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문민공 휘 광철(光轍)(문정공파‧문민공파)
고려조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둔헌(鈍軒)이요, 시호는 문민(文敏)이니
문정공(태현)의 둘째 아드님으로 충렬왕 32년(1305)에 문과에 급제,
입조이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충목왕 2년(1345) 6월에 서연(書筵)을 설치하였을 때에 우정승 채하중,
좌정승 한종유, 지신사 김광철 등 40여인이 연일 시독(侍讀)을 하였다.
충정왕 2년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해
「판밀직사사」김광철로 판사를 삼아
여러 「도(道)」의 경전(耕田)을 상고하고 살피게 하고
안겸사(按傔使)를 경임하게 하였다.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족제인 기삼만이
황후의 세력에 의지해 불법으로
사람을 해치고 재산을 탈취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함으로 안겸사로서
기삼만을 장형(杖形)으로 다스린 끝에 옥사하게 하니
원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정치도감 등을 국문 하였으나,
전 밀직사사, 공과 대호군 이원구는 병으로 사면이 되었다.
삼중대광 밀직사사에 화평군에 봉작되었으니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 배위(配位)는 원주 원씨이니 찬성사 관의 따님으로
두 아드님과 세 따님을 두시니
장자 희근은 판도판서 해양군이요,
차자 도락을 천우위 해령별당으로
추성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의 증직을 받았다.
◦ 공(公)의 손자 계지(繼志)는 태종묘(太宗묘)에 공훈으로 왕으로부터
사명(賜名)을 받았으며
호는 송곡(松谷)이니 풍해도 병마절도사겸 수군절제사를 거쳐
「지초토영전사」를 지냈고 해주목사를 역임하였다.
‧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체에 승진되니
태조 태종의 양대에 당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양궁을 내왕하면서
태조의 뜻을 돌이켜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회천(回天)대업의 공이 있어서
전토(田土)와 많은 노비를 하사 받고 선왕의 뜻을 이었다 하여
계지(繼志)라는 사명을 받고
순충 보조 명량 개국 공신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지고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으니
가문의 영화가 문민 공의 손자와 증손 대에 더욱더 창대 하였다.
종보 95.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