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시청에서 관광홈페이지에 게시된내용>
이로동(泥老洞) 도요지 비천 도요지(飛川 陶窯址) 전 양사언(楊士彦) 석각(石刻)
소재지 : -- 지역 선택 -- 삼화동 무릉계곡내
문의처 : 문화예술센터(☎033-530-2632)
무릉계곡 내의 금란정 약간 위쪽 아래인 무릉반석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봉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글씨로 전해지는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초서(草書) 12자의 석현과 함께 각 시대의 명인들의 필적들이 현자되어 있고 부근에는 금란계원명이 함께 새겨져 있다. 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석각은 무릉계곡의 신비한 경치를 노래한 내용으로 양사헌의 글씨로 추정되고 있는데, 양사언은 초서(草書)와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써서 안평대군, 김구(金絿), 한호(韓濩-한석봉)와 함께 조선전기의 사대 명필 중 한 사람으로 손꼽이는 인물이다. 그 아래에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書辛未)'라고 쓴 7자의 옥호를 옥대라고 볼 수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1963년 최만희(崔晩熙)가 쓴 <진주지(眞珠誌)>에 '우리나라 선조 때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12자를 석각하니 필세(筆勢)가 날아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용이 폭포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과 다툴만하다.'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양사언의 글씨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나 다른 견해로는 이조원(李肇源)(1758~1832)의 호가 옥호(玉壺)이므로 그가 쓴 글씨라고 하나 신빙성이 적다. 또 다른 견해로는 1750년에 삼척부사로 와서 2년 동안 있었던 옥호자 정하언(玉壺子 鄭夏彦)이 쓴 글씨라는 견해가 있다. 정하언은 어제 편제(御製 扁額)와 창경궁 편액(扁額)을 썼을 정도로 글씨가 뛰어났다. '옥호거사서신미'라는 7자에서 신미년은 정하언 부사가 재임기간인 1751년과 일치하고 있다 .
아울러 양사언의 글씨로 추정하는 사람들은 그가 초서의 대가로 정평이 났었고 인근 강릉부사로 왔던 때가 신미년(1751년)이며, 또 그가 바로 전임 부사인 정두형의 상(喪)을 조문하기 위해 무릉계에 인접한 비천동을 다녀갔다는 기록, 그리고 삼척지방의 구전(口傳)이나 최만희가 쓴 책자 등에도 양사언의 글씨라고 기재된 점으로 보아 양사언의 글씨로 보고 있다.
<시정요구사항> 양사언은 1517년에 출생하여 1584년에 사망(67년)한 자이다. 그런데 위 설명내용(밑에서부터 4째줄에)에 강릉부사로 왔을때가 신미년(1751년)이며 라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양사언 사망 이후 167년 이후이니 설명이 앞뒤 역사 연대가 이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기 위하여 시정을 요구합니다. 양사언은 지방관직으로 삼등현감,평창군수,회양군수, 강릉부사, 안변군수, 철원군수 함흥부윤 등 8고을에 재직 시기는 1550년부터 1580년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