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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팔리어로 독송을 제법 잘하십니다.
교재 66쪽을 펴보십시오.
교재 내용처럼 올바른 사띠에 대해 알아보고 아나빠나 사띠 실참을 한 후
부처님 생애를 공부하겠습니다.
올바른 사띠sati, 스님은 항상 올바른 사띠를 강조하는데 정확히 알고 넘어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를 정正, 생각 념念을 써서 정념은 (올바른 사띠는 우리 말이고 한문으로 정념이라함) 팔정도 중 7 번째 입니다. 이 정념 수행은 태국의 프롬빌리지에서
틱 낫한 스님께서도 정념 수행을 많이 강조 하시고 계십니다.
경을 독송하고 마무리할 때 '사두 사두 사두 사띠파타나'하는데 이 사띠 파타나가 사념처 수행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이 고통을 넘어서 해탈 열반의 길을 제시해 준 수행의 방법이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마하 사띠 파타나 숫따(대념처경大念處經)입니다.
팔리어로 정념은 삼마 사띠samma sati라고 합니다. 생각 념은 한문이고
팔리어로 사띠, 공부하실 때 념念은 sati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염불念佛을 부처님 가르침, 담마dhamma를 알아차림 사띠sati 한다 이말입니다. 염불念佛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의미가 들어 있음을 아시고 항상 사띠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지금 이순간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알아차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천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공부할 교재의 내용의 출처는 '붓다의 옛길' 입니다.
읽어 가면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올바른 사띠(正念)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자신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바로 마음 때문이다.
인간이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죠.
인간에게 가장 불가사의하고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 즉 의식이다.
의식, 팔리어로 윈냐나Winnana 이것은 의식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mano 의意, citta 심心, winnana 식識 세 가지로 마음을 표현을 합니다. 의는 마노, 심은 찟따, 식은 윈냐나로 불교에서는 마음을 표현하고 심의식이라고도 한답니다. 우리는 '영원'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영원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어요. 윤회를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업業입니다.
업이 윤회한다고 하는데 업이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업이 식에 머물면서 식으로 바뀌어 그 식이 다음 생으로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천도된다는 말은 교학적으로 맞지 않는 말입니다.
더 정확히 영원이라는 말은 기독교인 개신교나 천주교에서 쓰는 말인데 원래
불교에서는 의식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신 분은 정확한 용어를 쓰십니다. 교학적으로 아니까 틀린 용어는 사용하지 않지요.
스님은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공부를 제대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을 자석에 비유하자면 인간의 마음은 지각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놀라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자력이라 할 수 있다.
선사들의 법문 중에 '괴로운 마음을 내놓아라' 그러죠?
여기 회장님께 마음을 내놓아 보라고 하면 내놓을 수 있어요?
마음을 내놓아 볼 수 있다고요? 어떻게?
어떠한 형체로 내놓을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마음을 형상으로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괴로운 마음을 내놓아라' 라는 화두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럽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불가사의해서 우리가
만지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정말로 그와 유사하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마음을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지배적이며 탁월하다. 그래서 존재하는 다른 모든 힘들을 무색케 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물리, 화학의 법칙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을 법구경에서는 어디든 가서 앉는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마음으로 우주만물의 실상을 꿰뚫어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마음은겨자씨만큼 좁기도 하고요. 큰 마음은 또한 무한대로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의 변화를 잘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불교가 마음 공부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도 당연히 보호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만큼 남도 사랑해야 한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법이죠. 조건 지어진 연기법의
원리에 따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잘 다스리려면
자신을 잘 사띠해야 한다. (법구경 157)
법구경 게송 157번 내용입니다. 자신을 잘 다스려야 사띠의 힘으로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스린다고 그랬죠? 스스로 마음을 조절하고 억제한다 지금 고통을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그런것입니다.
구체적을 회장님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려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공부해서 그런 답을 말하는데 이 공부를 하기 전에는 굉장히 추상적이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기능이 있어요.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기능이 사띠sati 라는 것입니다. 이 사띠를 깨달음을 얻으신 후 우리들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안입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구체적 방법으로 사띠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띠 수행을 해야 한다고 명제되어 있는 것이고 스님이 오직 '사띠'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다스렸을 때만 마음의 고통을 소멸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띠는 스님이 만든 것도 아니고 발견한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실천하셔셔 깨달음을 얻으신 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최고의 수행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강조의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붓다의 다음과 같은 설법이 이 점을 잘나타내 주고 있다.
"비구들아, 옛날 어떤 곡예사가 대나무 막대기 위에 올라서서 그의 제자에게 말했다. '얘야, 막대기로 올라와서 내 어깨 위에 올라서거라.'
제자가 그렇게 하자 그는 말했다.
'얘야, 이제 네가 나를 지켜라. 그러면 나는 너를 지켜주마.' 서로 이렇게 묘기를 보여 주고 안전하게 내려가자.'
그러자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은 스스로를 지키십시오. 저는 저 스스로 지키겠습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 자신을 지키면서 묘기를 보여 주고 안전하게 내려가면 됩니다.' "
(상응부 경전 v.168)
이것이 자기자신을 스스로 한 마디로 장대의 꼭대기에서 곡예를 부리면서
제자가 스승의 어깨 위로 올라 갔는데 두 사람이 스스로를 지키는 사띠를 하지 못하면 한 사람이 방심하게 되면 또는 방일하게 되면 두 사람도 죽든지 바닥에 떨어집니다. 스스로를 각자가 알아차림 잘했을 때 화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은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고 사띠하는 것이 상대방을 도와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교는 자기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이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잘다스리면 욕은 물론이고 성내는 것도 자제할 수 있고 나쁜 짓도 잘하지 않기 때문에 이 사회에 이익을 주고 행복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스스로를 사띠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수행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을 잘알아 차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붓다는 계속해서 말한다.
"비구들아, 너희들도 제자가 스승에게 '저는 저 스스로 지키겠습니다.' 라고 말했듯이 그렇게 사띠念해야 한다. (즉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 또 스승과 같이 '나는 다른 사람들을 지키겠다.' 라고 생각하며 사띠해야 한다. (즉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알아차림해야 한다는 의미.)
자기자신을 지키면서도 회향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이 지켜내려고
사띠로서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킴으로써 다른 사람을 지킨다. 또한 다른 사람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지킨다.
자애경에서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돌보듯이 다른 사람을 지키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비구들아, 그러면 어떻게 해서 자신을 지킴으로써 다른 사람을 지키게 되는가? 사띠를 반복함으로써, 사띠를 닦음으로써, 사띠를 자주 행함으로써 그렇게 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띠를 반복함으로써, 사띠를 닦음으로써, 사띠를 자주 행함으로써'라는 의미는 이렇게 하므로 사띠의 힘을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나빠나 사띠 실참을 하는 것입니다. 사띠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전제 조건으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이유입니다.
사띠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그러면 비구들아, 다른 사람들을 지킴으로써 어떻게 자신을 지키게 되는가?
자제에 의해서, 무해無害, 자애, 연민...에 의해서 그렇게 되느니라.
(사무량심)
이것이 바로 사무량심四無量心. 자慈비悲희喜사捨 정신에 의해서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의 마음으로 수행하며 불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해탈 열반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가 자비를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자비심을 체득하기 위해
우리는 사띠의 힘이 필요합니다. 사띠가 없으면 자비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이익과 결부되면 바로 욕이 나오고 함부로 말이 튀어 나온 후 후회를 합니다. 이것은 자비가 아니죠. 먼저 화가 일어나기 전에 멈춰야 된다는 것입니다.
혜민 스님의 책 제목이 '비로소 멈추면 보이는 것들'에서 '멈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멈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멈출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이냐? 사띠의 힘이 아니고는 멈출 수가 없다고 부처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지관 수행법이라고 해요. 그칠 지止, 볼 관觀.
사마타 수행을 말합니다. 집중해서 그 대상에 몰입해야 번뇌망상을 멈출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칠 지止 사마타 수행이라고 합니다. 번뇌망상을 멈추고 이어서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관법觀法 수행으로 지혜를 얻습니다. 지혜로 세상이
무상 - 고 - 무아로 이루어져 있슴을 통찰합니다. 통찰하며 자신을 옭죄고 있던
고정관념이라는 틀, 번뇌망상에서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 의식을 무한대의 영역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나는 스스로를 지키겠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사띠해야 한다."
고 부처님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지키고 다른 사람도 지키겠다는 마음가짐.
항상 역지사지의 마음 가짐으로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법우들은 이 설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 것이다.
이것은 사띠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시띠하라고 충고한다.
자제, 무해, 자애, 연민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의 안전을 지켜 주는 미덕들이다. 이 미덕들 가운데 어느 것도 사띠 없는 계발될 수 없다. 사띠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을 알아차림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말·행동은 신·구·의 삼업三業으로 행위하여 계·정·혜
삼학三學으로 닦아나가고 있습니다. 계·정·혜 삼학三學을 다시 확장하면
팔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팔정도 중에서도 일곱 번째 정념正念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띠=samma sari=satipatama=정념正念 입니다. 이것이 사념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사띠는 사람들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보살펴 주고 선행을 하도록 격려해 준다. 이와 같이 사띠를 자주 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지키게 된다.
자신을 지키는 일은 이기주의나 이기적인 방위가 아니라 자기 수행이자 자기 훈련이며 또한 도덕적, 정신적인 수행이다. 우리는 자신이 정신적으로 강하고
확고한 만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스스로가 약하고 자신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도울 수 없다. 이타주의의 행동 원리가 우리의 인격과 정신적 발전의 토대이다.
'이타주의의 행동 원리' 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자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그러죠? 홍익인간이라고도 하는 이념으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정신이 이타주의의 행동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항시 자기자신을 먼저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다는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스러우면 다른 사람도 고통스럽습니다. 나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으로 상대에게 비꼬아서 말하고, 시기질투심으로 화내면서 대하면, 상대방도 나에게 그런 대접을 해줍니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 '야호!' 하며 소리를 질러댑니다. 야호 소리가 되돌아와서 내 귀에도 들립니다. 이 이치와 똑같으며 누워서 침 뱉는다는 속담과 같습니다.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며, 이 수행은 사띠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삼업을 계정혜 삼학으로 다스려 팔정도의 일곱 번째 정념사띠 파타나를 수행으로써 청정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힘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가난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물질적으로 도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해서 다른 부족한 사람을
가르칠 수 있지 공부가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남을 가르친다는 말입니까?
스님도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해서 가르쳐 드리는 것이지 스님이 모르면 여기서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띠의 힘을 길러야만이 상대방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보시든, 법보시든 스스로 사띠의 힘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교학 공부와 사띠 수행을 하며 생활전선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띠로서 일상 생활을 살아가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 성공적인 삶 속에서 얻어진 것들을 가지고 이 사회를 널리 이롭게 하는 진정한 보디삿따bodhisatta,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킴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지킨다.'는 말은 근본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염세적이라는 이중의 오해를 없애 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닦기 위해 노력하는 진정한 수행자들 즉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당하지 않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자신을 닦고 지켜야 한다. 이와 같이 과묵한 사람들은 종종 남몰래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 어떤 사람이 인정은 많더라도 사생활이 의심스럽고 선善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자신에게 매우 소홀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봉사를 할 수 없다. 그는 사회에 진정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후 45년간 중생을 위한,
뙤약볕 아래를 맨 발로 걸식하며 중생을 찾아 다니면서 전법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해탈하신 분께서 얻을게 뭐 있다고 길 위에서 중생들을 위하여 45년간을 보내시다 쿠시나가라 숲에서 돌아가시겠습니까? 자리이타 정신에서 그런 것입니다. 불교의 정신은 나 자신을 잘알게 되면, 상대방의 고통스런 마음도 알고 헤아려 도와주고 구제해주기 위해서 보살의 정신으로 실천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불자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땅이 불국정토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지킨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열중해서도 안 된다. 삶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두 부분을 동시에 취해야 한다.
대부분 혼인하여 남자들이 밖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잘하는데 집에 있는 처자에게는 못한다는 그런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하듯 집의 가족들에게 똑같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헌신을 하고 집에서는 헌신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정에서는 불만이 많아지게 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집부터 화합하고 난 후 밖에 나가서 헌신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챙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위하여 살아 간다면, 자신의 건강이 무너지면서 자신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도의 법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항시 조화를 이루어라.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볼 수 있듯이 보살(보디삿따bodhisatta 깨달음을 얻기 전 부처님을 지칭함. 초기불교에서는.)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 먼저 철저하게 자신을 수행하고 바라밀을 닦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이 설한 가르침의 두 가지 기본적인 덕목인 지혜와 자비를 닦아 다른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진정한
인류의 안내자가 되었다.
부처님 스스로는 언제나 안내자라고 말씀하셨어요. 길 안내자. 그럼 어떤 길을 안내 했는가? 인간이 가야 할 여덟 가지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간이 가야할 길이 팔정도입니다. 좀전에 모두가 수행해야 할 것은 사념처의 길이라고. 에까야나라고 합니다. 에까야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유일한 길은 팔정도입니다. 팔정도 일곱 번째 정념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팔정도 수행을 통해 먼저 깨달음을 얻으신 후 그 과정을 안내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위대한 스승이며 또는 권력자라는 뜻이 아니라 부처님이 먼저 체험해 보시니 이렇게 해야만 사생과 삼계를 뛰어 넘어 해탈할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되신 것이죠. 어느 성인도 이 길을 발견하신 분이 없었습니다. 천상(하늘)에 태어나는 법까지 가르쳐 줬으나 해탈 열반의 길은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위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분께서 겸손하게 그저 나는 안내자일뿐이라고 하십니다. '전지전능한 전지자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똑같은 인간으로서 먼저 체험한 선지식으로써 뒷날
해탈열반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안내해 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45년간 갖은 고생 다하시면서 중생들을 인도하신 역사인 것입니다.
인도자이십니다. 부처님은 정신적인 우리 인류의 가장 위대한 아버지이십니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그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정신적인 아버지입니다.
부처님 아버지 이렇게 표현해도 됩니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제자들을 '아들들아'라고 많이 표현하십니다. 부처님이 육신으로 낳았다는 뜻이 아니고 정신적인 아들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 아버지라고 왜 표현 못하느냐는 것이죠? 앞으로는 하셔도 됩니다.
보디삿따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면서 그는 자신을 도왔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 동시에 결코 우리 자신을 잊지 말고 사띠를 통해 자신을 닦아야 한다. 이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부와 안녕을
가져다 주는 올바른 방법이다.
공부 마치고 전법 선언문 독송하지요? 전법 선언문 내용에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라고 나옵니다. 사띠 수행을 통해서 지혜(빤냐)를 터득하여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전법의 길을 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붓다는 또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사띠로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남을 가르쳐라. 이와 같이 현명한 사람은 번뇌에 물들지 않을 것이다.(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법구경 158)
'사띠로 확립해야 한다' 는 사띠파타나 입니다. 사념처 수행은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 이렇게 표현합니다. 알아차림은 사띠이기 때문입니다.
경전 속에서 우리는 알아차림을 의미하는 사띠(sati念)라는 단어와 매우 밀접한 '압빠마다appamada 항상 깨어 있음. 불방일)'라는 단어와 자주 마주치게 된다.
압빠마다는 불방일을 의미합니다. 불방일이라는 뜻은 '항상 깨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띠와 파타나와 동일한 말입니다. 이 불방일이라는 용어는 부처님의
최후의 유언에서 나옵니다. '와야담마 상카라 압빠마데나 삽빠뎃타' 그 내용입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모두 무너지게 마련이다. 부디 불방일하고 정진하라'
이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최후의 유훈으로 알려 주신 것을 세 자로 요약하면 '불방일' 입니다.
압빠마다를 적절히 번역하기는 어렵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사띠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의 반대말이 빠마다pamada는
'태만'을 의미하는데 이 문맥에서는 마음이 감각적인 쾌락의 대상들 사이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방일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감각적 욕망에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삶
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방일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압빠마다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늘 방심하지 않음 즉 '항상 분명한 앎으로 알아차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또한 사띠의 의미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칠불통게의 내용이 선을 행하고 악은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럴러면 사띠해야 하고 불방일 해야 합니다.
붓다가 마지막 유훈에서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라." 라고
말씀하시며 '항상 깨어 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이 '와야담마 상카라 압빠마데나 삽빠뎃타' 그 뜻입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모두 무너지게 마련이다. 부디 불방일하고 정진하라' 강조에 강조를 마지막 유훈으로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저의 선원 차방 현판에는 '불방일' 씌여져 있답니다. 차선생님도 오셔서 봤습니다. 불방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상수 제자이면서 붓다보다 먼저 입멸한 사리뿟따sariputta도 마지막 유훈에서 '항상 분명하게 알아차림하고 있음'을 강조하셨다.
"항상 분명하게 알아차림하고 노력하라. 이것이 나의 충고이다."
사띠 완전한 인식과 분명한 이해. 이해 이 두 가지에 의해서 명상이 완성된다. 항상 자신을 관찰하고 주시하는 사람은 이미 불사不死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사띠하고 있는 지금 이순간은 불사不死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불사不死가
무엇이죠? 죽지 않는 것입니다. 사띠하고 있는 이 마음은 죽음을 초월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에게 죽을 때도 호흡이 마지막 끊어질 때까지 사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죽음을 넘어서는 불사를 이룰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띠가 중요하다는 것을 재삼 또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명상이 불교의 원동력이듯 나태(방일放逸)는 죽음의 원동력이다.
사띠를 지금 이순간 한다는 것은 자기가 죽지 않는 법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삶을 사띠로서 분명한 알아차림하는 것이 진정 자기가 살아 있는 것임을 말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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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사띠 빳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