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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주탈북민모임회 원문보기 글쓴이: 제주사랑
English : Escape From North Korea
글: 톰 오닐
사진: 치엔치 창
February 2009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11월어느날, 발자국 소리가 국경에서 16km 떨어진 중국 옌지의 한 허름한 아파트 3층에서 멈췄다. 소리를 들은 젊은 두 여자는 급히 뒷방으로 가서 벽에 몸을 바싹 기댄 채 움츠리고 앉았다. 잠시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탈북자 신분인 두 여자는 최악의 상태를 예상하는 듯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중국 공안이 신분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들은 수갑과 체인에 묶여 강제 송환될 운명에 처한다. 북송되면, 노동수용소에서 수년 동안 중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두 여자를 고용해 비디오 채팅을 강요했던 조선족 주인도 이들을 찾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레드와 화이트(중국 공안이 검문할 상황에 대비해 취재수첩에 적은 두 여성의 가명)는 방안에 갇혀 인터넷 상에서 “음담패설”을 나누고 남한 온라인 고객들이 원하면 카메라 앞에서 옷까지 벗으며 포로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바로 전날 밤, 선교사들에게 구출돼 이 은신처까지 오게 됐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안에 누구 있어요? 문 열어요.”라고 남자가 외쳤을 때, 화이트가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어제 자신을 구출해준 선교사의 목소리였다.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전기밥솥과 쌀 한 자루를 들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배고프지요?” 하며 말을 건넸다. 여자들은 인사하고 나서 부엌으로 그를 안내했다. 곧 이어 방안은 말소리로 가득 찼다. 그는 메시지를 갖고 왔다. “곧 떠날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방금 전화가 왔거든요.”
중국에는 5만 명 가량, 아니면 그보다 훨씬 많은 북한인들이 숨어 있는데, 대부분은 1450km에 이르는 중국 국경 주변의 외진 마을과 도시에서 숨어 지낸다. 몇 개월 간 몰래 중국에 들어와 식량을 얻고 돈을 벌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북한인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수는 지옥 같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 싫어서 계속 중국에 머문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계속 숨어 지내든지 -이를 악용하는 고용주의 포로로 지내는 사례가 다반수다.- 또는 아시아 지하철도(Asian underground railroad: 역주-미국역사에서 남북전쟁 전에 노예 탈출을 도운 비밀조직을 “Underground Railroad”라고 지칭했음) 여정에 나서는 것이다. 후자는 도보, 차량, 기차 등으로 중국을 횡단해 동남아시아로 가는 위험천만한 모험이다. 검문소, 밀고자, 험난한 지형 등의 장애물이 진을 치고 있는 이 여정 중에 무수한 탈북자들이 체포됐다. 그러나 소수의 인권운동가들과 3천 달러 이상을 요구하는 브로커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약 1만5000명의 탈북자들이 안전한 장소(대부분이 남한행)에 도착했다. 남한에 도착하면 정신적 충격을 겪은 데다 기술도 별로 없는 이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물에 맞닥뜨린다. 삶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대량 탈북사태는 북한 전역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던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식량난이 더욱 심한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뿌리와 풀, 나무껍질 따위로 연명해야 했고, 아사자가 2백5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중국인(특히 국경지역의 조선족)들이 절박한 탈북자들을 공개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북한측의 항의로 중국정부는 탈북자 체포에 나섰다. 발각되면 북송된다는 두려움에 떠는 탈북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중국 공안은 정기적으로 동네와 마을을 급습해 단속을 벌였다. 북한은 허가 없이 국경을 넘었다가 체포된 북한인들을 노동수용소에 3년에서 5년까지 감금시키고, 선교사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남한행을 시도한 경우는 배반행위로 간주돼 굶기고, 고문하고, 때로는 공개처형까지 시켰다. 인권단체들과 여러 외국 지도자들,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북한인이 송환될 경우에 받는 처벌을 이유로 이들을 난민으로 인정할 것을 중국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탈북자들이 불법 “경제 이주자”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중국당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몇 달 동안 탈북자 단속을 강화해 1주일에 수십에서 수백 명까지 체포해 강제송환시켰다. 그럼에도 탈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대개는 강폭이 좁은 두만강을 건넌다. 주로 걸어서 건널 만큼 수심이 얕은 여름이나 얼음이 어는 겨울에 강을 넘는다. 중국 국경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두만강의 중국 쪽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경비가 느슨해, 군인들도 보기 힘들고 전기 장벽도 없다. 건너편에 보이는 북한 쪽 강둑에는 몇 백 m마다 벙커가 있는데 초소라기보다 버려진 사냥용 잠복처 처럼 보였다. 중국 쪽 국경까지 나를 태워다 준 운전사에게 이렇게 수비가 엉성한 이유를 물어봤더니, 미소를 머금으며 “북한은 강을 건너기 전에 탈북 기회를 노리는 자들을 색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중국은 원하면 언제든지 탈북자를 체포할 수 있다고 확신하거든요.”라고 말했다.
초소를 제외하면 강 건너편 전경은 그 너머의 북한 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감금시키는 노동수용소가 수십 곳에 이르고, 2천3백만 인구 중의 최고 25% 가량이 영양실조와 허기에 시달리며, 국민을 괴롭히고 감시하는 군인이 최소한 1백만 명에 달하는 현실 말이다. 강변 평야에는 집단 농장들이 군데 군데 보였는데 대부분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이곳의 1차선 다리는 남양으로 이어진다. 그 쪽에는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아파트 건물들이 서 있고, 도로는 군용차량과 자전거 몇 대 외에는 텅 비어 있다. 그 마을의 유일한 색깔은 미소 띤 김일성의 거대한 초상화뿐이다. 북한의 창설자이자 현 북한 지도자 김정일의 아버지인 김일성은 김정일과 더불어 신격화되고 있다.
레드의 집에서는 국경 건너편이 보였다. 중국은 그녀에게 매혹적인 낙원처럼 여겨졌다. “아파트 건물들과 발전소에서 비치는 수많은 불빛을 볼 수 있었죠. 중국은 너무 부유해 보였어요.” 그녀는 함경북도의 집단농장에서 성장했다. 함경북도는 북한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탈북자 대부분이 이 지방 출신이다. “사람들이 풀을 뜯어먹고 병들어 죽는 걸 보며 자랐어요.” 그녀가 말했다. 최근에는 근처 도시의 아파트 전체에 여자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두 국경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2003년까지만 해도 탈북자의 남녀 비율은 거의 동일했다. 그런데 지금은 여성이 7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며, 이런 불균형 현상은 세계 난민 추세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군대, 농장, 공장 등에 소속돼 있는 반면, 여자들은 집이나 직장에서 몰래 빠져 나오기가 더 용이하다. 중국에 간 후에도 여자들이 더 쉽게 일자리를 찾는다. 한편, 레드나 화이트처럼 성 매매 산업에 종사하거나 중국 농부의 신부로 팔려가는 경우가 늘고 있다.
7월의 어느 비오는 날 밤, 드디어 레드는 탈출에 성공했다. 그녀는 집안에 짐이 되는 걸 우려했고, 마을 확성기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소식을 낭독해야 하는 새 임무가 창피했다. 그녀는 국경수비대원에게 눈감아주는 대가로 약 15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고 이모와 함께 두만강까지 왔다. 레드는 밧줄로 얼기설기 엮은 튜브를 미친듯이 손으로 저어 강을 건넜지만, 이모는 튜브가 새는 바람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15살밖에 안 됐던 레드는 공포에 질린 채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중국인 농부에게 팔린 북한 여자 집에 머물게 됐고, 그때부터 3년 간 농사일을 돕거나 설거지 일을 하며 숨어 지냈다. 결국 주인 돈을 훔쳐 옌지까지 간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성을 파는 비디오 채팅 일을 하게 됐는데, 그녀 옆에는 화이트가 있었다.
화이트는 10월 어느날 밤에 강을 건넜다. 그녀는 병든 엄마와 어린 동생 2명과 함께 북한 북부 산업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젓가락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음에는 노변에서 과일을 팔았지만 돈을 못 벌어 허기를 자주 느끼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중국에 컴퓨터 계통 일자리가 있는데 가겠냐고 했고, 26세였던 그녀는 엄마 약값을 벌 때까지 일하면 되겠다는 순진한 생각에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북한인 브로커는 차로 그녀를 두만강의 외진 곳까지 데려다 주며, 건너가서 그 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에 타라고 지시했다. 강을 건넌 후 떨고 있던 그녀는 차가 보이자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차 안으로 급히 탔다. 그 후 1년 간, 그녀는 방에 갇힌 채 성을 팔아야 했다.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식료품 점이 들어서 있는 서울의 한 건물 3층 사무실에서 천기원 목사가 전화를 걸었다. 탈북자들에게 지하철도 여정을 시작하라고 알리는 신호였다. 과거에도 수없이 했던 전화다. 탈북자를 돕기 위해 생겨난 남한의 여러 조직들 중의 하나인 두리하나(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 선교회의 설립자인 천 목사는 중국에 숨어지내는 탈북자 수백 명의 탈출을 지휘해 이들이 남한을 비롯해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줬다. ‘아시아 지하철도’로 탈북자를 탈출시키는 사람들은 천 목사와 같은 선교사들 외에도, 인권운동가, 인도주의자, 브로커 등,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이를 통해 북한 붕괴가 앞당겨지길 바라고, 또 어떤 이들은 북한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길 원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의 공통점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다. “북한과 중국에 있는 북한인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천 목사는 말했다. “그러니 그들을 도울 수밖에요.”
천 목사는 위험에 관한 한 도가 튼 인물이다. 그는 2002년에 밀고자의 신고로 당시 애용되던 탈출 루트인 몽고 국경 근처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그가 인도하던 탈북자 9명도 함께 체포됐다가 결국 북송됐는데, 그들 소식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천 목사는 중국 감옥에서 8개월 동안 갇혔다가 남한으로 추방된 뒤 중국 입국이 금지됐다. 천 목사의 체포와 수감 소식은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탈북자의 고통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레드와 화이트의 상황은 화이트의 온라인 고객 중에 그녀를 좋아하게 된 남자 덕분에 천 목사에게까지 알려지게 됐다. 그 고객은 그녀가 원치 않는 일을 강요당하고 있는 북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인터넷으로 두리하나에 연락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녀가 주인 몰래 보낸 구원 요청 이메일은 천 목사를 감동시켰고, 그는 이 여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중국 네트워크를 가동시켰다. 그리고 레드와 화이트의 도주에 분개한 주인에게 이들이 혹시라도 잡힐까봐 이들의 이름을 ‘지하철도’ 탈북자 목록의 제일순위로 올렸다.
레드와 화이트가 초조하게 출발할 때를 기다리는 동안, 몇 km 떨어진 곳에서는 또다른 탈북자가 중국을 탈출할 수 있는 자기 차례가 빨리 오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블랙’으로 명명했다.) 나는 조선족 선교사의 주선으로 옌지의 한 음식점 독실에서 블랙을 만났다. 그는 살을 에이는 강풍이 몰아치는 날에 입기에는 너무 얇은 진한색 나일론 재킷을 입고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은 수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는 김이 나는 설렁탕을 먹으며 두려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북한에 있는 가족 보호 차원에서 그의 이름이나 북한 생활을 밝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확신시켰다. 그제서야 그는 말문을 열었다.
2년 전, 블랙은 언 두만강을 건너 탈출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출신으로, 탈북자들 중에는 드문 고학력이다. 평양에서 경비 근무를 할 때, “노동자의 낙원”에 팽배해 있는 부패와 뇌물 현장을 목격하며 점점 환멸을 느끼게 됐다. 그는 자신과 여자친구를 안내해줄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몇 년에 걸쳐 수백 달러에 상당하는 돈을 모으며 탈출을 계획했다. 그러나 떠날 때가 되자 블랙은 차로 가면 눈에 띌 것을 우려해 도강 지점까지 걸어서 산을 넘겠다고 주장했다. 결국 7시간 동안 걷는 고행을 감수한 결과 발가락 신경이 영구적으로 손상됐다.
“두만강 건너는 건 그 후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쉬웠어요.”라고 블랙은 말했다. 그는 브로커에게 속아 조선족 갱단에 팔렸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만강을 오가며 마약과 돈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일을 거절했어요.”라고 블랙은 말했지만, 그가 초기에 중국에서 어떻게 생존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한편, 여자친구는 늙은 마약중독자에게 팔렸고, 그때부터 그녀와 소식이 끊어지면서 그는 가장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다. 결국 블랙은 탈북자들 가운데 나도는 충고를 듣기로 했다. “십자가가 보이는 곳으로 찾아가라.” 옌지 부근에는 30여 개 교회들이 탈북자들에게 음식과 옷, 그리고 임시 거처를 마련해준다. 교회들은 목사가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고, 탈북자 지원 사실을 드러내지만 않으면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교회 은신처를 찾자마자 블랙은 성경 공부를 시작했고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며 천 목사의 주목을 받게 됐다. 천 목사는 자신이 돕는 탈북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원하지만 탈북자의 신앙은 일종의 생존수단이기 때문에 피상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다수가 진짜 기독교인은 아니에요.”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탈북자들에게는 김일성을 믿는 거나, 하나님을 믿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머리로만 바꿨지, 가슴이 바뀐 건 아니지요.”
블랙은 신앙심이 독실해 보였다. 그가 얘기하는 동안 선교사는 아주 흡족해 했다. 블랙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전환점은 함께 PC방에 갔을 때였다고 선교사는 말했다. “블랙에게 ‘김정일 사생활’을 쳐보라고 했죠. 컴퓨터 화면에 김정일의 여자관계와 혼외 자녀들을 다룬 기사들이 뜨자 평생 동안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식사 중에 블랙은 작은 나무 십자가 목걸이를 셔츠 밑에서 꺼내더니 마치 온기 있는 생명체인양 손에 쥐었다. “제 꿈은 남한에 가서 신학교에 다니고,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내가 북한에서 성경을 소지하고 있다가 잡히면 총살형을 당할지 모른다고 했더니, 블랙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행동대원으로 활약하는 선교사들이 천 목사에게 탈출 준비가 됐다고 알렸다. 먼저 베이징에서 윈난성까지 기차를 타고 3220km를 간 후, 정글 속을 힘겹게 걸어 산을 넘어야 한다. 라오스 쪽 메콩 강까지 가기 위해서다. 일단 메콩 강을 건너면 태국에 이르는데, 탈북자들은 여기서 난민 신청을 할 수 있다. 먼저 레드와 화이트가 출발하고, 블랙은 며칠 후 다른 그룹과 출발할 예정이다.
중국인 안내인은 레드와 화이트를 데리고 차로 베이징까지 가서 기차역 근처에 있는 켄터키 프라이치킨(KFC) 앞에 내려줬다. 이제 계획에 따라 다른 탈북자 3명과 합류하기 위해 윈난성 수도, 쿤밍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 나도 같은 기차에 타기로 했다. 천 목사가 탈북자들에게 전달한 주의사항은 간단했다. 조용히 있을 것, 공안이 신분증 검사를 하러 오면 자는 척 하거나 화장실에 가서 숨을 것, 하나님께 기도할 것, 그리고 만약 체포되면 도와준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 말 것 등이다.
레드와 화이트는 기차에 오르자마자 침대칸의 맨 위 침대로 올라가 담요 밑으로 몸을 숨겼다. 가끔 머리를 내밀고 창밖을 내다보면, 석탄 매연이 자욱한 꽁꽁 언 밭과 도시의 겨울 풍경이 점차 사라지면서 초록색 밭과 울창한 과수원 풍경이 나타났다. 한 역에 잠시 정차했을 때 화이트는 얼른 뛰어나가 귤 한 봉지를 사오기도 했다. 40시간의 여정 동안 경찰과 역원들이 몇 차례 기차표와 신분증을 조사하러 올 때마다 레드와 화이트는 침대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그냥 지나갔다.
쿤밍에 도착하자, 이들은 거대한 역 대기실을 드나드는 사람들 무리 속에 합류했고, 곧 다른 탈북자 그룹을 찾았다. 그룹 인솔자는 택시기사 출신인 30세 남자였다. 그는 휴대폰과 위조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고 소통 가능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귀여운 베레모를 쓴 18세 소녀는 레드와 화이트처럼 성 매매 업종에 종사했었고, 또다른 탈북자는 이미 한국에 정착한 딸에게 가기로 결심한 57세의 중년여성이었다.
사람들로 혼잡한 보도에서 탈북자들은 천 목사가 고용한 안내인을 기다렸다. 이들을 태국으로 안내해줄 사람이다. 확성기에서는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계속해서 군인들이 행진하며 지나갔다. 시간은 아주 더디게 갔다. 지친 이들은 복잡한 거리에 눈이 동그래진 채 기둥 옆에 모여 있었다. 탈북자 5명이 밖에서 더 이상 오래 기다리고 있으면, 공안이 와서 조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내가 묵을 호텔 방에 가서 기다리자고 제안했다.
그 후 몇 시간 동안, 탈북자들은 긴 소파에 앉아 TV를 재미있게 시청했다. “저 남자 너무 잘 생겼다.” 한 명이 생전 처음 본 톰 크루즈의 외모에 감탄하며 말했다. 이들은 미니바에서 코카콜라를 꺼내 마시고 과일도 나눠 먹었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안 가요.” 채널을 바꾸며 화이트가 말했다. “그저 빨리 남한에 갔으면 좋겠어요. 남한은 발전했고 부유한 것 같아요.” 검은 색 롱 부츠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북한에서는 불법)와 레이스 블라우스를 입고 하트 모양의 목걸이를 하고 있는 그녀의 외모만 보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드도 더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마치 두려운 생각을 밖으로 짜내려는 듯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깜짝 놀라며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울까 해요.”라고 황급히 대답했다. 그렇게 먼 앞날까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안내인의 전화가 왔다. 다섯 명은 짐을 들고 서둘러 나갔다. 그런데 몇 초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화이트 였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TV 리모트 컨트롤을 돌려줬다.
헐렁한 체크무늬 셔츠에 캐주얼 바지를 입은 천 목사의 모습은 마치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메콩 강의 누런 물결을 바라보고 있는 여느 관광객과 다르지 않다. 그의 뒤편으로는 오토바이 소리, 코코넛이나 생선 사라고 외치는 노점상 소리에 깨어난 태국의 소도시가 있었다. 강 건너편 라오스의 울창한 숲에 점점이 서 있는 스틸트(말뚝 기둥) 가옥 부근에서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전날 밤 서울에서 방콕으로 날아온 천 목사는 화이트와 레드를 포함한 탈북자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 메콩 강변까지 왔다. 그러나 이들이 중국에서 발이 묶이게 된 탓에 지금 천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넓은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천 목사가 고용한 안내인은 쿤밍 호텔에서 이들을 차에 태워 산길로 라오스 국경 근처 은신처까지 데려갔다. 이들은 그곳에서 며칠 동안 발이 묶인 채 초조하게 떠날 날을 기다려야 했다. 라오스 국경일을 앞두고 국경 수비가 삼엄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안내인이 여정을 계속하기에는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안처럼 라오스 군 경찰도 탈북자를 체포하면 북송시키게 돼 있다. 이들이 여기서 기다리는 동안, 몰래 기차를 타고 중국 횡단에 성공한 블랙이 도착했다. “잡힐 뻔 했어요.” 그가 탈북자들에게 말했다. “경찰이 신분증을 조사하러 왔을 때 의식을 잃을 만큼 취한 척 했더니 그냥 지나갔어요.”
천 목사는 여정이 지연됐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재 탈출 여정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에 와 있습니다. 앞으로 걸어서 중국 국경을 넘은 후, 라오스를 통과해야 하거든요.” 함께 메콩 강변에 서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여기에 안전히 도착할 확률은 50퍼센트쯤 됩니다.”
천 목사는 40세에 선한 사마리아 인의 소명을 발견했다. 호텔 지배인이었던 그가 그 나이에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 친구와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탈북자를 돕고 싶은 마음은 1995년에 연변 지역 선교사로 갔을 때 숨어 지내는 탈북자들을 처음 만나면서 불붙었다. “이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이들의 인권을 회복 시켜주는 겁니다.” 천 목사의 활동이 동반하는 위험도를 감안할 때 그의 기록은 괄목할 만하다. 지금까지 탈북자 700여 명의 탈출을 진두지휘했으며, 실패한 경우는 얼마 안 된다. “북한정부는 내가 죽기를 원하죠.”라고 그가 말했다.
그렇다고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 해진 50대의 천 목사가 교과서에 나오는 성자는 아니다. 중국에서 연락책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가끔 그의 단독적이고 무모한 결정에 불만을 토로하며, 그가 가장 신뢰하고 자주 이용하는 안내인은 마약 밀매업자 출신이다. 그는 탈북자들이 감사할 줄 모른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내가 탈출하도록 도와준 사람들 중에서 고맙다고 전화한 사람은 30여 명밖에 안 됩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보상을 바라지 않고 남을 돕는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뿐이죠.”라고 덧붙였다.
거의 3주 가까이 은신처에 머물던 탈북자들에게 드디어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이들은 어깨에 짐을 짊어지고 마약 운반책 출신 안내인을 쫓아 벽지로 이동한 후, 밤새 산을 올라 황금 삼각지대(골든 트라이앵글)에 이르렀다. 중국, 미얀마, 라오스, 태국이 만나는 국경지대이자 무법의 아편생산지이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초목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정글을 통과하고 거머리가 득실대는 시내를 건너며 16시간을 힘겹게 걸었다. 안내인이 환히 아는 루트다. 거의 1200m까지 올라가서야 라오스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우리는 몸이 온통 젖고 더러웠어요.”라고 레드가 말했다. “길이 가팔라 자꾸 넘어졌죠. 나는 내내 울었어요.”
다음날 오후, 이들은 안내인 친구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 늦게 차로 메콩강 근처까지 이동한 후 거기부터 감시 탑들이 늘어서 있는 강까지 걸어갔다. 레드에게는 어둠과 세찬 물살, 그리고 부근에 있을 라오스 군인들의 존재 등이 뒤섞이며 기차로 중국을 횡단할 때보다 5분 동안 작은 모터 쪽배를 타고 태국 쪽으로 강을 건널 때가 더 떨렸다. “혹시 잡힐까봐 더럭 겁이 났어요. 여태까지 겪은 걸 생각할 때 무사히 탈출한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요.”
태국 쪽에서 기다리던 두리하나 픽업 트럭은 이들을 버스 역까지 데려다 줬고, 이들은 10시간 후에 방콕에 있는 두리하나 은신처에 도착했다. 거기서 몇 주만에 맛있는 식사를 하고 휴대폰으로 중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무사히 도착했다고 알렸다. 블랙은 “기도가 응답 받았다”고 외쳤다. 다음날 아침, 선교사는 이들을 한국 대사관으로 데려갔고, 이들은 거기서 망명 신청을 했다. 이제 탈북자들은 또다시 불확실한 상태에 돌입하게 됐다. 이들은 긴 대기명단에 이름을 첨가한 후, 버스를 타고 이민국 구치소로 이동했다. 여기서 한국 관리들이 서류 절차를 마칠 때까지 몇 달 동안 지내야 한다.
탈북자들로 만원인 구치소에 들어가 있다가 한국행이 확정되는 대로 풀려 나는데, 세 사람이 있을 당시에는 한 주에 30~40명씩 풀려 났다. 그때 구치소 여성 칸에는 450명이 수용돼 있었으나, 원래는 그 절반만 수용하도록 지은 시설이었다. “앉거나 잘 공간도 없었어요. 온전한 화장실은 2개밖에 없었고 공기는 끔찍했죠.”라고 화이트가 말했다. 나갈 때가 된 사람은 차지하고 있던 2평방피트쯤 되는 자리를 400달러에 판다. 돈이 없는 사람은 낮에는 벽에 기대 서 있다가 밤에는 화장실에 들어가 잔다. 두리하나의 도움으로 레드와 화이트는 각각 3평방피트의 자리를 샀다. 남성칸 역시 더럽지만 여성 칸처럼 혼잡하진 않다. (그 이후에 한국정부가 입국 수속을 신속히 처리하면서 상황이 호전돼 지금은 그때처럼 혼잡하지 않다.) 태국에서 80일 가까이 갇혀 있던 레드, 화이트, 블랙에게 소지품을 챙기라는 지시가 전달됐다. 이제 긴 여정의 마지막 구간을 마칠 때가 왔다.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 사람들에겐 서울에 대한 첫 인상이 가히 충격적일 수 있다. 레드도 이곳에 처음 도착한 순간 가슴이 벅차 올랐다. “얼굴을 계속 더듬으며 이게 꿈인가 생신가 생각했죠.”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할 당시 아래로 펼쳐지는 건물들과 도로를 내려다보면서 느꼈던 흥분을 떠올리며 그녀가 말했다. 이들은 버스를 타고 한강 변을 따라 서울 시내를 가로질렀다. 서울의 모습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가는 풍요로운 한국 사회의 전형을 보여준다. 탈북자들이 여태껏 접해본 어떤 세계보다 더 복잡하고 낯설다. 한국에 대해 들은 정보라고는 ‘한국은 적국이며 무자비한 자본주의자들의 땅’이라는 북한의 선전이나, 북한으로 밀 반입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이미지들, 남쪽 낙원에 가면 손쉽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환상이 전부였다. 2년 동안 서울에서 산 한 탈북자는 자신이 겪은 문화충격에 대해 간단히 “북한과 한국의 차이는 100년을 뛰어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간첩 진위여부를 가리는 조사를 거친 후, 탈북자들은 경비가 철저한 경기도 안성시 소재 하나원이라는 시설로 이동하는데, 거기서 2개월 간 남한 문화와 지하철 타는 법, 은행 구좌 여는 법 등과 같은 실용 지식을 익힌다. 교육이 끝나면 한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약 5000달러의 정착 지원금을 비롯한 월 보조금과 주택임대 비용, 취업장려금 등을 지급받는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매년 월남하는 북한인 수가 몇 십 명에 불과해 열렬한 환영과 파격적인 보상금을 받았고, 탈북자 대부분이 군부나 평양 출신 공산당 고위층으로 중요한 정보자료를 갖고 왔었다. 그러나 2006년부터 매년 평균 2000여 명씩 오고 있는 탈북자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면, 빈곤지역 출신의 농장 노동자, 공장 노동자, 하위층 군인과 사무원들이 주류를 이룬다. 평균 한국인과 비교했을 때 이들의 교육 수준과 기술은 현저히 떨어진다. 몇 년에 걸친 영양실조와 굶어 죽는 가족을 지켜봤던 고통으로 다수가 심한 육체적, 정식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불이익 때문에 탈북자들은 “영구적인 최하층 시민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국민대학의 북한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는 말한다. 이들의 남한 생활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부유하고 자유롭지만 이들은 소속감을 갈망한다.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탈북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무관심합니다.”라고 란코프는 말했다. “자신의 고통이 무시당한다는 건 거의 참기 힘든 폭력의 한 형태죠.”
레드는 노크 소리를 듣자마자 공항 근처에 있는 12층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중국 호텔 방에서 황급히 나가던 겁에 질린 짙은 눈동자의 십대 소녀였던 그녀를 본 지 8개월이 지났다. 정기적인 식사 덕분에 그녀 얼굴은 더 동그래졌고 팔도 더 통통 해졌다. 머리는 붉은 색으로 부분 염색을 했고 검은 색 진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입주한지 7주 된 자기 집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방 2개짜리 아파트는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했고 침실에 놓인 매트리스 하나와 컴퓨터를 자랑스레 올려놓은 책상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벽에는 행복 행(幸) 자가 적힌 핑크색 종이가 붙어 있었다.
“김치-!”라고 그녀가 외쳤다. “치-즈.”에 대한 한국 버전을 사용하며 그녀가 새 카메라로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다. 그리곤 여느 남한 젊은이처럼 능숙하게 사진을 다운로드한 후 미국에 있는 내 아내에게 바로 전송했다.
레드는 내 무릎에 초콜릿바를 쏟아부으며 먹으라고 강력히 권했다. 내가 드물게 방문한 손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많아요?”라고 내가 묻자 그녀는 머리를 세게 저으며 “외부 사회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친구를 사귈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북한 말투에 대해 신경이 쓰이고 영어를 많이 섞어 쓰는 남한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거의 외출하지 않는다고 했다. 레드는 앞으로의 취업 가능성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었다. 언어 코스와 미용 강좌 등록비는 정부에서 매달 지급하는 400달러로는 감당이 안 되고, 고졸 학력으로는 저임금 일자리밖에 얻지 못할 전망이다. 그녀는 벌써 주유소 일자리를 그만뒀고 지금은 카페테리아 일자리를 찾을까 생각 중이다. “취업 면접 때 북한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겁나요. 온갖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생선 요리를 먹었다. 레드는 깔깔대며 사진을 더 찍고 휴대폰으로 동료 탈북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컴퓨터”의 영어 발음을 연습했다. “이곳 생활은 힘들어요. 하지만 남한에 온 건 기뻐요.”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저는 지금도 성공을 꿈꾸고 있어요. 북한에 계신 부모님이 저를 자랑스럽게 여기실 수 있게요.”
화이트는 탈북자 정착 지원시설인 하나원에서 멀지 않은 지방도시인 천안의 한 병원 6인실에 입원해 있었다. 하나원 의사들은 그녀에게서 갑상선 암을 발견하자마자 암 제거수술을 집도했다. 북한이나 중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사망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치유의 희망이 있다.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하려고 힘겹게 일어섰다. 수술 자국이 목 밑까지 나 있었다. 잘 웃고 야한 옷을 입었던 감정이 풍부한 여성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쉰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며 헐렁헐렁한 병원복 차림으로 불안정하게 움직인다. “천 목사님께 전화해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두리하나에서 진료비를 도와주고 있고, 가끔 천 목사님이 오시면 함께 기도해요.” 천 목사는 화이트가 이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고 내게 말했다. “착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 진실한 여성입니다.”
화이트는 벌써 자기 아파트에 가봤다. “먼저 컴퓨터와 냉장고를 사고 싶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북한 음식을 요리할 거예요.” 그녀는 내가 쳐다보는 것을 알아챘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방에 갇혀 1년을 보냈고, 태국에서 3개월 간 혼잡한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지금은 병원에서 3개월째 지내고 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엄마의 사망과 남 동생의 체포 소식도 들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저렇게 행복해 보일까? 그녀는 택시 타는 곳까지 걸어 나와 내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택시 안에서 뒤로 쳐다봤더니, 그녀는 넓은 하늘을 향해 미소 지으며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블랙은 한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울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 입주했다. 차 소리와 매미소리가 아파트 창문을 통해 들렸다. 벽에는 중국에서 그가 꼭 부여잡고 있던 나무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다른 책들과 함께 성경책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그는 아직 가구를 장만하지 않았다. “모든 게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어렵고 복잡해요.” 40세의 블랙이 말했다. 신학교 진학에 대한 꿈은 대학 장학금이 35세 미만에 한해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지금 현재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데려 오려면 돈을 빨리 벌어야 돼요.”라고 그가 말했다.
블랙은 자신이 불평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내게 사과했다. “여기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서울에서 벌어지는 시위 소식을 읽을 때면 기분이 좋아요. 내가 북한에서 그랬다면 감옥에 갔을 겁니다.”
우리는 저렴하고 시끌 북적한 식당들이 즐비한 대학가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불러 탔다. 경적 소리가 요란하고, 표지판과 보행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8개월 전, 중국에서 선교사의 밴에 타고 있던 블랙은 어깨를 움추리고, 초조하고 불안한 눈초리로 십자가 목걸이를 꼭 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새 고국의 즐거운 소란함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졸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안전하고 자유롭다. (번역: 이소영)
톰 오닐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수석기자이고, 대만 출신인 치엔치 창은 메그넘 포토 에이전시에 소속된 사진작가로 타이베이와 뉴욕에서 거주한다.
힘겨운 남한 적응기
고향생각, 좌절 그리고 새로운 다짐:
갓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오래전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경험을 통해 생소한 남한 생활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쉬운게 하나도 없다. 이는 남한에 정착해 몇 년쯤 산 탈북자 대부분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터득한 교훈이며 새로 온 탈북자들에게 줄 수 있는 충고다. 경기도 일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윤성철(48)씨의 예를 보자. 윤 씨가 남한에 온 건 1996년이었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북한을 ‘창살 없는 감옥’에 비유했다가 이 말을 엿들은 누군가가 밀고를 하는 바람에 쇠사슬을 찬 채 끌려가게 됐다. 그는 그 사실 외에 북한 생활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윤 씨의 식당에 가면 직접 구워 먹는 차돌박이와 느릅냉면을 맛볼 수 있다. “여기서 파는 음식을 북한에서는 고위층 간부들밖에 못 먹습니다.” 윤 씨가 말했다.
식당이 아주 좋다고 했더니 윤 씨는 웃으면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터득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식품 유통업을 할 때 고용한 경리 사원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그는 자신의 최대 약점으로 순진함을 꼽았다. 자신감도 과했던 것 같다. 남한 여성을 따라다니며 구애해 결혼에 성공했지만 지금까지도 부인이 윤 씨가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숨긴다며 마음 아파했다.
윤 씨는 소떼가 찍힌 대형 사진이 걸려 있는 자신의 음식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 10년을 넘게 살았는데도 여전히 불안하고 우울할 때가 많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형제도 그립다. “북한, 러시아, 남한에서 다 살아봤어요. 그런데 가족과 헤어져 있으면 어디에 있어도 행복해질 수가 없더군요.” 그가 말했다.
탈북자들과 같이 일해 본 남한 사람들은 탈북자 중에서도 10~20대가 적응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 기근과 세뇌교육에 시달린 노년층에 비해 정신적 충격이 덜하고 교육비 지원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윤희(30) 씨는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탈북 여성의 전형이다. 밤늦게 서울 방화역 근처 임대아파트를 찾아가 만난 김 씨는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잤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영어공부와 안내데스크 아르바이트 일을 하고 조금 전에야 집에 왔다. 전날 밤에는 친구들과 노래방에 시설을 갖춘 술집에서 늦게까지 춤을 췄다고 한다.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처지의 탈북자들이다. 반짝이는 금실 장식의 검정 블라우스 차림에 윗 단추 몇 개를 풀어놓은 김 씨의 겉 모습만 봐서는 퇴근해 집에 온 여느 서울 사람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외모만 같을 뿐이다. 김 씨는 매일 남한 생활에 적응하느라고 고생하고 있다.
김 씨는 2002년 서울에 왔다. 자신을 중국에서 탈출시킨 브로커에게 5.000달러 이상의 빚을 졌다. 남한에 와서는 직장을 두 군데 다니며 빚을 갚아야 했다. 지금은 대학교에 다닌다. 그녀는 “첫 학기가 최악이었다.”고 말했다. 교수님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퇴하고 결혼이나 할까 고민도 많이 했어요. 그러나 힘들지만 고생하면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죠. 사람 사귀는 일도 어렵다. “모임에 가면 사람들이 영화배우 음악 정치 이야기를 하는데 아는 게 있어 야죠.” 김 씨는 말했다.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 검색을 했어요. 다음 번엔 대화에 어떡하든 끼어보려고요. 모를 땐 웃으면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해요.”
김 씨를 비롯해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왜 남한에 왔죠?”라는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인간답게 살려고 왔지요” 한 탈북자의 간단명료한 대답이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준다.
취재 기자 일문일답
내가 만난 탈북자들
중국과 태국, 라오스를 넘나들며 탈북자들을 동행 취재한 톰 오닐 기자를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판이 직접 만났다.
중국에 숨어있는 탈북자들과 어떻게 접촉했나?
오래전부터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선 요란한 선전 뒤에 감춰진 북한의 실상에 관해서 취재하려고 했습니다. 몇 년 전 사진기자 한 명과 평양에 가서 취재 허가를 받으려고 했지만 거부당했어요. 그 후 워성턴 DC에서 미국에 처음 입국한 탈북자들을 만났죠. 북한의 참담한 실상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더군요. 북한을 제대로 보려면 탈북자들을 만나는 게 지름길이다 싶었죠. 1년 뒤 탈북자들을 돕는 두리하나 선교회 천기원 목사를 만났습니다. 천 목사 덕분에 탈북자들을 취재할 수 있었죠. 단 엄격한 조건이 있었어요. 탈북자의 실명이나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거였죠.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는 선교사나 자세한 탈북 경로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기로 했어요.
취재를 하는 동안 들키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했나?
중국 공안이 탈북자의 은신처를 눈치 챌 만한 동행은 절대 금물 이였어요. 난 한국인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 온 관광객 행세를 했죠. 통화는 되도록 짧게 끝나고 암호를 만들어 얘기했어요. 사진기자 창 첸지에게 우리부부가 무사히 탈북자들과 만났다든가 탈북자를 만나러 갈 때면 이런 식으로 전달했죠. 결혼식 하객 전원 도착.‘ 지금 막 소풍 떠남.’ 이메일을 쓸 때도 서로 암호명으로 불렀습니다.
난 “프레리도그” 첸치는 “더블 해피니스(중국산 담배)‘였죠. 휴대전화번호도 자주 바꿨어요. 중국에 오기 며칠 전, 한국 기자가 선양에 있는 탈북자의 은신처를 취재한 뒤 공안이 들이 닥쳤다는 소식을 접했던 터라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양에 있던 탈북자 여덟 명은 모두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 되었다고 하더군요.
아찔한 순간은 없었나?
국경 부근에선 정말 피가 마르는 것 같았어요. 누가 공안에 신고라도 하는 날엔 당장 체포될 테니까요. 탈북자를 만날 때마다 모자 달린 외투를 푹 뒤집어쓰고 다녔고 탈북자를 돕는 선교사와 식사를 할 때면 항상 별실이 있는 식당을 이용했습니다. 베이징에서 아내와 난 탈북자들과 함께 쿤밍 행 기차에 올랐죠. 장장 40시간의 기차여행 끝에 쿤밍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쿤밍 역에 마중 나오기로 한 안내인이 안 보이더군요. 사방엔 공안과 군인이 쫙 깔려 있었고요 들키면 큰일이다 싶어서 기자의 본분이고 뭐고 제쳐두고 탈북자들을 택시에 태워서 호텔 방으로 데려갔죠. 아내와 나 모두 공범이 된 셈이었어요. 잡히면 나야 추방되는 걸로 끝이지만 아내는 한국인이라 몇 년을 감옥에서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라오스 국경으로 데려다 줄 안내원이 몇 시간 뒤에야 나타나더군요. 몇 주 뒤 한국에서 탈북자들이 무사히 태국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는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죠.
부인이 한국 사람이라는 게 도움이 되었나?
그럼요. 아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탈북자들이 우릴 믿어줬죠. 아내는 태국 방콕의 이민국 수용소까지 가서 탈북자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어요. 아내 고향인 서울에서 아내 친구들을 만난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 이였습니다.
안타까웠던 순간이나 사연이 있다면?
탈북자들은 대개 가족이 굶어 죽거나 체포되는 걸 목격한 사람들이죠.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어요. 고향이 그립고 외롭다고 했어요. 북한 생활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는데도 가족이나 고향 마을, 이웃을 그리워했죠. 대부분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할 걸 아니까 마음이 아팠어요.
북한 사람을 직접 만났는데, 어땠나?
서울이 고향인 아내는 탈북자들이 아주 옛날 사람 같다고 했어요. 중국에서 만난 탈북자들은 처음엔 아주 불안해하면서 우릴 의심했습니다. 음식도 사주고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기도 하니까 그제야 조금 마음을 열더군요. 유머 감각도 아주 뛰어났어요. 농담을 하면 잘 웃고 어디 구경거리나 소동이라도 있으면 웃음을 참지 못했어요. 나보곤 키가 크다고 놀려댔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었어요.
기사에 나오는 레드와 화이트, 블랙은 지금 어떻게 지내나?
화이트는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지금 회복 중입니다. 건설 일을 그만둔 블랙은 서울에서 다른 직장을 구했어요.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 레드 소식은 좀 안됐어요. 탈북자인 남자 친구에게 구타당한 뒤 화이트와 함께 두리하나 선교회로 거처를 옮겼다더군요.
휴전선 기사에 이어 이번엔 탈북자를 취재했는데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나 동기가 있나? 한국에 대해 또 취재를 한다면 어떤 분야를 하고 싶은지?
2002년 DMZ 기사를 취재하러 처음 한국에 왔어요. 그때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판 초대 편집장을 지냈습니다. 은퇴한 뒤론 서울과 워싱턴 DC를 오가며 살고 싶어요. 지금은 한국의 심마니에 관한 기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