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하였습니다. 오늘 새벽부터 시작한 칼럼인 “한국의 오늘 여기가 있기까지”의 자세한 연속 논의 가운데
적절한 기회에 계속될 것입니다.
저는 내일(월) 새벽 일찍 출발하여 수요일까지 진행될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서 구국합심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 떠나기 앞서, 한국의 오늘 여기가 있기까지 그야말로 절망적인 풍전등화 속에서 조국을 지킨 성웅 이순신 장군을 성경의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2005년 봄에도 불거진 ‘독도’와 일본의 왜곡된 교과서
문제가 또다시 ‘끓는 냄비’ 근성이라 우려하는 우리들의 심성과 화두에 지금 연속적으로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고는 그 당시 기독교연합신문에 2005년 5월25일부터 7월5일까지 7회에 걸쳐 연속 게재된
것을 독자들을 위하여 대폭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미리 부연하는 것은 작년부터 김우현 감독님을 중심으로 "일본과 한국의 영적 가족은 하나이다"라는 기도
운동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지원하면서도, 동시에 한국 고난 역사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이 기도 연합 운동을 더 적극 지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단순히 비 그리스도인들이 흥분적으로 논하고 있는 독도-대마도
논쟁과는 완전히 다른 동기와 방향성을 가지고 이 칼럼을 계속하고자 함을 양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본이 약 7년 동안 23번 한국을 침략하여 한국의 지상군이 패전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육군 15년과 수군
7년의 군 생활 22년 중에 23회 해전에 전승(全勝)한 이순신은 ‘세계사에 최상의 명장’이요, 하나님이 보내신 ‘성웅’(聖雄)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영도하는 해군이 첫 승리를 거둔 옥포대첩(1592. 5.7)을 시작으로, 그 유명한 한산대첩
(1592. 7.8)과 이 칼럼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하는 명량대첩(1597. 9.16) 및 패주하는 일본 해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노량 일대의 관음포(현 남해대교)에서 이순신 장군이 순직하는 노량대첩(1598. 11.19)에 이르는
4대 대첩이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결정적인 하나님의 일반은총적 섭리임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4대 대첩의 보다 자세한 정보를 위하여, 한국의 군사전략과 손자병법의 최고 권위자로서 이미 이 분야에
22권의 저서(23번 째 저서로서 마라톤 전쟁[주전 480년[에서 이라크 전쟁[2003년[] 의 약 100개의 전쟁사를
다루면서, 마지막 전쟁으로 6.25동란을 취급한 「나쁜 전쟁, 더 나쁜 전쟁」이 다가오는 8월 10일 경
약 1200쪽의 필독서로 출간될 예정이다)를 출간했으며, 2003년도 국방안보분야 세종문화상을 수상한 노병천
대령(현 육군대학 전략학 교수, 대전 자운교회 시무장로, ‘크리스천 리더십’으로 미국 목회학 박사)의
이순신」(양서각, 2006; 350쪽)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2005년 봄의 독도 문제로 한국이 소용돌이 칠 때, ‘시의 적절’(1545, 4.28 출생하여 1598, 11.19 노량
해전에서 53세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탄생일에 출판)하게 발행된 노병천 박사님의 「이순신을 알면 일본을
이긴다」(21세기군사연구소, 2005)를 “주 예수님의 소중한 동역자”로서 평소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쓴 이 책을 정독하면서, 서평 형식으로 우리가 당면한 오늘의 여러 가지 정황에서
이 책이 시사 하는 중요한 주제들을 성경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여러 가지 정황이 무엇입니까? 김훈의「칼의 노래」와 김택환의「불멸」을 대본으로 한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KBS 1TV 매주 토 주일 밤 9시30분)이 100회 방영을 목표로 지난 2004년 9월4일에 시작되어 2005년 5월15일에 제74회를 맞으면서, 그 당시 일본에서 야기된 독도문제와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말미암아 반일 감정이 고조되는 가운데 시청률이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세계 66.5억의 인류 가운데 우리 7천2백만 한민족만이 유일하게 아직도 분단민족이라는 고난의 반세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10일의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53세, 여)씨의 피살은 북한의 현 체제 상 김정일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시각에서, 지속적인 북핵위협과 국내외의 복잡하고 실망스런 정치 경제
사정과 함께 얽혀 우리 모두에게 난국타개의 과제를 안기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교회가 “성경기독교, 기도기독교, 선교기독교”로 칭송하는 120년 역사의 한국교회는 “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으려는” 회개와 부흥의 회복을 기도하면서도, 평양 장대현 교회의 회개와 부흥
(1907, 1.15) 100주년을 작년에 별 큰 사건 없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선교 200주년
(1807, 9.7 모리슨[Robert Morrison, 중국명 馬禮遜, 1782-1834] 선교사 광주 도착)과 다가오는 8월의 제29회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의 56 종족, 13억 인구의 복음화를 비롯한 세계선교의 주도적 사명을 감당하려는
열망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2004년의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국가흥망의 위기 속에서 지도층이 중심을 잃고 표류할 때도 흔들림 없는 애국심과 용기, 그리고
불굴의 신념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학연이나 지연, 혈연에 구애받지 않고 원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며, 구습을 완전히 타파하여 철저한 준비와 개혁의지로 부하들을 이끌던 이순신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참된 지도자 상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 시대의 무한 국가경쟁과 경제전쟁의 위협 앞에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긍정적
사고의 본이 되기 때문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칠전량(1597, 7.16) 전투에서 대패하여 단 12척의 배만
남긴 참담한 현실과 설상가상으로 수군을 없애겠다는 조정의 위험천만한 공포 앞에서 “상유십이”(尙有十二, “오히려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를 외치며,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적선의 섬멸을 부하장병에게
엄명하며 격려하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반드시 죽으려하면 곧 사는 것이요, 반드시
살려하면 곧 죽는 것이다”), “일부당경족구천부”(一夫堂逕 足懼千夫, “한 사내가 길목을 지키면 천 사내를 떨게 하기에 족하다”)의 정신이야말로 지금 가장 절실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셋째, 당쟁과 국론분열, 무지한 국제정세와 외교정책은 숱한 인재들의 결집을 방해하여 임진왜란을
자초했다는 역사적 정황이 오늘의 대한민국과 유사점이 많아 과거의 역사로 오늘의 교훈을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결코 패배한 전쟁이 아니며 침략자 일본의 의지를
끊고 조국을 지킨 승리의 전쟁이며, 3번의 파직과 2번의 백의종군에 상관없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일사각오로 승리한 이순신은 오늘의 한국인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영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핀 기획 의도는 우리의 혼란스런 현 시국에 시사 하는 바가 크지만, 여전히 역사의 주관자이신 성삼위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점에서의 역사해석이 전혀 결여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과 한국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역사적 배후에는 만 7년간의 임진왜란(1592, 4 - 1598, 12)의 풍전등화 속에 성웅 이순신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놓여있다는 사실을 노병천 대령의 최신작 「이순신을 알면 일본을 이긴다」는 은연중에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임진왜란에 가장 중요한 결정적 계기이며, 오늘의 한국을 가능케 한
명량(울돌목)해전(1597, 9.16)에 집중하여 지난 400년간 잘못 해석되어온 허와 실을 최고의 군사전략가 다운 ‘철저성과 정확성’으로 각종 문헌, 해상지도, 사진, 도면, 통계, 수치, 이론, 병법을 동원하여 상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고를 통하여 노병천 대령의 「이순신을 알면 일본을 이긴다」의 서평과 함께 성경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에서 보는 이순신을 고찰하여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회복해야 할 역사적 복음정신과
남북통일과 이스라엘을 중심한 세계 선교사명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최고 권위의 군사전략가요 신실한 시무장로인 노병천 대령의 「이순신을 알면 일본을 이긴다」
(21세기군사연구소, 2005)는 읽기에 적당한 262쪽의 분량으로 다양한 독자층을 겨냥하여 노골적인 기독교 용어나 성경인용은 극히 자제하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삶의 표준을 ‘오직 성경’으로, 삶의 기반을
'오직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라면 누구나 이 책의 저변에 흐르는 저자의 신앙고백적 통찰력을
그가 선택하는 다양한 용어들에서 감지할 것이며, 성경과 주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깊은 공감의 충격과 도전을 받을 것이다. 저자는 약 30년을 오직 전쟁사와 군사전략과 손자병법 연구에 씨름한 결과로서 육군 15년과 수군 7년의
군 생활 22년 중에 23회 해전에 전승(全勝)한 이순신은 ‘세계사에 최상의 명장’임을 단언한다. 뿐만 아니라
이순신이 ‘만들어진 영웅’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타고난 [천재적] 영웅’임을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입증한다(11-12쪽). 신학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이순신은 자신의 수행과 공덕에 의한 ‘능동적 의’
(active righteousness; 창 3:7; 사 64:6 참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은사의 ‘수동적 의’
(passive righteousness; 창 3:21; 고후 5:21 참조)로 영웅이 된 것이다. 이 책은 우리 민족사 5천년 중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만 7년간의 임진왜란에
초점을 맞추고, 23회 해전 중에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던 한산도 해전(1592, 7.8) 보다는 불과 13척으로 130여척을 상대했던 명량해전(1597, 9.16)을 최고 압권으로 선택하여, 지난 400년간 답습된 기존해석의 근간을 뒤엎는 새 해석을 집중적으로 시도한다.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설명은 “천혜의 길목 울돌목(명량)에서 불과 13척의 전선으로 일자진(一字陣)을 펼쳐
무려 130여척이나 되는 일본 전선을 맞아 울돌목의 조류가 바뀌는 틈을 이용해 일시에 일본 전선을 격파했다”(14쪽)는 인간예찬의 해석이라면, 저자가 확증하려는 분석은 일본 수군의 기습공격을 당하여 모든 전략은
뒤죽박죽이 되어 “처음부터 울돌목에서 싸우지 못했으며(안한 것이 아니라 못했다), 좁은 목을 중심으로
일자진도 펼치지 못했으며(안한 것이 아니라 못했다), 최초 접전의 몇 시간 동안은 조류나 소용돌이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각개, 135-6쪽]전투를 했다”(15쪽)는 신본주의적 해석인 셈이다. 즉 하루 4차례 전류(轉流) 시간대의 관점에서 보면, 역류 속에 이동해 온 일본 전선이 아침 7-8시 경 울돌목 출구를 통과할 때 막 순류로 바뀌어 유리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으나, 우수영 포구 안에 정박한 몇 척 안 되는
이순신의 전선을 보는 순간 조급한 욕심으로 손쉽게 양도 앞바다로 진입했기에 기습을 당한 이순신의 전선은
역류 속에 고전했다. 그러나 오후 1시 순류로 바뀌면서 유리해진 이순신이 가하는 총공세와 강한 역류에 밀린
일본 전선은 “마치 좁은 병 안으로 빨려 들듯이”(200쪽) 울돌목 안으로 흡인되면서 뒤따라 진입중인 동료
전선들과 뒤엉켜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초래하였고, 최대치의 조류가 되는 오후 4시에는 그 전체가 도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130여 회의 전쟁기사를 통하여 인류역사의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삼상 17:47; 대하 20:15), 모든 우주만상은 ‘전쟁의 용사’(출 15:3; 시 24:8)이신 하나님의 ‘군대’이며(참조. ‘만군의 여호와’[아도나이 쩨바오트]; 창 2:1의 천지와 '만물’[쩨바암]은 원어적으로 천지와
‘그들의 군대’임), 승전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병법’(참조. 수 10:10-11의 기브온 전투에 주어는 ‘여호와’이시며, 따라서 한글개역의 ‘여호수아가’는 원문에 없는 오역이며 하나님의 우박이 이스라엘의
칼 보다 더 위력 있는 무기였다; 노병천 대령의 「하나님 병법」[생명의말씀사, 2003]의 일독을 권한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1591년 일본 전국을 평정한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임진왜란 동안 조선에 투입한 왜군이 약 20만 명이었고,
제1진 고시니(小西行長) 부대가 부산(1592, 4.14)을 침공한 이래 서울(5월2일), 평양(6월13일)을 위협하는
파죽지세의 북상에 조선은 거의 무방비상태였으나 결국 11개월 만에 병력의 65.8%를 상실하고 전면 철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특별히 제2차 침공(정유재란 1596-97)에 약 14만1천5백 명과 수순 600여 척에 조선 병력은
약 3만 뿐인 위기를 고려해 볼 때, 명량해전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준 ‘하나님의 전쟁’이요,
절묘한 역류-순류의 전류시간대는 ‘하나님의 무기’였다고 고백할 뿐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우리 민족에게
사사의 별칭)이며, “꺼져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진 사명자”(257쪽)요, 명량해전은 ‘
구원의 해전’(17쪽)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칼럼에서 특별히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회상하게 하는
이순신의 인격, 사상과 삶을 성경적 시각으로 조명하면서, 주 예수님의 영광스런 복음이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부끄러운 현실을 인정하고 우리 각자의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게
될 것이다.
불교 가정에서 자랐으나 대구 계성고교를 입학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약 30년간 전쟁사와 군사전략과 손자병법 연구로 주 예수님과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주 예수님의 소중한 동역자 노병천 대령은 「이순신을 알면 일본을 이긴다」(21세기군사연구소, 2005)를 탈고한
후에도, 3년 동안 “하루에 한 번 이상 적어도 천 번 이상의 엄청난 수정 과정”을 거쳤음을 고백한다(19쪽).
이러한 열정어린 작업은 오늘의 선교한국이 존재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하나님께서 이순신을 세우신 것과(17쪽), 그가 “세계사의 최상의 명장”임을 우리 국민과 전 세계에 알리고 싶은 ‘사명감’ 하나 때문이라고 밝힌다
(19쪽).
1. 비전(꿈)의 사람 이순신
성경이 보는 이순신은 어떤 사람인가? 저자는 먼저 그를 ‘꿈의 사람’으로 이해한다(121-23쪽). 『난중일기』에 무려 40회에 걸쳐 꿈 이야기를 언급하거니와, 국운을 좌우하는 명랑대첩 3일 전(1597, 9.13)의 ‘이상한 꿈’에 뒤이어 전야(9.15)에는 “이날 밤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저렇게 하면
진다고 가르쳐 주었다”(是夜神人夢告曰如此則大捷如此則取敗云)고 밝힌다. 자신에게 중대사가 있기 전에는
어김없이 꿈을 꾸었으니, 곧 전라좌수사 임명(1591, 2.13)이나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1593, 8.1)이 있기 전,
또한 셋째 아들 면(葂)이 명량해전의 복수로 가토 기요사마가 보낸 50명의 특공대와 맞서 고향 아산에서
전사하는 당일(1597, 10.14) 새벽 2시가 그 실례이다. 잠과 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일반은혜이지만(욥 33:15; 시 73:20; 전 5:3, 7; 사 29:8), 역사의
분기점에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은혜로 꿈이나 환상을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사례를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이순신이 꿈에 만난 ‘신인’(神人)은 누구인가라는 흥미로운 질문과 함께 지면 관계상 상론할 수 없으나, 그랄 왕
아비멜렉(창 20:6), 수감 중인 바로의 두 신하(창 40:5), 두 차례의 바로(창 41:1, 5), 미디안 병사(삿 7:13), 두 차례의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단 2:1; 4:5), 동방박사(마 2:12)와 특별히 예수님 때문에 꿈에 ‘시달린’
(파스코, πάσχω; 마 27:19) 빌라도 아내 등의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일반은혜의 특별은혜화로서
경험한 끔들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도 결정적인 명량대첩(9.16)에서 배의 손실은 전혀 없고 단지 전사 2명과 경상자 3명뿐인 기적에
대하여 당일의 『난중일기』는 “적선 31척을 쳐부수자, 적선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천행(天幸)이다.” 라고 모든 승리의 공을 하늘에 돌리는 겸손의 배후에는
꿈에 나타난 신인(神人)과의 연상(聯想)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151쪽). 그는 참으로 ‘진인사 대천명’
(謀事在人 成事在天, “일의 꾀함은 사람에게 있어도 일의 이룸은 하늘에 있다”, 225쪽)의 자세로 하늘을
우러러 본 영(靈)적인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다음과 같은 신앙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즉,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9);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등이다.
표현이 많은 점을 미루어 “여러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이 기도할 때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순신은 항상 기도하는 영(靈)적 사람이었다”(242쪽)는 인상적인 저자의 평가는 좀 더 세밀한 고증이
필요한 듯하다. 올바른 기도는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할 때만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얼마나
체득하고 있는가? 아사왕이 구스의 100만 대군과 300승의 병거를 몰고 오는 세라에 대항할 58만 명의
‘용감한 정예병’(깁보레 하일; 대하 14:7)을 가졌지만, 전적으로 하나님만 소망하는 유명한 기도를 드렸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 14:11) 하였더니,
“구스 사람이 엎드려지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대하 14:13)는 세계전쟁사의 단일 전투에 최대 사상자수를 기록하는 완승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순신의 23회 해전의 전승 배후에 어떤 기도생활이 있었을까 라는 질문은 중요한 연구 과제이다.
노병천 대령은 자신의 17번 째 최신작인「이순신을 알면 일본을 이긴다」(21세기군사연구소, 2005)에서
“이 책 한권을 썼다는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낀다. 이 책을 쓸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17쪽)고 고백할 만큼 이순신 연구와 이 책에 대한 강한 애착과 자부심을 드러낸다. 저자는 이순신이 ‘꿈의 사람, 기도의 사람’은 물론이요, 셋째로 ‘믿음의 사람’임을 여러 곳에서 은연히 부각시키고 있다. 이순신을 칭송하는 ‘세계사에 최상의 명장, 하늘로부터 타고난 영웅, 군사적 천재’ 등의 별칭 배후에는 23번 해전에 완승하가까지 홀로 그 외롭고 무거운 전쟁을 짊어지고 ‘항상 하늘(天)을 바라보았던’(10쪽)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268척의 대 함대를 이끌고 부산을 향한지 11일 만에 칠전량 전투(1597, 7.16)에서 대패 전사하고, 배설이 끌고 온 단 12척의 배가 파직(2.6), 하옥(3.4), 백의종군(4.1~8.3)의 고난 속에 처한 이순신에게 주어진 참담한 선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턱없이 부족한 수군으로 일본군과 싸울 수 없다면 육지에 와서 싸우라”는 8월7일자의 왕의 유서(諭書)를 받고,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장계(狀啓) 속에 담긴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지금 신에게는 오히려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란 고백은 그의 담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압권이다. 9월의 거센 북풍의 추위에 여름옷으로 고생하는 약 2,000명 정도의 병사들에게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적선의 섬멸을 당부하는 다음과 같은 짧은 연설(9.15)은 그의 일사각오의 믿음을 보여주는 금상첨화이다: “병법에 이르기를 ‘필사즉생 필생즉사, 일부당경 족구천부’(必死則生必生則死 一夫當逕足懼千夫; 반드시 죽으려하면 곧 사는 것이요, 반드시 살려하면 곧 죽는 것이며, 한 사내가 길목[비교. 울돌목 출구]을 지키면 천 사내를 떨게 하기에 족하다)라 했으니, 이것은 모두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118쪽). 이순신의 ‘상유십이’ 고백은 현실을 ‘알고도’(비교. 롬 4:19) 인정하고 직면하고 돌파하는 ‘강하고 담대한’(비교. 수 1:6-9) 믿음으로서, 히브리서 11장이 소개하는 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믿음의 조상들, 특별히 그 중에서 가나안 정탐과 정복에 시위된 갈렙의 믿음을 생각나게 한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주전 2091년; 창 12:1-3) 아래 애굽 노예살이 430년 만에 이스라엘은 출애굽 하여(주전 1446년 3/4월; 출 12:41), 1년4개월 후 가나안 최남단 입구인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다(주전 1445년 6/7월; 민 13:20, 26). 가나안 정탐 40일 후(민 13:25) 간담을 녹이는 절망적 보고(민 13:21-23)를 들은 출애굽세대의 철야 통곡과 원망의 불신앙은 그 후 38년6개월을 광야에서 매일 평균 85명꼴로 죽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자신들이 믿은 대로”(막 11:23-24 참조)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민 14:38), 지파 별 땅 분배(수 13-21장) 역시 갈렙으로 시작(수 14:6-15)하여 여호수아로 끝맺는(수 19:49-51) 복을 누렸다. 여기 회중의 불평과 절망의 아우성 속에 파묻혀 들리지 않는 모기소리 만한 갈렙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라!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 13:30),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키] [우리가 그들의 ‘메뚜기’가 아니라, 민 13:33 참조] 그들이 우리 ‘밥’(레헴)이기 때문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7-9). 그 후 45년이 지나(수 14:7, 10), 85세가 된 노익장 갈렙의 점입가경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라. “이제 보소서(베앗타 힌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즉, 거인 족]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0-12).
어떤 암담한 현실 앞에서라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순신과 갈렙이 보여주는 이런 강하고 담대한 신앙의 도전과 격려를 누려야 할 것이다.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전 11:5-6) 소망하며, ”하나님의 약속[7,487개]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고후 1:20; 비교. 빌 4:13) 기적을 체득해야 할 것이다. 이순신의 ‘필사즉생 필생즉사’ 결의는 바로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3; 비교. 마 10:39; 16:25; 막 8:35; 요 12:24-25; 고전 15:36)는 주 예수님의 말씀이며,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요 12:32-33; 롬 6:8; 벧전 2:24) 그분의 실천이다. 이것이 기독교회사가 말하는 고난의 피와 순교의 원리, 즉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비교. ‘이 칼을 들고 참수대로, 이 밧줄을 들고 교수대로’]”(눅 14:26-27)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결단이다.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 요삼 2절)의 후유증으로 ‘십자가 없는 면류관’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향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5:12)는 바울사도의 순교신학은 큰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이제 ‘일부당경 족구천부’에 관한 논의를 계속해 보자. 이 경구(警句)는 저자가 밝히는 대로(249쪽)「오자병법」논장(論將)편의 ‘십부소수 천부불과’(十夫所守千夫不過, “열 사내가 자리를 지키면 천 사내가 지나지 못할 것이요”)와 려사(勵士)편의 ‘시이일인투명 족구천부’(是以一人投命 足懼千夫, “한 사람이 생명을 던진다면 천 사내를 두렵게 하기에 족하다”)의 독자적인 병합으로 이순신의 문무를 겸한 병법 이론과 실제의 경지는 물론 울돌목 출구를 이용한 ‘일당천’이라는 놀라운 믿음의 병법을 보여준다. 한국현대사에 그린-베레 100명과 주먹치기를 해도 이긴다는 각오로 만든 중앙정보부첩보대의 구호 ‘일당백’도 대단한 것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일당천 이당만”이라는 기적의 공식을 소개한다.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주지 아니하셨다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신 32:30; 비교. 레 26:28; 사 30:7).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수 23:10). 성경에 나타난 전쟁의 실증을 보자. 성령님이 삼손을 ‘관통’(짤라흐)하셔서 나귀 턱뼈로 블레셋 천명을 죽일 수 있었다(삿 15:14-16). 기드온 300명 용사가 ‘무수한 메뚜기, 낙타, 해안 모래 같은’(삿 7:12)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기습 자중지란으로 ‘12만 명’, 추격으로 ‘만5천 명’(삿 8:10) 모두를 격퇴한 것은(일당 450)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겁약한 미디안에게 “내가 반드시 네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 6:16)는 약속과 여러 표징을 주시고, 궁극적으로 성령님이 기드온‘을 옷 입히시는’(라베샤 에트; 삿 6:34) 보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신의 병기 잡은 병사 하나만 데리고 ‘병거 3만, 마병 6천, 해변의 모래 같은 병사’(삼상 13:5)를 가진 블레셋 군대를 향한 정면 돌파를 감행하여 그 진중에 ‘하나님의 떨림’(헤르다트 엘로힘; 삼상 14:15)이 있음도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는 담대한 하나님 신뢰에 근거한다. 엘리사 시대의 나병환자 4명의 흔들거리는 걸음을 하나님이 아람 군대에게 ‘병거와 말과 큰 군대의 소리’(왕하 7:6-7)로 증폭시켜, 한길로 왔다가 7곱길로 도망치게 하신 것이다(신 28:7).
본래 ‘믿음’(faith; 라틴어 fides에서 유래)이란 자신을 믿는 ’신념‘(confidence)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trust)와 충성(loyalty)'으로 웹스터(Webster)사전은 정의한다. 신념은 절대적인 확신과 보장이 없기에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시 62:3) 같은 것이라면, 올바른 믿음은 “약속을 맹세로써 보증하는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의 하나님”(히 6:13-20)을 신뢰하여 그분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비록 없을지라도‘(합 3:16-19),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 3:16-18), ’나를 죽이실지라도‘(욥 13:15),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히 13: 8), ”늘 신실하사 자기를 부인하실 수없으신“(딤후 2:13) 주 예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먹든지 마시든지‘(고전 10:31), ’깨든지 자든지‘(살전 5:10), ’살든지 죽든지‘(롬 14:8; 고후 5:9; 빌 1:21), ’범사에‘(골 1:10), ”주 예수님을 무엇이 기쁘시게 하는지 증명하는”(엡 5:10) 고난과 순교의 삶을 열망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히 11:38) ’믿음의 은사‘(고전 12:9)를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자들인 것이다. 본래 구약성경에 ‘믿음’(에무나)이란 단어는 어떤 대상을 ‘믿다’(아멘)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으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믿음]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합 2:4)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義)란 자신이 무화과 잎으로 엮은 ‘앞가리개’(하고르; 창 3:7) 같은 능동적인 의가 결코 아니다. 인간의 선행과 공로는 다 여성의 ‘생리대’(베게드 잇딤, “주기들의 옷”; 사 64:5) 같은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양의 ‘가죽으로 손수 지어 입혀주시는’(창 3:21; 비교. 죽임 당한 어린양, 계 13:8) 수동적 의를 믿음으로 받아 의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최대 최상의 명령인 “주 예수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복음이며, 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요 16:9)가 가장 악(약)질의 죄임을 천명하는 이유이다.
‘믿음’(에무나)은 또한 그것을 소유한 자를 믿을만한 ‘신실, 충성’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실’(신 32:4; 사 25:1; 시 33:4 등)과 ‘충성된 사람’(잠 28:20), 오실 메시아의 ‘신실’(사 11:5)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믿다’(피스튜오, πιστεύω)이서 파생한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 역시 ‘신실, 충성’의 뜻을 가져(비교. 피스토스, πιστός, ‘충성스런, 신실한’), 모세와 예수님의 ‘충성’(히 3:5-6), 그리스도인의 신실과 충성(고전 4:2; 계 2:10)에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