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순위
1955년 경남 진주 출생
경남여고, 대한신학대학 국문과 졸업
1984년 현대시학에 '산백일홍' 발표
시집 <말라가는 희망> <포도 인 아이>
가장 쓸쓸한 역 - 허순위
신설동역에선
스카프를 고쳐 맬 동안에 장갑을 잃었다.
살갗에 지퍼를 달자
호주머니가 몸 안에 있을 때
내가 잃어버린다라는 말과 이별할까?
그 길은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 허순위
외발로 멈추어 선 저녁 계단.
발바닥 밑으로 중력이 바뀌어간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말
누군가 공중에 흩뿌려 놓은 포플러 잎사귀들같이
푸들거리는 슬픔과 불안의 공기를 뚫고 멀리
아득하다. 맡은 역의 대사는 아직 못 다 외웠지만,
기나긴 저녁을 두른 내 옷은 툭, 툭 끌러 터진다.
계단 밖의 남자가 운다 못을 박으며
계단 안의 여자가 운다 못을 뽑으며
노란 현기의 즙 발린 이마에
뜨는 햇살마다 조금씩 묻은 피를 훔치고
집으로 가는 길.
부글거리는 거품의 계단에 서서
시계 속에 나른하게 흐르는
어둠의 시침, 배반의 분침 그리고 상실의 초침…
낀 먼지 뽀얗게 떠들어대는
저녁이 긴 창의 집에 돌아가고 싶다.
조금 조금 조석으로 갈아쓰는 안경과 안경 사이
부푸는 시력의 차이만큼
사물의 가장자리 둥글게 휘어지는
안개의 매듭을 풀어 나아가자면
지키지 못한 내 생애의 약속들
계단마다 벽처럼 우뚝우뚝 치솟아 오르지만
집으로 가는 길
그 길은 나의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그 소리 - 허순위
어둠 속에 계신 나의 어머니 울고 계세요.
오늘도 내 안에서 콜탈로 엉긴 꽃의 형태. 그 따뜻했던 내력은 언제까지나 내 머리에 가슴에 오디오 세트 품명 같은 혹은 티끌 같은 걸로 꽃피우는 식물의 품종인 환타지아로 쿵, 쾅 울리거나 휩쓸리는 그림자일 뿐, 저녁이면 청보라 빛나는 야광의 두개골을 이끌고 더워져서 말랑말랑해지는 투명한 밀랍의 공기 기둥들을 손끝으로 밀어뜨리며 어머니……안녕? 안녕! 하며 밤 속으로 들어가보지만 모두 아니라고 말할 것뿐이고요 밤이면 세상 처녀들의 탄탄하고 초산 머금은 질 속 같은 공기의 파도를 낯선 신전의 기둥마냥 쓰러뜨렸다간 세우며 그 검은 콜탈의 꽃잎가에 나는 설푸른 서러움의 주걱을 갖다붙이곤 힘껏 떼어요. 빳빳이 날리는 콜탈의 갈기들 그것이 어머니에게 못다 열린 다정한 입술들이라고 말해보지만 밤마다 까맣게 시든 어머니가 보여요. 아직도 아버지에게 온몸 도르르 말려들고 싶어 하시는 죽어도 닮고 싶지 않은 내 어머니 바람 부는 겨울의 긴 골목을 걸어오시던 어머니의 신발소리 내 무덤을 희허옇게 덮을 그 소리
나의 부재 - 허순위
퇴근 후 험한 발바닥을 더운 물로 씻고 7년 자췻방에 엎드려 울었더니 등에서 먼지뭉치가 따라 울었다 새털구름을 따라서 포플러나무를 따라서 죽 걸어왔더니 편지뭉치 같고 먼지뭉치 같이 마음이 뭉쳐 사랑이 빈 자리 무섭구나야 잿 속을 뒤져도 아무 것도 아무것도 없는 가엾은.
너의 자유는 부채처럼 내 옆구리에서 - 허순위
그것은 집·밥·옷처럼
눈물과 sex처럼
네가 내 가슴에 넣어준 큰
나뭇잎사귀처럼
절대희망처럼
꽃처럼
내
한숨처럼
불타는 나의 옆구리에서
활짝 펼쳐진
성 금요일 저녁으로부터
멀리멀리 달아나는 망명길처럼
달팽이 - 허순위
상추 천 원어치에 딸려 온 달팽이
하루 종일 아이들의 유리병 주둥이를 돈다
둘러앉은 눈 여섯 개가 신기한 양 구경하는
유리시장 속 눅눅한 생명이다
사과 껍질도 찢어진 풀잎쪽도 없어
쉴 자리도 일자리도 없는 달팽이
유리 주둥이 그 빙판길을,
뼈없는 하류의 몸이 고난대로 제 몸을 만든다
말라가는 희망 - 허순위
희망은 몹쓸 년, 혹은 너무 성스러운 아내. 나는 그것에게 속아왔다. 비틀린 긴 시간을 그것은 욕망의 우물 속 깊은 데로 그물에 담아 내린 둥근 수박의 꼴을 하고 차갑게 저장되어 왔던 붉은 속살, 까만 씨앗의 혀, 불구의 남편 내버려둔 채 끝끝내 제 소원 따라 나가 엉망진창인 집도 자식도 내 몰라라 돌아다닌 이제는 제 낯도 일그러져 제 발로 빈 손으로 대문 밖을 나서는 이년아 하필이면 비오는 날이냐, 네 이년 게 섰거라. 아무 말도 못하고 나가는 아내 내다보는 남편의 눈 같은 나의 삶을 휘이 둘러보면 허벅지로 가만히 갖다대던 따뜻한 손바닥의 체온 같은 추억도 없진 않으련만 비 탓이야 비 탓이야 말이 새어나오지 못하는 건. 젖은 세상 타고 기억의 들판으로 드문드문 섰던 꽃나무들 빗방울 뒤켠으로 슥 돌아 들어가고… 팽개쳐 둔 살림살이 곳곳에 분내나는 곰팡이 그년의 영혼마냥 알록델록한 얼룩으로 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외로움이거나 추스려야 할 가난쯤으로 말하며 둘러섰겠지만, 가거라 희망아. 너는 내 삶의 아름다운 화냥년이었더니라.
목련 - 허순위
차이코프스키랑
백작부인이랑
종이벽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입맞춤은
쓴 약.
한 수억 년간
풀지 못한 오해의 은박지에 싸인 말
안녕.
반달 - 허순위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
처음에는 안돼 안돼 소스라치다가
스르르 풀리는 햇살의 태엽
그날 이후 마음 안의 마음도
마음 밖의 마음도 지치던 저녁답
오후3시 햇살 속에 쏟아지는 눈같이
적막이 정지된 시계 속
찌르르 찌르르 여치가 울고
그리고도 한 사나흘 뒤 비딱한 모자 쓰고
제 낯 드러내는, 잘 가 즐거웠어, 하는 말같이.
이별의 정거장 아픈 네 머리 위
붉은 포도를 머리에 인 여자들 - 허순위
그러고도 고즈넉하고 조용한 더욱 밤이 되었을 때 남천에는 동두렷이 달이 떠 오르고 달 속에서 수 천 줄기 버드나무 실가지들이 뻗어져내려 오는데 그것은 노란 실비 같았는데 실가지를 타고 내리던 두꺼비떼는 간데없고 버드나무 가지들 곰실곰실 흙을 밀고 올라 온 포도나무 연한 덩굴에 감겨 아직은 어두운 공기를 헤치고 사람들 사이로 점점 흘러가는 포도밭 물살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달의 터진 중심으로부터 희고 긴 손가락이 빠져 나와서 포도나무 잎사귀 찬 허공에 대고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고 글씨를 쓸 때 무덤에서 들판에서 바다에서 촛불에서 여자들은 시든 수세미 같은 자궁을 머리에 이고 차례로 일어나서 포도덩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이 머리에 인 자궁들은 또 어느새 바알간 포도송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포도밭을 붉게 붉게 한 알씩 물들여가는 동안이 삶이라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비 갠 뒤 불안한 물웅덩이에 비친 달은 또 어느새 희고 긴 손가락에 찔린만큼 이즈러져 가고 여자들을 따라 나는 포도밭에 서 있었습니다 햇볕이 여자들의 머리에서 붉은 송이를 따 가며 그 자리마다 검붉은 햇볕의 후손들을 한 웅큼씩 수북히 담아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사이, 천지가 물살, 물살로 출렁거리며 또 빛살의 파도가 요동치는 흐름 속에서 빛바다는 영원이라는 말을 토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백년시장 2 - 허순위
바하의 칸타타 듣다가 시장에 간다.
말라붙은 표고버섯이 때맞춰 떨어진 욕망 같아
과일전 옆, 꽃집 옆, 신발가게 옆
건어물집 지나면 노점의 천막들 펄럭거리는
여긴 얼핏 주저앉으면 자리가 될 듯
더러는 사람도 언젠가는 시장이 되지 않으랴?
컬컬한 목소리 그늘을 머리 이고 웃어본다. 콩콩콩콩
청춘의 죄는 시장에 내다 팔리려나 보다.
늘 가설무대 같던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행복을 빌며 나는 클레멘타인으로 방생되는데
왜 죽은 물고기 닮았는가
그는 바하 곁에서 기도라도 하겠지만
온갖 잡동사니 딸려드는 현철의 노래가 내 삶을, 더 원하는, 지금,
백년시장 3 - 허순위
지며 무섭게 붉어가는 해를 본
하루 저녁은
신장시장 한복판을 걸어가다가
좌판에 놓인 희고 둥근 무우덩이랑
배추 몇 포기
싱싱하게도 단단해 보여 사들고
집에 와 칼로, 베어보니 바람들고 한창, 흥,
벌써 썩고 있었다.
그리운 사람도
찬송가도 낡았다.
눈물만은 눈물 속에 잘 담아 두어야겠다.
수술 - 허순위
안이 밖으로 흘러나오고 다시 또
밖이 안으로 집어넣어지는 동안
마스크를 쓰고 가운을 입은 몇몇이 흘낏 엿보았다.
뱃속으로 시든 나뭇잎들같이 쏟아져 나온 검붉은 내장들
산소마스크를 덮어쓴 채 캄캄한 동굴 속에서
그는 싸우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다.
마취 때문에, 그러나 어떤 선한, 메스를 갖다대면
시간이 순간처럼 응집되리만큼, 강렬한
통증 없는 감각만이 그의 기억에 불꽃으로 맺혀 있다.
어떤 부정과 어떤 긍정이, 혹은 그 안의 어떤 누가
사물이 되고 시퍼런 메스가 되어
그의 축축하고 쓸쓸한 배를 주욱, 가른다 해도
삶은 한번 출렁일 뿐, 유유한 물결로 흘러갈 것이다.
어제와 오늘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지?
수술이 끝난 후 약과 간호로 그는 재조립되고 있다.
자기의 삶조차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표정으로
내가, 왜, 여길……오, 그렇지, 터진 맹장? 혹은
어떤 검은 종양이? 하면서
누군가 설명해 주기까진 결코 알 수 없는 과정을 끼고 누워
어느새 몸에 생겨난 감각 무딘 부분을 더듬으며,
얼어붙은 죽음을 삶 속에 끌어다 붙였다.
숨 - 허순위
저 얼음은 캄캄한 돌의 눈물일까요
무엇을 어디에 두고 왔는지
공포의 하얀 한숨이 새고요
딱딱한 냉동실벽에 천장에
으스스스 붙어있네요
만약 투명한 저 결정의 속에
뭐, 혹시 갇힌 게 있다면
가령 투명한 백합이나 새가 있다면
얼음은 물의 상처일까요
고등어를 얼리는 건
고등어를 보존하기 위해서라지만
그저 얼음이란 지독한 존재의 슬픔 같네요
얼음을 떼내어서, 들어올려서
양지쪽에 김같이 내다말리고 싶네요
옆길 - 허순위
가을이 지나가도
지나가지 않아도
슈퍼에서 집까지
시장에서 목욕탕까지
원룸주택공사를 하는
언덕을 오르면
길 위에 길들이 포개인다
좁고 넓고
짧고 긴
헌 길 위에 새 길들이
눈같이
낙엽같이 포개인다
미장원에게 미장원들이
비디오가게에게 비디오가게들이
아이에게 아이들이
남자에게 남자들이
여자에게 여자들이
느릿느릿 몰려와
구불구불 달려와
풍경 쌓인 달력처럼 포개인다
볼록볼록 포개져서
울긋불긋 포개져서
이웃집에 포개져서
한 동네에 포개져서
포개지는 경계마다
그리운 무늬들의 분수가 치솟고
어느새 엷은 미소 같은 길이
옆으로 옆으로 번져 나아간다
우는 소리 - 허순위
오 벌레들이 운다고 할까 염소가 운다 새가 문풍지가 개가 운다고 할까 옷이 운다고 할까 햇빛이 산뜻한 날 하나님이 웃는다고 표현하지 않으면서 비가 오면 그 양반이 운다고 쓸까 우리는 애환이 많은 사람들이라 우는 소리에 기대면 편안해지는 걸까. 아무런 요구도 없이 무심히 아름다운 소리가 울음이 될 때 구원의 첫 스텝이 찍힌다고. 가령 웃는다고 하자 귀뚜라미가 웃는다 새가 웃는다……
무심한 것들에게 우리가 슬픔을 주는 건 모든 소리의 집이 슬픈 데라서 그런가 기계는 울지 않은데 산천초목이 웃는다고 하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울텐데.
이사 - 허순위
문 옆에 어린 활엽의 나무 나무 옆에 이웃집 지붕들 낮게 드리워진 세 계단 내려선 낮은 반지하에 살면서 이웃의 선량한 부인들과 아이들과 어울려 날마다 천사들이 왕래하는 요단강을 건너면서 슬플수록 아플수록 아담하게 단정하게 사는 법을 어린 활엽의 나무로부터 들었다. 토끼눈이 빠지게 괴로울수록 조용하게 친절하게 악착같이 사는 법을 블록 담벽을 붙어 기는 담쟁이덩굴로부터 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몸을 움직이며 내는 길이 마음을 내놓는다. 물길불길빛길숨길이 교차하며 미끄러질 듯 그렇게 이어져오더니 어느 날 그 어린 활엽의 나무 새파란 꼭대기에 핀 흰꽃 하나를 어느 이웃집에 가서야 밝게 바라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