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무도회 (가면을 벗고서)
홍순호
가면무도회 하면 듣기만 해도 환상적일지 모른다. 우리가 흔히 영화나 연극에서 보면 현란한 옷을 입고 거기에다 여러 가지 종류의 가면을 쓰고(고양이, 호랑이, 악마, 천사, 예쁜 얼굴의 가면, 흉측한 얼굴의 가면 등) 파티에 참석해서 자기를 가리고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최면 상 차마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해도 좋을 것 같은 장면들을...
그 예로 복수의 비극을 낳았던 엘리자베스 시대와 제임스 1세 시대에 영국 비극에서 인기를 얻었던 형식으로, 이 형식을 가장 수준 높게 표현한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들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나 이 복수극의 시작은 로마의 세네카의 비극에서 출발했는데, 영국 무대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은 토머스의 키드의<스페인 비극>을 통해서였다. 안드레아의 유령과 원한의 이야기로 막을 여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살해당한 아들로 인해 우울증에 빠진 스페인신사 이에로니모 이다. 그는 정신착란의 와중에서 살인자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게 되어 교묘한 복수계획을 세운다. 그는 살해자들도 배역을 맡은 연극이 상연되는 중에 자기의 역을 연기 하면서 실제로 그들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다. 이 극의 영향은 <햄릿>에 뚜렷하게 나타날 뿐 아니라 그 시기의 다른 극에서도 분명하게 보인다. -
존 마스턴의 작품 <안토니오의 복수> (1602)에서는 살해당한 부친의 유령이 나타나 자기의 원수를 갚아 줄 것을 부탁하여 안토니오는 궁정의 가면무도회에서 이 일을 성사 시킨다.
조지 채프먼의 극 <뷔시 당부아의 복수>(1610)에서는 뷔시의 유령이 내성적인 동생 클레르몽에게 나타나 자기를 죽인 자에게 복수 해 달라고 탄원한다. 클레르몽은 주저하면서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다가 마침내 유령의 부탁을 들어주고 자기도 목숨을 끊는다. 대부분의 복수 비극은 복수를 당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복수하는 사람도 죽는 피 비린내 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가면무도회를 떠 올리다 보면 독일어 사용권의 로마 캐톨릭 교회에서 사순절 이전 3일간 벌이는 축제<사육제>를 빼 놓을 수 없다. 사육제의 정확한 역사적 기원은 불분명 하지만, 그 의식이 거행되었다는 사실이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팔> (13세기 초)에 언급 되어 있다. 이 축제는 특히 마인츠와 슈파이어 등의 도시에서 시작된 것으로, 쾰른에서는 이미 1234년에 정착되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 앞에 오는 축제이기도 했지만, 일상생활의 규율과 질서에서 벗어나는 기간이기도 했다. 이 축제에서 바보들의 의회에 도시의 열쇠들을 넘겨주거나 여자를 군주로 앉히는 관습이 생겼다. 또한 요란한 가장 행렬과 대 규모 가면무도회, 풍자적, 파격적인 연극, 연설, 신문 칼럼, 광적인 행위들도 이 축제에서 유래 했는데, 이 모든 것은 현재의 사육제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종교개혁이후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는 카톨릭의 이 무절제한 축제를 금지함으로써 사육제 축제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급진적 자코뱅당 지도자로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 로베스피에르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공포 정치 시대 혁명 정부의 주요 통치 기관이었던 공안 위원회를 1793년 후반기에 장악했으나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 때 축출되어 처형당했는데, 왜, 그와 가면무도회가 관련되어지는가.
루소식의 이신론자였던 로베스피에르는 반 그리스도교 운동과 이성숭배라는 ‘가면무도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5월 국민공회에 제출한 한 보고서에서 로베르피에르는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긍정했으며 혁명세력을 하나의 시민종교와 ‘최고 존재’에 대한 신앙으로 결집 시키고자 했다.
또 다른 인물 구스타프 3세 (스웨덴의 왕1771 -29 재위) 계몽주의자인 그는 러시아 - 스웨덴 전쟁(1788 - 90)과 핀란드 전선에서 일어난 장교들의 반란으로 그의 입장은 어렵게 되고 귀족들은 구스타프 3세를 겨냥한 음모를 꾸몄는데, 1792년 3월 구스타프는 ‘스톡홀롬 오페라 하우스’의 자정 <가면무도회>에 참석 했다가 ‘야코프 요한 앙카르스트룀’ 대위의 저격으로 치명상을 입고 며칠 뒤 죽었다.
가면무도회 이것은 서양에서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우리 고유의 탈춤이 바로 탈과 춤이 주요 매체인 독특한 가무극인 것이다. 이 탈은 사회적 계층을 전형적으로 형상화 했고 춤은 몸짓의 율동 화를 통해 사실을 전달한다.
이 탈춤이 시작된 것은 조선 영조 때 이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유래는 훨씬 이전일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과 같은 국중대회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신에 대한 공연적 성격의 무용요소와 탈을 쓴 군중의 가무회가 있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탈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가면무도회처럼 탈이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
그 한 예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는 탈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마당으로 탈춤에 따라서 파계승마당, 양반마당을 그 판놀음을 풀어가는 첫 머리에 두기도 한다.
특히 산대놀이의 상좌, 옴중, 목중등은 시정잡배와 같은 세속적인 물욕, 음욕에 들뜬 타락상을 보인다. 해서탈춤의 목중은 구나의식과 불교의식이 혼용된 형태인데 호쾌한 남성적 춤으로 거칠 것 없는 육체 해방감을 누린다.
양반에 대한 모욕은 양반과 대립하는 말뚝이 마당을 통해 탈춤마다 핵심적인 대목으로 부각되어 있다. 말뚝이(쇠뚝이)는 초랭이나 이매가 보이는 단순해학에서 벗어나 한결 공격적, 비판적인 위화감을 보인다. 현실에 어두운 양반에 맞서 능란한 입씨름으로 양반을 이기는데 특히, 들놀음, 오광대에서는 거침없는 욕설과 가차 없는 질타가 두드러진다.
또한 처첩간의 갈등에 대한 가정비극을 그린 미얄(할미 광대) 마당은 영감을 사이에 두고 본처인 미얄과 첩인 덜머리집(제밀주)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을 통해 남성의 횡포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봉건 윤리가 끝판에 다다랐음을 아울러 말해준다. 미얄의 죽음은 죽음과 삶이 다르지 않아 삶의 무기로써 일상적인 죽음이며, 이는 *취발이 아들의 출생과 함께 민중적 축전의 도화선이 되어 민중적 신명을 분출시키고 일상화 하는 통로가 된다. (다음검색참조)
가면무도회...
사람들은 저마다 가면을 쓰고 사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자기 신분에 맞는 가면을...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탈을 쓰고 악마의 역할을 한다. 신문에 유언비어를 실어서 한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아무 일도 아닌 듯... 오히려 자기 스스로 나단 선지자가 된 양 의기양양하다. 그들은 개선장군이 된 듯 세상을 활개치며 산다. 또 어떤 사람들은 웃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그 속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다. 이리저리 쑤셔놓아 다시 붙이기에는 너무 늦은 극한 상태에 빠지게 한다.
나 역시 얼마 전 까지 때때로(항상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지만) 가면무도회장에서 가면극 연기자처럼 열연하였다. 마치 명배우라도 되듯 나의 속내는 감추고 그 가면의 모양새에 맞추어 잘도 연기 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판단하기도 하고, 죽이고, 살리고... 때로는 아파도 아픈 내색도 못하고 속상해도 속상타 말 못하며... 각본에 짜 맞추어 밸도 씨알도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나의 신분과 남편의 신분에 맞추어, 사회적 위치에 맞게 경건하고 훌륭하게, 흠도 티도 없는 사람처럼. 마치 내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우리 같은 신분에 있는 사람은 부부싸움도 안하고 화낸 적도 없고 늘 온유하고 겸손한 어린양처럼. 남들을 절대 미워 해 본적 없는 천사처럼 보이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다고 위로하면서, ‘덕을 쌓는 데는 그 이상 성공적일 수 없다.’라고 스스로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인가 그 가면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덕지덕지 집체만한 시멘트 바닥을 뒤집어 쓴 것처럼 나의 전신을, 가슴을 억눌러 왔다. 얼마나 울었던가. 캄캄했던가. 기쁨이 충만했던 하루하루의 생활이 사라지고 한 순간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온 것 같은 암울함.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상대방에게 나의 신분을 알리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또 다른 나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싶은 욕구가 가슴 저 밑에서 치솟아 올랐다.
나는 위에서 각각의 가면무도회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모두가 다 비극에 그치고 만 이야기들을....
결국 가면놀이는 남에게도 비극이요, 자기 자신에게도 비극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가면들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먼저 내 안에 내주 하시고 저 위에서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셔서 날 보호하고 계신 분께 모두 다 일러 바쳤던 것이다. 나를 서운하게 했던 것. 힘들게 했던 것. 나도 맞으면 아프고 밀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전에는 내 잘못만 일러 바쳤지 남의 잘못들, 그런 것 일러바치면 큰일이 날 것 같고 '그래도 용서 해야지' 하시고 혼날 것 같고, 그리고 그렇게 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차마 일러바치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던 것이다. 나는 그분 앞에 여러 색색의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난 후에야 데이지 꽃과 같은 하이얀 겸손의 바탕에 하늘거리는 가을바람과 같은 용서가 되었다. 오직 빠알간 샤론의 꽃 무궁화 같은 주님의 십자가보혈 안에서 만 가능할 것이다.
이제는 민트향처럼 산뜻한 파란하늘을 훨훨 날수 있듯이 가볍다.
가면을 벗고 나니 나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되 버렸다. 그냥 어린아이가 투정을 하고 싶으면 투정도 하고, 서운한 것이 있으면 서운하다 말하고, 그러나 그 과정에는 사랑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서운 한 것이 정말로 서운해서 서운한 것이 아니다. 삐진 것이 정말로 삐져서 삐진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마음도 이해하고, 또한 그렇게 말하면 서운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저 말 하는 것뿐이니까. 어린아이같이 된 마음에는 미움이 싹 틀 수가 없다. 사람들이 그렇게도 사랑스럽게 보일 수가 없다. 할머니를 보아도 콩당콩당 두근두근, 아저씨를 보아도 콩당콩당 두근두근, 그리고 아이들과 그 모두를 보면 그 모습 속에서 그분을 볼 수 있다.
사랑한다. 두근두근 콩당콩당.
아침이었다.
그렇게 향기롭던 하루해는 저물어 가고 다시 호젓한 밤이 왔다.
돌아보니 또 다른 가면을 쓰지는 않았나? 하는 의문에 섬칫 놀라 뒤돌아본다. 다 정직했는가 하였는데 다 정직하지 못했다. 다 진실했는가 하였는데 다 진실하지 못했다. 다 ... 진정 사랑 이었는가 했는데 온전한 사랑이 못되었다.
오직 온전한 사랑이신 그분!
주 예수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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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005년>
안정희 1집(김석균 작곡9집) - 은총(결혼축가).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