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및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이신 노동은 중앙대교수가 기술한 홍난파에대한 평가를 모아보았다.
1.굴욕의 노래, 친일 음악 (대표집필 노동은, 2003년, 민족문제연구소발행)
그러나 홍난파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의 민족현실과 무관한 음악가였다.--99쪽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되자 쉽게 친일의 길로 걸어간다.--99쪽
홍난파가 전향서를 발표한 직후인 1937년 7월부터 그는 조선총독부가 부각시킨 악단의 대부로 자리잡았다.--101쪽
일본 천황폐하의 신민으로서 확고한 일본정신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여 신체제 동아의 평화를 구가하려한 전향서와 글들은 바로 홍난파의 친일논리이자 신념적 행위였다.--104쪽
홍난파는 대동아건설을 목표로 일본국민으로서 우리 모두가 음악보국 운동을 전개하자는 논리로 친일창작활동과 언론활동 그리고 주요 단체에서 임원으로 악단대부가 되어 친일활동을 전개하였다.--110쪽
홍난파, 그는 일제하 악단의 대부로서 대표적인 친일음악가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110쪽
2.노동은의 두번째 음악상자 (노동은저, 2001년, 한국학술정보(주)발행)
또 이들(홍난파와 현제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신앙고백을 일본천황에게 했으니, 그 고백이야말로 참인가 거짓인가?--145쪽
그러나 홍난파는 제1급 친일음악가 였다.--306쪽
그러나 홍난파는 현제명과함께 친일의 양대 대부였다.--361쪽
이 밖에도 수많은 일본전시가요를 경성방송국에서 지휘방송하거나, 모리카와 준이라는 이름으로 매일신보에 친일논평을 발표하였다.--362쪽
그만큼 난파는 한국음악사에서 반쪽 음악도 못되는 양악사 인물이다.--362쪽
[학교종이]나 [고향의 봄]류의 동요는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502쪽
또 [고향의 봄]을 “나의 살던 고향은 인천교도소....집에가면 마누라는 집 팔아먹고 도망을 쳤네”식의 노래가사바꿔 부르기도 여기에 속한다--502쪽
3.친일파 99인 3권 홍난파 (노동은저, 1993년, 도서출판 돌베개 발행)
따라서 홍난파가 1930년대 벽두부터 주장한 순수음악운동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현실을 외면할 수 있었던 자기도피와 자기기만의 음악운동 이였다.--115쪽
지나사변과 음악 글을 보면 홍난파는 이미 제국주의를 펼치고 있는 일본천황의 신민이 되어있었다.--115쪽
4.민족음악론 (노동은 이건용공저, 1991년, 한길사발행)
이들에겐 조국의 민족현실이 아예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일본민족의 현실이었을 뿐이다. 이들에게 민족윤리는 휴지조각이었다.--187쪽
홍난파의 희망의 아침은 황민의 희망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324쪽
5.노동은의 음악상자 (노동은저, 1996년, 웅진출판사발행)
홍난파의 음악은 가사만 한글이지 그 모든 음악기법은 서양음악 전통에 충실하고 철저한 서양음악이다. 그 음악들은 처음부터 한반도의 역사적 전통과 무관한 음악들이였다.--359쪽
6. 친일파 홍난파 기념 사업이 주춤 하는 듯 했던 것이 우호태 화성군수의 간악한 페인트 모션이었음을 발로 뛰는 우리 민족문제 연구소 회원과 연구원들이 군수실로 뛰어가 화성군수와의 면담을 통해 밝혀냈습니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친일파의 기념관 따위가 이 땅에 세워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우호태 군수여!
권하건데 홍난파의 기념과 따위는 일본에 가서 이등박문 기념관
한구텡이를 빌려 설치함이 어떠하요!
작성자: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 박한용
1번부터 5번가지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이신 노동은 중앙대교수가 그의글에서 쓴 다분히 악의적 평가이고 6번은 2000년 8월 10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및 박한용 상임연구위원이 화성시장과 면담후에 쓴 들이다. 이런 표현하는 사람들이 과연 홍난파에 대해서 얼마나 연구하려고 노력했는지 혹시 학문을 왜곡시켜서 세상에 아첨하려는 자들은 아닌지 독자들은 판단해 주시기 바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