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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海印의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석천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What the Buddha taught
윌폴라 라훌라 저 / 전재성 역
▒ 목 차 ▒
발간사 ▲ 위로
그 나라에서는 불법이 아쇼카왕 이래로 융성하여 오늘날까지 그 생명의 활력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고대적인 전통 가운데에서 자랐지만 모든 전통이 의문시되는 오늘날, 세계적인 학문의 정신과 방법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그는 스리랑카의 세일론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얻은 후에 스리랑카불교역사라는 제목으로 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캘커타 대학에서 여러 교수들과 만나면서 티베트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불교 형태인 대승불교와 접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그는 전 불교적인 관심을 넓히기 위해 티베트와 중국의 경전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 와서 대승불교 철학자 아쌍가(無着)을 공부하면서 영광스럽게도 우리와 합류했다. 아쌍가의 주요한 작품의 범어원문은 상실되었고 오로지 티베트어와 한문에서만 발견된다. 라훌라 박사가 우리와 함께 오렌지색 가사를 입고 서양의 공기를 호흡하며 우리의 오래된 거울 속에서 자신의 종교에 대한 보편적인 사유를 찾아서 우리와 함께 한지 어느덧 8년이 되었다. 이 책은 내게 친절하게도 서구에서 출판하도록 부탁을 한 것이지만, 모두가 읽을 수 있고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망라한 것이며 가장 오래된 경전인 빠알리어의 니까야(部集)나 범어의 아가마(阿含)에서 발견되는 경전이 촘촘히 들어박힌 빛나는 불교의 입문서이다. 불교문헌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라훌라 박사는 그 경전들을 항상 거의 베타적으로 인용한다. 그 경전들의 권위는 과거에 다양한 모든 불교학파가 너나할 것없이 인정했던 것이다. 경전을 뛰어넘어 그 정신에 대하여 더 나은 해석을 시도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어떠한 해석도 이 경전들에서 벗어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해석이 실로 수세기 동안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불교가 전파되면서 변화되었고 법은 한가지 이상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그러나 윌폴라 라훌라 박사 - 인간적이고, 합리적이고, 어떤 점에서는 소크라테스적이고, 어떤 점에서는 개신교적이고, 무엇보다도 학문적인 - 가 여기서 보여주는 불교의 진실한 모습은 그가 오로지 그러한 것들을 위해 말하게끔 한 권위 있는 경전의 증거들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것이다. 언제나 빈틈없는 정확성을 가지고 번역된 그의 인용문들과 거기에 첨가된 설명들은 명증적이고 간단하고 직접적이고 모든 현학적인 것에서 벗어났다.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그가 빠알리 문헌에서 다시 발견하길 원했다. 대승의 가르침들은 토론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 있지만 그러한 원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대승의 가르침에 새로운 빛을 던지게 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현대인들에게 말했지만 현대의 사유경향이 - 사회주의, 무신론, 실존주의, 정신분석 - 만들어낼 수 있는 여기저기 제안된 비교적인 관점은 피해나갔다. 이 천재적인 작품 속에 그러한 관점을 피하고 현대를 가치 있게 평가하고 거기에 불교를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 열어놓은 것은 독자를 위한 것이고 그 본래의 가르침의 풍요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폴 드미에비유 (프랑스 학술원회원, 프랑스 대학 교수)
머릿말 ▲ 위로 전 세계적으로 불교에 대한 관심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불교를 알아보려고 수많은 공부모임과 친교모임이 만들어져왔고 불교에 대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 대부분이 다른 종교에서 차용한 가정들을 잘못 수용하거나 주제를 잘못 파악한 사람, 진정하게 적임자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 최근에 불교에 대한 책을 쓴 비교종교학의 한 교수는 붓다의 헌신적인 시자였던 수행승 아난다가 비구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가 재가신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책들에 의해서 전파된 불교의 지식은 독자의 상상력 속에나 남게 된다. 나는 이 작은 책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가 진실로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고 싶어하는, 지성적이고 지적인 독자들에게 그 가르침을 말하고자 노력했다. 그 초보자를 위하여 보편적으로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지는 빠알리 삼장에서 발견되는 붓다가 사용한 성실하고 정확한 언어들을 가능한 한 요약해서 직접적으로 간명하게 진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여기에 언급된 자료들이나 메시지는 직접 원전에서 인용되었다. 단지 몇 군데서만 필자가 후대의 문헌에서 언급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또한 이미 붓다가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알고 있지만 더욱 공부하려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중요한 술어를 빠알리어 뿐만 아니라 그 원래의 경전에 관해 언급했고 엄선한 참고문헌을 부가하였다. 나의 작업에서 어려운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붓다의 설법의 내용과 형식을 조금도 손상됨이 없이 오늘날의 영어권 독자들에게 그가 이해하고 음미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있도록 생소한 것과 대중적인 것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가려고 노력했다. 책을 쓰면서 고대의 경전의 구절, 우리에게 구전을 통해서 전해내려 왔기 때문에 생겨난 붓다의 설법의 부분이었던 동의어들과 어구의 반복이 유유히 내 마음속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은 스승이 가르친 설법의 형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능한 원전에 가깝게 접근하려고 시도했다. 번역은 쉽고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도록 배려했다. 나는 붓다가 가르친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것에 관하여 이 책에서 논의하였다. 네가지의 거룩한 진리(四聖諦),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八正道), 다섯가지의 존재의 다발(五蘊), 업(業), 윤회(輪廻), 연기(緣起), 무아(無我)의 교리, 새김의 토대(念處) 등이다. 물론 서구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표현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소한 용어에 맞닥뜨린 사람은 흥미를 갖고 있다면, 먼저 1, 2장을 읽고 훨씬 일반적으로 자명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6, 8, 9장을 읽고 나서 나중에 3, 4, 5, 6을 읽도록 권하고 싶다. 테라바다나 마하야나의 불교가 사유 체계 속에서 기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주제들을 취급하지 않고 붓다의 가르침에 관한 책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테라바다라는 용어는 - 히나야나(소승)이라는 용어는 국제적으로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 '상좌부(上座部)' 의 불교라고 번역될 수 있고 마하야나는 '큰 수레(대승)' 의 불교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이 이 세 상에 알려진 불교의 두가지 주요한 형태이다. 근본적인 정통불교로 취급되는 테라바다는 스리랑카, 미얀마, 타일랜드, 캄보디아, 라오스, 동파키스탄의 치타공에 전파되어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후대에 성립한 마하야나는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 몽고 등지에 퍼져있다. 상기의 두 종파는 믿음이나 실천이나 계율에서 어떤 차이들이 발견되지만 여기서 취급하는 붓다의 중요한 가르침에 관해서는 테라바다건 마하야나건 전적으로 일치한다. 끝으로 나는 나를 초대하여 이 책을 쓰도록 고무하고 실질적인 모든 도움을 주고 관심을 기우려주고 여러 가지 제안을 마다하지 않고 원고를 읽어주신 루도위크 교수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원고를 교정하고 가치 있는 조언을 마다하지 않은 마리안느 묀 양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서문을 써주신 나의 프랑스에서의 지도교수 뽈 드미에비유 교수에게도 크게 감사를 드린다. 마니(mani)에게 '진리의 선물이 모든 다른 선물보다 탁월하다.' (sabbadanam dhammadanam jinati) 1958년 프랑스 파리에서 윌폴라 라훌라 합장
역서저의 서 ▲ 위로
한글번역만은 잘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많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 후에 독일 유학을 다녀와서 한길사측이 이 책의 번역만을 분리해서 명상시리즈 1권으로 내겠다고 해서 별생각 없이 수락했는데 한길사에서는 "불타의 가르침" 이라는 제목으로 1993년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빠알리어 사전, 범어문법학을 출간하고 최근에 쌍윳따 니까야 전질(11권)을 완역한 이후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이 불타의 가르침을 빠알리어와 대조하여 번역해 본 결과 적지 않은 오역이 발견되었다. 저자 윌폴라 라훌라는 원주석에서 빠알리어를 밝혀 놓지 않았고 단지 출처만을 밝혀 놓았는데 그것도 상당 부문은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싱할리어 빠알리 대장경의 출처를 기록했기 때문에 빠알리성전협회본의 로마나이즈화한 빠알리 대장경 교열본을 찾는데 필자는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이번에 올바른 번역을 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어 적지 않은 오역의 무거운 짊을 벗어버린 것 같아 홀가분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주석을 더 상세히 보완하고 부처님 말씀에 대해서는 일일이 주석을 만들어 빠알리 원문과 그 출처를 실어주었다. 그러나 대신 자유롭고 날렵한 번역의 유려한 문제는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필자는 처음에는 단순히 번역을 윌폴라 라훌라 박사의 원전에 맞게 번역만 해서 다시 내기로 마음을 먹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팔정도와 연기에 대한 해설이 너무 빈약한 것 같아 필자의 저술인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을 참고로 이 책을 보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이 책은 원저보다 두 배 정도로 그 분량이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까 이 책은 윌폴라 라훌라 박사와의 공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윌폴라 라훌라 박사는 빠알리성전협회의 고문으로 있다가 1997년에 90세로 열반에 들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의 허락도 없이 책을 개조한 것처럼 되어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데 그분과 공저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생각다 못해 김광하 편집장님과 상의하여 윌폴라 라훌라 박사 원저, 필자의 역저로 발간하기로 했다. 필자가 추가한 부분을 밝히려고 하니 일일이 거론하기가 무척 어려워 밝힐 수가 없다. 단지 거의 모든 주석을 다시 달았으며 팔정도가 들어가 있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장은 완전히 새롭게 필자가 저술한 것이며 [연기와 무아]의 장의 앞부분도 필자가 저술한 것이다. 대소승을 싸잡아 본다면 불교의 가르침이 너무나 심오하고 호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진수를 알기가 어렵다. 수십 년 간 불교공부를 해도 종잡을 수 없는 방황을 일삼는 사람이나 불교에 새로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더없이 훌륭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나 인문학에 입문한 자들이 인간의식의 악마성에 당혹하고 점증하는 야만적인 폭력에 절망할 때에 이 책을 들고 읽는다면 흙탕물 속에 소용돌이치는 듯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유리알 같은 평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연구실에서 전재성
1. 붓다 ▲ 위로 붓다의 개인적인 이름은 범어로 씻다르타이고 성은 고따마였다. 기원전 6세기 경에 북인도에 살았다. 그의 아버지 슛도나다왕은 네팔근처 싸끼야(釋迦) 왕국의 지배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마야 부인이었다. 당시의 습관에 따라 어려서 16살 때에 결혼했고 그에게 아름답고 헌신적인 젊은 공주의 이름은 야쇼다라였다. 젊은 왕자는 왕궁에서 그가 원하면 자유스럽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갑자기 삶의 진실과 인간의 고통에 맞닥뜨려 그 해결책을 찾기로 결정했다. 그의 나이 29세 때에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 뒤에 왕국을 버리고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고행자가 되었다. 육년 동안 고행자 고따마는 갠지즈강 계곡을 따라 유명한 종교적인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의 교의체계와 수행방법을 공부하고 추종하며 극단적인 고행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따마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전통적인 종교와 수행방법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가 35세가 되던 해 어느 날 저녁 붓다가야의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보리수 나무아래 앉아 고따마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로부터 그는 붓다라고 불렸다. 깨달은 이후 고따마 붓다는 베나레스 근처의 이씨빠따나의 녹야원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그의 동료였던 다섯 명의 고행자에게 전했다. 그 날부터 45년간 털끝 만한 차별도 없이 왕족들, 농부들, 성직자들과 불가촉천민들, 장자들과 거지들, 성자들과 거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법을 설했다. 그는 사회적인 계급과 집단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그것을 이해하고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모든 선남선녀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고따마 붓다는 나이 80에 오늘날의 인도 웃따라뿌라데슈 지방의 꾸씨나가라에서 입멸하였다. 오늘날 불교는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에 머물지 않고 그 합리적이고 탁월한 가르침 덕분에 유럽이나 아메리카 등 전세계로 전파되고 있고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서 성장하고 있다. 註. - 고따마 씻다르타 : maha sakyamuni gotama. 釋迦牟尼佛. 그는 과거 25불 가운데 마지막 25번째의 부처님으로 역사적인 부처님이다. 까삘라밧투의 슛도나다 왕과 왕비인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곳은 룸비니 동산이다. 생후 7일만에 마야부인이 돌아가자 이모 마하빠자빠띠가 불모(佛母)로서 그를 양육했다. 그는 람마, 수람마, 수바의 세 궁전에 살면서 젊어서 야쇼다라 비와 결혼해서 라훌라라는 아들을 두었다. 29세에 출가해서 6년간의 고행을 한 뒤에 마가다 국의 네란자라 강 근처에서 정각을 이루었다. 그때 처녀 쑤자타가 유미죽을, 목동 쏘띠야가 자리 풀인 길상초(吉祥草)를 제공했다. 그리고 보리수는 아자팔라 나무였다. 초전법륜(初轉法輪)은 이씨빠따나에서 꼰다냐 등 5비구에게 행했다. 싸끼야무니 고따마의 10대 제자로는 싸리뿟따, 목갈라나, 마하깟싸바, 아눗다라, 수부띠, 뿐나, 깟짜야나, 우빨리, 라훌라, 아난다가 있으며 수행녀로는 비구니 교단을 이끌던 이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유명했다. 신도로는 장자(長者) 아나타삔디까로 알려진 수닷따가 유명하고 빔비사라 왕 등도 불교의 보호자로 잘 알려져 있다. 45년간의 중생교화를 끝내고 꾸씨나가라에서 열반에 들었다. 註. - 라훌라 : rahula. 고따마 붓다의 외아들이다. 아버지가 출가하던 날 태어났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뒤 슛도나다 왕의 초청으로 까필라밧투를 처음 방문했을 때 라훌라의 어머니는 아들을 부처님에게 보내서 유산(遺産)의 승계를 요청했다. 부처님은 침묵한 채 공양을 들고 궁을 떠났다. 라훌라가 좇아나서자 부처님은 마침내 싸리뿟따를 시켜 라훌라를 승단에 입단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어린아이들의 출가는 부모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고 요청하자 부처님은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라훌라는 이미 출가했고 부처님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전했다. 어렸을 때 라훌라는 한 줌의 모래를 집어들고 '오늘 내가 이 모래알처럼 많은 가르침을 얻기를 바란다' 고 기도했다. 라훌라가 일곱 살이었을 때 부처님은 암발라띳까 경을 설해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을 설했고, 라훌라가 18살 때 마하라훌로바다 경을 설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도록 했다. 라훌라는 밀행제일(密行第一)의 제자가 되었다.
1) 가장 인간다운 붓다 ▲ 위로 종교의 창시자들 가운데 붓다는, 그를 일반적인 의미의 종교의 창시자로 부르는 것이 허용될지 모르지만 순수하게 인간으로 남아있길 바랬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다른 교조들은 자신이 신이거나 신에게 영감을 받았거나 또는 다른 형태로 화현된 화신이었다. 붓다는 인간일 뿐만 아니라 신이나 외적인 힘에서 오는 어떠한 영감도 요구하지 않았다. 깨달음의 성취는 인간적인 노력과 지성의 덕분이었다. 오로지 인간만이 깨달은 자인 붓다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바라고 노력하기만 하면 그것은 성취된다. 우리는 붓다를 순수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는 인간으로서 너무나 완전했기 때문에 후에 대중적인 종교에서 거의 '초인간' 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의 지위는 지극히 높다. 인간은 스스로가 그의 주인이다. 그의 운명 위에 군림하는 보다 높은 존재나 권력은 없다. 붓다는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안식처이다. 다른 누가 안식처가 되겠는가?' 라고 말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자신의 안식처로 할 뿐 다른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거나 안식처를 구하지 말라고 했다.
註. - 여래 : tathagata. 如來. 여래는 '참되게 오셨다' 또는 '참되게 가셨다' 라는 의미로 '이렇게 오신 이' 또는 '이렇게 가신 이' 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붓다가 자기 자신을 언급하는데 자주 쓰이는 용어이다. - 승단 : sangha. 원래 상가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승단 곧 '불교 승려들의 공동체' 를 지시한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단은, 불(佛 buddha) 법(法 dhamma) 승(僧 sangha)은 삼보(三寶 tiratna)는 삼귀의(三歸依 tisarana)의 대상이다. - 사권 : acariyamutthi. 師拳. 스승의 주먹을 뜻하며 감추어진 비밀스런 가르침을 상징한다.
2) 의심을 버리고 바로 보라 ▲ 위로
그들은 오직 자기의 가르침만을 설명하고 계몽할 뿐 다른 교리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욕하고 경멸하고 코방귀 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다른 유행자와 바라문이 와서는 그들도 역시 차례로 자기의 가르침만을 설명하고 계몽할 뿐 다른 교리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욕하고 경멸하고 코방귀 끼는 것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로서는 그들 존경스러운 수행자와 성직자들 가운데 누가 진리를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미심쩍고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붓다] "깔라마들이여, 당신들이 미심쩍어하고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의심스러운 것은 미심쩍은 일에서 생겨납니다. 깔라마들이여, 풍문이나 전통이나 전설에 끄달리지 마십시오. 종교적인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이념적인 심취나 그럴듯한 가능성이나 '이분이 나의 스승이다' 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오. 깔라마들이여, 이러한 것들이 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은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식자에게 비난받을 만하고 이러한 것들은 성취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한다라고 스스로 알게되면, 그때에 깔라마들이여, 그것들을 버리시오... 깔라마들이여, 이러한 것들이 건전하고 이러한 것들은 옳은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식자에게 칭찬받을 만하고 이러한 것들은 성취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고 즐거움을 가져온다라고 스스로 알게되면, 그때에 깔라마들이여, 그것들을 성취하시오." 붓다는 더욱 나아가서 수행승들에게 자신이 따르는 스승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도록 여래 자신을 살피도록 충고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의심은 진리를 이해하는 데나 정신적인 수행을 행하는 데나 방해가 되는 다섯가지 장애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의심은 죄가 아니다. 불교에는 믿음의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불교에는 다른 종교에서처럼 "죄" 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악의 뿌리는 무지와 사견(邪見)에서 비롯된다. 의심이 있는한 당황하고 흔들리며 아무런 발전을 이룰 수가 없다. 또한 정확히 이해하거나 올바로 보지 못하는 한 의심 할 수밖에 없는 것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제거해야 한다.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바로 보아야 한다. 의심하지 않고 바로 보아야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나는 믿는다' 라는 사실은 정확히 깨닫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학생이 수학문제를 풀 때에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망설이거나 의혹을 갖고 당황하는 수가 있다. 그가 의혹을 갖고 있는 한 문제를 더 이상 풀어 나아갈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길 원한다면 의혹을 풀어야한다. 물론 의혹을 풀 수 있는 길은 있다. '나는 믿는다' 또는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그 문제를 전혀 풀지 못한다. 자신에게 믿도록 강요하거나 깨달음이 없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지 영적이나 지적인 것이 아니다. 붓다는 언제나 의혹을 몰아내려고 노력했다. 완전한 열반에 들기 직전에 붓다는 몇 번이고 수행승들에게 말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부처님이나 가르침이나 승가나 길이나 방도에 관하여 어떠한 의심이나 의혹이라도 갖고 있으면 수행승들이여 질문하라. 나중에 '우리는 스승을 친견했으나 스승의 앞에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라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 그러나 제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 때에 붓다가 한 말은 감동적이었다. [붓다] "그대들이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스승에 대한 존경이라면, 한 동료가 다른 동료에게 그 대답을 알려주도록 해라." 註. - 다섯 가지 장애 :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장애가 있다. 어떠한 것이 다섯가지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장애, 악의의 장애, 해태와 혼침의 장애, 흥분과 회한의 장애, 의심의 장애가 있다.(SN 5-60) 이를 한역에서 5장(五障) 또는 5개(五蓋)라고 번역한다.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장애 : kamacchandanivaranam. 欲貪障
3) 관용의 정신 ▲ 위로 생각의 자유뿐만 아니라 붓다가 허용한 관용의 정신도 종교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놀라운 것이다. 한 때에 나란다에는 우빨리라고 불리는 한 장자(長者)가 있었다. 그는 니간따 나타뿟따의 유명한 평신도였는데 붓다를 만나보라고 마하비라가 특별히 보낸 사람이었다. 붓다는 마하비라의 무리들과는 견해를 달리했기 때문에 우빨리와 업(業)에 관해 논쟁하게 되었다. 거기서 붓다는 우빨리를 승복시켰다. 우빨리는 논쟁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기대와는 어긋나게 붓다의 견해가 옳고 자신과 스승의 견해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붓다의 재가신도가 되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붓다는 서두르지 말고 다시 고려해 보기를 원했다.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와 같이 잘 알려진 사람에게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빨리가 다시 제자가 되고 싶은 생각을 명백히 했을 때에 붓다는 그가 모시던 옛스승 마하비라를 계속 존경하고 받들 것을 부탁했다. 기원전 3세기 경에 이해와 관용의 귀중한 모범을 보인 인도의 아쇼카라는 위대한 불교 황제는 그의 광대한 제국에서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도 잘 보호하고 후원했다. 비석에 새겨진 그의 칙령 가운데 황제가 천명한 바를 읽을 수 있다. [아쇼카] "누구나 자신의 종교만을 숭앙하고 다른 종교를 저주해서는 안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면서 다른 종교에도 봉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자신의 종교에 무덤을 파는 것이며 다른 종교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만을 숭앙하고 다른 종교를 저주하는 자도 누구나 '나는 내 종교를 찬양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종교에 헌신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 자신의 종교를 더욱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화해하는 것이 좋다. 경청하라.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나 교의에도 귀를 기울이라." 이러한 교감적인 이해의 정신은 종교적인 교리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영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용과 이해의 정신은 처음부터 불교문화와 불교문명의 가장 귀중한 이념이었다. 그것이 왜 2500여 년의 긴 포교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불교도로 만드는데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또한 종교적 박해도 받지 않았는가 하는 이유이다. 불교는 평화적으로 아시아 대륙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5억의 신도를 확보했다. 어떤 핑계로든 어떤 형태로든 폭력은 절대로 붓다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이다.
4) 진리는 어떠한 상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위로 사람들은 이따금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 상관없다. 불교는 정의를 내리는 그 수준으로 정의 내리는 사람에게 남는 것이다. 그 수준은 하찮은 것이다.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에 부여하는 불교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누가 거기에 부여하는 이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윌폴라 라훌라] "이름 가운데 무엇이 있는가? 장미라는 것이 있나니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붙인다고 해도 향기로움은 그대로 이리라." 이처럼 진리에는 어떤 상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교나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누구의 독점도 아니다. 진리를 이해하는데 분파주의적인 상표는 방해가 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해로운 선입견을 낳는다. 이러한 상황은 정신적이나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을 만났을 때에 그 사람을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그에게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딱지를 붙여서 보게된다. 다시 말해서 마음속에 그러한 표제와 관련된 선입견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보게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우리가 그에게 부여한 모든 선입견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분파주의적이고 분파적인 상표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통된 인간성이나 감정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붙이려고 든다. 예를 들어 불교의 자비나 기독교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 이야기하거나, 그것들과는 다른 자비에 대해서는 낙인을 찍어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나 불교도나 힌두교도나 이슬람교도의 소유가 아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불교적이나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사랑, 자비, 동정, 인내, 관용, 우애, 탐욕, 증오, 악의, 무지, 속임수 등와 같은 인간성과 감정에 분파주의적이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상표가 붙을 수 없다. 그것들이 특수한 종교에 소속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5) 믿음보다 확신 ▲ 위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어디서부터 관념이 오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관념의 근원과 발전은 학문적인 문제이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붓다에서 유래했는지 어느 다른 누구에서 유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물을 보고 또한 아는 것이다. 붓다는 한때에 옹기장이 움막에서 밤을 보냈다. 그 움막에는 이미 조금 전에 도착한 젊은 수행승이 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했다. 붓다는 '이 젊은이는 즐거운 여행길에 있다. 내가 그에게 질문해도 좋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붓다는 그에게 물었다. [붓다] "수행승이여, 누구의 이름으로 집을 떠났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누구의 가르침을 좋아합니까?" [수행승] "석가족의 수행자 고따마가 있습니다. 그는 수행자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그가 거룩한 님이 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 존경받는 분의 이름으로 나는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 스승이며 저는 그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붓다] "그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으신 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수행승] "벗이여, 북쪽나라에 싸밧티라는 시에 계십니다. 그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은 지금 바로 그곳에 계십니다." [붓다] "당신은 그 세상에 존귀한 분을 본 일이 있습니까? 당신이 그를 보면 알 수 있습니까?" [수행승] "저는 그 세상에 존귀한 분을 본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그를 뵙더라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붓다] "수행승이여, 당신에게 그의 가르침을 말하겠습니다. 귀를 기우려 잘 들으십시오." [수행승] "벗이여, 좋습니다." 붓다는 이 젊은이에게 진리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을 설했다. 설법이 끝날 때쯤이 돼서야 뿟꾸싸띠라는 이 젊은 수행승은 자기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분이 붓다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어나서 스승의 발에 절하고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벗' 이라고 부른데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그는 붓다에게 승단에 들어가기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붓다는 그가 바루(밥그릇)와 의복을 갖고 있는지를 물었다. 뿟꾸싸띠는 바루와 옷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불행히도 소에 받혀 죽었다. 그러나 나중에 붓다가 이 슬픈 소식을 듣고 뿟꾸싸띠는 이미 진리를 깨달은 현명한 사람으로 열반에 들어, 거룩한 이(아라한)가 되어서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뿟꾸싸띠는 붓다에게 귀를 기울여서 그의 가르침을 깨달을 때까지 누가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것이 누구의 가르침이었는지를 몰랐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는 진리를 보았다. 약이 좋다면 질병은 치유될 것이다. 누가 그것을 준비했는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는 필요치 않다. 거의 모든 종교는 믿음 - 맹목적인 신앙으로 보이는 - 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보고 알고 깨닫는' 데 바탕을 두고 있지 믿는데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불경에도 믿음이나 신심으로 번역되는 '쌋다(saddha)' 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그 참모임에 헌신한다는 의미에서 신심이라는 내용이 들어있기는 하다. 서기 사세기 경 유명한 불교철학자 아쌍가는 쌋다라는 말이 세가지 뜻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첫째 , 존재한다고 하는 완전하고 확고한 확신, 둘째, 확신에 대한 희열, 셋째,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아무튼 여타의 다른 종교와 같은 믿음이나 신앙은 불교와는 관계가 없다.
- 뿟꾸싸띠 : pukkusati. 붓다고싸에 의하면 뿟꾸싸띠는 딱샤실라의 왕이었고 빔비사라왕과 동시대인으로 서로 국가간 무역을 통해 서로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뿟꾸싸띠는 그 황금원판 위의 부처님 가르침을 보고 환희하여 붓다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벗 : avuso. 이 말은 친구라는 말로서 동등한 위치에서 존경하여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제자가 붓다를 두고 그렇게 부르는 법은 없다. 대신에 제자는 존자 혹은 세존(bhante)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부처님 당시에 승가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벗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붓다가 완전한 열반에 들기에 즈음하여서는 젊은 수행승들은 장로 수행승에게 존자 혹은 구수(具壽 ayasma)라고 부르고 장로 수행승들은 젊은 수행승들에게 벗이라고 부를 것을 지시했다. - 아쌍가 : asanga. 無着. 북인도 바라문 가문에서 출생하였고 형제로는 유명한 유식학의 논사 세친(世親 vasubandhu)이 있다. 처음에는 소승공관(小乘空觀)을 공부하였으나 나중에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을 만나 대승공관을 배웠다고 전한다. 그의 저작으로는 한역대장경에 금강반야경, 순중론, 섭대승론, 대승아비달마논집론 등과 서장대장경 가운데 해심밀경론 등이 있다.
6) 와서 보라 ▲ 위로 믿음에 대한 의혹은 알지 못했을 때에 일어난다. 그러나 보는 순간 의혹은 사라진다. 내가 손안에 보석을 감추고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내 손에서 보석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의혹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내 주먹을 펴서 보석을 보여주면 당신은 스스로 알게 되어 의혹은 사라질 것이며, 그 의혹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경에는 다음과 같은 경구가 있다.
무씰라라는 붓다의 제자가 다른 수행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씰라] "벗이여, 싸빗타여, 믿음이나 만족이나 배움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심취 이외에도 나는 이와 같이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 라고 알고 또한 본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알고 또한 보는 자에게 번뇌가 소멸한다는 사실에 관해 말한다." 언제나 '알고 또한 본다' 는 것이 문제이지, 믿는다는 것은 별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언제나 '와서 보라' 이지 '와서 믿으라' 가 아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 관하여 경전의 어느 곳에서든지 언급되고 있는 말이 있다. '더러움 없고 깨끗한 진리의 눈을 떴다' , '또한 나는 이것이 최후의 삶이며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흔들림 없이 마음의 해탈을 이루어 앎과 봄을 성취했다' , '올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본다'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에 관해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눈이 생겨났다. 앎이 생겨났다. 지혜가 생겨났다. 명지가 생겨났다. 빛이 생겨났다." 진리는 신앙을 통해 믿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슬기를 통해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선언은 바라문교의 정통성이 의심 없는 유일한 진리로서 전통과 권위를 지니고 받아들여지고 신봉되던 시대에 아주 감동적인 것이었다. 학문적으로 아주 유명하고 총명한 바라문이 붓다를 만나서 오랫동안 토론한 적이 종종 있었다. 그 때에 바라드와자 가문에 까빠띠까라는 한 총명한 16살의 바라문이 붓다에게 질문했다. [까빠띠까] "고따마 존자여, 예부터 파괴되지 않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바라문의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을 참고하여 바라문들은 '이 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는 일방적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붓다는 되물었다.
[까빠띠까] "고따마 존자여, 아닙니다." [붓다] "그렇다면 바라문 가운데 한 스승으로서 뭇 스승들의 스승으로 7대에 이르기까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는 사실을 보아서 분명히 안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까빠띠까] "고따마 존자여, 아닙니다." [붓다] "그렇다면 바라드와자여, 그것은 잇달아 묶여있는 장님의 줄서기와 같다. 첫째 사람이 보지 못하면 두 번째 사람이 보지 못하고 마지막 사람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바라문들이 말한 바는 장님의 줄서기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 사람이 보지 못하면 두 번째 사람이 보지 못하고 마지막 사람도 보지 못한다. 바라드와자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와 같다면 바라문들의 믿음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붓다는 바라문의 무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충고를 했다. [붓다] "바라드와자여,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는 일방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진리를 수호하려는 지혜로운 자의 태도가 아니다."
7) 진리의 수호 ▲ 위로 진리를 수호하는 말을 해달라고 젊은 바라문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붓다는 진리의 수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붓다] "만약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믿는다' 라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좋아함이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좋아한다' 라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배운 바가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배웠다' 라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상태에 대한 분석이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상태에 대해 분석한다' 라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이념에 대한 심취가 있다면 '이와 같이 이념에 대하여 심취한다' 라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그가 좋아하는 것을 믿으며, '나는 이것을 믿는다' 라고 말한다. 그 한계 내에서 그는 진리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나 신념 때문에 그가 믿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 붓다는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하나의 관점에 집착해서 다른 것들을 열등하다고 멸시하는 것, 현명한 사람은 이것을 족쇄라고 부른다." 붓다는 또한 제자들에게 원인과 결과에 대한 가르침을 설했다. 그 때에 그들은 분명히 그것을 보고 알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붓다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명확하고 분명한 관점이라도 그것에 집착하고 애착하고 달라붙는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내 가르침마저 강을 건너면 놓아버려야 하는 뗏목과 같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경전에서도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에 비유해서 강을 건너면 그 뗏목을 버려야 하며, 짊어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여행을 가는데 커다란 홍수를 보았다. 이 언덕은 위험하고 두렵고 저 언덕은 안온하고 두려움이 없는데 이 언덕으로부터 저 언덕으로 가는 나룻배도 없고 다리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내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가면 어떨까?' 그래서 그 사람은 수행승들이여,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 그가 저 언덕에 도달했을 때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내가 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갈 곳으로 가 버릴까?'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은 이와 같이 해서 그 뗏목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행했는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그 뗏목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그때 그 사람이 저 언덕에 도달했을 때 이와 같이 생각했다.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 속에 침수시키고 갈곳으로 가 버릴까?'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은 뗏목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행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뗏목의 비유를 아는 너희들은 법(法)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랴." 이 우화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을 안전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고요한 열반의 성취로 인도하려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모든 가르침은 이러한 식으로 끝난다. 그는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어떤 것도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적인 교사였으며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만을 가르쳤다. 붓다는 한 때에 알라하바드 근처의 꼬삼비에 있는 씽싸빠숲에 있었다. 그때 그는 적은 양의 씽싸빠 나뭇잎을 손에 집어들고 수행승들에게 말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손으로 집어든 적은 양의 씽싸빠 나뭇잎과 저 씽싸빠 숲 위에 있는 나뭇잎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욱 많겠는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손으로 집어든 적은 양의 씽싸빠 나뭇잎보다 저 씽싸빠 숲 위에 있는 나뭇잎이 훨씬 많습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알고 나서 그대들에게 설한 것이 매우 적고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바른 이치에 맞지 않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지 않고, 싫어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라지기 위한 것이 아니고, 소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잘 알기 위한 것도 아니고, 올바로 깨닫기 위한 것도 아니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설하지 않았다." 붓다가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은 것들을 숙고한다는 것은 마치 학자들이 헛되이 수고하는 것처럼 쓸데가 없는 것이다. 붓다는 순수하게 명상적이고 환상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형이상학적인 토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러한 것을 '황당무계한 견해' 로 간주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몇몇 제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예로 잘 알려진 고전적인 열가지의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진 말룽까뿟따가 있다. 어느날 말룽까뿟따는 오후의 명상을 끝내고 붓다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드린 다음 그 옆에 앉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말룽까뿟따] "세존이시여, 제가 홀로 명상할 때에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여래께서는 설명하지 않은 것이 있다. 첫째, 우주는 영원한가? 둘째, 우주는 영원하지 않은가? 셋째, 우주는 유한한가? 넷째, 우주는 유한하지 않은가? 다섯째, 영혼은 육체와 같은가? 여섯째, 영혼은 육체와 다른가? 일곱째,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여덟째,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아홉째,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열째,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도 하는가? 여래께서는 이러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이 저에게는 못마땅합니다. 저는 세존께 이러한 것을 묻고 싶습니다. 만약 세존께서 저에게 대답을 주신다면 저는 그 밑에 머물러서 거룩한 삶을 따를 것입니다. 세존께서 알고 계신다면 제게 설명해주십시오. 세존께서 모르신다면 알고 또한 보지 못하는 자로서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보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것입니다." 말룽까뿟따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답변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쓸데없이 마음의 평화를 혼란시키며 시간을 낭비하는 오늘의 수많은 사람에게 매우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붓다] "말릉까뿟따여, 내가 그대에게 '말룽까뿟따여, 와서 내 밑에서 거룩한 삶을 영위하라. 나는 그대에게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설명할 것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말룽까뿟따]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붓다] "말룽까뿟따여, 그대가 나에게 '세존이시여, 저는 여래 밑에서 거룩한 생활을 영위할 것입니다. 여래께서는 이러한 질문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말룽까뿟따]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붓다] "말룽까뿟따여, 나는 '오라, 그리고 내 밑에서 거룩한 삶을 영위하라. 내가 그대에게 이러한 문제들을 설명하리라' 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대가 나에게 '저는 여래 밑에서 거룩한 생활을 영위할 것이고 여래께서는 이러한 질문을 해결해주실 것이다' 라고 말한 적이 없다. 어리석은 자여, 이러한 상황 아래서 누가 누구를 거절하겠는가? 말룽까뿟따여, 어떤 사람이 '나는 여래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여래 밑에서 거룩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에게서 대답을 못들은 채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죽어갈 것이다." 여기서 붓다는 유명한 독 묻은 화살의 비유를 든다. [붓다] "말룽까뿟따여,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가 와서 그를 외과의사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했다고 하자. '나를 쏜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 그가 귀족인지 바라문인지 평민인지 노예인지, 그의 이름과 성은 무엇인지, 그의 키가 큰지 작은지 중간인지, 그의 안색이 검은지 푸른지 노란지, 그가 어떤 마을이나 도시에서 왔는지를 알아야겠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고 하자. '나를 쏜 활을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 보통의 활인지 석궁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 말룽까뿟따여, 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알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룽까뿟따여, 만약 어떤 사람이 '우주가 영원한가, 아닌가' 와 같은 문제에 해답을 얻고서야 비로소 나는 여래 밑에서 거룩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라고 한다면, 그는 여래로부터 그 해답을 얻기 전에 죽어갈 것이다." 그 때에 붓다는 거룩한 삶은 그러한 견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말룽까뿟따에게 설명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 사람들이 어떠한 견해를 가지건 태어나고,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있다. 이러한 것을 멈추는 열반이 진정한 삶이다. 그래서 붓다는 말한다. [붓다] "말룽까뿟따여, 그러므로 나는 설해야 할 것은 설했고 설하지 않아야 할 것은 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우주는 영원한가 아닌가 등은 설하지 않았다. 말룽까뿟따여, 내가 왜 그것을 설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바르고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대에게 이러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붓다가 설한 가르침은 무엇인가? [붓다] "그러면 말룽까뿟따여,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괴로움,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했다. 말룽까뿟따여, 나는 왜 그러한 것들을 설했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신적인 고귀한 생활과 연관되어 있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바르고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것들을 설했다." 註. - 말룽까뿟따 : malunkyaputta. 한역의 만동자(蠻童子)이다. 꼬쌀라 국의 사정관의 아들로 어머니의 이름이 말룽까였다. 천성이 종교적이라 일찍이 유행자가 되었다가 붓다를 만나 얼마 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다.
1)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 위로
그러나 빠알리 대장경은 그것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부연된 또 다른 형태의 여러 가지 설법으로 가득하다. 여러 경전들과 그 주석을 참고해서 이 사성제를 연구한다면 원전에 입각한 붓다의 기본적인 교설에 관하여 훌륭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 1)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苦聖諦 dukkham ariyasaccam) 2)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集聖諦 dukkhasamudayam ariyasaccam) 3)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滅聖諦 dukkhanirodham ariyasaccam) 4)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거룩한 진리 (道聖諦 dukkhanirodhagamini ariyasaccam) 이다. 첫번째,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일반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고성제라고 번역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불교적으로도 인생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한 해석과 번역은 모두 그 참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거나 오도할 우려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염세주의로 잘못 이해하는 이유는 이러한 제멋대로 풀이한 안이한 해석과 수박 겉핥기식의 해석 때문이다.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합리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종교이다. 불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불교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이상향에 살도록 추스르거나 온갖 종류의 상상적인 공포나 죄악감에 놀라거나 괴로워하지 않도록 한다. 불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을 둘러싼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유와 평화, 청정과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어떤 의사가 질병을 과장해서 희망을 포기하라고 엄숙하게 선언하고, 또 어떤 의사는 오진으로 병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아무런 치료도 필요 없다라고 거짓 위안으로 환자를 안심시킨다. 전자는 비관론자, 후자는 낙관론자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똑같이 위험한 것이다. 어떤 의사는 질병의 징후를 올바로 진단하고 질병의 원인과 발생을 이해하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다고 확신한 다음 용기 있게 치료해서 환자를 구해낸다. 붓다는 이러한 식의 의사이다. 그는 이 세상의 질병에 대한 현명하고 과학적인 의사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괴로움에 해당하는 빠알리어에는 '둣카' 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행복, 안락, 평안' 을 의미하는 '쑤카' 라는 말과는 반대로 '고뇌, 고통, 슬픔, 비극' 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붓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대표하는 첫번째,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더욱 깊은 철학적 의미와 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괴로움이란 말은 일반적인 고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덧붙여, 불안정, 불완전, 무상, 공, 무실체, 무아의 더욱 깊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첫번째,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둣카의 거룩한 진리' 라고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붓다가 괴롭다고 말했을 때에 그가 인생의 행복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승려들은 물론 재가의 신도에게도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가지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을 싣고 있는 다섯 개의 빠알리 경전 가운데 하나인 [앙굿따라니까야]에는 1) 가정생활의 행복과 속세를 떠난 수행자의 행복, 2) 감각적 쾌락의 행복과 자제로부터 오는 행복, 3) 애착에서 오는 행복과 집착을 떠남에서 오는 행복, 4) 번뇌에서 오는 행복과 번뇌를 벗어난 행복, 5) 자양분 있는 행복과 자양분 없는 행복, 6) 성스러운 행복과 세속적인 행복, 7) 육체적인 행복과 심리적인 행복, 8) 희열 있는 행복과 희열 없는 행복, 9) 기쁨 있는 행복과 평정의 행복, 10) 삼매 있는 행복과 삼매 없는 행복, 11) 희열의 대상이 있는 행복과 희열의 대상이 없는 행복, 12) 기쁨을 야기하는 대상 있는 행복과 평정을 야기하는 대상이 있는 행복, 13) 형상계를 대상으로 하는 행복과 무형상계를 대상으로 하는 행복과 같은 행복의 종류를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괴로운 것으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에 해당한다. 높은 명상의 단계에서 얻어지는 선정의 매우 순수한 정신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괴로움의 모든 감정을 벗어난 순수한 마음의 명철하고 고요한 상태와 같은 괴로움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매우 높은 정신적인 상태마저도 괴로움의 진리에 속한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붓다는 이러한 선정에서 오는 정신적인 상태의 행복을 찬양한 뒤에 그러나 그것들도 역시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한다" 라고 말했다. 여기서도 "괴롭다" 라는 말이 분명히 사용된 것에 유의해야 한다. 불교에서 괴로움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고통이 아니라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든 괴롭다' 라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이다. 註. - 위 번호매김의 용어에 대한 일반적인 한역 용어는 아래와 같다. 1) 在家樂, 出家樂 2) 欲樂, 出離樂 3) 依樂, 無依樂 4) 有漏樂, 無漏樂 5) 有染樂, 無染樂 6) 非聖樂, 聖樂 7) 身樂, 心樂 8) 有喜樂, 無喜樂 9) 悅樂, 捨樂 10) 非定樂, 定樂 11) 有喜緣樂, 無喜緣樂 12) 悅緣樂, 捨緣樂 13) 色緣樂, 無色緣樂.
2) 붓다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이었다 ▲ 위로
첫째, 유혹(甘味)이고 유혹은 만족과 즐김을 수반하고 위험에는 불만과 재난이 따른다. 출리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을 말한다. 유쾌하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매혹 당하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을 자꾸 보는 것을 즐기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는다. 이것이 유혹이다. 이것은 경험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유혹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매력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이 변하여 당신이 그 사람을 볼 수 없게 되고, 이러한 향락을 박탈당할 때에는 슬픔에 잠기게 된다. 당신은 이성을 잃고 균형을 잃어 아주 어리석게 행동하게 된다. 이 때에는 나쁘고 불만족스럽고 위험하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이것이 위험이다. 이것도 역시 경험적인 사실이다. 만약 당신이 완전히 초연해서 그 사람에게 매혹을 당하지 않게 되면 그것은 자유롭고 해탈된 구출의 상태이다. 이것이 출리이다. 이 세 가지는 인생의 모든 감각적인 향락에서의 진실이다. 이상에서 불교가 염세주의나 낙관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지만, 삶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그 즐거움과 괴로움에서의 출리에 관하여 잘 알아야한다. 그래야 비로서 진정한 해탈이 가능하다. [붓다] "수행승이여,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감각적 쾌락의 그 유혹이 유혹이며, 그 위험이 위험이며, 거기에서의 벗어남이 벗어남이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 그들 스스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분명히 알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거나 그렇게 실천하는 자로 하여금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분명히 알도록 할 수 없다." 붓다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붓다] "수행승이여,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감각적 쾌락의 그 유혹이 유혹이며, 그 위험이 위험이며, 그 출리가 출리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면, 그들 스스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분명히 알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거나 그렇게 실천하는 자로 하여금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분명히 알도록 할 수 있다." 붓다가 정의한 괴로움의 개념을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범주로 살펴 볼 수 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워하는 사람이나 좋지 않은 조건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은 조건과 이별하고,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고, 슬퍼하고 비탄에 잠기고, 곤궁에 처하는 삶의 모든 괴로움, 이러한 형태의 물질적 정신적인 괴로움이 일반적으로 고통의 괴로움이다. 삶의 행복한 느낌, 행복한 조건 등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언젠가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변할 때에 고통, 아픔, 불행을 낳는다. 이러한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체험하는 것이 변화의 괴로움이다. 행위에서 언급한 괴로움의 두가지 형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이러한 형태로 이해되기 쉬운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되는 사실이다. 불교철학에 의하면 존재, 개체, 자아라고 하는 것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5온)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정신적인 힘 또는 에너지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붓다] "간략히 말해서 이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이 바로 괴로움이다." 다른 곳에서도 붓다는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수행승이여,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괴로움과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른바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다발의 개념을 알게 되면 괴로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註. 고고성(苦苦性) : 고통의 괴로움은 일반적인 고통에서 오는 괴로움이다.
3)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 ▲ 위로
유도물질이라는 말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의 물질적 감각능력(六根)과 거기에 대응하는 외부적 대상(六境)인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물이 포함되어 있다. 이 유도물질에는 내적 외적인 모든 물질의 영역이 포함된다. 2) 감수의 다발(受蘊)이다. 감수의 다발이란 느낌의 집합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감각기관이 외부의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경험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포함한다. 이 감수에는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기관에 따라 여섯가지 종류가 있다. 시각접촉에 의한 감수, 청각접촉에 의한 감수, 후각접촉에 의한 감수, 미각접촉에 의한 감수, 촉각접촉에 의한 감수, 정신접촉에 의한 감수의 여섯가지가 있다. 우리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느낌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불교철학에서 마음(心)이나 정신(意)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알아두는 것이 유용하다. 마음이나 정신이라는 용어는 물질과는 반대되는 서구적인 정신이라는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처럼 마음이나 정신을 물질과는 반대개념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마음이란 단지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감각기관이다. 그것은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조정되거나 개발될 수 있다. 붓다는 이 마음이나 정신을 포함하는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수련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시각기관과 마음이 기능상 다른 점은 눈은 세상의 빛과 보이는 물질을 감지하는데 비해 마음은 관념과 생각의 세계와 정신적인 대상을 감지한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이 감관은 서로 다른 감각으로 세상의 다른 측면을 감지한다. 빛은 들을 수 없으나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소리는 볼 수는 없으나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계의 일부분만을 표시하지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과 관념은 어떠한가? 그것도 역시 세계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느껴질 수 없으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것이 다른 기관에 의해 수용될 때에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그러나 이 다섯가지의 감각은 체험된 세계와 독립되어 있지 않다. 만약에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나면 빛깔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없으며, 소리에 대한 분석이나 다른 감관에 의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이외에는 할 수가 없다. 세상의 일부를 형성하는 관념이나 생각은 육체적인 경험에 의해서 산출되고 조건지어지며 마음에 의해서 수용되어 마음은 사물을 파악하게 된다. 마음은 시각기관이나 청각기관과 같은 감관으로 간주된다. 3) 지각의 다발(想蘊)이다. 이것은 지각의 집합을 뜻하며 지각은 개념적인 파악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기에 책상이 있다면 그것을 책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 지각에는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명칭 지어진 형상에 대한 지각, 소리에 대한 지각, 냄새에 대한 지각, 맛에 대한 지각, 감촉에 대한 지각, 사물에 대한 지각의 여섯가지가 있다. 감수와 마찬가지로 지각도 외부세계와 여섯 감관의 접촉을 통해서 일어난다. 4) 형성의 다발(行蘊)이다. 이것은 육체적 언어적 정신적 형성의 집합을 뜻한다. 여기에는 선악과 같은 의도적 행위가 개입한다. 일반적으로 업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생겨난다. 업에 관해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붓다] "수행승이여, 내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이다. 의도가 있으면 육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행하게 된다." 의도란 기본적으로 정신적 구성이며 정신적 형성이다. 이것은 마음을 선이나 악 또는 선악도 아닌 것으로 향하게 한다. 형성에는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명칭되는데 곧 지어진 형상에 대한 의도, 소리에 대한 의도, 냄새에 대한 의도, 맛에 대한 의도, 감촉에 대한 의도, 사물에 대한 의도의 여섯가지가 있다. 감수와 지각은 의도적 형성이 아니다. 그것들은 업보를 낳지 않는다. 믿음, 숙고, 의욕, 해석, 집중, 지혜, 정진, 탐욕, 성냄, 무명, 교만, 실체에 집착하는 견해 등은 업보를 낳는 의도적인 형성들이다. 이렇게 형성의 다발을 구성하는 52가지의 의도적 형성들이 있다. 5) 의식의 다발(識蘊)이다. 이것은 의식의 집합을 뜻하는데 의식이란 여섯가지 감각기관과 이에 대응하는 외부의 대상이나 현상의 반응이다. 예를 들어 시각의식(眼識)은 시각을 근거로 하고 형태를 대상으로 하여 보는 작용이다. 정신의식(意識)은 정신을 근거로 하여 관념이나 생각을 포함하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그래서 이 정신의식은 다른 감관과 연결되어 있다. 감수, 지각, 형성과 같이 의식에도 시각접촉에 의한 의식, 청각접촉에 의한 의식, 후각접촉에 의한 의식, 미각접촉에 의한 의식, 촉각접촉에 의한 의식, 정신접촉에 의한 의식의 여섯가지가 있다. 의식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알아차림이다. 대상의 존재를 단지 알아채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이 파란 색의 물체를 보았을 때에, 안식은 빛깔의 존재를 알아챌 뿐이고, 그것이 파란 색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단계에서는 아무런 인식이 없다. 그것이 파란 색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는, 지각(想)의 단계이다. 시각의식이라는 말은 곧 '본다' 와 같은 뜻을 지닌 것이다. 다른 형태의 의식들도 마찬가지다. 註. - 형성 : samkhara. 行. 의도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samkhara는 다섯존재의 다발 가운데 가장 외연이 넓은 의미를 지닌다. 다른 문맥에서 모든 조건지어진 것을 가르킬 때에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존재의 다발이 samkhara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역자는 형성(形成)이라고 번역한다.
4) 물질과 의식 ▲ 위로 불교철학에 의하면 물질의 반대 개념으로서 '자아' '영혼' '자기' 라고 생각될 수 있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정신은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되풀이해야겠다. '의식' 은 물질의 반대개념으로서의 서구적인 정신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이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의식이 삶의 지속적인 본질로서 계속되는 자아나 영혼의 일종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근본불교의 시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붓다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싸띠는 세존께서 '이 의식은 전생하고 윤회하는 것이다' 고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붓다는 그에게 '의식' 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싸띠는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 저기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붓다는 그를 꾸짖어 말했다. [붓다] "이 어리석은 자여, 내가 이와 같이 그 이치를 누구에게나 가르쳤는데 그것을 모르는가?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곧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설하지 았았던가? 의식이란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시각을 조건으로 형상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시각의식이라고 한다. 청각을 조건으로 소리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청각의식이라고 한다. 후각을 조건으로 냄새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후각의식이라고 한다. 미각을 조건으로 맛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미각의식이라고 한다. 촉각을 조건으로 감촉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촉각의식이라고 한다. 정신을 조건으로 사물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정신의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예를 들어가며 더욱 자세히 말했다. [붓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불이란 그 연료에 따라서 이름지어진다. 불이 장작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장작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섶에 의해서 타게 되면 그 때는 섶불이라고 불린다. 이와 같이 의식이란 그것이 생겨나게 된 조건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대주석가인 붓다고싸는 특히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붓다고싸] "나무에서 일어나는 불은 나무가 공급될 때만 탄다. 나무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조건의 결핍으로 불은 꺼진다. 불은 숯 등에 접근하여 숯불 등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각과 형상의 관계에서 생겨난 의식은 시각기관과 형상과 빛과 주의력 등이 있을 때에 한해서 시각에서 생겨난다. 그러한 것이 없으면 조건의 결핍으로 거기서 사라진다. 의식이 청각에 접근해서 청각의식 등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붓다는 의식이란 물질, 감수, 지각, 형성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것들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혔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에 집착하면 의식은 거기에 머물면서 유지되고 물질을 대상으로 물질을 바탕으로 향락에 의존해서 자라고 성장하고 증대될 것이고, 감수에 집착하면 의식은 거기에 머물면서 유지되고 감수를 대상으로 감수를 바탕으로 향락에 의존해서 자라고 성장하고 증대될 것이고, 지각에 집착하면 의식은 거기에 머물면서 유지되고 지각을 대상으로 지각을 바탕으로 향락에 의존해서 자라고 성장하고 증대될 것이고, 형성에 집착하면 의식은 거기에 머물면서 유지되고 형성을 대상으로 형성을 바탕으로 향락에 의존해서 자라고 성장하고 증대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물질을 제외하고 감수를 제외하고 지각을 제외하고 형성을 제외하고 의식의 오고감, 죽음, 태어남, 자라고 성장하고 증대되는 것을 시설할 것이다' 라고 한다면, 그러한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여기 존재의 다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다. '존재' 니 '개체' 니 '자아' 니 하는 것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의 조합에 주어진 편리한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무상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 괴롭다'. 붓다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는 '괴로움은 다섯가지 집착하는 존재의 다발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두 개의 연속적인 순간은 같은 것이 아니다. A는 A와 다르다. 그것들은 순간적으로 생겨나고 사라지는 흐름이다. [붓다] "바라문이여, 예를 들어 산에서 기원하여 유장하고도 빨리 흐르며 주위의 모든 것을 강탈하는 강은 멈추는 찰나도 경각도 순간도 없이, 나가고 휘감아 흐르듯이,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인간의 삶은 산에서 기원하는 강과 같다." 붓다는 랏따빨라에게 말했다. [붓다] "인생은 짧고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연기의 법은 세상에 하나가 사라지면 다음 것이 나타나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실체란 없다. 여기 영원한 자아, 개체, '나' 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의존되어 있는 정신적 물질적 다발들이 정신-물리적인 기계처럼 작용할 때에 '나' 라는 관념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관념이나 정신적인 형성에 불과하다. 곧 그것은 영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註. - 붓다고싸 : buddhaghosa. 빠알리 삼장(三藏)에 대한 위대한 주석가. 그는 붓다가야의 한 마을에서 바라문으로 태어나 베다에 정통했다. 어느날 레바따라는 승려를 만나 논쟁에서 지고 불법에 귀의했다. 그의 언변이 부처님처럼 심오하여 세상에 알려지면서 붓다고싸(佛音)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는 스승 레바따의 제안으로 스리랑카에 가서 싱할리 주석서를 공부하고 정리하여 빠알리 삼장의 각종 주석서들을 완성하고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 랏따빨라 : ratthapala. 확신으로 출가한 자들 가운데 최상자이다. 그는 꾸루국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부처님이 그 지방을 방문했을 때에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으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자 죽음에 이르는 단식을 하여, 출가후에 부모를 찾아뵙는 것을 조건으로 허락을 받아냈다. 그후 싸밧티로 부처님과 동행하여 수행했으며 12년 간을 침대에 눕지 않고 수행하여 아라한의 지위에 올랐다.
5) 언제나 미소짓는 사람 ▲ 위로 붓다는 흔히 '존재' 라고 불리는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은 형성의 괴로움에 속한다. 존재의 다발의 배후에 괴로움을 체험하는 '존재' 나 '나' 는 없다. 그래서 붓다고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다고싸] "괴로움은 있지만 괴로워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고 행위는 있지만 행위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열반은 있어도 열반하는 자는 없고 길은 있어도 길을 가는 자는 없다." 움직임의 배후에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은 없다. 오직 움직임만이 있다. 삶이 움직인다는 것은 옳지 않다. 삶 그 자체가 움직임이다. 삶과 움직임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것의 배후에 생각하는 자는 없다. 생각을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생각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이 데카르트 학파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삶은 시작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삶이란 흐름의 근원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은 이러한 대답에 당혹해 할 것이다. 그러나 붓다에게 '신이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붓다는 서슴없이 '신은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자신의 이러한 대답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며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은 시설되지 않는다." 붓다는 더 나아가서 윤회의 원인이 되는 무명에 관하여 무명의 시작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무명은 없다라는 식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무명의 선행(先際)는 '이것보다 앞에는 무명이 없다. 이것의 뒤에 무명이 발생한다' 라고 시설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은 이와 같이 설해진다. 그렇지만 '무명은 조건적인 것이다' 라고 시설된다. 무명은 수행승들이여, 자양분을 수반하며 자양분을 수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며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도 본다." 이러한 진리가 어떤 사람들이 잘못 상상하는 것처럼 불교도들을 우울하고 슬픈 삶으로 이끌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진정한 불교도는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들에게는 공포나 탐욕이 없다. 그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때문에 변화나 뜻하지 않은 재난에 대하여 흥분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언제나 평온하고 고요하다. 불타는 음울하거나 음산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언제나 미소짓는 사람' 이라고 불리었다. 붓다의 그림이나 조각 속에서 붓다는 언제나 행복하 고요하고 만족스럽고 자비롭게 표현되어 있어 고뇌나 번민이나 고통의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비록 삶에 고뇌가 따른다고 하더라도 불교도는 그것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못 견뎌해서는 안된다. 불교에 의하면 삶의 근본적인 악 가운데 하나가 '증오' 나 '비난' 이다. 증오란 "생명에 대한 악의, 고통에 대한 악의, 고통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악의를 말한다. 그 기능은 불행한 상태와 악한 행위의 토대를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괴로움을 못 참고 화를 낸다고 해서 괴로움은 없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더하게 하여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필요한 것은 화를 내거나 못 견뎌하거나 하지말고 괴로움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제거될 수 있는가 등 괴로움의 문제를 이해해서 인내, 지혜, 용기, 힘 등을 가지고 그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다. 초기경전에는 테라가타(장로게)와 테리가타(장로니게)라는 두 경전이 있다. 거기에는 붓다의 제자들에 관한 에피소드로 가득 차 있다. 하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행복과 평화를 얻은 남성 수행자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여성 수행자에 관한 것이다. 꼬쌀라국의 왕이 붓다에게 "여위고 거칠고 창백하고 노랗게 맥없어 보이고 혈관이 드러난" 것처럼 보이는 다른 종교의 많은 제자들과는 달리 붓다의 제자들은 "즐겁고 의기양양하고, 기쁜과 희열에 넘치고, 정신적인 생활을 즐기고, 감각적으로 만족하며, 걱정이 없으며, 고요하고, 평화롭고, 사슴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왕은 이러한 건강한 성품은 제자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잘 깨달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존이시여, 이것에 대하여 저는 이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이 존자들은 세존의 가르침에서 뛰어난 것, 시대를 초월한 승묘한 것을 지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불교는 진리의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우울하고 슬프고 뉘우치는 음산한 태도와는 아주 정반대이다. 반면에 기쁨은 열반을 깨닫기 위해 연마해야 할 본질적인 요소로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7각지-후술-)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1) 무엇을 조건으로 괴로움이 생겨나는가 ▲ 위로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두번째의 거룩한 진리를 말한다. 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가장 일반적이고 잘 알려진 정의는 아래와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 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인데 그것은 곧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그 자체를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 등이다. 그러나 불교에 의하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상호의존하기 때문에 하나의 원인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이러한 탐욕들만이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괴로움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곧 감수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수는 접촉에서 일어나며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나중에 거론하게 될 유명한 조건적 발생의 원리인 연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갈애나 탐욕은 괴로움의 발생을 일으키는 첫번째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손으로 만져질 수 있는 것과 같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며 '주요한 것' 이며 '보편적인 것' 이다. 그래서 빠알리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으로서 갈애를 제일 먼저 들고 있지만, 그것은 오염이나 번뇌를 포함하고 있다. 이 제한된 지면에서 우리는 이러한 갈애가 무지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충분하리라고 본다. 여기서 '갈애' 혹은 '탐욕' 이라는 용어는 감각적 쾌락,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뿐만 아니라 관념과 이상, 관점과 견해, 이론과 개념, 신앙 등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 곧 법에 대한 애착을 포함한다. 붓다의 분석에 따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싸움과 분쟁은 작게는 가족들 사이의 사사로운 다툼에서 크게는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기적인 '탐욕' 에서 일어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은 이기적인 탐욕에 뿌리박고 있다. 국제적인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쟁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위대한 정치가도 이 문제를 피상적으로 손댈 뿐 결코 문제의 뿌리에까지 깊이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이 탐욕이 재생과 윤회를 낳게 되는가는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와 일치하는 거룩한 진리인 괴로움의 발생의 철학적인 측면을 더욱 깊이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 업과 윤회 ▲ 위로
"정신의 의도는 중생이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통하여 활동하며 존재의 뿌리를 만들어내어 존속하려는 것이다." 붓다 자신이 정의한 것처럼 정신적인 의도가 업이라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미 언급한 정신적인 의도에 관하여 붓다는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정신적 의도의 자양분을 두루 알면 갈애의 세가지 형태를 두루 안다."
3) 괴로움의 원인은 괴로움 내부에 있다 ▲ 위로 여기서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 있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나 근원은 괴로움 그 자체 내부에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또한 괴로움의 소멸을 가져오는 원인이나 근원도 괴로움 그 자체의 내부에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주의 깊게 새기고 명심해야한다. 이것이 빠알리 경전에 자주 보이는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는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존재이든 사물이든 조직이든 간에 그 자신 내부에 발생과 지속의 원인을 갖고 있다면, 그 자신의 내부에 또한 단절과 파괴의 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괴로움은 그 자신 속에 발생의 근원을 갖고 있으며 그 자신 속에 소멸의 원인을 갖고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를 다룰 때에 다시 논의할 것이다. 빠알리어의 깜마나 범어의 까르마라고 하는 '업' 은 문법적으로 끄리라는 동사어근에서 파생된 것으로 '행위, 행동'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이론에서 업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모든 행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행동' 을 뜻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거나 아무렇게나 이해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결과를 뜻하지도 않는다. 업보라는 말은 행위의 과보라는 뜻으로 쓰인다. 욕망이 상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처럼 의도도 상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 마찬가지로 의도적인 행위인 업도 선하거나 악하다. 좋은 업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업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탐욕, 의도, 업과 같은 것들은 그 결과로서 어떤 힘,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지속하려는 힘을 갖게 된다. 선이든 악이든 그것은 상대적이며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 있는 것이다. 거룩한 이(아라한)는 비록 그가 행동하더라도 업을 쌓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거짓된 관념, 윤회를 지속시키는 탐욕, 모든 번뇌와 유루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업의 이론은 이른바 도덕률이나 상벌의 이론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도덕률이나 상벌의 개념은 심판대에 앉아서 법을 부여하는 자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최고의 존재, 곧 신의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도덕률로서의 정의라는 개념은 애매 모호하고 위험하고 신이 인간성에 관여하는 것보다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업의 이론은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이론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법칙이지 도덕률이나 상벌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의도적인 행위는 그 결과나 효과를 낳는다. 좋은 행위는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행위는 나쁜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당신의 행위를 심판대에 앉아서 심판하는 권력이나 심판자에게 부여되는 정의나 상벌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스스로의 법칙, 그 자신의 덕인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업의 이론 가운데 어려운 것은 의도적인 행위의 효과가 죽은 후의 삶 속에 스스로를 계속 들어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여기서 제기된다. 앞에서 존재는 단지 정신적 물리적인 힘이나 에너지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질적인 육신이 그 활동을 모두 정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고 가장 큰 에너지이다. 불교에 의하면 이 힘은 죽음을 의미하는 몸의 기능이 정지된 후에도 작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며 재생이라고 부르는 윤회를 낳는다.
4) 자아없이 어떻게 윤회 하는가? ▲ 위로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만약 자아나 영혼과 같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실체나 본질이 없다면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는 죽은 후의 삶을 이야기하기 전에 현재의 삶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속하는지 살펴보자. 이미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삶이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의 집합이며 정신물리적인 힘의 결합이다. 이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연속적인 두 순간에도 그들은 똑같지 않다. 매순간마다 그것은 생겨나고 사라진다. 붓다는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수행승이여,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이 생겨나고 파괴되고 사라지고 죽을 때마다 우리들은 태어나고 파괴되고 사라지고 죽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생동안 우리는 매순간마다 태어나고 죽지만 우리는 지속한다. 이러한 삶 속에서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자아나 영혼이 없이도 삶이 존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육체의 기능이 정지한 후에도 이런 힘의 배후에 자아나 영혼이 없이도 이러한 힘들이 존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이해할 수 없겠는가? 이 육체가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에 에너지는 육체와 더불어 죽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삶을 부를 수 있는 어떤 다른 형태를 취해서 지속해 나아간다. 어린아이는 정신적, 육체적, 지적 능력이 유약하지만 그 내부에 완전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른바 존재를 형성하는 물질적 정신적 에너지가 그 내부에 새로운 형태를 취해서 점점 자라나 완전히 성숙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영원하고 불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분명히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파괴되지 않은 채로 지속하지만 순간마다 변화하는 연속이다. 이 연속이란 실제로 움직임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밤을 새워 타는 불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불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불꽃도 아닌 것이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60세가 된다. 그 어른은 60년 전의 어린아이와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처럼 여기서 죽은 사람과 다른 곳에서 윤회하여 태어난 사람은 같은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연속의 계속이다. 태어남과 죽음의 차이는 일 순간의 생각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이 생에서 마지막 생각의 순간이 이른바 내생에서의 처음 생각의 순간이다. 그것은 실로 연속의 계속이다. 이 생 자체에서도 한 생각은 다음 생각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불교적 시각에서 사후의 문제는 커다란 신비가 아니다. 불교는 이 문제에 관하여 결코 근심하지 않는다. 존재하고 무엇이 되려는 탐욕이 있는 한 윤회는 계속된다. 마구 내닫는 탐욕이 진실이나 열반을 보는 지혜로 부수어졌을 때에만 윤회는 그칠 수 있다.
1)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 ▲ 위로 괴로움의 소멸이란 괴로움, 또는 괴로움의 지속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라고 하는데 바로 열반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괴로움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뿌리가 되는 갈애나 탐욕을 없애야 한다. 그러므로 열반은 갈애의 종식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열반이란 무엇인가? 이 간단하고도 당연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책이 쓰여졌다. 그러나 그러한 책들은 문제를 명확히 하기보다는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대답은 인간의 언어는 열반이라는 궁극적인 진리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에 언어로서는 결코 완전하고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이 그들의 감관이나 마음으로 경험한 일이나 생각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절대진리와 같은 출세간적인 진리는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고기가 육지의 환경을 표현할 말이 없는 것처럼 절대진리의 경험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거북이가 "육지를 거닐다가 바다로 돌아왔다" 라고 그의 친구 거북이에게 말했더니 "물론 헤엄쳤다는 말이겠지" 라고 대답했다. 거북이는 땅위에서는 단단하기 때문에 수영을 할 수 없고 걸어다녀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땅도 바다와 같은 물이며 거기에는 파도가 있고 헤엄칠 수 있는 곳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언어란 우리에게 알려진 사물과 관념을 표시하는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들이 일상적인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전달할 수도 전달될 수도 없다. 언어는 진리를 깨닫는데 방해가 되거나 진리를 오도할 경우가 많다. 그래서 능가경은 "어리석은 사람은 진흙 속의 코끼리처럼 말속에 묻혀버린다" 고 말한다. 그러나 언어 없이는 살 수 없다. 하지만 열반이 긍정적인 용어로 표현되거나 설명된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 표현과 연관된 개념을 잡으려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그러므로 열반은 주로 부정적인 용어 - 아마도 덜 위험한 용어로 표현되어 왔다. 그래서 그것은 갈애의 소멸(愛盡), 무위(無爲), 이탐(離貪), 사라짐(止滅), 적멸(寂滅) 등의 부정적인 용어로 표현된다. 빠알리 대장경에 나오는 열반에 관한 몇가지 정의를 살펴보자. [붓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붓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보내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은 보기 어렵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무위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라고 한다." [붓다] "라다여, 갈애가 부수어진 것이 열반이다." [붓다] "수행승이여, 조건적이든 무조건적이든 탐욕을 여의는 것이 최상이다. 그것은 자만의 분쇄이며, 갈증의 파괴이며, 집착의 뿌리뽑음이며, 윤회의 자름이며,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이다." 이교도가 제기한 '열반은 무엇인가?' 라는 당돌한 질문에 대한 붓다의 수제자 싸리뿟따의 대답은 "탐욕을 여의고, 성냄을 여의고, 어리석음을 여의는 것" 으로서 붓다가 이야기한 무위에 관한 정의와 일치한다. 싸리뿟따는 또한 "존재의 취착다발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파괴하고 버리는 것,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고 말한 바가 있다. 계속해서 열반에 대한 붓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붓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성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에 그 태어나지 않고 생성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성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에서 벗어남은 시설될 수 없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성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태어나고 생성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에서의 벗어남이 시설될 수 있는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공간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의식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경지도 없고,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도 없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해도 달도 없다. 나는 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멈추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기반도 없고 유전도 없고 대상도 없는 이것이야말로 나는 괴로움의 종식이라고 부른다." 註. - 열반에 관한 표현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용어들은 모두 비유적인 것이다.
2) 열반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 위로 열반은 이와 같이 부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열반은 부정적이고 자아포기적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열반은 분명히 자아부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정할 자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부정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환상이나 그릇된 자아에 대한 부정적인 것이다. 열반을 두고 부정적이나 긍정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부정이나 긍정이라고 하는 개념은 상대적이며 이원성의 영역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이원성과 상대성을 넘어서 있는 열반이라는 절대적 진리에 적용될 수 없다. 부정적인 말이 반드시 부정적인 상태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에 대한 빠알리어나 범어는 아로기야(arogya,無病)인데, 그것은 문법적으로 '병이 없음' 을 뜻하는 부정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아로기야는 부정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이 아닌 것으로 열반의 동의어로 가장 잘 알려진 말은 '해탈' 이라는 말이다. 어느 누구도 해탈이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이 해탈이라는 말도 부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해탈은 언제나 방해가 되고 악하고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나 해탈은 부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열반, 해탈, 절대적인 자유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모든 이원성과 상대성, 시간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에는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열반의 개념이 나와 있다. 이러한 중요한 이야기를 붓다는 옹기장이의 움막에서 현명하고 성실해 보이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뿟꾸싸띠에게 설했다. 경전에서 이와 관련된 부분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여섯가지 요소, 곧 땅, 물, 불, 바람, 공간과 의식(地水火風空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을 분석해보면 '내것' '나' '자아' 라는 것은 발견할 수 없다. 사람은 어떻게 의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어떻게 기쁘고 불쾌하고, 기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느낌을 알아채더라도 그의 마음이 초연하게 되면, 그는 자기의 내부에서 평정심(捨心)을 발견한다. 그러면 그는 어떤 최고의 정신적인 상태의 성취로 향할 수 있어, 순수한 평정심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붓다] "만약 내가 공간이 무한한 경지에다가 순수하고 청정한 평정심을 집중해서 마음을 닦아 그러한 상태에 순응시키면 그것도 바로 조건지어진 것이다. 만약 내가 의식이 무한한 경지에다가 순수하고 청정한 평정심을 집중해서 마음을 닦아 그러한 상태에 순응시키면 그것도 바로 조건지어진 것이다. 만약 내가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다가 순수하고 청정한 평정심을 집중해서 마음을 닦아 그러한 상태에 순응시키면 그것도 바로 조건지어진 것이다. 만약 내가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에다가 순수하고 청정한 평정심을 집중해서 마음을 닦아 그러한 상태에 순응시키면 그것도 바로 조건지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유와 무를 정신적으로 창조하려고 하거나 의도하지 않는다. 그가 유와 무를 시설하거나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열망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완전한 열반에 들어 완전한 평온에 머문다. 그는 "다시 태어남은 종식되었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할 일은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안다. 그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체험했을 때에 그것들은 무상하여 자신을 속박시키지 못하며 감정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붓다] "수행승이여, 이러한 사람은 최상의 지혜를 성취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앎은 가장 거룩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기반을 둔 이러한 해탈은 흔들리지 않는다. 수행승이여, 허망한 것은 거짓이고, 진실한 것은 열반이고 진리이다. 그러므로 수행승이여, 이러한 사람은 최상의 지혜를 성취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한 것이 열반이라는 것은 곧 최상의 거룩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붓다는 열반을 설명할 때에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나는 진리와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칠 것이다." 고 말했다. 여기서 진리는 명확하게 열반을 의미한다.
3) 절대적인 진리란 무엇인가 ▲ 위로 불교에 의하면 절대적인 진리란,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조건지워져 있으며 무상하고, 자아, 영혼, 진아와 같은 불변하고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절대적인 실체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이다. 진리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나지만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환상이나 무명을 제거하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 곧 진리를 깨닫는 것은 탐욕을 끊는 것이며,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이며, 열반이다. 열반에 대한 대승불교적인 관점은, 그것이 윤회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관점은 흥미로운 것이지만 기억해둘 만한 것이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 윤회와 열반은 같은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대승의 관점은 우리가 이미 간략하게 논의한 바가 있는 테라바다의 빠알리 경전에 나와 있는 이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열반이 탐욕을 끊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열반은 어떠한 것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이 결과라면 원인에 의하여 산출되는 결과일 것이다. 그 결과로 조건지어진 것, 곧 유위이다. 열반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열반은 원인이나 결과를 넘어서 있다. 진리는 결과나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선정이나 삼매와 같은 신비적, 정신적, 또는 영적인 상태를 낳지 않는다.
4) 자아가 없다면 누가 깨닫는가 ▲ 위로 또 일반적인 의문이 있다. '자아' 또는 '진아(眞我)' 가 없다면 누가 열반을 깨닫는가? 열반을 거론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자아가 없다면 지금 누가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는 앞에서 생각하는 것은 생각이지 생각의 배후에서 생각하는 자는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깨닫는 것은 지혜나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배후에 다른 자아는 없다. 또한 괴로움의 발생에 관한 논의에서 존재이든, 사물이든, 조직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발생의 성질을 갖고 있다면 그 내부에 소멸이나 파괴의 원인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따라서 윤회와 괴로움이 발생의 성질을 갖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 소멸의 성질도 갖고 있는 것이다. 괴로움은 탐욕 때문에 일어나고 지혜 때문에 소멸한다. 탐욕과 지혜는 모두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에 속한다. 그래서 발생뿐만 아니라 소멸도 존재의 다발에 속한다. 그것은 붓다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붓다] "이 의식이 있는 육천단신의 몸 속에서 나는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시설한다." 이 말은 곧 네 가지 거룩한 진리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인 우리 자신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낳는 외부적인 힘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따라서 지혜가 계발되고 배양되면 지혜는 있는 그대로의 삶의 비의와 사물의 실제를 보게된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최고선은 죽은 후에야 비로서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열반은 바로 이 생에서 실현될 수 있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죽음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진리인 열반을 깨달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는 모든 강박관념, 괴로움, 남을 괴롭히는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있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또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 현재에 충실하게 산다. 그는 모든 이기적인 탐욕, 증오, 무지, 속임수, 교만을 비롯한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보편적인 사랑, 자비, 친절, 동정, 이해와 관용 등으로 가득 차있다.
5) 열반의 초월성 ▲ 위로 열반은 모든 이원성과 상대성을 초월해 있다. 그러므로 선과 악, 옳고 그름,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을 초월해 있다. 열반을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즐거움이란 말조차 여기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싸리뿟따는 한 때에 이와 같이 말했다. [싸리뿟따] "벗이여, 열반은 즐거움이다. 열반은 즐거움이다." 라고 말했다. 그 때에 우다이가 물었다. [우다이] "그러나 벗이여, 싸리뿟따여, 감수가 없다면 즐거움이 있을 수 있는가?" 싸리뿟따는 대답했다. [싸리뿟따] "감수 그 자체가 없는 것이 즐거움이다." 열반은 논리나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열반이나 궁극적인 진리, 깨달음에 대해서 제 아무리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아가고 지적인 유희를 펼쳐 나아가도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유치원 아이가 상대성의 이론에 대하여 논쟁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가 끈기 있고 근면하게 정진한다면 그것을 깨닫게 된다. 열반은 '슬기로운 자에 의해서 각자 깨달아지는 것' 이다. 인내하며 부지런히 그 길을 따라서 성실하게 자기 자신을 정화시켜 나아가고 단련시키면서 필요한 정신적인 수행을 해나가면 까다로운 말장난을 하지 않고서도 언젠가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깨닫게 된다.
1) 세가지 배움과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 ▲ 위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네번째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길은 두가지 극단을 피하기 때문에 중도라고 알려져 있다. 하나의 극단은 쾌락주의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극단은 고행주의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두 가지 인가? 하나는 감각적 쾌락에 관해 탐착하는 것을 일삼은 것이니 저열하고 비속하고 범부의 소행으로 성현의 법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괴롭힘을 일삼는 것이니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법이 아닌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 이러한 두 극단이 쓸데가 없다는 사실을 안 붓다는 이 두 극단적인 수행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발견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이 생기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며 고요함, 탁월한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이 중도는 여덟가지의 범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八聖道)이라고 불린다. 1. 올바른 견해 (正見,sammaditthi) 2. 올바른 사유 (正思惟,sammasankappo) 3. 올바른 언어 (正語,sammavaca) 4. 올바른 행위 (正行,sammakammanto) 5. 올바른 생활 (正命,sammaajivo) 6. 올바른 정진 (正精進,sammavayamo) 7. 올바른 새김 (正念,sammasati) 8. 올바른 집중 (正定,sammasamadhi) 실제로 붓다가 45년간 설한 모든 가르침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는 이해하고 따르는 능력과 수행의 정도에 따라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이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설했다. 따라서 불경에 흩어져 있는 수천이 넘는 법문은 모두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의 여덟가지 수행은 순서대로 하나를 수행하고 나서 다음 것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붓다가 위와 같은 순서를 밝혀 경전의 어느 곳에서나 어김없이 설법을 했다. 물론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소간 동시적으로 수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덟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각각의 수행은 다른 것의 수행을 돕는다. 이 여덟가지 수행은 불교에서 세가지 배움(三學)을 닦기 위한 것이다. 이 여덟가지의 각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의 순서적 다발로 구분된다. 1. 계행의 다발(戒蘊,silakkhandha) :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2. 집중의 다발(定蘊,samadhikkhandha) :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 3. 지혜의 다발(慧蘊,pannakkhandha)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그러나 이렇게 분류하면 계행 -> 집중 -> 지혜의 세가지 배움의 계기가 여덟가지 수행의 순서와 들어맞지 않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지혜는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의도를 수반하는 세가지 배움의 최종단계지만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의도는 예상 밖으로 경전상에 팔정도의 최초의 두 단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덟가지 수행의 순서는 부주의한 실수의 결과가 아니라 중요한 논리적 숙고에 의한 배려였다. 붓다는 마지막 설법에서 반복해서 이러한 세가지 배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다] "손으로 손을, 발로 발을 씻는 것처럼 지혜는 계행을 통해 씻겨지고 계행을 지혜를 통해 씻겨진다. 계행이 있는 곳에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곳에 계행이 있다." 따라서 지혜를 구성하는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가 있는데 그것이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나 올바른 사유가 되면 여덟가지 수행의 출발점이 되고 출세간적인 것이 되면 궁극적인 지혜에 해당하게 된다. 올바른 견해는 출발이자 종착이므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은 직선의 길이라기보다는 수레바퀴와 같다. 윤리적인 규범인 계행은 불타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모든 생명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과 자비라는 위대한 개념위에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불타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은 올바른 견해에 해당하고 보편적인 사랑과 자비는 올바른 사유에 해당한다. 학자들이 불교에 관해 논의할 때에,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이러한 위대한 이념을 잃어버리고,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메마른 측면으로 빠져버리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붓다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사람들에 대한 자비로 가르침을 베풀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두가지 측면, 곧 한편으로는 자비와 또한 한편으로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여기서 자비는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사랑, 동정, 친절, 인내와 같은 거룩한 성품인데 지혜는 정신의 지적인 능력을 나타낸다. 사람이 지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정서적인 측면만 개발하면 그는 좋은 마음을 지닌 바보가 되어버린다. 반면에 정서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지적인 측면만 개발하면 그는 냉혹한 지성이 되어버린다. 인간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지혜와 자비를 동시에 개발해야 한다. 그것이 불교적인 삶의 목표이다. 그 속에 지혜와 자비는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다. 팔정도의 출발인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가 곧 지혜와 자비인데 이것은 모든 여덟가지 성스러운 수행에서 수반한다.
2) 올바른 견해 (正見) ▲ 위로 올바른 견해는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고 또한 아는 것에 기반을 둔 기초적인 연기법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붓다] "사람이 만약 더러운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에 따른다. 바퀴가 소의 발을 따르듯이. 사람이 만약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떠나지 않듯이." 올바른 견해는 출발점에서 분명하게 깨달아지지 않고 단지 개념적으로 이해되어 수용되는 믿음의 과정이더라도 해탈 과정의 정신현상에 기여하게 된다. 이러한 올바른 견해에는 세속적인 것과 출세간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에는 번뇌를 수반하며 공덕을 갖추고 과보를 초래하는 것(有漏)이 있으며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에는 성스럽고 번뇌 없이 세상을 뛰어넘는 길의 요소에 속한 것(無漏)이 있다." [붓다] "무지한 자에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겨난다면, 그가 만든 그러한 업은 크거나 작거나 무릇 자신이 받아야 하며 남이 받을 수 없다." 업과 과보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윤회의 한계 안에서 선한 행위를 추구하고 보다 높은 존재 상태를 얻는데 합리성을 제공하지만 그 자체로서 해탈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는 궁극적인 해탈과 관계된다. 윤회의 전과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해탈은 모든 형태의 윤회를 구성하는 존재의 특성에 관한 깊은 통찰에 의존한다.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는 이러한 해탈로 이끄는 것인데,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통찰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의미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발생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통찰하는 것,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라고 부른다."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은 인식의 주체를 인정하는 우리의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개념적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그러한 과정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동일한 진리에 대한 지혜에 의한 직관적인 통찰이 성취된다. 그래서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올바른 견해는 괴로움의 소멸, 즉 열반에 이르는 길의 시작이자 길의 종극인 것이다. 이때 길의 시작으로서의 올바른 견해를 '진리에 따르는 올바른 견해(saccanulomika-)' 라고 부르기도 하며 길의 종극으로서의 올바른 견해를 '진리를 꿰뚫는 올바른 견해(saccapativedha-)' 라고 한다. 이러한 진리에 꿰뚫는 올바른 견해는 깊은 집중의 삼매 속에서 가능한것이다.
3) 올바른 사유 (正思惟) ▲ 위로 올바른 사유는 모든 존재로 확산되어 갈 수 있는 무아적인 이욕 또는 사랑과 비폭력의 생각을 뜻한다. 그런데 올바른 사유는 지혜에 속하므로 무아적인 이욕(離欲), 사랑, 비폭력에 대한 생각이 지혜의 측면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이다. 이러한 올바른 사유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인 어떤 영역에서든 진정한 지혜는 이러한 고귀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기적인 탐욕, 악의, 증오, 폭력의 모든 생각은 지혜가 부족한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붓다는 [맛지마 니까야]에서 올바른 사유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1. 욕망을 여읜 사유 (出離思惟, nekkhanmma sankappa) 2. 성냄을 여읜 사유 (無애思惟, avyapada sankappa) 3. 폭력을 여읜 사유 (無害思惟, avihimsa sankappa) 이러한 올바른 사유에 비해 그릇된 사유는 각각 욕망의 사유, 성냄의 사유, 폭력의 사유에 해당한다. 붓다는 선정에 들기 이전에 숲 속에서 사유하면서 그의 사유가 위와 같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올바른 사유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그 양자를 해치지 않는다. 지혜를 증진시키고 고뇌를 수반하지 않으며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으며 그릇된 사유가 일어날 때마다 그 반대로 생각했다. 올바른 사유는 올바른 견해 또는 세계관을 조건으로 수습되는 결과로서 세계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행위하는 도덕적 실천의 원인을 제공한다. 이때에 도덕적 행위는 도덕적인 사유를 항상 수반하게 된다. 불교의 윤리는 여타의 다른 종교처럼 보상에 대한 기대나 처벌에 대한 공포에서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올바른 사유에서 오는 것이다. [붓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들에게도 삶은 사랑스러우므로 그들의 존재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여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아라." 1. 욕망을 여읜 사유는 감각적인 쾌락인 오욕락(五欲樂), 즉 눈에 의해 인식되는 색, 귀에 의해 인식되는 소리, 코에 의해 인식되는 냄새, 혀에 의해 인식되는 맛, 몸에 의해 인식되는 촉감의 유혹과 위험을 알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2. 성냄을 여읜 사유는 진애를 소멸시키고 치유하기 위해서 붓다는 자애(慈,metta)를 강조했다. 자애의 어원은 '우정' 을 의미하지만 그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므로 보통 자비로 번역한다. 자애는 감각적인 사랑이나 애정 또는 순간적인 동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으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뛰어넘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자애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무아적 사랑을 의미한다. 자비의 요체는 자신이 스스로 행복해지길 바라듯이 '모든 중생이 행복할 지어다' 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3. 폭력 여읜 사유는 그것은 잔혹하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사유를 없애는 연민(悲,karuna)의 마음으로 사랑의 보충적인 개념이다. 자애가 모든 존재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특징을 지녔다면 연민은 비폭력의 사유로서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는 특징을 지녔다. 이러한 연민은 자애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같은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노병사의 고통 속에 속박되어 있다는 깊은 자각에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폭력을 여읜 사유는 성냄을 여읜 사유에 따르는 사유로 자애와 연민이 합쳐진 자비의 실천으로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4) 올바른 언어 (正語) ▲ 위로 올바른 언어는 표현 방법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일어날 수 있는 비윤리적인 것을 경계한 것이다. 올바른 언어는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들 사이에 증오, 적대감, 불일치, 부조화를 불러오는 험담, 모함을 하거나 또는 시기를 하거나 거칠고, 조야하고, 무례하고, 악의에 차있고, 모욕적인 말을 하거나 게으르고, 어리석고, 쓸데없는 수다 또는 농담을 지껄이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1. 거짓말을 하지 말 것(不妄語)이라는 이 윤리적 덕목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계율의 덕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짓말을 하지 말되 진실을 말하라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붓다] "여기 쭌다여,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끊고 거짓말을 삼간다. 그는 집회에, 또는 대중 사이에, 또는 친족 가운데, 또는 단체 속에, 또는 왕족들 사이에 끌려와서 증인으로 '이놈아, 와서 네가 아는 것을 말해라' 라고 심문을 받아 그가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 고 말하며, 안다면 '안다'고 말하며, 보지 못했으면 '보지 못했다' 고 말하며, 보았으면 '보았다' 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사소한 이익을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올바른 언어는 거짓말을 폐기하고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 줄 알고 거짓말을 했다면 속일 의도가 없으므로 계율을 범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거짓말의 의도에는 탐욕, 진애, 우치의 동기가 놓여 있다. 탐욕에서 비롯된 거짓말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물질적 부, 지위, 존경, 찬양의 사적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진애를 동기로 하는 거짓말은 다른 사람을 해치고 파괴할 의도를 수반한다.
2. 중상하는 말을 하지 말 것(不兩口)이라는 이 윤리적 덕목도 '하지 말라' 는 단순한 부정적 계율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합을 도모하라는 긍정적 측면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중상하는 말은 한 사람을 다른 모임이나 사람으로부터 이간시킨다. 이러한 중상의 배후에는 경쟁자의 성공이나 덕망에 대한 질투나 증오가 놓여 있다. 그밖에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자 하는 잔인한 의도, 자신에게 호의를 끌고자 하는 악한 욕망, 불화를 보고 느끼는 전도된 기쁨 등이 있다. 중상하는 말은 도덕적으로 아주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그 배후에 있는 질투나 증오는 불선업을 만들기에 충분하지만 행위에 의해 수반될 때 비로소 그 결과를 나타낸다. 중상하는 말이 거짓말일 때에는 더욱 강력한 악하고 불건전한 업을 유발하게 된다. 위에서 붓다는 중상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 대신에 우정과 조화를 증진시키는 화합의 말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그러한 말은 사랑과 동정의 자비를 실어나른다. 이러한 말은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키고 상호신뢰의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시킨다. 3. 추악한 말을 하지 말 것(不惡語)이라는 윤리적 덕목은 추악한 말은 거칠고 상스러운 말로 듣는 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말인데, 이러한 말을 하지 않는 대신에 붓다는 적극적으로 상냥한 말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붓다] "추악한 말을 버리고 추악한 말을 삼간다. 부드럽고, 귀에 듣기 좋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와 닿고, 점잖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람에게 유쾌한,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러한 말을 한다." 추악한 말은 성내고 화를 내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악한 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욕지거리를 들 수 있다. 둘째는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셋째는 비꼬아 하는 말이다. 추악한 말은 진애를 수반하고 있다. 이 추악한 말은 의도적이 아니다. 충동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거짓말이나 이간질보다는 심각한 악업을 초래하지 않는다. 붓다는 이러한 거칠고 추악한 말을 삼가는 대신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심지어 강도나 살인자를 만났을 때도 화를 내어 악한 말을 해서는 안되며 사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양쪽에 자루가 달린 톱으로 강도들이나 살인자들이 사지를 하나씩 자른다고 하더라도 그때 마음을 더럽히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때에도 역시 다음과 같이 배워야 한다. ' 우리들의 마음은 바뀌지 않으리라. 우리들은 악한 말을 하지 않으리라. 우리들은 측은한 마음으로 자비스런 마음을 내며 화내는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을 자비스런 마음으로 채워주십시오. 그를 비롯한 모든 세상은 크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해가 없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채워주십시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배워야 한다." 4. 쓸데 없는 말을 하지 말 것(不綺語)이라는 윤리적 덕목은 촛점이 없으며 의미 없는 횡설수설에 가까운 농담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는 의미있고 조리있는 말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붓다] "쓸데없는 말을 버리고 쓸데없는 말을 삼간다. 올바른 때에 말하며 사실에 맞는 말을 하며 유용한 말을 하며 가르침에 합당한 말을 하며 계율에 맞는 말을 하되 가치있는 말을 적당한 때에 합리적으로 신중하게 의미있도록 행한다." 쓸데 없는 말은 가치있고 의미있는 말을 교환하지 못하며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오염시킨다. 붓다는 이 쓸데없는 말을 삼가야 하며 사실에 부합되는 말을 그것도 올바른 때에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또한 궁극적으로 가르침과 계율에 합당한 가치있는 말을 행하라고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쓸데없는 말이란 법과 율에 합당하지 않은 의미없는 말로 넓게는 희론(戱論,papanca)을 말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희론 대신에 연기법적 진리를 설하는 것이 쓸데없는 말을 삼가는 자유가 될 수 있다. 많은 사회적 분쟁이 희론적인 언어의 사용에서 온다. 조야한 이론과 거친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붓다를 비롯한 모든 성인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나쁘고 해로운 말을 삼갈 때에, 저절로 옳은 말을 하게 되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부드럽고 의미있고 유용한 말을 사용하게 된다. 부주의하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말은 올바른 때에 올바른 장소에서 행해져야 한다. 무엇인가 유용한 말을 하지 못할 경우엔 고귀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5) 올바른 행위 (正業) ▲ 위로 올바른 행위는 표현의 방법으로 육체를 사용하여 일어날 수 있는 불선업을 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행위는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올바른 사유나 올바른 언어에 기초하지 않는 이기주의적 행동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죄악이다. 이타적 행위는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준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강요적인 모든 내적 외적 환경과 연관되어 있다. 현대 학문도 인간의 행위는 유전적인 환경뿐 아니라 물질적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환경구조와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올바른 행위에도 이러한 모든 제반조건을 고려하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올바른 행위는 도덕적으로 명예롭고 평화로운 행위를 조장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붓다는 세가지의 올바른 행위에 관해 언급했다. 1. 생명을 죽이지 말 것 2.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말 것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말 것이다. 이들 사이에서도 생명을 죽이지 않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토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계기가 성립한다. 1. 생명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것(不殺生)은 인간 자신의 존엄성을 모든 중생(衆生)에게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로 나타나는 윤리적인 덕목이다. 생명에는 실제로 인간, 동물, 곤충을 망라한 식물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식물은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의식의 결여로 제외될 수 있다. 불살생의 덕목에서 중요한 것은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 적극적으로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다. [붓다] "생명을 살해하는 것을 피하고 생명을 살해하는 것을 삼간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버리고 부끄러워하며 동정하며 모든 생명의 이익을 도모한다." 행위에는 의도가 수반된다.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의도적인 살해를 피하는 것이다. 살생에 수반되는 의도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탐욕과 성냄이 수반되는 것이 더욱 심각하며 성냄이 수반되는 살생은 아주 잔인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어리석음이 수반되는 살생은 의도적인 것이 약하므로 보다 덜하다. 생명을 살해하는 범주 가운데 자살은 살해의 의도가 없으므로 실제적인 살생은 아니지만 살생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경전에서는 탐욕을 여의고, 성냄을 여읜 깨달은 자의 자살만을 허용했다. 그리고 살생의 질적 차이가 있는데 동물을 살해하는 것보다 인간을 살해한다든가 범부를 살해하는 것보다 아라한을 살해한다든가 부모를 살해하는 것이 죄가 더욱 무겁다. 이것은 생명의 정신적인 깊이와 자비심의 심도에 따라 도덕적 무게를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不偸盜)이라는 윤리적 덕목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이란 남이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말하며 빼앗지 말라는 것은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붓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는 것을 버리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는 것을 삼간다. 마을이나 숲 속에서의 다른 사람의 부동산이나 동산이라면 무엇이든지 그 주어지지 않은 것을 도둑의 심보로 취해서는 안된다." 주석서들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는 것' 으로 첫째는 도둑질로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것이며, 둘째 강도질로 위협이나 폭력으로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는 것, 셋째 소매치기로 갑자기 다른 사람의 물건을 저항하기 전에 탈취하는 것, 넷째 사기행위로 남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탈취하는 것, 다섯째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잘못된 저울이나 계량기를 써서 고객을 속여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 은 모두 탐욕이나 진애에 의해 수반되는 것이다. 대부분 탐욕이 우선적인 조건이 되지만 증오가 거기에 수반되기도 한다. 이럴 때는 그 업(業)의 결과가 더욱 무거워진다. 이렇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는 것' 을 삼간다는 것의 적극적인 의미는 타인의 재산을 존중하고 그들이 사용할 권리를 인정하는 정직성이나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는 만족감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자신의 부와 재산을 남을 위해 베푸는 보시의 정신을 키우는 것이다. 3. 사랑을 나눔에 관해 잘못을 범하지 않는 것(不邪淫)은 윤리적으로 재가의 신도들에게는 부부관계의 균열을 막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수행자들에게는 성적 욕망을 억제하는 청정행의 독신생활을 유지하도록 하는 도덕적인 금계에 해당한다. [붓다] "사랑을 나눔에 관해 잘못을 범하는 것을 버리고 애욕에 관해 잘못된 행위를 삼간다. 어머니의 보호를 받고 있고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있고 형제의 보호를 받고 있고 자매의 보호를 받고 있고 친척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법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유부녀이거나 유죄를 선고받은 여자나 마지막으로 이미 약혼한 여자이거나, 이와 같은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재가자가 불법적인 성적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목조목 명시하고 있다. 남자의 경우를 위주로 하고 있으나 남성이건 여성이건 모두에 해당한다. 아버지, 어머니, 친척, 형제, 자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여자는 그 후견인들의 동의 없이 결혼해서는 안된다. 그밖에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예를 들어 나이 어린 여자나 친척 관계의 여자나 수녀나 비구니 등 독신생활을 맹세한 사람과의 성적 관계를 해서도 안 된다. 한편 사음은 본질적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며 탐욕을 수반하고 있다. 그러나 변태성욕일 경우에는 증오나 어리석음도 동시에 수반한다. 따라서 불사음도 궁극적으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소멸과 관계된다. 불사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측면은 청정한 생활(梵行)을 실천하는 것이다.
6) 올바른 생활 (正命) ▲ 위로 올바른 생활은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올바른 생계를 도모하는 것' 이다. 올바른 생활은 사회적인 것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부끄러움이 없이 철면피하고 무례하고 대담하고 죄악에 오염된 사람의 생활은 쉽다. 부끄러움이 있고 항상 청정을 구하고 집착 없이 겸손하여 청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식견 있는 사람의 생활은 어렵다." 올바른 생활의 개념은 속물적인 행동을 배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무역, 독과점, 돈의 자본적 사용 등을 비난했다. 그는 그들을 자연스럽지 못한 도덕적 생활을 증진시키는 자연적 재정과는 다른 이재학(理財學)적 행위라고 비난했다. 불교도 이러한 이재적인 경제적 조작을 비난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이윤동기는 이타적인 서비스 정신에 의한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불교의 자본윤리는 경제적 행위의 도덕적 표준인 이타주의에 의한 것이다. 더구나 불교에서의 생활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삼매에 들기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하다. 경전은 생계를 도모하는 방법으로 여법(如法)하게 재산을 모을 것을 말하고 있다. [붓다] "장자여, 세상에서 선남자는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완력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여법한 법으로 얻어진 재산을 지닌다." 붓다는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미치므로 피해야 할 다섯 가지의 여법하지 않은 직업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재가신도는 이들 다섯 가지의 판매에 종사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무기의 판매, 생명의 판매, 고기의 판매, 술의 판매, 독극물의 판매이다." 여기서 생명의 판매에는 인신매매나 매춘을 위시한 인간에 해당되는 것이나 가축 등 동물의 판매를 뜻할 것이다. 그밖에 피해야 할 잘못된 생활로 경전에서 들고 있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기만, 요설, 점술, 고리대부,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잘못된 생활이다." 올바른 언어나 올바른 행위를 수반하는 것이 올바른 생활이므로 당연히 올바르지 않는 삿된 생활은 기만, 요설 등의 잘못된 언어를 수반하며 무기판매, 인신매매 등의 잘못된 행위를 수반한다. 올바른 생활은 따라서 올바른 언어와 올바른 행위에 기반을 둔 직업적인 일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특히 올바른 직업에 종사할 경우에 사용자는 피고용인에게 능력과 재능에 따라 일을 하게 하고 능력에 맞는 임금을 지불하고 몸에 병이 났을 때 치료해 주고 이따금 기부금이나 상여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피고용인은 부지런해서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하며 사용자의 말을 잘 듣고 사용자를 속이지 말며 열성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 행위는 수단적인 실제에 불과하다. 일반적인 신도의 올바른 생활은 다음과 같다. [붓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은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다. 나누어주고 정의롭고 친지를 보호하고 비난받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다."
7) 올바른 정진 (正精進) ▲ 위로 올바른 정진은 건전하고 선한 힘은 물론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를 수반하는 도덕적 요인으로부터 나온다. 일반적인 선한 상태의 힘의 경우에는 그것이 생사윤회의 범주 안에서의 공덕을 쌓는 데 국한된다. 그러나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의 계열 속에서의 선행적인 것을 수반으로 하는 정진의 힘은 오염된 마음을 해탈된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올바른 정진에는 네 가지의 노력(四精勤)이 있다. 여기서 불건전한 상태(不善法)는 지양되고 건전한 상태(善法)을 실현시키는 것을 말한다. 불건전한 상태란 행위를 유발하건 유발하지 않건 간에 오염된 사유, 감정, 의도 등의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건전한 상태는 해탈로 이끄는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궁극적으로 불건전한 것은 해탈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방치되고 버려져야 하는 속박의 연기에 소속되며 건전한 것은 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지속시키고 계발하여야 하는 자유의 연기에 소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건전한 상태가 정신의 집중과 있는 그대로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만큼 장애라고 불리우며 거기에는 다섯가지 장애(五障)가 있다. 1. 감각적 쾌락의 욕망 (愛貪, kamacchanda) 앞의 두 가지 장애,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악의는 가장 강력한 것으로 선정이나 삼매의 수행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인데, 그것들은 탐욕과 성냄을 수반하고 있다. 다른 세 가지 장애는 비교적 덜하지만 장애적인 요소가 강한 것으로 어리석음을 수반하고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일반적으로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의 다섯 가지 감각의 장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쾌락(五欲樂)을 말하지만 때로는 넓은 의미로 감각적인 쾌락뿐 아니라 부, 권력, 지위, 명예 등에서 발생하는 욕망도 의미한다. 두번째의 장애인 분노는 첫번째 장애와 다른 극단적 형태의 성냄을 수반하는 것으로 자타에 대한 증오, 화냄, 원한, 혐오 등을 속성으로 한다. 세번째 장애는 해태와 혼침이다. 해태는 정신적으로 아둔한 것을 의미하고 혼침은 마음이 무겁고 가라앉아 졸리는 것을 뜻한다. 네번째의 장애는 흥분과 회한인데 흥분은 마음의 흥분, 불안정을 의미하고 회한은 걱정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원하지 않았던 결과에 대한 근심을 뜻한다. 이것은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섯번째 장애는 의심이다. 의심은 어리석음에 수반하는 상습적인 미결정과 미해결, 신뢰의 결여 등을 뜻한다. 경전에는 이들 다섯 가지 장애에 관해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든 물에 비유되고, 분노는 부글부글 끓는 물에 비유되며, 해태와 혼침은 이끼가 낀 물, 흥분과 회한은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 매사의 의심은 흐린 흙탕물에 비유된다. 이러한 장애의 물을 버리고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1. 제어에 의한 노력(律儀勤,samvarappadhana)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상태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을 말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수행승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한 상태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생겨나게 하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한다." 마음의 장애는 정신적인 흐름 속에 지속되지만 감각적 체험의 유입을 통해서 활성화된다. 감각적인 체험은 감각자료, 즉 시각자료(色), 청각자료(聲), 후각자료(香), 미각자료(味), 접촉자료(觸)로 구성된다. 이러한 감각자료들은 의식에 의존하는 감각과 만나게 된다. 이때 의식이 함께 수반하면서 감각자료는 지속되고 평가되고 적절한 반응을 일으킨다. 의식이 그러한 자료적인 인상을 주의 깊고 현명하게 숙고(如理作意)하지 않으면 감각자료는 불건전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오염되어 진행된다. 이러한 오염의 경향성은 감각대상에 따라서 규정된다. 매력적인 대상은 탐욕, 혐오적인 대상은 성냄, 중성적인 대상은 어리석음을 수반하는 오염을 일으킨다. 그래서 붓다는 이러한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감관의 제어(根律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것이 감관의 제어인가? 이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 시각으로 형상을 보되 그 모습을 취하지 않고 그 특징을 취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시각의 기관을 제어하지 않으면 탐욕과 근심과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수행하고 시각의 기관을 보호하고 시각의 기관을 제어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다른 모든 감각기관에 대해 동일한 설명이 반복된다. 그런데 여기서 '시각으로 형상을 보되 그 모습을 취하지 않고 그 특징을 취하지 않는다' 는 말은 감관의 제어가 무엇인지를 해결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모습이란 말은 대상의 겉모습이고 특징은 사소한 특징을 의미한다. 정형화된 연기에 의하면 의식은 항상 감각영역에 수반하므로 감관이 잘 제어되지 못하면 의식은 무모하게 흐르면서 사물의 겉모습에 끄달려 탐진치의 오염을 야기시키고 사소한 특징을 조작하여 희론에 의한 오염을 증폭시키며 불건전한 상태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감관의 제어는 필수적인 것이다. 2. 버림에 의한 노력(斷勤,pahanappadhana)은 이미 일어난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는 것을 말한다. [붓다]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한다." 감관을 제어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장애들을 극복하였더라도 과거의 업으로부터 유래된 불건전한 사유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바로 이 두번째의 정진이 필요한 것이다. 이 노력을 '버림에 의한 노력' 이라고 한다. 경전은 이것이 무엇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버림에 의한 노력인가? 여기에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사유들, 이미 생겨난 악의에 대한 사유들, 모든 이미 생겨난 폭력적 사유들의 불건전한 상태들을 수용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파괴하고 없애는 것이다." 모든 이미 생겨난 불건전한 상태에는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의 정신적인 장애가 포함된다. 경전에 의하면 이러한 장애에 대처하는 방법은 응병여약(應病與藥)처럼 각각의 경우에 맞게 주어진다. 다섯 가지 장애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그 조건을 소멸시킴으로써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불건전한 오염된 사유는 그와 대치되는 건전한 사유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붓다] "그 '불건전한' 특징과는 다른 건전한 것을 수반하는 특징을 숙고하는 자에게는 탐욕을 갖추고 성냄을 갖추고 어리석음을 갖추는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은 버려지고 소실된다. 그것들이 끊어짐으로써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해지고 하나로 되고 집중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없애는 것은 선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숙고를 통해 없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선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사유마저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것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대치하는 것은 마치 능숙한 미장이나 그 도제가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제거하는 것' 과 같다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그 선한 것도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 생겨난 다섯 가지 장애의 극복을 위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다. 자비에 대한 명상을 통해 모든 탐욕과 성냄, 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악의 등은 사라지며, 해태와 혼침의 제거를 위해서는 빛나는 광명체에 대한 시각화, 활발한 행선(行禪)의 수행, 죽음에 대한 명상, 또는 단지 정진을 지속할 확고한 결심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흥분과 회한은 마음을 전환해서 관심 있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소멸될 수 있다. 의심에 대한 해결은 질문, 탐구, 학습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미 생겨난 불건전한 상태의 장애를 몰아내는 데는 위와 같은 일대일대응의 대치법(對治法)을 첫번째로 하는 이외에 두번째로 부끄러움(慙)과 창피함(愧)이란 도덕적인 양심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사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세번째 방법은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날 때 관심의 방향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네번째 방법은 관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면돌파해서 상태의 속성과 그 원인을 조사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소멸한다. 다섯번째 방법은 의지의 힘으로써 억제함으로써 불건전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마음의 노예가 아니라 그 주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를 소멸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유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무엇이든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불건전한 상태를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3. 수행에 의한 노력(修勤,bhavanappadhana)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붓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한다." 불건전한 상태의 제거를 통해서 올바른 정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의 계발을 수반한다. 이것을 수행에 의한 노력이라고 한다. 수행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지만 경전에서 특히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七覺支,satta bojjhanga)를 들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수행에 의한 노력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승은 멀리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보내버림으로 열반으로 회향하는 새김의 깨달음 고리, 탐구의 깨달음 고리, 정진의 깨달음 고리, 희열의 깨달음 고리, 안온의 깨달음 고리, 집중의 깨달음 고리, 평정의 깨달음 고리를 수행한다." 이 깨달음의 고리들은 깨달음의 조건이 되면서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그 속성이 되는 것들이다. 깨달음의 길은 새김의 깨달음 고리를 출발으로 해서 시작된다. 새김은 장애들이 제거되고 일체의 선입견이 소멸되어 현재의 시점에서의 사물에 대한 관찰을 의미하는 깨달음의 고리이다. 이 새김에 의한 사물에 대한 관찰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이며 탐구의 깨달음 고리는 능동적인 인식의 측면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올바른 길을 알게 되면 정진력을 얻게 되는 정진의 깨달음 고리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정진이 진행되면 기쁨이 등장하는데 이를 희열의 깨달음 고리라고 한다. 기쁨은 점차로 형성되어 정점에 달하면 지복의 파도가 몸과 마음을 감싸면서 안정되어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평안한 안온의 깨달음 고리에 도달한다. 이러한 정신의 집중이 깊어지게 되면 결국 깨달음의 마지막 요소인 마음의 평정을 의미하는 평정의 깨달음 고리에 이른다. 이러한 깨달음에 수반되는 요소들이 곧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로서 수행되어야 할 것들이다. 4. 수호에 의한 노력(守護勤,anurakkhanappadhana)은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붓다]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성장하게 하며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한다." 이 수호에 의한 정진은 정신의 집중을 통해 나타나는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상기시키는 지각의 특징(現相,nimitta)을 수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수호에 의한 정진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승은 이미 생겨난 건전한 삼매의 특징, 즉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고름이 가득찬 시체에 대한 지각,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부푼 시체에 대한 지각을 수호한다." 경전에서 이미 생겨난 깨달음의 요소를 수호하기 위한 정진으로 이러한 존재의 궁극적인 괴로움, 즉 죽음에 수반되는 현실의 처참함을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의 속박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에서 벗어나 해탈을 수호하는 데 있다. 註. - 참괴 : 참(慙,hiri)은 마음속으로 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괴(愧,ottappa)는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고백하여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또는 참은 스스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괴는 타인을 가르쳐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라든가, 참은 자신의 관찰을 통해 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괴는 타인의 관찰에 대하여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라든가, 그밖에 참은 타인의 덕을 경모하는 것이고 괴는 스스로의 죄를 두려워하는 것이라든가, 참은 사람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괴는 하늘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것이라는 해석들이 있다. - 칠각지 : 위에 설명된 칠각지의 각 개념은 다음과 같다.
8) 올바른 새김 (正念) ▲ 위로 올바른 새김은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인 사유나 숙고에 휩싸이지 않고 일어나는 사건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는 무조건적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다. 또한 올바른 정진은 팔정도에서 다른 선행하는 도덕적 계기들이 어느 정도 충족될 때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새김의 과정은 올바른 도덕적 관계로 열려진 마음을 통해 고요하고 민첩하게 현존하는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때 모든 판단적 사유나 해석적인 숙고는 인지되자마자 버려진다. 마음은 확고하게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생성과정에서의 의식은 현재의 주어진 지각현상과 더불어 인식과정이 시작되면서 단순히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숙고에 의해 개념적으로 확산되어간다. 원래의 대상은 개념적으로 확산된 희론적 지각현상에 의해 오염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현존하는 대상은 희론의 구름 속에 비치는 희미한 달처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소멸시켜 청정하게 할 때 올바른 새김이 성립하며 그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개현시킨다. 따라서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개현된다. 그렇다고 해서 새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를 현실 속에 닻을 내리게 하며 사유작용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방황하도록 하게 하지 않는다. 새김이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앉는다. 이처럼 강한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서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새김의 토대에 대한 대경(大念處經)]에서의 올바른 새김의 정의는 올바른 정진을 조건으로 하는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와 함께 주어져 있다. [붓다] "무엇이 네가지 새김의 토대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신체에 관해 신체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감수에 관해 감수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관해 마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사물에 관해 사물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가지 새김의 토대는 올바른 정진을 수반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기는 것을 본질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열반을 깨닫는 길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붓다] "새김의 토대는 곧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하고 열반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길이다." 이러한 새김의 네가지 가운데 첫번째는 육체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주로 정신과 관계되는 것이다. 육신에 대한 관찰은 수습적으로 다른 것에 우선하며 감수를 비롯한 마음의 관찰의 조건을 형성하고 끝으로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새김이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관찰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그리고 내외적으로, 즉 공간적으로 수행되며 생성적으로 소멸적으로 그리고 생멸적으로, 즉 시간적으로 수행된다. 1. 신체에 대한 관찰(身隨觀,kaya anupassana)을 행할 때 가장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호흡에 의한 몸의 움직임이다. 그래서 호흡새김(安槃念, anapanasati)이 신체에 대한 관찰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룰 뿐만 아니라 명상의 근본적 토대(根本業處-호흡에 대한 새김이나 관찰은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불린다. 호흡새김은 단지 육체적인 훈련이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를 이끄는 기반이다. [붓다] "호흡에 관한 새김을 닦고 익히면, 네가지 마음새김의 바탕일 닦고 익히면,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원만히 하며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고 익히면 명지(明智)에 의한 해탈을 원만하게 한다." 호흡에 관한 관찰 내지 새김을 실천하려면 우선 숲 속의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게 세우고 새김을 현전하도록 해야 한다. [맛지마니까야]의 '호흡새김의 경(安槃念經)' 에 의하면 호흡에 대한 새김은 네가지의 기본적인 단계를 갖고 있다. (1) 처음 두가지는 긴 들숨과 날숨을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는 것과 짧은 들숨과 날숨을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단지 숨이 들고나는 것을 그 길고 짧음을 알아채면서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2) 마음에 새김이 점점 깊어지면 들숨과 날숨의 시작에서 경과와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경전은 그밖에 정신적인 상태와 관련된 호흡새김의 수행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호흡의 관찰은 육체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새김의 토대나 깨달음의 고리 등의 정신적인 것에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몸에 관한 관찰로서 잘 알려진 것은 몸의 정태적, 동태적 활동에 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1) 걷거나, (2) 서 있거나, (3) 앉거나, (4) 자거나, (5) 깨어 있거나, (6) 말하거나, (7) 침묵할 때나 어떠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주의 깊게 세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걸을 때는 걷는다고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고 알며 자세를 바꿀때는 바꾼다고 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몸은 자아나 자아의 소유가 아니며 단지 의도라는 조건에 따라 작용하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가거나 오거나 앞을 보거나 옆을 보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옷을 입거나 먹고 마시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잠들거나 깨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그러한 과정에 대한 충분한 이해(正知所作)를 통해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또한 몸에 대한 관찰로 중요한 것은 몸의 실재적인 모습을 분석적으로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그 가운데는 피부로 덮인 여러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신체의 각 부분이나 장기에 대한 관찰, 땅, 물, 불, 바람으로 구성된 신체에 대한 관찰 및 무덤에 버려진 사체에 대한 관찰이 있다. 이러한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신체에 대한 관찰은 갈애에 수반되는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 충동을 제어하고 소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부정관(不淨觀)은 몸을 감각적으로 매력적인 것이라 인식하는 지각의 토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육체적인 쾌락의 욕구를 소멸시킬 수 있다. 감각적 욕구는 지각을 조건으로 한다. 육체적인 매력은 피상적인 관점에서 유래하며 부정관은 사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한다. 경전은 마치 두개의 구멍을 가진 푸대자루에 여러 가지 곡물이 들어 있듯이 이 신체를 32가지 부정물 - 머리카락, 몸털, 손톱, 이빨, 피부, 고기, 근육, 뼈,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폐, 창자, 장간막, 위장, 배설물, 뇌수,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임파액, 침, 정액, 관절액, 오줌 - 로 가득 차 있는 푸대자루처럼 하나 하나씩 그 내용물을 열거하면서 분석적으로 그 더러움을 관찰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러한 수행의 과정은 혐오감을 함축하는 성냄을 생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쾌락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나 그 조건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신체에 대한 관찰방법으로는 네 가지의 비인격적인 요소인 땅, 물, 불, 바람의 사대로써 분석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경전은 숙련된 도살자가 소를 도살해서 네 거리에 부분 부분을 나누어 놓는 것같이 신체의 부분을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로 분류해서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맛지마니까야]의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에서는 우리의 신체는 내부적인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반적인 지수화풍은 외부적인 것으로 나눔으로써 순환적인 생태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붓다] "(1) 내부에 각각 거칠고 견고한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머리카락, 털, 손톱, 등과 기타의 개체적이고 거칠고 견고한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 모두 내부적인 땅의 세계이며, (2)내부에 각각 액체나 액체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담즙, 가래, 고름, 피 등의 각각 액체나 액체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은 모두 내부적인 물의 세계이며, (3)내부에 각각 불이나 에너지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열, 노쇠, 소화,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현상 등을 수반하는 각각 불이나 에너지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은 모두 내부적인 불의 세계이며, (4)내부에 각각 기체나 기체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상향풍, 하향풍, 위주풍, 하복주풍, 지체순환풍, 출식풍, 입식풍 등의 각각 기체나 기체적인 것은 모두 내부적인 바람의 세계이다." 이러한 내부적인 원소들은 무상한 외부적인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신체가 죽은 뒤에 다시 흩어져 외부로 돌아간다. 이러한 신체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가져온다. [붓다] "벗이여, 그 외부적인 땅의 세계가 위대할지라도 무상한 것이 알려질 것이며 소멸하는 것이 알려질 것이며 사라지는 것이 알려질 것이며 변화하는 것이 알려질 것인데, 하물며 이 갈애가 취착된 조그마한 육체에 '나' 또는 '나의 것' 또는 '나는 있다' 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없는 것이다." 외부적인 원소의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을 통해 그와 동일한 내부적인 원소의 끝없는 변화를 관찰하여 그 가운데 '나, 나의 것, 나는 있다' 라는 실체적 관념을 없앰으로써 육체에 대한 집착을 소멸시키는 것이 수행의 중요한 성과이다. 또 다른 육체에 관한 분석적인 관찰로는 죽은 후에 몸이 해체되는 사체에 대한 관찰이 있다. 사체가 묘지에 유기되어 며칠이 경과한 뒤에 시체가 팽창하고 푸르게 멍든 어혈이 있고 고름이 가득한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까마귀, 독수리, 개, 승냥이 등의 각종 생류가 잡아먹거나 뜯어먹고 남은 시체에 대한 관찰이 있으며 그밖에 사체에 살과 피가 있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살은 없지만 피가 있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살과 피가 없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관절이 풀어져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손뼈,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뼈, 척추뼈, 두개골과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해골들을 관찰하는 수행법이 있다. 이러한 관찰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그것과 비교하여 관찰하는 것을 수반한다. [붓다] "이 몸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며 이와 같이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수행은 이미 올바른 정진 가운데 수호에 의한 노력과 동일한 내용을 함축하는 것이다. 단지 수호에 의한 노력은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고름이 가득찬 시체에 대한 지각,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부푼 시체에 대한 지각 등의 특정한 지각현상을 수호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것을 토대로 새김에서는 그러한 사체의 현상에 대한 지각이 자신의 살아 있는 육체에 대한 관찰과 병행하면서 진행된다. 2. 감수에 대한 관찰(受隨觀,vedananupassana)은 여섯 감관의 접촉의 계기마다 강하거나 약하거나 분명하거나 불분명하거나 쾌, 불쾌의 정서를 일으키므로 감수에 대한 새김은 이러한 조건에 대한 관찰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즐거운 감수는 탐욕을, 괴로운 감수는 성냄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중성적인 감수는 어리석음을 수반한다. 이때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또한 무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감수에 대한 새김은 이러한 오염의 조건을 알아챘을 때 그 오염을 소멸시키고 궁극적으로 감수마저 소멸시킴으로써 감수 자체를 경험의 영역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새김의 토대경]에 나타난 감수에 의한 새김은 단순히 즐거움의 감수를 느낄 경우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괴로운 감수나 중성적인 감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각각의 감수는 다시 육체적인 것(자양분이 있는)과 정신적인 것(자양분이 없는)으로 분석적으로 관찰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어떻게 감수 가운데 감수를 관찰하는가? 여기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 '나는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육체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 '나는 육체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정신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 '나는 정신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새김의 원리에 따라 감수도 공간적으로 내외(자신과 타자)로 시간적으로 생멸을 통해 관찰된다. 여기서 시간적 관찰은 곧 전형적인 연기의 인과연쇄에 의한 고리로서 감수를 파악함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을 수반하는 새김은 단지 감수의 속성에 대해 '분명히 아는 것(了知,pajanana)'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그것이 감수의 점차적인 소멸로 이끄는 길이 된다. 왜냐하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감수의 속성에 대한 통찰은 곧바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소멸로 이끌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3. 마음에 대한 관찰(心隨觀,cittanupassana)이 감수에 대한 관찰 이후에 놓은 것은 정신적인 특수한 요소인 감수로부터 그것이 소속되는 일반적인 마음에 대한 관찰로 명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의식(識) 자체가 마음(心)이라고 불린다. 마음은 사실상 모든 정신적 요소를 함축한다. 그 가운데 가장 일차적인 것이 의식이다. 의식은 전형적인 연기에서 보면 감각영역에 최초로 수반되는 정신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식의 작용(心所,cetasika)을 수반한다. 여기에는 감수, 지각, 형성 등이 수반된다. 의식 자체는 순전히 대경과 감관 사이의 순수한 체험에 불과하다. 의식은 스스로 식별되지 않으며 오로지 수반하는 그 작용들에 의해 분별된다. 의식의 작용이 마음을 물들이며 마음에 구별하는 성격을 부여한다. 우리가 마음을 관찰의 대상으로 할 경우에 마음의 작용을 수반하는 의식을 관찰하여야 한다. 경전에서는 16가지의 마음의 작용을 수반하는 의식, 즉 마음에 관해서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제시되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마음에 있어서 마음을 관찰하는가? 여기에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 밖에 경전에서는 탐욕의 유무 이외에 성냄의 있고 없음, 어리석음의 있고 없음, 과밀하거나 흩어짐, 계발되었거나 되지 않음, 열등하거나 최상임, 집중되었거나 되지 않음, 해탈했거나 하지 않음의 도합 16가지의 마음의 작용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마음의 작용에 대한 관찰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의 유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마음이 어떠한 작용을 수반하더라도 마음의 상태로서 단지 관찰할 뿐 거기에 '나' 또는 '내 것' 또는 '나는 있다' 라는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붓다] "불건전한 의도,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제거함으로써 마음은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고 잘 닦여진다." 4. 사물에 대한 관찰(法隨觀,dhammanupassana)은 내적 외적인 사물에 대한 관찰을 의미한다. 내적인 사물이란 정신현상을 말하고 외적인 사물이란 외적인 감각대상을 말한다. 그러나 경전에서 일반적으로는 그것들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진리로서의 법(法)에 대한 관찰을 의미한다. 그 진리는 신비적이거나 비교적(秘敎的)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고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법은 현세에서 실체적인 통찰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 새김(念,sati)이다. 법에 대한 관찰은 육체와 지각현상 그리고 의식이나 마음에 관한 관찰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때 기계적으로 따를 수 있는 보다 궁극적인 관찰이다. [새김의 토대경]에 의하면 법에 대한 관찰은 주로 정신적 혹은 정신물리적 작용의 현상과 그것과 연관된 해탈론적인 가르침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모든 관찰은 정형화된 연기에 관한 관찰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그 경전에서는 법에 관한 관찰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다섯가지 장애의 현상(五障法)에 대한 관찰은 무지의 원인이 되는 번뇌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한, 의심이 있다. 우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관찰방법에 관해 논의해보자. 나머지는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에 한 수행승이 있어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면 '나에게는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있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없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생겨난다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버리면 버리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미 버려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2)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의 현상(五取蘊法)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물질은 이와 같고 물질의 발생은 이와 같고 물질의 소멸은 이와 같다.... 감수... 지각... 형성... 의식... 이와 같이 내적 현상에 대하여 현상의 관찰을 한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서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의 현상에 대하여 현상의 관찰을 한다." 역시 이 존재의 취착다발에 대한 관찰도 내적으로 자신에 대해, 외적으로 타자에 대해,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찰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취착다발의 소멸을 지향한다. (3) 여섯가지 내외적 감역의 법(六內外處法)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시각을 분명히 알고 형상을 분명히 알며 그 양자를 조건으로 결합이 생겨나면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결합이 생겨나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결합을 버리게 되면 버리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 이미 버려진 결합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경전은 시각과 형상과 그 결합뿐만 아니라 청각과 소리와 그 결합, 후각과 냄새와 그 결합, 미각과 맛과 그 결합, 촉각과 감촉과 그 결합, 정신과 사물과 그 결합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들 감각의 장들에 대한 관찰도 내적으로 자신에 대해, 외적으로 타자에 대해,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감각의 장의 소멸을 지향한다. (4)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七覺支)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있다면 '나에게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있다' 고 분명히 알며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없다면 '나에게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없다' 고 분명히 알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생겨난다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알며 이미 생겨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수습되어 원만해지면 수습되어 원만해지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 이러한 설명은 이미 올바른 정진에서 언급한 깨달음의 다른 여섯 가지 요소에 관해서도 경전 상에서 반복될 뿐만 아니라 내적 외적으로 그 생성과 소멸에 관한 과정적 관찰도 동시에 언급된다. (5) 네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단순한 관념적 이해에서 벗어나 점점 더 깊은 새김의 차원으로까지 고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9) 올바른 집중 (正定) ▲ 위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 가운데 마지막이 올바른 집중 내지 삼매이다. 그것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과정이긴 하지만 미식가가 음식을 생각하던가 음탕한 자가 여색을 생각한다던가 군인이 전장에서 적을 죽인다던가 하는 데 있어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과정의 악하고 불건전한 집중은 집중이 아니라 집착이므로 제외된다. 그러므로 명상의 과정에서의 올바른 집중은 선하고 건전한 마음의 상태에서의 집중과정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 새김을 수반하며 해탈의 계기로서 작용한다.
1) 이것이 있을때 저것이 있다 ▲ 위로
註. - 실체와 사태(사건) :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물질은 본질적으로 사건으로서 변화의 주체이지 어떤 사물이 그것으로부터 나와서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고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네 가지 종류의 원인은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한 종류의 원인만 가지고는 결과를 산출할 수 없고 대신에 네 가지 종류의 원인이 필요하다. (1) 질료인(質料因,causa materialis) : 사물이 만들어지는 재료
2) 방편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 ▲ 위로 연기의 법칙뿐만 아니라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五蘊)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 아트만 혹은 영혼, 자아, 자기라는 인간의 안팎에 상주하는 불멸의 본질이 있다는 사상은 거짓된 신념이고, 단지 정신적인 투영일 뿐이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의 가르침이다.
그들은 불교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명철하고 심오한 사상가라고 생각한 붓다가 그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아트만, 곧 '자아' 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영원한 존재 - 소아로서의 작은 자아가 아니라 대아로서의 커다란 자아 - 에 대한 필요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에서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전멸될 것이다. 나는 파괴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통곡하며 가슴을 쥐어뜯고 방황한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자아 가운데 어떤 영원한 것이 발견되지 않으면 사람은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다."
붓다는 물질(色), 감수(受), 지각(想), 형성(行), 의식(識)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의 분석을 통해 그러한 존재 속에서 자아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가지의 존재의 다발을 떠나서 인간 내부의 어떤 곳에서든지 전혀 자기를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떠한 경전에서도 붓다는 존재는 다섯가지의 존재의 다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하나는 붓다는 언제나 우주의 어디에서든지 인간의 안이든 밖이든 간에 아트만, 영혼, 자아,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부정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만약 셋째 경구가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아이다" 라고 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쌍카라 즉 조건지어진 것이 무아이니까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 곧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 이외의 것은 '자아' 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법 즉 담마라는 말을 세 번째 구절에서 사용한 것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말속에는 우주 안팎에서의 상대적인 것이나 절대적인 것이나,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조건지어진 것이나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나, 어떠한 것이든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무아이다" 라는 진술은 분명한 것이다.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난 어떠한 곳에서도 자아 또는 아트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 경구가 있는 법구경이나 다른 많은 경전에서 일반적으로 그 말은 '나 자신' '너 자신' '그 사람' '사람' '우리 자신' 등의 뜻으로 쓰인다. 다음에 '나타' 라는 말은 '주인' 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처' '보호처' '도움' '보호' 등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3) 진리를 깨닫도록 도와준 붓다 ▲ 위로
그러나 그는 가까이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서 자신의 질병을 극복하지 않고 죽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용기와 결단으로 모든 고통을 이기고 병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붓다의 몸은 여전히 허약했다. 회복한 후에 거처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 때에 붓다의 가장 헌신적인 제자 아난다는 존경하는 스승에게 다가가 그 곁에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건강을 돌보아 왔고 세존의 병상을 돌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세존의 노환을 보고 저는 술취한 사람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방향을 잡을 수 없고 가르침도 저를 비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여래께서 승단에 대하여 무언가 가르침을 남기지 않고서는 결코 열반에 드시지 않으리라' 는 안도감만은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때에 붓다는 자비와 인간적인 감정에 가득 차서 그 헌신적이고 사랑스런 제자에게 말했다. [붓다] "아난다여, 승단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아난다여, 나는 안팎 없이 진리를 가르쳤다. 여래는 진리에 관해서 사권(師拳)을 갖고 있지 않다. 아난다여, 누군가 '나는 승단을 이끌어간다' 라든가 '승단이 나에게 의지한다' 고 생각한다면, 아난다여, 그가 승단에 대하여 무언가 가르침을 남길 수 있겠는가? 아난다여, 여래는 '나는 승단을 이끌어간다' 라든가 '승단이 나에게 의지한다' 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여래가 승단에 대하여 무언가 가르침을 남길 수 있겠는가? 아난다여, 나는 늙고 성장하고 노쇠하고 고령에 달하여 이제 80노인이 되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어 낡은 수레가 가죽끈의 도움으로 가듯이, 아난다여, 여래의 몸도 확실히 가죽끈의 도움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그대의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그대의 안식처로 하지 다른 누구도 그대의 안식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그대의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그대의 안식처로 하지 다른 어떠한 것도 그대의 안식처로 하지 말라." 붓다가 아난다에게 전하려고 했던 가르침은 아주 명백하다. 아난다는 슬프고 괴로워했다. 그는 위대한 스승이 완전한 열반에 든 후에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무리들은 고독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안식처가 없고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붓다는 그를 위로하고 용기와 자신을 불어 넣어주면서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자신이 가르친 법에 귀의하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자아나 아트만을 찾아 나선다면 그것은 요점에서 아주 벗어난 것이 되고 만다. 계속해서 붓다는 네가지 새김의 토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자기 자신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르침이 자기 자신의 섬이나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하는 것을 설명하는데 여기서도 결코 자아나 아트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가끔 인용되지만 붓다의 가르침에서 아트만을 찾으려는 또 다른 시도로서 사용되는 이야기가 있다. 붓다는 베나레스 근처의 우루벨라로 가는 길목 숲 속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어느 날 젊은 왕자 30여명이 젊은 아내들을 데리고 그 숲 속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 중에 결혼하지 않은 한 왕자는 창녀를 데리고 왔다.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동안 그녀는 귀중품을 훔쳐서 달아났다. 그들도 숲 속에서 그녀를 찾아 헤매다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붓다를 보고는 그 여인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붓다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을 때에 붓다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붓다] "젊은이들이여,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느 것이 그대들에게 이로운 것인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인가?" 여기에 극히 자연스럽고 단순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 대화에 억지로 꾸며댄 형이상학적 자아 또는 아트만을 정당화하려는 생각이 개입될 여지는 추호도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붓다는 그들을 풀밭에 앉게 하고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이 이야기는 초기경전에 있는데 거기서 붓다는 아트만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註. - 섬 : dipa. 간혹 등불로 오역되나 섬이 맞다. [디가니까야]의 주석서는 이 단어를 이와 같이 설명했다. "큰 바다의 섬처럼 안전한 곳인 섬을 네 자신의 안식처로 하여 안주하라(mahasamuddagatam dipam viya attanam dipam patittham katva viharatha)". 윤회는 보통 큰 바다, 윤회의 바다로 비유된다.
4) 고귀한 침묵 ▲ 위로 붓다의 여덟가지 성스러운한 때에 밧차곳따라고 하는 유행자가 붓다에게 자아 또는 아트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물었을 때에 붓다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많이 인용되는 내용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유행자 밧차곳따는 붓다에게 물었다.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자아는 있습니까?" 붓다는 침묵했다. [밧차곳따] "그러면 고따마여, 자아는 없습니까?" 다시 붓다는 침묵했다. 그러자 유행자 밧차곳따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버렸다. 아난다는 왜 밧차곳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가를 물었다. 붓다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붓다] "아난다여, 유행자 밧차곳따가 '자아는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만약 내가 똑같이 '자아는 있다' 라고 대답했다면 유론(有論-실체가 있다는 영원주의적 견해)을 가진 수행자나 성직자에 동조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유행자 밧차곳따가 '자아는 없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만약 내가 똑같이 '자아는 없다' 라고 대답했다면 무론(無論-실체가 없다는 허무주의적 견해)을 가진 수행자나 성직자에 동조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내가 유행자 밧차곳따의 '자아는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똑같이 '자아가 있다' 라고 대답하면 아난다여, '일체의 법은 무아이다' 라는 지혜의 발현에 순응하는 것인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붓다] "아난다여, 내가 유행자 밧차곳따의 '자아는 없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똑같이 '자아가 없다' 라고 대답하면 아난다여, '예전에 나에게 자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아가 더 이상 없다' 라고 혼미한 밧차곳따는 더욱 혼미해질 것이다." 이제 붓다가 왜 침묵을 지켰는지 명백히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를 논의할 때에 붓다가 질문이나 질문자를 다룰 때에 그 배경이나 문맥을 숙고해본다면 더욱 분명하게 그 의미를 살필 수가 있다. 붓다는 어떤 질문이 들어오면 숙고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대답하는 컴퓨터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지성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질의자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그들의 발전단계, 경향, 정신적 성숙, 성격, 특수한 질문을 이해하는 능력 등에 따라서 가르침을 폈다. 붓다에 의하면 질문을 다루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둘째, 어떤 이에게는 질문의 화살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應反詰記問). 셋째, 어떤 이에게는 질문을 제쳐두어야 한다(應捨置記問). 넷째, 어떤 이에게는 분석적으로 대답해주어야 한다(應分別記問). 그리고 질문을 제쳐두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주는 영원한가 아닌가와 같은 잘 알려진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붓다가 밧차곳따에게 침묵으로 대답했듯이 특수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거나 설명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그런 방법으로 붓다는 마릉까뿟따(만동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대답했다. 그러나 자아나 아트만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응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에 관해서는 늘 거론했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자아는 있다' 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자아가 없다' 는 지혜와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붓다는 또한 '자아가 없다' 라고 말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 있는 의문에 관해 엇갈린 생각을 갖고 있는 가엾은 밧차곳따를 마구 혼란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무아' 의 이념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별한 경우에는 질문을 고귀한 침묵으로 제쳐두는 것이 현명하다. 붓다는 오래 전부터 밧차곳따를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밧차곳따의 경우가 궁극적인 의문을 품은 구도자로서 붓다를 찾아온 첫 번째의 사람은 아니었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스승은 이러한 방황하는 구도자를 위해 많은 가르침을 폈고 깊은 사색에 잠기곤 했다. 빠알리 경전에는 유행자들이 밧차곳따와 같은 문제에 사로잡혀 방황하다가 붓다와 그의 제자들을 만나서 밧차곳따와 유사한 질문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붓다의 고귀한 침묵은 어떠한 웅변적인 대답보다도 밧차곳따와 같은 사람에게 더욱 효과적이다. 註. - 밧차곳따가 붓다와 아라한의 사후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등에 대하여 보다 미묘하고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었는데(맛지마 1-487), 그때에 밧차곳따는 붓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저는 무지에 빠졌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와 대화를 시작할 때만해도 제게 믿음만이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사라졌습니다. 계속하여(맛지마 1-489), 얼마 후 밧차곳따는 붓다를 다시 만나러 왔다. 그러나 이때에는 그가 하던 버릇대로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세존이신 고따마와 이야기한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붓다는 그에게 간단하게 선과 악에 관하여 설명하리라고 말하고는 그렇게 했다. 결국 밧차곳따는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그도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진리를 깨닫고 열반에 이르렀다. 더 이상 자아나 아트만에 관한 문제들이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註. - 사람의 수준됨(器)을 아는 지혜 : 붓다의 이러한 지혜를, '능력의 높고 낮음을 아는 지혜(indiyaparopariyattanana)' 라고 한다.
5)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은 느낌에 불과하다 ▲ 위로
수행승들은 케마카에게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다발(오온) 속에 어떤 자아나 자아를 지탱하는 어떤 것을 볼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케마카는 '없다' 라고 대답한다. 그 때에 수행승들은 "그렇다면 그대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아라한이다" 라고 말한다.
케마까가 말하는 '나는 존재한다' 라는 것은 물질도 감수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그 이외의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이것이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분명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나는 존재한다' 는 느낌은 가지고 있다. 그것은 꽃잎의 색깔이나 꽃가루의 향기가 아니라 꽃향기와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케마까는 깨달음의 초기 단계에 도달한 사람에게도 '나는 존재한다' 라는 느낌이 남는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새로 세탁한 옷의 약 냄새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듯이 '나는 존재한다' 는 느낌은 수행이 깊어지고 깨달음이 깊어지면서 사라진다. 이러한 논의는 그들에게 매우 유용하고 계몽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논의의 끝에 케마까를 포함하여 모든 수행승들이 최종적으로 '나는 존재한다' 는 느낌에서 벗어나 모든 번뇌를 부순 아라한이 되었다고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자아를 갖고 있다' 는 영원주의적 견해(상견)는 '나는 자아를 갖고 있지 않다' 는 허무주의적 견해(단견)와 마찬가지로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나는 존재한다' 라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속박이기 때문이다. 무아에 관한 올바른 입장은 어떤 견해나 관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투영 없이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나' 또는 '존재' 라는 것이 인과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의 흐름을 타고 상호작용하는 정신적 물질적인 결합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영원하고 지속적이면서 항구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붓다] "수행승이여, 나는 모든 것 속에서 연기의 법칙을 보라고 가르쳤다."
[아쌍가] "무아의 사실이 있다."
1) 명상에 대한 오해 ▲ 위로
[붓다] "수행승들이여, 병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육신의 병과 마음의 병이다. 수행승들이여, 일년, 이년, 삼년, 사년, 오년, 십년, 이십년, 삼십년, 오십년, 심지어 백년을 육신의 병을 앓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을 본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마음에 번뇌가 없는 거룩한 이 이외에는 한시라도 마음의 병이 없이 지낸다고 하는 사람은 세상에 극히 드물다." 붓다의 가르침, 특히 명상하는 법은 마음을 완전히 건강하게 하여 평형을 이룬 고요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붓다의 가르침 중에 명상만큼 불교도나 비불교도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도 없다는 사실은 불행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생활의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곧 명상이란 사회에서 격리된 어떤 궁벽한 곳에서, 절의 토굴이나 암자에 있는 석상처럼 특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며, 또는 어떤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러운 생각이나 몽환상태에 잠기거나 빠져있는 상태로 일반인은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교의 명상은 절대로 이러한 도피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붓다의 가르침이 너무 그릇되게 잘못 이해된 나머지, 붓다 이후에 와서는 명상법이 거의 기술적인 면에서의 종교의식이나 격식의 일종으로 가치가 낮아지고 변질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명상이나 요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다른 보통 사람이 지니지 못한 제삼의 눈과 같은 영적인 어떤 불가사의한 힘을 얻으려는데 있다. 무엇이든 완전하게 볼 수 있는 천안통을 갖고 있었는데도 완전히 들을 수 있는 천이통을 깨우치려고 노력하는 여승이 있었다. 그녀의 이와 같은 생각은 정신도착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문제는 초능력에 대한 열망과 갈망의 문제인 것이다. 명상이나 말은 그 어원을 '바바나' 로 하는데 그 어원적인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바바나' 란 수행이라는 의미인데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수련을 뜻한다. 이 수행의 목표는 탐욕, 증오, 악의, 게으름, 근심, 불안, 회의와 같은 불결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깨끗이 하고, 마음의 집중, 직관, 총명, 의지, 활력, 분석력, 확신, 희열, 부동과 같은 것을 닦아서 마침내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궁극적인 진리인 열반을 깨닫는 가장 높은 지혜를 얻는데 있다. 불교의 명상 수행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선정을 비롯해서 공간이 무한한 경지나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와 같은 불가사의한 상태(四無色의 세계에 대한 명상)에 오르도록 삼매에 들거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계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불가사의한 경지들은 붓다에 의하면 마음에서 창조되고 마음에서 산출되고 마음에서 연기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 진리, 열반과는 상관이 없다. 이러한 형태의 명상은 인도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불교 명상의 영역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불가사의한 명상은 열반의 경지를 깨닫는데 꼭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붓다는 깨닫기 전에 이러한 요가수행을 다른 스승들 밑에서 공부하고서 극히 신비로운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붓다는 그 경지가 완전한 해탈도 궁극적인 실제에 대한 통찰도 주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붓다는 이 신비스러운 상태를 '현세에서의 즐거운 삶(現法樂住)' 또는 '평화로운 삶(寂靜住)'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불교 명상 수행의 또 다른 하나는 다음과 같다. 그래서 붓다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관찰 또는 통찰, 곧 비빠싸나(vipassana)라는 다른 형태의 명상법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그를 완전한 해탈로, 궁극적인 진리인 열반을 깨닫도록 이끌어주었다. 이 명상이 본질적으로 불교적인 명상이다. 그것은 유념, 알아차림, 세밀한 주의력, 관찰에 바탕을 둔 분석적인 방법이다.
註. - 사무색(四無色,cattaro aruppa)의 세계에 대한 명상 : 네 가지 비물질적인 상태는 근본정의 심층적인 수준에 대한 대상적 토대가 되는 것으로 이미 선정의 단계에 깊이 들어간 자에게 대상으로 접근될 수 있는 네 가지가 있다. 이 상태는 이 상태는 또한 존재의 영역으로 범천의 세계에 속하며 화생한 신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2) 명상의 실제적 측면 ▲ 위로
1. 자애로운 삶 : 어머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차별도 없이 중생을 사랑하는 보편적이며 무한한 사랑을 실천한다. (慈, metta)
1) 생활속의 불교 ▲ 위로
[붓다] "일이백, 오백이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가정생활을 하면서 나의 가르침을 잘 따른 결과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2) 우리들은 어떻게 살것인가 ▲ 위로
3) 어떻게 불교도가 되는가 ▲ 위로
4) 붓다의 사회 경제 정치에 대한 가르침 ▲ 위로
5) 정당한 전쟁이란 없다 ▲ 위로
6) 비폭력, 평화, 사랑 (終) ▲ 위로
강대국들이 직접 만들어낸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하는 인류는 그 탈출구를 찾기를 원하고 있으며 어떤 해결책을 얻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그러나 붓다가 제시한 길 밖에는 해결책이 없다. 다시 말해서 붓다의 가르침인 비폭력과 평화, 사랑과 자비, 존경과 신뢰를 통해서 이기심과 증오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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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