은 여기 남아 있구려”
-어제어필
1522년 중종 17년에 이원수에게 출가한 신사임당은 출가 후에도 그대로 오죽헌인 친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중 그해 11월 부친과 사별하게 되면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 시댁으로 돌아간다. 이후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했고,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10여년을 보내다가 38세 때 강릉에 있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시 서울로 가게 되면서도 이곳을 몹시 그리워했다고 전한다.
신사임당은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그녀의 생애에는 고향 강릉과 부모에 대한 생각이 깊게 새겨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자락에는 신사임당의 묘역이 있다. 남편 이원수와 합장됐으며, 아들 율곡 이이의 묘도 그곳에 함께 있다. 자운산 신사임당의 묘역에서 300㎞나 떨어져 있는 이곳 강릉 오죽헌에는 여전히 사임당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듯 했다.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연마는 千里家山萬疊峰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歸心長在夢魂中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寒松亭畔孤輪月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鏡浦臺前一陣風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 모이락 沙上白鷗恒聚散
고깃배는 바다위로 오고 가리니 海門漁艇任西東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何時重踏臨瀛路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更着斑衣膝下縫
-`어머니 그리워(思親)'
김상태기자 stkim@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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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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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들쥐 그린 `초충도' 등 그림 40여폭 전해지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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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신사임당의 산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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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은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탐독하고 시와 문장에 능했다. 그림에도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닌 신사임당의 유품을 살펴보면 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수박과 들쥐를 그린 `초충도'를 비롯해 포도, 꽃과 새, 고기와 대나무, 매화, 난초, 산수 등을 그린 채색화와 묵화 등 신사임당의 그림 40여 폭이 전해지고 있다. 신사임당의 산수도는 종이에 채색으로 그려진 두 폭의 그림으로 각 폭에는 사임당의 화제시가 적혀 있는데 한 폭은 맹호연과 이백의 시가 적혀 있다.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사임당 초충도 병풍은 오이와 메뚜기, 물봉선화와 쇠똥벌레,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가선화와 풀거미, 봉선화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을 그린 여덟 폭의 그림이다. 이 병풍은 사임당의 섬세한 필치와 구도로 그의 예술적 재능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맏딸의 이름을 `매창'이라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한 신사임당은 고매도, 묵매도 등 여러 매화 그림도 그렸다. 신사임당은 글씨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현재 흘려 쓴 글씨인 초서 6폭과 똑바로 쓴 글씨인 해서 1폭만 남아 전해지고 있다.
초서로 쓴 오언절구의 6폭 병풍을 보면 그가 그림과 함께 글씨에도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사임당이 정성들여 쓴 글씨 하나하나에서 고상한 정신과 기백, 품덕을 느낄 수 있다.
김상태기자 stkim@kw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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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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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년(연산 10년) 10월29일 출생=현재 강릉시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에서 신명화공의 둘째 딸로 태어나다.
△1510년(중종 5년) 7세=어려서 외조부 이사온의 교훈과 어머니의 훈도 아래서 자랐다. 안견의 화풍을 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유교의 경전에 통하고 글씨와 문장에도 능할 뿐 아니라 자수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다.
△1516년(중종 11년) 13세=부친 신명화공이 진사 시험에 오르다.
△1522년(중종 17년) 19세=덕수이씨 원수공에게 출가하다. 출가 후 그대로 친정에 머물러 있던 중 11월 친정 부친이 별세하다.
△1524년(중종 19년) 21세=서울에서 맏아들 선이 태어나다.
△1529년(중종 24년) 26세=맏딸 매창이 태어나다.
△1536년(중종 31년) 33세=이른 봄 밤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다 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다. 다시 그해 12월 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율곡 선생이다.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고 한다.
△1541년(중종 36년) 38세=강릉 친정에서 어머니를 하직하고 서울로 올라가며 대관령에서 시를 읊다. 서울 수진방(지금의 청진동)에서 시집의 모든 살림을 주관하다. 넷째 아들 우가 태어나다. 서울에 살며 홀로 계신 친정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읊다.
△1550년(명종 5년) 47세=여름에 부군 이원수공이 수운판관이 되다.
△1551년(명종 6년) 48세=5월17일 새벽, 병상에서 2,3일 만에 홀연히 별세하다. 세곡을 운반하는 일로 평안도에 갔던 부군과 두 아들은 그날 서강에 도착해 부인의 별세 소식을 듣다.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사 지내다. | |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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