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의 많은 비유들 중에는 유명한 '삼거화택(三車火宅)의 비유'라는 것이 있다. 세 가지의 수레와 불타는 집을 통한 비유라는 뜻이다. 그 요지는, 집이 불길에 싸여 가는 줄도 모르고, 안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으므로, 그들을 밖으로 유인하여 구하기 위해 소의 수레와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가 준비되어 있으니 빨리 나와서 가지라고 함으로써 그들을 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의 수레는 각각 성문승과 독각승, 보살승의 삼승을 비유한 것이다.
승(乘)이라는 말은 '실어 나르는 것'을 뜻하므로, 실질적으로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취하는 '입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성문승과 독각승을 소승이라 간주하여 그 가치를 격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또는 성문승은 소승, 독각승은 중승(中乘), 보살승은 대승이라고도 한다. 물론 『법화경』에 이 삼승을 설하는 것은, 그러한 차별이 무의미하므로 그들은 모두 부처 또는 보살이라는 한 가지 입장(一乘)을 지향하는 방편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42문 참조) 어쨌든 이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문과 독각이 어떠한 인물을 가리키는 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보살에 대해서는 제14·15문 참조)
성문(聲聞)이란 말 그대로 음성을 듣는 사람이다. 따라서 제자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아함경을 비롯한 초기경전에서부터 성문에 대해서는 종종 언급된다. '성문은 음성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는다'라는 설명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후의 대승경전과 논서들에서는 성문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예가 많은데, 이들을 간추리면 대개 이러하다. 부처님이 설하는 음성을 듣고서 수행하는 사람, 자신의 깨달음만을 생각하는 성자, 자기의 완성만을 구하려 노력하는 출가인, 자기의 깨달음을 구하는 일에 전념하는 성자, 자기의 완성만을 노력하는 출가승, 가르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제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무한히 긴 시간에 걸쳐 수행한 결과 아라한의 계위에 도달한 사람. 이와 같은 설명들을 보면, 성문은 출가한 수행자로서 이기적인 입장에서 노력하는 사람을 주로 지칭하는 듯하다. 이는 물론 대승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초기의 불교성전에서 성문이란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가르침을 듣는 사람을 의미했으며, 불제자를 의미했다. 즉, 성문에 대한 설명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성문이란 주로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의 여러 제자들을 가리키는데, 사성제의 이치를 관찰하고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에 정리된 온갖 종류의 수행을 닦아, 견해와 수도에서 생기는 온갖 미혹을 끊고 차례로 네 단계의 경지(제16문 참조)를 증득함으로써 무여열반에 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은 실질적으로 출가한 수행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후대가 되면 불교의 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출가수행승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라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근본취의에서 보면, 뭔가에 의지해야만 하는 성문을 꼭 올바른 인간상이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독각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독각(獨覺)이란 말 그대로 저 혼자서 깨달은 사람이다. 연각(緣覺)이라고도 하고 벽지불(벽支佛)이라고도 하는데, 벽지불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원어(pratyeka-buddha)의 발음을 딴 것이다. 이는 타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깨달은 자, 또는 깨달은 후에도 타인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있는 자라는 뜻이다. 타인에게 가르침을 설하여 인도하는 일을 독각은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독각에는 자리(自利)만 있고 이타(利他)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타를 중시하는 대승에서는 이 독각을 성문과 함께 한 단계 낮추어 보는 것이다. 물론 대승불교 이전에도 독각에 대한 언급은 있고, 거기서는 성문과 마찬가지로 낮추어 보려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지는 않다. 시대가 흐르면서 독각에 대해서는 성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의 구분을 두게 된다.
그런데 이 독각에 대해서는 그 확실한 기원이 밝혀져 있지 않다. 일찍이 실재했던 인물을 모델로 삼았다는 설도 있고, 깨달음을 얻은 이후 아직 설법을 결심하지 않고 있던 부처님의 모습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느 쪽도 확실하지는 않다. 어쨌든 자력으로 뭔가를 성취하고서 그것을 자기 혼자만 간직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문이란 남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목적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인 사람이 될 것이다. 후세에 독각은 십이인연을 관찰하여 미혹을 끊고 그것을 증득한 사람이라고 해석되었다. 이는 성문이 사성제를 관찰하여 아라한이 되고, 보살이 육바라밀을 행하여 부처가 된다고 보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독각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독각을 연각이라고도 번역할 때의 그 연(緣)이 십이인연을 가리킨다고 보는 데서 기인한다.
결국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설명처럼, 독각은 부처님이 없는 세상에 나서 스승이 없이 홀로 깨닫는 반면, 성문은 부처님이 가르치는 음성을 듣고서야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으로 그 둘을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을 아무래도 이기적이라는 데에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법화경』의 정신에 따라 이 둘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성문승은 근본불교의 가르침을 일컫는 것으로서, 그 가르침은 믿음을 특징으로 한다. 부처님을 어디까지나 믿고 따라서 수행하겠다는 결심에 의해 여러 가지의 것을 알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면, 깨달은 사람을 철저하게 믿고 그 사람을 좇아서 수행하겠다고 결심하여, 이 탐욕과 무지와 증오의 세계를 꿋꿋하게 살아가겠다는 생활방식을 가리킨다. 한편 독각승이란 천지인연의 이법(理法), 즉 대자연의 법칙을 궁구하고, 인간의 삶의 방식을 파악해 가는 입장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자연이나 인생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법칙을 발견하며, 그것에 의해 이 탐욕과 증오와 무지의 세계를 헤쳐나가려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물론 이러한 입장들은 이타적이며 대사회적(對社會的)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