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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란드 지도 1965년 10월 11일, 예일대학 신문은 <빈란드 지도와 타르타르족 이야기(The Vinland Map and the Tartar Relation)>라는 특이한 제목을 단 학술서의 출판소식을 전했다.(이상한 제목의 이 책은 예일대가 사들인 두 개의 중세 문서─표지 하나에 합본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책 자체의 내용은 두 문서를 전문적으로 분석한 것이었다.) 발행인은 원래 그 책을 '레이프 에릭손의 날'인 10월 9일에 출판할 예정이었으나 그 다음 주 월요일인 11일로 출판날짜를 변경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그 악의없는 단순한 결정이 맞이하게 될 대소동을 전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조촐하게나마 학술서의 출판을 축하하자는 의도였는데 상황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대학 측과 책의 저자들이 온갖 중상 속에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미국 역사의 초석을 뒤흔드는 직접적인 도전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시카고 트리뷴> 지(誌)는 그 상황을 "콜럼버스의 날에 먹칠을 한 지도"라고 일컬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어째서 그렇게 분노했을까? 중세의 두 문서 중 하나인 '빈란드 지도'에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비롯하여 학자들이 공히 북아메리카를 나타냈다고 확신하는 하나의 큰 섬, "빈란드"를 포함한 지역이 그려져 있다. 그 섬은 두 개의 깊은 어귀(아마 허드슨 해협과 성 로렌스 강인 듯)에 의해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세 지역이 서기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북구의 전설에 기록된 헤르란드(Helluland), 마르크란드(Markland), 빈란드(Vinland)인 것은 당연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그 지도가 1440년 무렵에 작성되었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빈란드 지도'는 레이프 에릭손 등 북구의 탐험가들이 현실적으로 미국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는 최초의 증거인 셈이었다. 그들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무려 5세기나 앞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잡지의 표제가 분노를 담고 있었다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152쪽 그림 설명 이 상황은 물론 1965년 당시의 일이었다. 지금은 그와 같은 난리법석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 뉴펀들랜드 란스 메도우(L’Anse aux Meadows)에서 발견된 노르웨이인의 정착지는 지도가 있든 없든 간에 그들이 거기에 살았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설령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1992년 '콜롬버스의 미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질병의 유입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 등 그의 위대한 발견의 또 다른 측면이 새롭게 부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인들과 캐나다인들이 대개 빈란드 지도에 얽힌 소동을 잊어가고 있었던 반면 전문가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 지도가 위조된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이는 자신들의 논쟁에 정열을 돋우었기 때문이었다. 양측의 논쟁은 두 매력적인 세계를 언뜻 들여다보게 한다. 다시 말해 확고한 증거로부터 일에 착수하려는 중세 역사가들의 세계와 첨단과학 기술을 응용해보려는 과학자들의 세계. 이들 두 집단이 지도의 진위를 가리려고 애썼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 과학적인 접근이 더 객관성을 띨 것 같이 보이지만 막상 증거가 하나하나 나오자 그 두 집단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에 관한 한, 중요한 것은 기술이라기보다 그 기술을 누가 사용하느냐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지도가 진짜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끈질긴 의혹들은 여전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빈틈없는 과학기술을 활용한 접근법으로도 의혹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북아메리카를 그린 최초의 지도가 발견되었다면 아무래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빈란드 지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방식이 각별히 의혹을 부추겼다. 그러한 배경에는 수많은 우여곡절과 음흉한 서적수집가와 중개상, 신원이 불분명한 인물들이 관계되어 있을지 모르나 그 경위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1957년 코네티컷주(州) 뉴헤이븐시(市)에 거주하는 로렌스 위튼 2세라는 이름의 서적상이 유럽에서 고서적을 구매하던 중 두 부분으로 된 진기한 문서를 사게 되었다. 그 첫 두 쪽(사실상 한 장의 송아지 가죽 종이가 반으로 접혀 있는)에 세계지도인 빈란드 지도가 들어있었다. 그 지도는 존 데 플라노 카르피니라는 가톨릭교 탁발 수도사가 1245년에서 1947년에 걸쳐 아시아를 여행한 모험담을 라틴어로 기술한 16쪽 짜리 문서에 묶여 있었다. 그 여행은 칸(Khans)들의 제국과 접촉을 시도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칭기즈칸의 손자 황제 쿠육 칸을 만나보기 위한 것이었다. 무려 13000킬러미터를 대부분 말을 타고 가는 긴 여정으로 끊임없이 굶주림과 타타르족의 손에 죽을 위협에 직면해야하는 험난한 여행이었다. 성격상의 본질에 있어 타타르족에 관한 한 지성인의 기록인 그 원고는 <타타르족 이야기>라고 불렸다. 위튼은 그 문서 한 벌을 3500 달러에 구입했다. 그 가격은 나중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거래'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으나 그는 사실상 상당한 액수를 치른 것이었다. 일견 <타타르족 이야기>는 진짜처럼 보였으나 지도는 얘기가 달랐다. 비록 그 지도가 <타타르족 이야기> 속에 묶여 있었지만 처음부터 그런 모양새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제본은 20세기에 한 것처럼 보였고 두 문서의 벌레 먹은 구멍조차 아귀가 맞질 않았다. 또한 출처에 관한 기록도 전혀 없었다. 이러한 모순들로 인해 지도가 최근에 위조된 가짜라는 가능성이
실제로 대두되었다. 위튼 이전의 잠재 고객들은 대영 박물관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구했는데, 그들은 그것이 믿을만하다고 생각하지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지도가 워낙 굉장한 물건이라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위튼은 과감히 모험을 해보기로 하였는데, 주로 그 이유는 필적 때문이었다. 지도와 <타타르족 이야기>의 필체는 똑같았고 지도에 나타난 67 군데의 표기와 <타타르족 이야기>의 1450행을 고려해 볼 때, 위튼은 위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뉴헤븐시의 집으로 돌아온 위튼은 즉시 예일대학의 고전담당 큐레이터인 톰 마스턴에게 구매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그들은 지도가 흥미롭긴 하지만 출처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당분간 기다려보기로 뜻을 모았다. 당시만 해도 그들은 그 증거가 어디에서 나올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고 거의 믿을 수 없는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겨울날 오후 마스턴은 위튼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최근에 사들인 고문서들을 구경하러 오라고 했다. 그 문서들 중 하나가 낡은 15세기 양피지 장정을 한 빈센트 드 보베의 <역사의 거울(Speculum Historiale)> 이었다. 그 문서는 희귀한 것은 아니지만 세계 역사를 다룬 매우 장황한 중세의 백과사전의 일부였다. 위튼은 그 필체가 빈란드 지도와 비슷한 것을 알아차리고 마스턴에게 그것을 하룻밤만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위튼은 그 둘을 비교하기 시작했기 시작했는데, 즉시 필체와 출처, 시기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종이의 투명 무늬도 역시 비슷했다. 놀라운 건 지면의 크기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위튼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잇따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세부적으로 더욱 자세히 검토하면서 빈란드 지도에 뚫린 벌레구멍들이 빈센트 드 보베의 <역사의 거울> 앞면에 난 구멍들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자 온 몸의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느낌이었다. 반면 <타르타르족 이야기>의 벌레구멍들은 <역사의 거울>의 뒷면에 난 구멍들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빈란드 지도와 <타르타르족 이야기>에 난 구멍들이 서로 맞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톰 마스턴이 구입한 또 다른 문서인 <역사의 거울>이 원래 그 둘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어느 시기에 그 세 문서는 따로 분리되었고 빈란드 지도와 <타르타르족 이야기>가 20세기 풍의 장정으로 다시 묶인 것이었다. 이 세 문서가 1950년대 말에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시에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었다.(사실상 그 놀라운 우연의 일치는 지도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는 파렴치한─그러나 영리한─유럽의 중개상들이 교묘하게 조작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회의론자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초기에 그런 회의적인 입장은 여러 이유로 드문 편이었다. <역사 이야기>의 겉표지에 남아있는 얼룩진 글씨 흔적은 바젤 공의회라고 하는 1431년에서 1449년에 걸쳐 스위스의 바젤에서 열린 가톨릭교회의 종교회의 동안 작성된 것을 암시했고 따로 종이를
검사해 보니 그 재질은 1440년 혹은 1441년에 바젤의 한 제지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단 한 줄만 표기된 면이 있는데 전에는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이제 그것이 <역사 이야기>의 제 1부와 2부, 3부를 언급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세 문서가 한때
한 권으로 묶여있었다는 이보다 더 훌륭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역사 이야기>나 <타르타르족 이야기>는 그 확실성을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빈란드 지도도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신빙성은 꽤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장애물은 그 문서들의
내력이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로렌스 위튼은 이전 소유주에게 (세금상의 이유로)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는 심지어 논쟁이 한창 절정에 달했을 때조차 그 약속을 이행했다. 위튼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전 소유주가 그 문서들은 적어도
두 세대 이상 집안 서재에 간직되어 온 물건이라고 장담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신원불명의 인물로부터의 이러한 말들은 확실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일종의
사기행위가 개입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내력이 불분명한 한 장의 유일한 지도!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과시하기에 완벽한 대상이 아니었을까?
1965년 그 지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10년 동안의 상황은 이런 것이었다. 노르웨이인들이 1000년 전에 북아메리카를 찾아갔다는 점에서는 별다른 의혹이 없었다. 비록 당시 다른 유럽인들이 사용하던 항해장비를 전부 구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뛰어난 선원이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전설이나 여러 문헌에는 붉은 머리 에릭(Eric the Red)이 980년대에 그린란드를 식민지화한 사실이 나와 있다. 그 당시만 해도 북대서양의 기온은 지금보다 훨씬 따스했고 해빙(海氷)도 훨씬 덜 위협적이었다. 그린란드 식민지는 기후 악화로 인해 끝내 쇠퇴하여 멸망할 때까지 수세기 동안 번영을 누렸다. 북아메리카 탐험에 관련해서는 비야르니 헤르욜프손(Bjarni Herjolfsson)이라는 아이슬란드인이 986년 경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로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북아메리카 해안에 처음으로 접근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그가 일부러 해안에 발을 딛지 않았다는 사실은 후에 그의 동료들로부터 한참 어리석었다는 핀잔을 들었을 정도이다.) 반면, 레이프 에릭손은 1000년 무렵에 해안을 밟은 최초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대개 에릭손의 '헤르란드'는 배핀 섬 남쪽 지역, '마르크란드'는 라브래도, 그리고 '빈란드'는 뉴펀들랜드의 북쪽 지역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레이프 일행이 빈란드에서 겨울 한 철을 보낸 이후에 노르웨이인들이 북아메리카에서 영구히 정착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들은 그 후 400년 동안 간간이 그곳을 방문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흔치 않은 북아메리카의 방문이라도 기록할 만한 가치는 충분했음으로 1400년대의 유럽인들이 그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빈란드 지도가 진짜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 또한
북대서양, 특히 그린란드와 빈란드를 실제로 그려가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데,
그 세부 모습에 있어 14세기의 정보가 아니라 20세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했다. 공교롭게도 대중의 관심은 빈란드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전문가들의 주의는 그린란드에 쏠렸다. 그린란드가 지도에서 하나의 섬으로 나타나있었기 때문이다. 1440년대 이전의 세계지도에서는 모두 그린란드를 북유럽에서 시작하여 북 대서양에 걸쳐있는 거대한 활 모양을 이룬 반도의 꼬리부분으로 그리고 있다. 빈란드 지도는 노르웨이인들이 그린란드 주위를 완벽하게 항해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래서 자신들이 가 본 곳을 지도로 나타내었고, 그것이 유럽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그런 일은 항해에 의해 가능할 뿐인데, 노르웨이인들의 정착지는 그랜란드 섬의 전체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을 정도로 동해안이든 서해안이든 그로부터 북쪽으로 그리 멀리 자리잡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극지방 주위를 항해할 수 있었을까? 이는 좋은 질문인데, 오늘날에도 그린란드 주항은 그 대부분이 어름 밑에 묻혀 있어서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르웨이인의 기록으로부터 지금보다 그들이 북대서양을 탐험할 당시에 해빙은 항해에 훨씬 덜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기후가 얼어붙으며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레이프 에릭손 당시에 아이슬란드에서 서쪽으로 곧장 항해하여 그린란드 남쪽 끝에 도달하려면 처음부터 얼음을 피해 갈짓자로 나아가며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다음에 북서쪽으로 돌아 육지에 도착해야만 했다. 만일 그린란드 주항이 오늘날의 쇄빙선으로도 여간 쉽지 않은 일이라면 노르웨이인들이 유용하지만 비교적 조잡한 해항선으로 그 모험을 완수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그 바이킹들이 주항에 성공했다면 어째서 엘즈미어(Ellesmere) 섬은 그 지도에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린란드 서해안 아래쪽을 통과한다면 그 섬을 놓칠 리가 없다. 하긴, 그들이 그린란드 주위를 항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뉴잇(Innuit:북미그린란드의 에스키모, 캐나다에서 부르는 에스키모족의 공식 호칭-옮긴이)한테서 그린란드가 섬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르웨이인들이 과연 이뉴잇과 소통을 했는지에 관해서도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설령 그들이 그린란드의 모습에 대해 말을 나누었다 하더라도, 그 말만 듣고 어찌 그리 쉽게 노르웨이인의 지도에 윤곽을 그려 넣고 그 이후에 빈란드 지도가 그것을 모사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 지도는 이뉴잇 지도를 베낀 것일까? 심지어 제 3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당시 지도제작자들은 유달리 섬에 대해 집착을 보였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땅들을 흔히 섬으로 그려 넣는 것은 일종의 관례였다. 빈란드 지도 제작자도 그런 식으로 주로 베일에 싸인 그린란드를 다루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빈란드를 동쪽에 나 있는 커다란 두 개의 어귀에 의해 대략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 큰 섬으로
그린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서로 엇갈린 주장들을 검증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빈란드
지도에 나타난 그린란드의 모습을 오늘날 지도책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 비교해보는 것이다. 노르웨이인들이 섬 전체를 보았다는 주장을 지지할만한 매우 정확한 해석을 제공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965년 <빈란드 지도와 타르타르족 이야기> 판본 184쪽에는 오늘날의 그린란드가 빈란드 지도의 그린란드와 나란히 실려 있는데, 그 둘의 모습은 놀랄만큼 매우 닮았다. 일반적으로 해안의 모습이 비슷한데, 빈란드 판본에는 적절한 위치에 지그재그형이 나타나
있으며 열 개 남짓한 특정한 피오르드와 해안선의 코스가 오늘날의 모습과 똑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판본 이래로 30여 년이 지난 지금,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1995년 예일대학 출판부는 <빈란드 지도와 타르타르족 이야기>의 최신판을 발행하였다. 거기에 새로 덧붙인 서문에서 처음부터 빈란드 지도가 진짜라고 주장하였던 대영 박물관의 조지 페인터는 그 책의 원래 판본에 실린 두 개의 그린란드를 비교하는 일은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선 빈란드 지도의 그린란드는 한 치 남짓한 성냥 크기이다. 그 정도 길이에 각각의 자그마한 피오르드와 유입구가 의도적으로 거기에
그려졌다고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따른다. 페인터는 실제 모습과 지도 사이에는
진실로 서로 관계가 없으며 가능직한 설명은 그 지도 제작자가 '불확실할 경우에는 해안선을 구불구불하게 그린다'는 중세의 관례기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페인터는
그린란드의 해안선이 적어도 자잘한 부분에 관련하여 그 지도의 다른 해안선과 차이점이 있다─혹은 보다 사실적─고는 보지 않았다. 그린란드 논쟁은 아무리 전문가적인 안목이라도 애초부터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 해답을 내리기가 곤란한 경우의 완벽한 예라 할 수가 있다. 누가 빈란드 지도를 위조한 것일까? 하는 점이다. 위조자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시나리오가 제기되었다. 그 자는 <역사의 거울>과 <타르타르족 이야기> 라는 출처가 분명한 두 문서에서 여백으로 남아있는 양피지를 활용하여 그 지도를 (중세 때 쓰던 잉크를 사용하여) 만든 다음에, 세 종류를 한데 묶은 상태에서 가짜 벌레구멍을 뚫어놓는다.(자그마한 송곳을 써서 책벌레가 뚫어놓은 구멍과 같은 직경의 '벌레' 구멍을 만들 수 있는 비열한 방법이 있다.) 그러고 나서 위조자는 문서들을 분리하여 <역사의 거울>은 잠시 동안 보관해 둔 채, 지도와 <타타르족 이야기>만 함께 제본하여 일반 시장에 내놓는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역사책도 시장에 내놓게 되고 나머지 두 문서와 합해졌을 때 그 극적이고도 거의 불가능한 우연의 일치인 것처럼 보이는 것에 득의의 웃음을 날릴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의 상황에서 이의가 제기되고 우연의 일치의 불가능성이 지적되고 한편 그 적합성이 너무 훌륭하다는 논의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의혹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1972년 2월에 예일대 측은 보다 명확한 규명을 위해 첨단과학을 활용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들 앞에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다면 그들은 그
결정을 다시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빈란드 지도를 분석하는 책임은 월터 맥크론이라는
자존심이 강한 과학자가 맡게 되었다. 맥크론은 현미경을 탁월하게 다루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의 6권 분량의 방대한 <입자 도감> 은 모든 종류의 극미 입자물질의 확인과 분석에서 교과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었다. 맥크론은 한 동료에게는 빈란드 지도
표면에서 극히 미세한 54개의 입자(54개 입자의 전체 중량은 100만 분의 1그램에 훨씬 못
미치고 전부 뭉쳐 놓아야 맨 눈에 겨우 보일까말까한)를 고르게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입자들을 현미경, 이온 마이크로 프로브(전자빔을 이용한 시료(試料)의 미량 분석용 장치-옮긴이),X선, 전자 회절 장치 등 온갖 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검사하였다. 목표는 단지 지도표면의 물질 성분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의 결론이 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맥크론의 분석에 따르면 지도를 그리고
글씨를 쓰는데 사용했던 잉크에는 티타늄이 다량 함유되어 있었다. 어떤 부위에서는 무려 50퍼센트를 차지했다. 티타늄은 산소와 결합하여 오늘날 백색 안료로 널리 사용되는 아나타제(예추석銳錐石-옮긴이)라고 불리는 산화티탄을 형성하는 금속이다. 15세기 잉크에 무려 50퍼센트나 되는 티타늄이 들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들 안료 입자들(극히 미세하여 10만 개를 모아야 새끼손가락 손톱 위를 덮을 수 있다)을 전자 현미경으로 검사하자 결정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1920년대 티타늄 안료를 제조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던 산업 공정을 통해서나 생성될 수 있는 전형적으로 둥글고 규칙적인 결정들이 드러났던 것이다. 이 결과에 유머감각을 발휘한 사람은 오직 맥크론 자신뿐이었다. 그는 5백년 전의 지도에 그러한 미세한 안료 방울이 들어 있을 가능성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아호(號)가 호버크라프트(고압공기를 아래쪽으로 분사하여 기체를 지상이나 수명 위에 띄워서 나는 탈것-옮긴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미해결된 한 가지 문제는 지도에 사용된 잉크는 황색이었으나 아나타제는 밝은 백색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나타제가 80여 년 전에 처음 생산될 때 철에 오염이 되어 누런 색조를 띠었다면 색이 바랜 중세의 잉크를 흉내내는 데에는 안성맞춤일 것이었다. 맥크론의 검사 결과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일반인 대부분과 여러 전문가들은 미심쩍은 부분이 드러났고 화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빈란드 지도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학구적인 성격을 지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기행각이었다는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 관계자들은 그 지도가 단지 위조되었다는 시나리오에 완벽하게 부합되었다고 해서 처음으로 실시한 과학 분석에 의해 간단하게 취급될 문제는 아니라며 자신들의 믿음을 끈질기게 고수했다. 아닌게 아니라 맥크론의 분석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우선 잉크로 보이는 부위에 티타늄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 꼼꼼한 사람들─그들 중 과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은 지도 전체에서 백 만 분의 1 그램이라는 물질에 근거하여 추정을 내린다는 생각에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한 한계는 지도 표면에서 극미 입자를 고르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85년 1월, 데이비스시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두 번째로 과학적 분석이 실시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톰 카힐이 이끄는 팀이 PIXE 즉, 양성자유발 X선 발생법을 사용하여
빈란드 지도에 있는 화학성분을 분류하였다. 데이비스시의 카힐 팀은 구텐베르그 성서와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등 천 건에 달하는 고대 문서를 분석했다. PIXE에서는 원자핵의 입자인 초고속의 양자빔을 목표물을 향해 쏘는 것인데, 이 경우에 지도 위의 잉크 선이 그 대상이 된다. 그래서 양자들은 잉크 원자들로부터 전자들을 몰아내어 원자들로 하여금 남아 있는 전자들을 재배열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모든 화학물질은 일련의
독특한 X선을 방사한다. 따라서 빔을 잉크에 쏘고 튀어나오는 X선을 읽으면 함유된 화학물질의 성분을 분류할 수 있게 된다. 결과는 기절초풍할 만한 것이었다. PIXE에서는 맥크론이 보고한 것보다 수만에서 수십만 배나 훨씬 적은 티타늄이 발견되었다. 카힐은 20세기의 화합물인 아나타제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종류의 결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카힐 팀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오늘날 티타늄이 들어있는 잉크를 사용하여 16세기 양피지에다 지도 선들을 모사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 선들을 맨눈에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지워버렸다. 그렇게 해도 그들은 여전히 빈란드 지도에서 발견한 것 보다 2만 배 더 많은 티타늄 입자 수를 발견했다. 카힐 팀은 심지어 빈란드 지도에서 발견한 것 보다 구텐베르그
성서의 잉크에서 더 많은 티타늄을 발견했다. 심지어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PIXE를 사용하여 위조된 잉크 속에서 티타늄을 발견할 수 있는데, 빈란드 지도에서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맥크론은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은 티타늄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두 분석 결과는 결코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톰 카힐은 그 점에 대해 이런 주장을 했다. "여기에 잉크 한 점이 있다고 하자. 그(맥크론)는 거기서 하나의 결정을 추출했는데
아나타제가 50퍼센트나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근거로 잉크 전부가 50퍼센트의 아나타제를 함유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우리는 지도 표면의 잉크 전부를 분석했음으로 어떤
것도 추정할 필요가 없다. 지도상의 잉크는 매우 다양했다. 어느 부분은 티타늄이 들어
있었고 어느 부분은 들어있지 않았다." 맥크론은 넓은 범위를 조사함으로써 PIXE 방식은 티타늄의 농축을 하찮은 정도로 감소시킨다고 주장한다. 맥크론이 오늘날에나 찾아볼 수 있는 티타늄 결정을 그렇게 많이 찾게된 배경에 대해 카힐은 오염의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흰 페인트칠을 한 방에는 티타늄 결정으로 가득 차있고 공기 중에도 결정들이
떠다닌다는 것이다. 이것이 1980년대 중반까지의 상황이었다. 그 이후로 월터 맥크론의 분석은 더 심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발간된 <빈란드 지도와 타르타르족 이야기> 판의 새로운 두 서문에는 맥크론에 대해 노골적이거나 살짝 의도를 감춘 공격이 실려있었다. 하나는 조지 페인터의 것이다. 그는 지도의 확실성에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지도를 어떤 식으로 위조했는가에 대한 맥크론의 가설에 대해서도 "터무니없고", "불합리하며", "요령부득의",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일축하고 있다. 그 다음에 PIXE 배후인물인 톰 카힐은 맥크론의 분석절차상의 타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입자 추출과정을 시행하면서 추출 부위에 대해 문헌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했다는 증거를 우리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더 나아가 "맥크론 팀 연구자들의 사전 경험 부족"을 통탄해마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 카힐은 월터 맥크론이 빈란드 지도에서 발견한 티타늄 결정은 현대에 와서 오염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 반면, 또 다른 해석(마찬가지로 설득력 있는)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재클린 올린으로부터 나왔다. 그녀는 맥크론의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미세한
종류의 티타늄 결정은 고운 가루상태가 될 때까지 원료를 불에 가열하는 중세의 잉크 제조과정에서 전형적으로 생겨날 수가 있다고 말했다. 아나타제처럼 현대적인 결정 모양은 용광로가 아주 높은 온도에 이르게 되면 그 과정에서 생겨날 수가 있다는 주장이다. 맥크론 측에서는 연구소 웹사이트(www.mcri.org)를 통해 15세기 잉크제조업자가 사용한 용광로에서 그렇게 높은 온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비웃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방법이 오류투성이라면 어째서 그와 동료들이 <타르타르족 이야기> 나 <역사의 거울>에서 발견한 것보다 빈란드 지도에서 티타늄이 200백 더 많이 나왔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만일 세 문서 모두 똑같거나 비슷한 잉크를 사용하여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다면, 왜 지도에서 티타늄 함량이 훨씬 많이 검출되느냐? 하는 것이다. 게다가 맥크론은 또한 스미스소니언 측의 지지에 힘입어 큰소리칠 수도 있다. 그 박물관 고생물학부의
케네스 토우는 15세기 잉크 제조업자가 진짜 아나타제 결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며, 사실상 올린이 말하는 결정과 지도에서 나타난 결정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맥크론의 의견과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그는 또한 카힐의 결과를 통계분석을 통해
검토해보고 잉크에 함유된 티타늄의 양이 양피지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고 결론지었다. 만약 현대적인 결정 모양의 티타늄이 흰 페인트칠을 한 벽에서 떨어져
내려 지도 위에 쌓인 것이라면 어째서 그 입자들이 유독 지도의 잉크부분에만 가라앉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과학이 진실에 이르는 편견이 없는 수단이라고 아직도 믿고있는 사람을 위해 여기 하나의 구체적 실례를 소개한다. 이 경우에 개인 각자의 과학적인 접근법이 진실에 이르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별개의 접근방법들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회의론자로 정평이 나 있는 월터 맥크론은 '토리노의 수의(shroud of Turin)'에 대해 비슷한 입자 분석을 실행하여 수의에 드러난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물감으로 그린 것(많은 이들이 만족스럽게도)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가 빈란드 지도를 사기품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반면, 톰 카힐은 그 지도가 여전히 진품이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면 빈란드 지도를 애써 재검사해보는 수고를 했을까? 나는 어느 과학자가 부정직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다른 선입관을 가지고 출발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결국,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대답은 우리가 무엇을 묻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여튼 빈란드 지도의 경우에도 단순히 과학적인 접근법 그 자체로는 모든 사람이 묻고 있는 질문들에 답을 줄 수는 없다. 설령 맥크론이 티타늄을 발견하지 못했다든지 아니면 카힐이 티타늄을 대량으로 발견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의혹들은 가시지 않을 것이다.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을 해서 그 지도가 5백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다고 해도 여전히 위조라는 주장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15세기 용광로의 온도나 추정상의 위조자가 15세기 지도를 위조하기 위해 1920년대의
가정용 페인트를 고른 동기에 대한 끝없는 논쟁 끝에 우리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이 아닌 믿음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빈란드 지도에
대한 소동도 여타의 과학과 결코 다르지 않다. 설득력이 충분한 자료가 나올 때까지는
믿음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빈란드 지도가 진짜라고 가정을 해보자. 아울러 정교한 해안선들을 그리고 미세한 글자들을 쓰느라 공을 들인 그 제작자가 장차 5백년이 흘러 그 지도가 실제로 그려진 것인가를 규명하려는 노력으로 학자들이 회의를 열게되고 지도의 모습을 실제크기보다 수천 배로 확대하며 정체불명의 입자들로 지도에 충격을 가하게 된다는 말을 듣는다면 당사자의 심정은 어떠할까? 나는 그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떠돌 것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