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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따면서 김남주
감을 따면서
감을 따면서 푸른 하늘에
초가을의 별처럼 노랗게 익은 감을 따면서
두 발의 연장인 사닥다리의 끝에 서서
두 손의 연장인 간짓대의 끝으로 감을 따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의 뿌리가 있었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짐승과는 구별되는
나는 감 따는 노동을 중지하고
인간의 대지로 내려왔다 직립보행의 동물인 나는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감나무와 감나무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그렇다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은 노동이었다
수천년 수만년 수백만년의 노동이었다
숲과 강과 자연과의 싸움에서 노동 속에서
인간은 짐승과는 다른 동물이 되었다 인간이 되었다
보라 감을 쥐고 있는 이 상처투성이의 손을
손과 발의 연장인 이 간짓대와 사닥다리를
간짓대와 사닥다리를 깎고 잘랐던 저 낫과 톱을
낫을 갈았던 저기 저 숫돌까지를 보라
노동의 손자국이 나 있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
노동의 과실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
보라 내가 지금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 평상을
이 평상 위에 놓은 네 발 달린 밥상과 밥상 위의 밥을
보라 내가 짓고 있는 저 돼지막과
내가 기거하고 있는 저 초가집과
지붕 위에 우뚝 솟은 검은 굴뚝과
굴뚝에서 하얗게 피어 올라 하늘 끝으로 사라지는 연기를
보라 장독대를 그 위에 가득 찬 옹기그릇을
옹기에 가득가득 담겨져 진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는 간장과 된장을
어느 것 하나 노동의 결실 아닌 것이 있느냐
모두가 모든 것이 노동의 역사 아닌 것이 있느냐
뿐이랴 내가 입고 있는 이 내의도
내가 벗어 놓은 저 저고리의 단추도 노동의 과실이자 옷의 역사다
내가 만지고 있는 이 장딴지의 굳은살도
굽혔다 폈다 할 수 있는 이 팔의 뼈도
그리고 내 가슴에서 뛰고 있는 이 심장의 피도
수천년 수만년 수백만년의 노동이 창조한 물질이다
노동의 역사이고 인간의 역사다 그리고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이 펜도
펜 끝에서 흐르는 언어의 빛도 종이 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말의 행렬도 하나가
하나같이 노동의 결정이고 인간 역사의 기록이다
이제 확실해졌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한 장본인이었다 짐승과는 다르게
살과 뼈와 피를 빚어낸 마술이었다 기적이었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출발점이고 과정이고 종착역이다
한마디로 끝내자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다
노동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의 짐승에 가까워진다
이제 분명해졌다 적어도 나에게는
나의 가장 가까운 적은 노동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이다
아니다 노동에서 이미 멀어져 버린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된장 속의 구더기다 까맣게
감잎을 갉아먹는 불가사의한 벌레다
쌀 속의 좀이고 어둠 속의 쥐며느리이고 축축하고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 서식하는 이고
황소 뒷다리에 붙어 있는 가증스런 진드기이고
회충이고 송충이고 십이지장충이고 기생충이고 흡혈귀다
인간의 동지는 노동 그 자체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고목 김남주
고목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 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
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꽃이여 피여 이름이여 김남주
꽃이여 피여 이름이여
내란의 무기 위에 새겨진
피의 이름
시가전의 바리케이드에서 피어나는
꽃의 이름
자유여 나는 부르지 않으리
함부로 그대 이름을
그대가 한 발짝 전진하면
그 뒤에는 피가 강물이 되어 흐르고
그대가 한 발짝 물러나면
그 앞에는 시체가 산이 되어 쌓이고
오 자유여 무서운 이름이여
나는 부르지 않으리 그대 이름을 함부로
내란의 무기 위에서 시가전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피의 꽃으로 내가 타오르는 그 순간까지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나의 꿈 나의 날개 김남주
나의 꿈 나의 날개
하늘을 나는 새가 나를 비웃네
날개도 없는 주제에 내 꿈의 높이가 하늘에 있는 줄 알고
그 꿈 키우다가 땅에 떨어져 이런 신세 철창 신세 면치 못한 줄 알고
그러나 웃지 마라 새야
십년을 하루같이 벽과 벽 사이에
갇혀
오가도 못하는 이 사람을 보고
팔다리 육신이야 이렇게 기막히게 철창과 철창 새에 끼여
옴짝달짝 못한다만
나에게도 날개가 있단다 꿈의 날개가
바람의 속도로 별과 달의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무기의 꿈이 있고
햇님의 은총을 받아 기름진 대지에
달무리의 원을 그리며 씨를 뿌리고
만인의 입술에 가을의 결실을 가져다주는
노동의 날개가 있단다
그러나 새야
하늘 높이에서 나를 비웃고
철창에 그림자를 떨어뜨리며 비켜가는 매정한 새야
나의 꿈은 너처럼 먼 데 있지 않단다
나의 날개는 너처럼 높은 데 있지 않단다
나의 꿈 나의 날개는
지금 이곳에 있단다 지상에 있단다
노동의 팔이 닿을 수 있는 인간의 대지에 있고
발을 굴러 산맥과 함께 강과 함께 전진할 수 있는 벌판의 싸움터에 있단다
가장 높아야 내 꿈의 날개는
하늘 아래 첫동네 백두산에 있단다
그 산기슭에서 강가에서 숲 속에서
재롱을 피우며 자작나무 가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다람쥐의 꼬리에 있단다
팔팔하게 뛰노는 붕어의 지느러미에 있단다
무지개 끝을 달리는 청노루의 뒷다리쯤에 있단다
다람쥐와 함께 붕어와 함께 청노루와 함께
춤과 노래로 밤을 지새는 온갖 잡새와 함께
인간세계를 이루고 사는 작은 농장에 있단다
무르익은 노동의 과실 맑은 물과 맑은 공기
하늘의 별과 산에 들에 만발한 꽃과
인간에게 공기와도 같은 것
밀이며 옥수수며 남새며 이슬이며 집이며
인간에게 기본적인 이런 것들이 너나없이 만인의 입으로 가슴으로
골고루 들어차는 그런 세상 바다에 있단다
가장 높아야 내 날개의 꿈은
기차로 한나절쯤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청천강 푸른 물결 위에 있단다
그 물결 위에 아롱진 이름이여 아침의 나라여
ꡒ조국은 하나다ꡓ에 있단다
ꡒ조국은 하나다ꡓ에 있단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나 자신을 노래한다 김남주
나 자신을 노래한다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선사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자랑이라면 부자들로부터 재산을 훔쳐 민중에게 선사하려 했던 나 또한 민중의 자랑이다
나는 듣고 있다 감옥에서
옹기종기 참새들 모여 입방아 찧는 소리를
들쑥날쑥 쥐새끼들 귀신 씨나락 까는 소리를
ꡒ왜 그런 짓을 했을까, 왜 그렇게 일을 했을까
좀더 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경박한 짓이었어
그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한 10년 후퇴되었어
한마디로 미친 놈들이었더 미친 짓이었어
이에 상당한 책임을 그들은 져야 할 거야ꡓ하는 소리를
나는 묻고 싶다 그들에게
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 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들은 척척박사이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묻겠다
불을 달라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 무릎 꿇고 구걸했던가
바스티유 감옥은 어떻게 열렸으며
센트 피터폴 요새는 누구에 의해서 접수되었는가
그리고 쿠바 민중의 몬까따 습격은 웃음거리로 끝났던가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고통으로 끝났던가
루이가 짜르가 바티스타가 무자비한 발톱의 전제군주가
스스로 제 왕궁을 떠났던가
팔레비와 소모사와 이 아무개와 박 아무개가
제 스스로 물러났던가
묻노니 그들에게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자기 희생 없이 어떻게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단 말인가
혁명은 전쟁이고
피를 흘림으로써만이 해결되는 것
나는 부르겠다 나의 노래를
죽어가는 내 손아귀에서 칼자루가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
나는 혁명시인
나의 노래는 전투에의 나팔소리
전투적인 인간을 나는 찬양한다
나는 민중의 벗
나와 함께 가는 자 그는
무장이 잘되어 있어야 한다
굶주림과 추위 사나운 적과 만나야 한다 싸워야 한다
나는 해방전사
내가 아는 것은 다만
하나도 용감 둘도 용감 셋도 용감해야 한다는 것
투쟁 속에서 승리와 패배 속에서 그 속에서
자유의 맛 빵의 맛을 보고 싶다는 것 그뿐이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달 김남주
달&
비수에 꽂힌 달
비수에 꽂혀 살해된 처녀의 달
비수에 꽂혀 비수에 꽂혀
학살된 아이의 달
달이여 피 묻은 피 묻은 오월의 달이여
노래해주마 당신들의 죽음을
시인인 내가 기억해주마
이방인의 침략처럼
원주민의 학살처럼
파괴당한 오월의 사자들이여
내가 노래해주마 기억해주마
가로수와 함께 쓰러진 당신들의 육체를
아침의 창살에서 교살당한 당신들의 미소를
압제자의 총알 때문에 벌집투성이가 된 당신들의 가슴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동지여 김남주
동지여
뜨거운 아랫도리 억센 주먹의 이 팔팔한 나이에
동지여,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사슬 묶여 쇠사슬 벽 속에 갇혀
목청껏 노래하고
힘껏 일하고
내달리며 전진하고 기다려 역습하고
피투성이로 싸워야 할 이 창창한 나이에
쓰러지고 일어나면서 승리하고 패배하면서
빵과 자유와 피의 맛을 보아야 할
이 나이에 이 팔팔한 나이에 이 창창한 나이에
서른다섯의 이 환장할 나이에
긴 침묵으로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동지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모래알 하나로 김남주
모래알 하나로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첫술에 배부르랴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없어라 많지 않아라
모래알 하나로 적의 성벽에
입히는 상처 그런 일 작은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답니다 김남주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답니다
암, 그래야지요 그래야 쓰고 말고요
헌법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걸요
부잣집 침대 위에서 태어난 아기나
염천교 다리 밑에서 태어난 아기나
똑같이 평등하게 태어나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답니다
암, 그래야지요 그래야 쓰고 말고요
헌법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걸요
집 없이 평생을 떠도는 도붓장수 박서방이나
대궐 같은 기와집에 사는 왕서방이나
허가 없이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서는 안 되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답니다
암, 그래야지요 그래야 쓰고 말고요
헌법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걸요
물 쓰듯 돈을 쓰고도 남아도는 재산 때문에
고민이 태산같은 자본가 장아무개나
무노동에 무임금이라
다음날 아침이면 다섯 식구 끼니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은 노동자 김아무개나
언제라도 아무 데라도 나라 안팎을
여행할 자유가 있으니까요
그뿐이 아니랍니다 자유대한에서는
예 예 연발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에게는
다문 입에 쌀밥이 보장되고
아니오 아니오 목을 세워 고개를 쳐든 사람에게는
벌린 입에 콩밥이 보장된답니다
참 좋은 나라지요 우리나라
자유 대한 길이길이 영원히 빛나라지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벗에게 김남주
벗에게
좋은 벗들은 이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네
살아 남은 이들도 잡혀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있거나
지하의 물이 되어 숨죽여 흐르고
더러는 국경의 밤을 넘어 유령으로 떠돌기도 하고
그러나 동지, 잃지 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지금은 시련을 참고 견디어야 할 때,
심신을 단련하게나 미래는 아름답고
그것은 우리의 것이네
이별의 때가 왔네
자네가 보여준 용기를 가지고
자네가 두고 간 무기를 들고 나는 떠나네
자네가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준 말
―참된 삶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 향한 끊임없는 모험 속에 있다는
투쟁 속에서만이 인간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혁명은 실천 속에서만이 제 갈 길을 바로 간다는
―그 말을 되새기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병사의 밤 김남주
병사의 밤
눈이 내린다 삼팔선의 밤에
하얗게 내린 눈을 북풍한설에 날리고
바람은 울어 바람은 울어
가시철망 분단의 벽에서 찢어진다
내 귀에 와서 내 고막에 와서 아픔으로 터진다
눈은 밤새도록 내릴 것 같은 눈은
북을 향해 치달리다 허리가 끊긴 철길 위에도 내린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총을 메고 북을 향해 서 있는 보초병의 철모 위에도 내린다
눈은 이제 바람이 자고 소리없이 쌓이는 눈은
병사와 나를 잇는 뜨거운 시선 위에도 내린다
병사여 나는 불러 본다 그대를
어디서고 볼 수 있는 내 이웃의 얼굴 같기에
병사여 나는 불러 본다 그대 이름을
부르면 형 어쩐 일이오 하고 반겨올 것 같기에
서울로 팔려 간 서림이의 작은오빠같고
빚에 눌려 홧김에 농약을 마셨다는 서산 마을 농부같고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은 다정한 동무같기에
병사여 그대를 믿고 나는 물어 본다
그대가 지키고 있는 이 밤은 누구의 밤이냐
호미 댈 밭 한 뙈기 없어
이 마을 저 마을로 품팔이하고 다니는 그대 어머니의 밤이냐
일자리 빼앗기고 거리에서 거리로
허공에서 허공으로 헤매는 그대 누이의 밤이냐
누구의 밤이야 그대가 지키고 있는 이 밤은
미제 총을 메고 그대가 지키고 있는 이 밤은
그대 나라의 국경선이냐, 그렇다면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국경선이냐 저 삼팔선은
병사여 그대를 알고 나는 물어본다
그대는 누구의 밤을 지키는 용사냐
고향에 돌아가면 일구어야 할 땅 한 뙈기 없는 병사여
제대하면 누이를 찾아 가난의 거리를 헤매야 할 병사여
그대가 지켜야 할 땅은 재산은 어디에 있느냐
남의 나라 총을 메고 이 밤에 삭풍의 밤에
북을 향해 그대가 겨누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대에게도 저 너머 삼팔선 너머 조선의 마을에
자본가가 이를 가는 노동자의 세계가 있느냐
그대에게도 저 너머 삼팔선 너머 조선의 도시에
아메리카합중국이 초토화시키고 싶은 증오의 대상들이 있느냐
그대에게도 저 너머 삼팔선 너머 조선의 금수강산에
압제자들이 찢어 죽이고 때려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느냐
눈이 내린다 삼팔선의 밤에
하얗게 내린 눈은 북풍한설에 날리고
바람은 울어 바람은 울어
가시철망 분단의 벽에서 찢어진다
내 귀에 와서 내 고막에 와서 아픔으로 터진다
눈은 밤새도록 내릴 것 같은 눈은
눈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눈은 이제 바람이 자고 소리없이 쌓이는 눈은
병사의 철모 위에도 내리고 내 발목 위에도 내리고
병사와 나를 잇는 뜨거운 시선 위에도 내린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불꽃 김남주
불꽃
활
불꽃이 타오른다
어둠이 싫어 어둠의 나라가 싫어
무등산에서 팔공산에서 태종대에서
활 활 활
불꽃이 타오른다
활
성조기를 살라먹고
반미의 불꽃이 타오른다
활
성조기를 살라먹고
반미의 불꽃이 타오른다
활
식민지의 하늘을 붉게 붉게 물들이고
해방의 불꽃이 타오른다
보라 이 불꽃을
이 불꽃에 놀라 개판 소판 재벌들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튈거나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튈거나
갈팡질팡 허둥대는 저 꼬락서니들을 보아라
보라 이 불꽃
이 불꽃에 놀라 이방인과 그 앞잡이들
경찰을 불러 곤봉으로 끌거나
병정을 풀어 군화발로 끌거나
안절부절 못하는 저 꼬락서니들을 보라
활
불꽃이 타오른다
곤봉을 만나면 장작으로 패서 먹고
활
불꽃이 타오른다
군화를 만나면 가죽으로 삶아먹고
활 활 활
어둠이 싫어
어둠의 나라 억압의 그늘이 싫어
봉기의 불꽃이 타오른다.
활
불꽃이 타오른다
부자를 만나면 기름진 배때기
증오의 불길로 튀겨먹고
활
불꽃이 타오른다
흰둥이 깜둥이 이방인을 만나면
저주의 낙인 까맣게 하얗게 태워먹고
활 활 활
예속이 싫어
예속의 나라 식민지의 하늘이 싫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사랑은 김남주
사랑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사상에 대하여 김남주
사상에 대하여
새로운 사상은
썩고 병들고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어떻게 손을 써 볼 수가 없는 그런 세상에서 태어난다
이를테면 동학이 그러했다 반봉건싸움에서
새로운 사상은 그 초년에는
거리와 시장의 우스갯소리가 되기도 하고
사문난적이라 박해의 과녁이 되기도 한다
반역의 씨앗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그것을 멀리하고
굶주린 이들이 그것을 가까이 한다
사상은 노동의 대지를 그 밭으로 삼는다
처녀들은 깊숙한 곳에 호미로 그것을 파묻고
사내들은 억센 주먹으로 그것을 지킨다
밤이 그들의 옷이고 별이 그들의 미래다
고난의 긴 세월 낡은 껍질과의 싸움에서
새싹의 기운은 이기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지천으로 그 가지를 뻗는다
사상의 꽃이 아름다운 것은
민중의 피로 그것이 개화하기 때문이다
그 열매가 아름다운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만인의 입으로 그것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손 김남주
손
이 손을 보게 친구
얼풋 보아 그 생김새가 짚불에 구부러진 갈퀴 같네
거칠기는 옹이와 상처투성이로 늙어빠진 상수리나무같고
삭풍에 사이가 벌어진 잔솔밭의 송꽁이처럼 꺼끌꺼끌 하네
나는 알고 있네 이 손의 주인과 그 내력을
열여섯 살까지였던가 웃마을 고씨집의 꼴머슴으로 잔뼈가 굵었고
스무 살 훨쩍 넘어서까지 저 아래 기와집 상머슴이었다네
밤과 낮의 눈코뜰 새 없는 노동이 그의 하루하루였고
제 앞으로 땅 한 뙈기 가지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네
그 꿈은 이루어졌다네 나이 서른둘에
늦은 장가와 함께 이루어졌다네
새우배미 열두 다랑치를 합배미하여 서 마지기 논배미로 만들었고
그는 그것을 이름하여 구천지기라 했다네
성씨가 구씨인데 봉천지기였기 때문이라네
정금나무와 산돌로 깡깡한 주인집 야산을 파헤쳐
네모반듯한 산밭을 하나 일구었는데 3년 전에는 그것을
제 앞으로 문서에 올려 놨다네 으흠
자네는 볼 수 있을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면
일 분 일 초를 가만있지 못하는 이 손을
금방까지 싸리비로 안마당을 쓸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손은 뒤안에서 장작을 패고
소죽솥에 불을 때고 있었는데 또 어느새
변소에 가서 합수와 보릿대를 이겨 참거름을 만드네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한시도 일하지 않으면 배겨내지 못하는 이 손
이 손은 싸운다네
우리들의 밥상에 오르는 그날 그날의 양식을 위하여
봄이면 살을 에이는 눈녹이바람과 싸우고
씨 뿌려 병충해가 생기면
죽음의 농약과 함께 싸운다네
가뭄을 만나 어제까지는 물과 싸우는가 하면
홍수를 만나 오늘은 무너져 내린 둑과 싸우고
다 자란 자식 고개 숙인 황금의 이삭을 부둥켜안고
가을이면 태풍과 싸운다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네 아직
이 손의 주름이 부자들의 웃음처럼 펴지는 것을
제 노동의 주인이 되어 이 손이
제 입으로 쌀밥을 가져가는 것을
노동의 기쁨이 되어 이 손이
춤이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을
제 노동의 계산이 되어 이 손가락이
나락금을 셈하는 것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네
나는 묻겠네 친구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한낮의 이랑 속에서 배추포기를 키우는 사람이
가장 싱싱한 채소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
척박한 땅에 사과나무를 심고 땀을 흘리는 사람이
과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먹어서는 안 되는가
지성으로 자식보다 귀하게 소를 키운 사람이
겨울의 화롯가에서 등심구이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
연장 대신에 이 손에 무기를 쥐어 주고
그 무기를 내 시가 노래해서는 안 되는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 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 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시의 요람 시의 무덤 김남주
시의 요람 시의 무덤
과거의 시는 표현이 내용을 능가했다. 그러나 미래의 시는 내용이 표현을 능가할 것이다 ―마르크스
당신은 묻습니다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되었느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투쟁과 그날그날이 내 시의 요람이라고
당신은 묻습니다
웬놈의 시가 당신의 시는
땔나무꾼 장작 패듯 그렇게 우악스럽고 그렇게 사납냐고
나는 이렇게 반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싸움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냐고
하다 보면 목청이 첨탑처럼 높아지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도 나오는 게 아니냐고
저쪽에서 칼을 들고 나오는 판인데
이쪽에서는 펜으로 무기삼아 대들어서는 안 되느냐고
세상에 어디 얌전한 싸움만 있기냐고
제기랄 시란 게 무슨 타고난 특권의 양반들 소일거리더냐고
당신은 묻습니다
시를 쓰게 된 별난 동기라도 있느냐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혁명이 나의 길이고 그 길을 가면서
부러진 낫 망치 소리와 함께 가면서
첨으로 시라는 것을 써보게 되었다고
노동의 적과 싸우다 보니 농민과 함께 노동자와 함께
피 흘리며 싸우다 보니
노래라는 것도 나오더라고 저절로 나오더라고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 시라는 것을 억지로 써 본 적이 없다고
내 시의 요람은 안락의자가 아니고 투쟁이라고 그 속이라고
안락의자야말로 내 시의 무덤이라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어머님께 김남주
어머님께
일제 30여년 동안
낫 놓고 ㄱ자도 모르셨던 어머니
미제 40여년 동안
호미쥐고 ?표도 모르시는 어머니
일자무식 한평생으로
자식사랑밖에는 모르시는 어머니
지금 나처럼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속자라 부르지 마세요
양심수라 부르지도 마세요
정치범이다 뭐다 시국사범이다 뭐다 그런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세요
그냥 애국자라 하세요
일제 30여년 동안
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 징용통지서밖에 없으셨던 어머니
미제 40여년 동안
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 세금통지서밖에 없으신 어머니
일자무식 한평생으로
글 한 줄 쓰신 적 없고 편지 한 줄 읽으신 적 없어도
자식사랑은 한으로 쌓여 가슴이 막히신 어머니
지금 나 같은 사람을
감옥에 처넣고 있는 사람들을
대통령이라 부르지 마세요
독재자라 부르지도 마세요
보수다 뭐다 반동이다 뭐다 그런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세요
그냥 매국노라 하세요
달리 부르는 놈이 있으면 그 놈 주둥이를 호미로 찍어 주세요
달리 쓰는 놈이 있으면 그 놈 손모가지를 낫으로 잘라 주세요
지금 이 나라에는
보수와 진보가 있는 게 아니어요
우익과 좌익이 있는 게 아니어요
매국노와 애국자가 있을 뿐이어요
그 중간은 없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어머니.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
옛 마을을 지나며
찬 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 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우익 쿠테타 김남주
우익 쿠테타
쿠데타는 언제 일어나는가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풀들이 바람에 일어 고개를 쳐들고
회복기의 자유가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리고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을 때 일어난다
창문을 열면 거리마다 무거운 군화발 대신에
오가는 시민들의 가벼운 발자욱 소리가 신선하고
이제 아무도 제 이웃의 거동을 의식하지 않고
사라져 없어진 총칼의 그림자도 의식하지 않고 때마침
머리 위를 날으는 새의 자유를 노래하고 그 높이와
한계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 쿠데타는 일어난다
그렇다 쿠데타는 자유를 적으로 삼고 일어난다
가진 자들이 강요한 생활의 질서 그 가위눌림으로부터
긴긴 밤의 악몽으로 깨어나 가난뱅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이마를 맞대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꿈꾸기 시작했을 때
그 꿈의 번성을 위하여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조합의 결성과 동지의 단결을 호소하고 농촌에서는
농부들이 숫돌에 낫을 갈며 갑오년의 그날을 떠올리고
당돌하게도 부자들의 독점물이었던 통일문제까지 가난뱅이들 좋을 대로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을 때
그때 소위 쿠데타라는 것은 일어난다
이를테면 이럴 때 쿠데타는 일어난다
노동과 가난의 거리에 그날그날의 자유가 넘치고
그 넘침의 자유가 착취의 거리까지 흘러들어
부자들의 발등을 적시고 무릎까지 배꼽까지 차올라
목에까지 차올라
부자들의 재산과 생명이 위험수위에 찼을 때
바로 그때 우익 쿠데타는 일어나는 것이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원숭이와 설탕 김남주
원숭이와 설탕
참 우습기도 하다
인디언들이 원숭이를 잡는 법은
그들은 이렇게 원숭이를 잡는다는 것이다
코코야자 열매를 따서 옆구리에 구멍을 판다
원숭이의 빈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하게 파서
거기에 원숭이가 제일 좋아하는 설탕을 넣고
높다란 나뭇가지에 그것을 매달아놓는다
그러면 영락없이 원숭이가 와서 잽싸게
구멍에 손을 찔러 넣고 덥석 설탕덩어리를 움켜쥔다
그러나 설탕덩이를 거머쥔 원숭이의 주먹손은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지지 않는다
뻘뻘 땀이 흐르도록 팔이 빠지도록 잡아당겨도 빠지지 않는다
설탕을 놓아 버리면 쉽게 손을 뺄 수 있으련만……
그러나 어찌 그 좋은 것을 감히 포기하랴
사람이 접근해서 손짓 발짓으로 위협을 해도
막대기로 빨간 똥구녁을 쑤셔대도 막무가내인 것이다
결국 인디언이 쏜 화살에 맞고서야 죽고 나서야
주먹을 펴고 설탕을 놓는다는 것인데
참 우습기도 하다
원숭이가 움켜쥔 설탕을 놓는 것 하고
후진국의 대통령이 움켜쥔 권력을 놓는 것 하고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김남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원제 :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어느 백성 이야기
전쟁이 터지고 우리는
쌈 터로 끌려갔지요
앞장 세워져 맨 앞 부자들의 총알받이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두고
나라 국경 지키는 용사라 했지요
쌈질이 끝나고 고향은 쑥밭이 되고
우리는 건설대에 끌려 갔지요
소나 말이 되어 게거품을 흘렸고
사람들은 그런 우리들을 두고
나라살림 일으키는 역군이라 했지요
겨울이 오고 한파가 밀어 닥치고
굶주림과 추위 혹사에는 더는 못 견뎌
에헤라 가더라도 내일 삼수갑산 들고 일어섰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감옥으로 끌려 갔고
사람들은 그런 우리들을 두고
나라 팔아 먹은 역적이라 했지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장난 김남주
장난
감방
문턱 위에
걸쳐 있는
다람쥐 꼬리만큼한 햇살
삭둑삭둑 가위질하여
꼴깍꼴깍 삼키고 싶다
언 몸 봄눈 녹듯 녹을 성싶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전향을 생각하며 김남주
전향을 생각하며
총칼의 숲에 싸여
눈감고 아웅하는 꼭두각시놀음
나는 나의 최후를 놈들의
법정에서 장식하고 싶지 않았다
놈들이 파 놓은 굴속 같은 방
나는 내 최후의 그림자가 감옥의
벽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동지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놈들의 총칼 앞에 무릎이라도 꿇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혁명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허리 굽혀 놈들의 발밑에 엎디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살아남아 대지와
민중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한번 사랑을 껴안는 것이었다
보기 흉한 패배에
옛 상처의 무기에 입맞춤하고
다시 한번 칼자루를 잡는 행복으로
자유를 잡아보는 것이었다
서른일곱의 어쩌지도 못하는
이 기막힌 나이 이 환장할 청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덤을 지키는 지조 높은 선비는 아니다
나에게는 벗이여
죽기 전에 걸어야 할 길이 있다
싸워야 할 사랑이 있고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있다
기대해다오 나의 피 나의 칼을
기대해다오 투쟁의 무기 나의 노래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조국은 하나다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 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양키 점령군의 탱크 앞에서
자본과 권력의 총구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
이제 나는 쓰리라
사람들이 주고받는 모든 언어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탄생의 말 응아응아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말 아이고아이고에 이르기까지
조국은 하나다 라고
갓난아기가 엄마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말
엄마 엄마 위에도 쓰고
어린아이가 어른들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행동
아장아장 걸음마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나는 또한 쓰리라
사람들이 오고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
기쁨과 슬픔을 나눠 가지는 인간의 길
오르막길 위에도 쓰고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고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오 조국이여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여 이름이여
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의 눈길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당신이 맨 먼저 보게 되는 천정 위에도 쓰고
눈을 감으면 한밤에
맨 나중까지 떠 있는 샛별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축복처럼
만인의 배에서 차오르는 겨례의 양식이여
나는 쓰리라 쌀밥 위에도 쓰고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바다에 가서 쓰리라 모래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파도가 와서 지워 버리면 그 이름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세월이 와서 지워 버리면 그 이름
가슴에 내 가슴에 수놓으리라
아무리 사나운 자연의 폭력도
아무리 사나운 인간의 폭력도
감히 어쩌지 못하도록
누이의 붉은 마음의 실로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외치리라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벽에 대고
조국은 하나다 라고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
삼팔선에 대고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식민지의 낮과 밤이 쌓아 올린
분단의 벽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압제와 착취가 날조해낸 허위의 벽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내걸리라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 높이에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의 손가락 끝도
가난의 등에 주춧돌을 올려 놓고 그 위에
거재를 쌓아 올린 부자들의 빌딩도
언제고 끝내는 가진 자들의 형제였던 교회의 첨탑도
감히 범접을 못하도록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
자유를 사랑하고 민중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남과 북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조선의 딸 김남주
조선의 딸
저기 가는 저 큰애기를 보아라
새참으로
막걸리 든 주전자를 들고
보리밥과 김치로 가득한 바구니를 이고
반달 같은 방죽가를 돌아
시방
논둑길을 들어서는
부푼 저 가슴의 처녀를 보아라
마른 자리 반반한 풀밭을 골라
빨갛게 파랗게 원앙을 수놓은 하얀 보자기를 깔고
그 위에 들밥을 차리는 농부의 딸을 보아라
이 마을에 아니 이 나라에 하나뿐인
검은 치마 하얀 저고리를 보아라
―아부지 그만 쉬었다 하셔요
저만큼에서 허리 굽혀 나락을 베는 아버지 곁으로 가
아버지 대신 나락을 베고
―아저씨 밥 한술 뜨고 가세요
지나가는 낯선 사람도 불러
이웃처럼 술도 한잔 드시게 하는
조선의 딸 그 마음을 보아라
마을에 하나뿐인 아니 이 나라에 하나뿐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통일되면 꼭 와 김남주
통일되면 꼭 와
장병락 선생님 그는
일심(一心)이라고 팔에 문신을 한 뱃사람이었지
북녘에서 남녘으로 조선쌀이 오던 날
우리 둘은 얼싸안고 울었지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언약도 하나 했지
통일되면 꼭 놀러 오라고 꼭 놀러 가마고
그는 내가 그의 고향 원산에 가면
명사십리 해당화를 구경시켜 주겠다 했고
나는 그가 내 고향 해남에 오면
실낙지에 막걸리를 대접하겠다 했지
고향에 홀어머니를 두고 왔다는 그는
내게 편지가 올 때마다 어머니한테서 왔냐며 묻고는
어머님 잘 계시냐 어디 아프신 데는 없느냐
앞으로 나가게 되면 효도 많이 해드리라 신신당부 했지
철창으로 으스름 달빛이 젖어드는 밤이면
내 심사 울적하여 청천하늘의 잔별을 헤아리다가
옆방의 그를 불러내어 이런 부탁 가끔씩 하고는 했지
ꡒ장선생님 나오셔셔 노래나 한 곡조 뽑아주시오ꡓ
그러면 그는 한사코 또 어머니 생각나냐며
ꡒ수천 년 수만 년 그 모습 여전해
세상에 근심 걱정도 많네……ꡓ
볼가강의 뱃노래를 고적하게 불러 주거나
ꡒ이 한 몸 다 바쳐 쓰러지며는
대를 이어 싸워서라도 금수강산 삼천리에
통일의 그날이 오면 만세소리를
자손아 불러다오ꡓ를 목메이게 불러 주었지
그런 그가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어딘가로 모르는 곳으로 이감을 가게 되었지
나는 부랴부랴 내 십오 년의 징역 보따리를 뒤져
덧버선이며 귀마개며 장갑이며를 꺼내
어쩌면 통일의 그날까지 징역살이를 할 줄도 모르는
어쩌면 통일의 그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옥사할지도 모르는 그에게
철창 너머로 사슬 묶인 그의 손에 건네 주었지
폐가 나빠 자주 각혈을 하고는 했던 그는
교도관한테 끌려 가면서 뒤돌아 보면서
백지장 같은 얼굴에 눈물 빛내며 다짐했지
ꡒ통일되면 꼭 와ꡓ ꡒ통일되면 꼭 와ꡓ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편지 1 김남주
편지 1&
산길로 접어드는
양복쟁이만 보아도
혹시나 산감이 아닐까
혹시나 면직원이 아닐까
가슴 조이시던 어머니
헛간이며 부엌엔들
청솔가지 한 가지 보이는 게 없을까
허둥대시던 어머니
빈 항아리엔들 혹시나
술이 차지 않았을까
허리 굽혀 코 박고
없는 냄새 술냄새 맡으시던 어머니
늦가을 어느 해
추곡수매 퇴짜맞고
빈 속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 앞에
밥상을 놓으시며 우시던 어머니
순사 한나 나고
산감 한나 나고
면서기 한나 나고
한 집안에 세 사람만 나면
웬만한 바람엔들 문풍지가 울까부냐
아버지 푸념 앞에 고개 떨구시고
잡혀간 아들 생각에
다시 우셨다던 어머니
동구 밖 어귀에서
오토바이 소리만 나도
혹시나 또 누구 잡아가지나 않을까
머리끝 곤두세워 먼 산
마른 하늘밖에 쳐다볼 줄 모르시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다시는 동구 밖을 나서지 마세요
수수떡 옷가지 보자기에 싸들고
다시는 신작로가엘랑 나서지 마세요
끌려간 아들의 서울
꿈에라도 못 보시면 한시라도 못 살세라
먼 길 팍팍한 길
다시는 나서지 마세요
허기진 들판 숨가쁜 골짜기 어머니
시름의 바다 건너 선창가 정거장엘랑
다시는 나오지 마세요 어머니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학살 1 김남주
학살 1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은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 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 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