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9 (사도행전9:1-9절)
오늘은 사도행전9장에 관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사도행전9장에 등장하는 한 사람의 인물이 있는데,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이라는 의미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큰자 혹은 희망이라는 의미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회심 후에는 바울, 작은자로 그 이름을 바꾸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은 원래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죽이러 다니는 악명 높은
핍박자였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도 봤지만,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 죽음 앞에 자기의 겉옷을 벗어 그 시신에 던진 사람입니다.
이런 행위는 스데반의 죽음은 마땅하고 그 죽음에 대해 내가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그 만큼 사울은 기독교인들의 핍박에 진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사울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오늘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로 다멕섹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울의 회심사건입니다.
누가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엄청난 사건이었던지
사울의 예수님 만나는 영적인 사건을 3번씩이나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사도행전9:1-9장이고,
두 번째는 행22:6-16절에 기록하고,
마지막 세 번째는 행26:12-18절에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울이라는 이 한사람의 회심이 얼마나 우리 기독교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는지는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사울의 바울 되는 이 회심이 없었다면,
우리 기독교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였지만,
하나님께서 택한 이 사람의 영향력은 기독교의 세계관을 뒤바꾸어 논 사건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사울이라는 사람을 통해 하나 교훈을 받아야 할 것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잘못된 열심의 위험성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특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요2:17]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게 뭐가 잘 못된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한 겁니다.
대충 신앙생활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번 보세요.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멕섹에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그들을 잡아 죽이고자 달려가지 않습니까?
이 다멕섹은 지금의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지역입니다.
대략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40키로 정도의 거립니다.
수원에서 대구 정도의 거립니다.
지금도 멀지만, 그 당시에는 적은 거리가 아닙니다. 먼 거립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그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정도의 열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열심이 있는거 좋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열심에 문제가 뭡니까?
잘못된 열심이었다는거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한번 보세요.
신앙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새벽기도도 나가고, 수욜 예배도 나가고, 금요철야도 나가고. 금식도 하고,
방언기도도 하고.....세상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신앙의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이단으로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목사인 제가 그런 사람들이 젤 무서워 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 지나친 열심이 다른 사람들을 죽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지나친 자기 열심 때문에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기와 같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많지는 않지만 거쳐온 교회들 가운데
자기 열심 때문에 잘못된 열심 때문에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그런 성도들을 수도 없이 봐왔습니다.
근데 보면, 그렇게 열심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적이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자기는 삶에 모범은 못되더라는 겁니다.
믿는 대로 안삽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습니다. 이게 문젭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가 뭡니까? 바로 그겁니다. 믿는대로 안산다는 겁니다.
여러분, 열심을 가지돼 지혜로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기도할 때 빠지지 말고 기도할 제목이 뭐라 그랬습니까?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열심을 가지는거 나쁜거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해하는 열심은 자기도 삼키고 다른 사람도 삼킵니다.
주변에 이단들 보세요. 얼마나 열심입니까?
우리는 그 사람들 발뒷쿰치도 못쫓아 갑니다.
근데, 그들의 문제가 뭡니까? 잘못된 열심이라는 겁니다.
자기와 다른 이를 삼키는 열심이라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하마스나, IS이슬람 국가 보세요.
저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앙에 광적으로 자기들의 신앙만 절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자살테러를 자행하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얼마나 잔인짓을 합니까?
그래도 저들은 그게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런데 그런 모습이
오늘 우리 가운데 열심을 가진자 중에 있더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무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입니다.
잘 모르면 오해를 낳고, 오해가 생기면 선입관이 생깁니다.
여기서 생기는 위험이 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그분이 정확히 어떤 분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자기 생각에, 자기 믿음에 반하니까,
하나님의 대적자로 혹은 백성들을 현혹하고 미혹하는 자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 즉 기독교인들을 말살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생각입니까? 차라리 모르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옛말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 다는 말을 하는거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잘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무식하게 믿으면 하나님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거기다가, 열심까지 내면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6: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그러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바로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사울 이었을 때,
잘못된 열심과 무지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서다가
다멕섹으로 가는 노중에 주님을 만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울은 회심하게 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주로 고백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 합니다.
먼저 예루살렘 공의회원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러 앞장서던 사람이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를 변론하고 전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이 충격이 가히 천하를 흔들만한 사건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죽이기로 또 작정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나는 죽고 주님이 사십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주님이 또다시 십자가에 못밖히실 수 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주님앞에 고꾸러졌습니다.
그 기고만장했던 사울이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회심이 복음의 판도를 바꿔놓기 시작합니다.
복음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갑니다.
예루살렘을 뒤집어 놓고,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와 로마를 거쳐 전 세계로 뻗아 나가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 역사는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회심 사건은 그가 알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내가 무너지고, 부셔져야 그제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분이 보이지 않습니까?
내 자아가 높아서 그렇습니다.
내 자아가 무너질 때, 하나님이 제대로 보이실 겁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철저하게 무너지고 부서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울은 눈이 멀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한가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왜 하필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눈을 멀게 하셨을까?
다리를 부르뜨리시던지 팔을 분질러 놓지 왜 하필이면 눈을 멀게 하셨을까?...
여러분들은 그 이유를 뭐라고 보십니까?
저는 이것이 상징하는 뜻이 있다고 봅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새로운 눈, 하나님의 눈, 영적인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라는 뜻이 아닐까?....
사울은 지금까지 자기 안목으로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바울로서 하나님의 눈으로, 영적인 안목으로 자기의 삶을 보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의 전 생애를 바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사울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내 안목이 변합니다.
내 삶의 자리가 변하고, 내 주변이 변하고, 내가 사는 사회와 세계가 변합니다.
사울뿐만 아닙니다. 무디가 그랬고, 웨슬레가 그랬고, 빌리 그레함이 그랬습니다.
저는 우리교회도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면
우리교회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바뀔 수 있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내년 한해는 우리모두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