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에 대하여 -
* 오늘은 약간 다른 종류의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제가 잘 아는 “전통신앙(傳統信仰 = 무속-巫俗이라고도 함)”을 하시는 분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는데요.
그 분이 지금까지 여러 신령(神靈)님들을 모셔왔는데 이번에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을
더 모시기로 했는데 역사적인 측면에서 그 신령님은 어떤 분이냐고...
그래서 경순왕을 역사적인 측면에서 알려져 있는 일반사항과 그분의 관심사항을 종합해서
A-4 용지로 10장 정도를 만들어 보내줬더니 좋아하더군요.
이거 만드느라 별의별 자료도 훑어보고 책도 찾아보고... 논문 한편 만들었지요.
우리나라 “전통신앙”은 태초부터 우리 민중의 마음속에서 태어나 면면히 이어 오면서
우리민족의 삶에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어 왔고 또 큰 영향을 끼쳐왔지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와 관습” 그리고 “우리의 아름다운 민속”을 지금까지 계승하고 보존해 오고 있고
그리고 아직도 많은 분들이 크건 작건 이쪽에 관심이 많으시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도 합니다.
옛 부터 내려오는 동네나 마을 또는 고장의 전통들이 이러한 정신에 바탕을 두고 전해져오고 있으며
지금도 여기저기 전국적으로 많은 행사에서 이 분들이 초청을 받아 갖가지 춤이나 노래 등 여러 가지 공연을 하여
즐거움을 주거나 축복과 기원을 해 드림으로써 기쁨을 주고 또 행사의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시는 곳은 “한국민속예술연구원” 등등의 단체가 있고 또 다른 나라와 교류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민중의 마음속에 깊숙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믿음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잘 보존하고
이어 갈 대상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종교 관련 문제는 나중에 불교를 말하는 기회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저도 자료 조사하면서 경순왕의 자취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남아 있음에 놀랐습니다.
다음은 만들었던 자료에서 전문적이거나 다 아실만한 것들은 빼고 재미있게 한번 읽으실만한 부분만
당초의 내용을 절반 정도로 줄여서 올리오니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 사실은 매우 서둘러서 만들었으므로 혹시 알고 계시는 내용과 다르고
제 얘기의 앞뒤가 조금 안 맞는 일이 있어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우리나라 전통신앙에서 모시는 신 들
- 우리나라의 전통신앙에서 모시는 신들 즉, “한국무(韓國巫)”의 신령님들은
“경순왕”을 비롯하여 통상 다음과 같다.
- 장보고(張保皐), 공민왕(恭愍王), 최영장군(崔瑩將軍), 남이장군(南怡將軍), 김시습(金時習),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 송씨부인(宋氏夫人=조선 제6대왕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 定順王后”를 말함)“ 등으로
모두 슬프고 기구한 삶을 살았거나 억울한 죽임을 당한 공통점이 있다.
* 위에 언급한 신령님들은 모두 잘 아실 테니까 상세 설명을 뺐는데 괜찮겠지요?
2. 경순왕(敬順王)
가. 경순왕 간략히 보기
(1)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이며 재위기간은 9년(927년~935년)으로서 전통신앙에서는 “김부대왕(金傅大王)”
이라고도 부르는데 출생연도가 확실치 않아 정확한 향년은 알 수가 없다.
(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부(傅)로서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28세 손이며 제46대왕인
문성왕(文聖王)의 직계 후손으로서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孝宗),
어머니는 제49대왕인 헌강왕(憲康王)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 김씨((金氏)이다.
(3) 첫 번째 비(妃)는 소원왕후(昭元王后) 또는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로서 신라 제55대 왕인
경애왕의 딸이며 여기서 첫 번째인 마의태자(麻衣太子)를 비롯하여 세 아들과 공주 하나를 얻었다.
고려에 항복한 이후에 고려태조 왕건은 신명태후(神明太后) 유씨(劉氏)의 소생이며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와 다시 결혼시켜 계비(繼妃)로 하였는데 여기서 아들 다섯과 딸 둘을 얻는다.
기록에 의하면 여기에 왕건은 자신의 아홉 공주중 낙랑공주 외에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 소생의
공주와도 또한 결혼시켰다고 되어 있는데 그 소생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에 순흥안씨(順興安氏)를 별빈(別嬪)으로 맞았는데 여기서 막내인 아홉 번째 아들을 얻게 된다.
(4) 서기 927년 경주 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던 신라 제55대왕인 경애왕이 후백제 왕인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5)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성품이 온화한 고려태조 왕건 쪽으로 기울어 갔다.
(6) 서기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 일을 머무르는데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신라 수도인 경주의 아녀자들은 “지난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마치 부모를 만난 것과 같다“ 하면서 기뻐하였다.
(7) 서기 935년 그는 나라를 고려에 넘길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신하인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8) 이때 맏아들인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여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들어가 나라를 되찾는 운동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여의치 못해 세상을 등졌으며
둘째아들인 범공(梵空)은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는 등 가족의 변화가 크게 생긴다.
(9) 그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위에서 말 한대로 그를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와 결혼시키고 벼슬은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고
유화궁(柳花宮)을 하사하여 살게 했는데 그 지위는 서열상 태자(太子)의 위에 있는 자리였다.
또한 왕건은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侍從)과 원장(員將)을 모두 다시 등용토록 하였으며
신라의 이름을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고려왕조의 “사심관”의 시초가 되었다.
* 낙랑공주(樂浪公主) :
- 일명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도 부르며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충주지방 호족이며 왕건의 고려 건국에 매우 큰 공을 세운 유경달(劉競達)의 딸인
신명태후(神明太后) 유씨(劉氏)이다.
* 사심관(事審官) :
- 처음 고려초기에는 그냥 “사심”으로 부르다 후일(서기 996년, 고려 제6대왕 성종 15년)에 뒤에
“관” 짜를 붙여 “사심관”이 되는데 이는 본인은 서울(고려수도 개경)에 머무르나 자기출신지역인
고향의 다스림에 관여하는 관리를 뜻한다.
- 고려 초기에는 중앙의 고위관리들은 거의 지방호족(地方豪族) 출신으로 아직 자기 출신지역에서
강력한 세력기반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기득권을 인정해 주고 그 지방의 치안 등을
다스리도록 하여 나라의 안정을 꾀하고 새로운 나라의 부족한 관리를 충당하였다.
(10) 그는 고려 제5대왕인 경종4년인 서기 978년 4월 4일에 별세하였는데 나라에서는 그의 시호(諡號)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의 예로서 후하게 장례를 치루어 주었다.
(11) 무덤(왕릉)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2에 있는데 국가사적 제 244호이다.
이는 신라의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지역을 벗어나서 경기도에 소재하고 있는 릉이다.
-- 비석에는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으로 표기되어 있다.
* 당초에는 북한의 행정구역인 경기도 장단군 소재였으나 남북이 갈린 이후에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나. 경순왕 신위(神位)
(1) 경순왕은 이미 시운이 다한 나라를 전쟁의 참화에서 피하게 하여 백성을 보호한 점에서
민중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는다.
(2) 그가 죽은 뒤 그의 유적지 곳곳에 사당이 세워지고 여러 전설이 생겨났으며 신령으로 모셔졌다.
(3) 그리하여 고려시대부터 계속하여 신앙의 상징으로 모셔져 왔는데 시호를 올리기 전의 그의 칭호에 따라
“김부대당(金傅大堂)”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무(韓國巫)”의 신령이 된다.
(4) 그를 숭배하는 지역은 경북의 경주, 포항, 영풍, 월성 등을 비롯하여 강원도 원주와 충북 제천,
청풍, 충주 지역과 경기도의 안산과 서울의 금천구 시흥동에서 특히 성하다.
(5) 전설에 의하면 경북 포항지역의 형산(兄山)과 강 건너의 제산(弟山)은 원래 연결되어 있어 비만 오면
물이 빠지지 않아 안강(安康)벌까지 수해를 입었는데 그런데 하루는 경순왕이 용으로 변해서
그 꼬리로 두 산을 끊어 놓아 물이 그 사이로 해서 바다로 빠지게 하였다한다.
이 전설은 경순왕이 죽어서도 백성을 보살펴주는 신령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6) 충북 청풍의 덕주사 뒤편에도 “김부대왕사(金傅大王祠)”라는 사당이 있었던 것과
강원도 인제에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나중에 다시 말한다) 이 있었던 사실,
그리고 충북 충주, 제천 등지에도 관련된 여러 유적과 전설이 있었음을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가 전하고 있다.
*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
조선 후기 헌종 때 사람인 이규경(李圭景)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등 여러 나라의 고금(古今)의
사물을 1,400여 항목에 걸쳐 고증하고 해설한 백과사전 형태의 책으로 천문, 시령(時令), 지리, 풍속,
관직, 궁실, 음식, 금수(禽獸) 따위의 모든 분야에 걸쳐 수록하였으며 60권 60책으로 이루어 졌다.
(7) 경북 영풍시 영주면 영주리에는 목조기와로 된 “자인전(慈仁殿)”이 있는데
경순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8)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군자봉 꼭대기에는 서낭당 터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경순왕을 모셨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9) 또한 용화산 학수암에 경순왕 원당이 있고
(10) 백운산 황산사, 태고사에 또한 영당이 있고
(11) 순천 송광사, 문경 양사사, 경주 황남전에도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12) 경주 월곡사에는 경순왕이 신었던 것으로 구전되고 있는 신발인 당혜(唐鞋)가 한 켤레 보관되어 있다.
(13) 그리고 경주 “숭혜전(崇惠殿)”에서는 매년 춘분에 “춘향대제(春享大祭)”를 봉행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신라 제13대왕인 미추왕(味鄒王), 제30대왕인 문무왕(文武王) 과 지금 말하고 있는
제 56대왕인 경순왕(敬順王)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어 이 세분의 왕을 위하여 대제를 봉행한다.
(14) 그런데 오늘날 무당들은 “김부대왕(金傅大王)“을 그리 명확하게 신앙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말과 일제시대에는 영험이 높은 신령으로 받들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 경순왕 후손들
(1) 다음은 경순왕의 본관인 “경주김씨” 이야기이다.
-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는 원래 제4대왕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이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후에 제5대왕이 되는 파사(婆娑)에게 태자 자리를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고
대보공(大輔工)의 벼슬만가지고 살았다
따라서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사람은 위에 잠시 언급한 제13대왕인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으로
경주김씨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7세손이 된다.
- 경주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本(본)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현재는 약 270여개의
本貫(본관)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 중에서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5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
(江陵金氏),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인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光山金氏),
또 같은 신무왕의 후손인 김영이(金令貽)를 시조로 하는 영산김씨 또는 영동김씨(永山金氏 / 永同金氏),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의 8세손인 김선궁(金宣弓)을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 또는 일선김씨
(善山金氏 / 一善金氏), 같은 문성왕의 5세손 김락(金樂)을 시조로 하는 당악김씨(唐岳金氏)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주김씨는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 경주김씨에서 다른 성으로 갈려 나간 성씨로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강릉왕씨(江陵王氏),
광산이씨(光山李氏), 감천문씨(甘泉文氏), 수성최씨(隋城崔氏) 등이 있다.
(2) 다음은 경순왕의 자손들 중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장남의 이름은 김일(金鎰)로서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 소생이며 후일 마의태자(麻衣太子)로
불렸는데 나라가 망하자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에 들어가 나라를 찾을 궁리를 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용문산 경내에 은행나무 한그루를 기념으로 심고 금강산(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일생을 마쳤는데
이 은행나무는 지금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큰 것으로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30호이다.
그리고 마의태자는 “부안김씨(扶安金氏)” 또는 “부령김씨(富寧金氏)”의 관시조(貫始祖)가 되는데
그 후손에서 통천김씨, 부여김씨 등이 나온다.
- 둘째 아들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이름과 설이 있는데 역시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 소생이며
이름은 굉(鍠) 또는 황(煌) 또는 황(湟)이며 나라가 망하자 처자를 버리고 불문에 귀의하여 화엄사의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고 한다.
그의 첫째 아들 이름이 운발(雲發)인데 이 분이 “나주김씨(羅州金氏)”의 관시조(貫始祖)가 되며
그 후손에서 교하김씨, 안로김씨, 해주김씨 등이 갈라져 나간다.
- 셋째아들도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 소생인데 이름은 명종(鳴鍾)으로 경주김씨
“영분공파(永芬公派)”의 관시조(貫始祖)가 되며 그 아래에 많은 후손이 있어 57개 파로 분파되는데
그 후손에서 강화김씨, 계림김씨, 낙안김씨 등이 나온다.
- 넷째 아들 이름은 은열(殷說)인데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 번째 아들이다.
이 분은 경주김씨 “대안군파(大安君派)”의 관시조(貫始祖)가 되는데 경순왕 후손들 중에서 이 파가 가장
번창했으며 이 대안군파에서 김녕김씨, 구안동김씨, 영광김씨, 서흥김씨, 도강김씨, 전주김씨, 양주김씨,
청풍김씨, 밀양김씨, 야성(영덕)김씨, 월성김씨, 대구김씨, 안악김씨, 안산김씨, 연주김씨, 영산(靈山)김씨,
양근김씨 등이 갈라져 나간다
- 다섯째 아들은 이름이 석(錫)으로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 소생이다.
이 분은 “의성김씨(義城金氏)”의 관시조(貫始祖)가 되며 이 후손에서 개성김씨, 고령김씨, 광주김씨,
설성김씨, 적성김씨 등이 갈라져 나간다.
- 여섯째 아들의 이름은 鍵(건)이며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 소생이다.
이 분은 “강릉김씨(江陵金氏)”의 관시조(貫始祖)이며 여기서 홍주김씨와 강서김씨가 나온다.
- 일곱 번째 아들의이름은 鐥(선)인데 이분도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 소생이다.
“언양김씨(彦陽金氏)”의 관시조(貫始祖)가 되며 이 후손에서 담양김씨와 청주김씨가 갈라져 나왔다.
- 여덟 번째 아들의 이름은 추(錘)로서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와의 막내아들이다.
이 분은 “삼척김씨(三陟金氏)”의 관시조(貫始祖)가 되며 여기서 희천김씨, 영월김씨, 진주김씨,
남원김씨 등이 갈라져 나갔다.
- 경순왕의 아홉 번째 막내아들은 별빈(別嬪)인 순흥안씨(順興安氏)와의 사이에서 낳았는데
이름은 덕지(德摯)로서 “울산김씨(蔚山金氏)”의 관시조(貫始祖)가 된다.
(3) 다음은 경순왕의 자손들 중 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첫째 딸은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 소생이며 고려 제5대왕 경종(景宗)의 왕비가 된다.
- 둘째 딸은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 소생으로 장수황씨(長水黃氏) 황경에게 출가한다.
- 셋째인 막내딸은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 소생으로 경주이씨(慶州李氏) 이금서에게
시집가는데 이금서는 경주이씨의 시조라고 알려져 있다.
라 경순왕 큰 아들 마의태자에 대한 이야기
(1)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김부1리 마을에는 "대왕각(大王閣)“이라 부르는 사당과
”5층 석탑“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 신라 청태2년 을미(서기 935년) 10월, 각지에서는 군웅이 할거하고 특히 견훤이 빈번하게 침공하여
약탈 및 나쁜 짓을 일삼으니 나라의 국력은 극도로 약해지고 국가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는 등
형세가 위태로워져서 스스로 나라를 보전 할 수 없게 되었다.
- 이 무렵 경순왕은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함을 의논하니 여러 신하들은
옳거니 그르니 하면서 패가 갈려 의논이 시끄럽기만 하고 끝나지 않았다.
- 이 때 왕태자인 마의태자는 말했다.
“나라가 보존되고 멸망함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들과 의사들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후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천년이나 전승해온 나라를
쉽사리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 이에 경순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가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형세를 보존할 수 없다. 이왕 강해 질 수도 없고
또한 약해 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임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보내서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한다.
- 이 후에 왕태자는 1천년 사직을 그대로 내어 놓을 수 없다 하여 비빈과 수십 명의 수족병을 거느리고
김부리에 와서 머무르며 스스로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양병을 꾀한다.
- 이런 연유로 이 동네를 “김부리” 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는데 이는 또 “김보동”, “김보왕촌”,
“김보왕동”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김부리”로 통일되었으며 여기에 있는 “김부대왕각”의 위패에는
당초 “경순왕제1자김부지신위(敬順王第一子金富之神位)”라 되어 있었으나 1978년 후손들이 다음과 같이
고쳐서 지금도 전해져 오고 있다. 즉,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
으로 되어 있다.
- 여기서는 수백 년 전부터 매년 단오(음력 5월5일) 과 중양절(음력 9월9일)에
동민들이 동제를 올리며 김부대왕을 기리고 있다.
- 이 동제에 꼭 올라가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미나리적“ 과 ”취떡“으로 ”미나리적“은 김부대왕이 즐기시던
음식이며 ”취떡“은 동제가 끝난 후 갈잎에 싸서 근처의 나뭇가지에 몰래 감추어 놓고 젊은이들이
찾아 먹었는데 이때 남자가 먹으면 글공부를 잘하고 여자가 찾아먹으면 길쌈을 잘하게 된다고 한다.
- 1983년 부터는 김부대왕의 후손인 ““부안김씨” 와 “통천김씨“ 들이 그들의 관시조인 조상을 사당에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통상 왕에게는 절을 세 번하는데 이들은 절을 네 번하는
천자에 대한 예를 갖추고 있어서 주목된다.
- 한편 옆 마을에는 “갑둔리(甲屯里)” 라고 “갑옷을 입고 진을 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네가 있으며
또한 그 옆에는 “다물리(多勿里)”가 있는데 이는 고구려 말로 “국권회복(國權回復)” 또는 “광복(光復)”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주목된다.
- 또한 가까운 옆의 마을인 양구군 양구읍에는 “군량리(軍糧里)”라는 동네도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들이 곧 마의태자가 이 부근에서 국권회복을 도모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다.
- 그러나 결국 여의치 못해서 금강산(개골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여생을 마치는데 그의 무덤은
금강산 제1봉인 비로봉 바로 아래에 “태자릉”으로 있다고 하는데 그 비석에는 “신라마의태자릉
(新羅麻衣太子陵)“이라고 되어 있는데 릉의 크기는 둘레 10미터, 높이 1.5미터로 보통의 묘보다 다소 큰
형태이며 그 옆에는 평소 타고 다니던 용마가 변했다는 “용마석龍馬石)”이
높이 58미터의 바위 형태로 남아 있다.
(2) 한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갈 때 지나갔던 충북 충주시 월악산에는 마의태자와
그의 여동생인 덕주공주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다.
* 위의 딸 이야기에서는 “덕주공주”가 빠져 있는데 좀 더 연구가 필요하여
향후 자료 보완 시 언급할 예정임.
- 월악산 미륵사지(미륵사터)에는 우리나라 보물 제96호인 석불입상이 있는데 부처님의 얼굴이
천년의 세월에도 이끼나 때가 끼지 않고 백옥같이 하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불가사의한 일들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중의 하나이며
이 미륵부처님은 마의태자의 화신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 그런데 이 미륵부처님은 정 북쪽을 향하여 서서 계신데 정 북쪽에는 마의태자의 동생인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덕주사가 있으며 그 뒤에는 거대한 마애불(보물 제406호)이 앉아 있어서
정 남향을 하며 미륵부처님과 마주하는데 이것이 두 남매의 한 맺힌 역사를 말한다고 한다.
- 그런데 두 사람은 “월악산 국사봉이 물에 비치면 나라를 구하는 시기가 되리라”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 경순왕
- 경순왕 묘
-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 :
1,100살이 넘은 지금도 가을이면 나무 가득히 열매(은행)를 맺고 있어 불가사의입니다.
- 월악산 미륵사터
- 미륵부처님 얼굴이 천년의 세월에도 이끼나 때가 끼지 않고 하얗게 깨끗해서 우리나라
“미스터리”중 첫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
***** 위에 나오는 지명들은 모두 현재도 그대로 있는 이름들입니다.
* 참고로 저는 “김해김씨(金海金氏)”입니다.
--- 끝까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첫댓글 하이코 역사에다 무속이 겹치니 뭔가 선뜩하기도 하고, 전래 문화라도 생각하면 따뜻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한데요. 역사 공부 잘 했슴다.
그냥 어릴때부터 우리 주변에 있어서 많이들 보셔왔지만 요즘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야 보실수 있으니까 좀 그런것 뿐이지요. 뭐 기본이야 마찬가지인데 그 중에도 정통으로 가시는 분들도 있고 또 약간 옆가지로 가시는 분들도 있어서 사람들이 여러가지로 해석하는것 뿐... 요즘 세상은 문서화 되고 표준화 되는걸 좋아하는데 다른 종교들 처럼 그렇게 일관되질 못하니... 어쩌면 이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 아닐런지... 재미있으면 됐지요. 고맙습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이번 내용은 지난번것보다는 읽기가 좀 어려우셨으리라 보입니다. 漢字를 쫌 안다는 저도 이거 만드느라 바빴지요. 여기저기서 자료를 메모해서 취합하는데 제가 글씨가 좀 그래서 내가 써놓은 글씨를 내가 못 알아봐서 다시 뒤지고... 이왕 만드는데 漢字로 된 글짜도 틀리면 안되니... 말씀대로 그런 신도 있습니다. 우리주위의 모든 사물이 모두 신이지요.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맞는 얘기입니다. 경주김씨는 우리주변에 많습니다. 명문가이고요... 다 읽어 주셔서 다시 감사드립니다.
ㅋㅋ 혹시 경주김씨이신가 여쭤볼라했더만...휴~~읽기도 벅찬데 어찌 이리도 긴글을 ...그래서 읽고 또 읽었는데도 아리송송..하긴 제가 원래 국사에는 약해서..그런데 정말 신기하네요.저도 첨 알았어요.무속신앙에 그런 유명하신 분들이 계시다는걸..여태까지는 무속신앙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귀가솔깃^^ ..덕분에 저의 시조도 알게됬고..감사 또 감사드립니다..그런데머리에 쥐가나려하네요..갑자기 공부하려니..^^
혹시 그런 질문을 하실까봐 마지막에 원문에 없는 제 본관을 부랴부랴 넣었지요. "미현님"이 그 본관이라는 건 알고 있었고요...뭐, 알고 지내시라고 올린 건 아니고요. 제 딴에는 재미있을것 같아서 한번 읽어 보시라고... "무속신앙"이라고 자꾸 귀신만 떠 올리는데 사람이나 동물이 죽으면 모두 귀신되는건 맞지요.ㅎㅎ 그냥 "그랬댔구나" 하고 지나가시면 됩니다. 다음에는 너무 어려운건 안 올리겠습니다. 저는 무지 재미있는데... 끝까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새로운 사실 하나 알았네요.ㅎㅎㅎ전통무속에서 모시는 신이 그 유명세를 떨쳤던 인물들이 있다니...!총장님 덕분에 넘 유식해지면 어떻하나???섬무당이 사람 잡는다고~~~~~~~~넘 넘 감사드려요. 꾸벅~~~~
"옥희님" 반갑습니다. "섬무당"은 섬에 계시는 무당? 원래는 "선무당"인데 "초짜 무당"이라는 뜻이고 원래 그런 초짜들이 사고를 잘 치니까...ㅎㅎ 여기 나오는 얘기들은 그냥 지나가시고요... 혹시 나중에 월악산 가시거나 할 때 한번 찾아보시면 그냥 둘러볼만 합니다. 근처에 호수와 온천도 있고 "죽령", "조령", "하늘재" 등 등 옛자취도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도 읽으시는데 아직 눈은 아프지 않으신가 보지요?
'ㄴ'을 옆에 있는 'ㅁ'으로 썼네요...'선무당'인데...이긍....갈수록 맹~~~~근데 오타 정도는 그냥 애교로 넘겨 주세요~~~` ♧
ㅎㅎ 당연히 재미있으라고 그리 쓰신거 압니다. 제가 괜히 아는체 했네요. 담 부터는 너무 어렵거나 무거운 테마를 올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글쎄... 저도 대강 이런 저런거 올려야겠다 하고 순서를 정해 놓은 것이 있어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러다 보따리 떨어지면 어쩌나???ㅎㅎ 당분간은 쓸만한 것들이 있네요.....
오실거라 믿던 분이 안 오시니까 다음 테마를 진행 할 수가 없군요. 다음 테마는 "찾아가고 싶은 곳"의 차례입니다. "재미 있는 꽃"과 경쟁하다 이겼지요.ㅎㅎ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군요..근데...누구실까??♧
ㅎㅎ 오실거라 믿었던 분들이 세분인데요... 모두 안오시니 이상해서... 사정이 있으시겠지요. 오늘은 예정대로 다음 테마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