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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은 가정, 학교, 기업, 군대, 국가 등 다양한 유형의 공동체가 등장
하기 시작한 이래 우리 인류가 가장 주목해 온 보편적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고금을 막론하고 리더십을 연구해온 사람들은, 진정한 리더는 단지
자신이 이끄는 조직의 관리 기술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긍정적인 변화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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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
하고 있어요. 이러한 의미에서 ‘리더에게 요구되는 정신’이란 공동체 구성
원들이 지금 여기서 가장 필요로 하는 바, 즉 ‘시대정신’(Zeitgeist)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새로운 ‘공유비전’으로 개념화한 후 다시 현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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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follower)과 협력하여 성취할 수 있는 자세와 역량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서양의 역사를 관찰해 보면 리더의 위치에서 구성원과
비전을 공유하며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들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흔히 역사서에서 최초의 ‘로마황제’이자 ‘존엄한 자’(Augustus)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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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되어 왔으며 로마 공화정 말기 백여 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지중해
일대에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근 이백년간 유지되도록
발판을 마련했던 옥타비아누스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1400년간 존속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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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제국의 창시자는 카이사르이지만 그는 암살당했습니다. 제국 건설의
막중한 의무는 불과 19세의 ‘어린 후계자’에게 넘겨졌어요.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절제의 리더십을 발휘해 제국을 완성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는데 그의 리더십의 본질은 ‘같이 가는 것’ 즉 함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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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의 어린 후계자, 정적에 둘러싸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존속했던 제국은 로마제국입니다. 서로마 제국은
물론 비잔틴의 동로마까지 약 1400년간 유지되었어요. 그 제국의 시작을
학자들은 카이사르에게서 찾아요. 카리스마, 대중적 친화력, 결단의 리더십,
노련한 군 지휘 력을 자랑하는 카이사르가 로마 제국의 창업자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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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시대는 1인 지배체제, 즉 절대 권력자 황제의 탄생을 두려워
한 원로원공화파의 반란으로 종식됩니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쓰러졌습니다(44년).
로마는 혼란에 빠졌어요. 원로원을 장악한 공화파 귀족들은 권력투쟁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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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고 시민들은 영웅의 급작스런 죽음에 애도를 표했어요. 물론 대부분의
원로원 의원과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어요.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카이사르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아들인 7살 카이사리온, 또 한 명은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수많은 전쟁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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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빈 38세의 안토니우스였어요. 사람들은 안토니우스라고 판단했지요.
드디어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었고 유언장에는 “나의 후계자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이며 그를 나의 양자로 삼는다.“ 라고 쓰여 있었어요.
기원전 63년에 태어난 옥타비우스, 그는 카이사르의 누이 율리아 카이사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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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외손자로 당시 불과 19세의 애송이였어요.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배신당했다”고 분노했고 원로원 귀족들은 애송이를 요리할 생각에 즐거운
미소를 감추지 못했지요.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양자, 즉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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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카이사르가 암살될 당시 로마가 아닌 변경에 머물고 있었어요. 옥타비아
누스의 참모들은 그가 로마가 아닌 마케도니아로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로마로 가면 로마의 군권을 장악한 안토니우스에게 암살당한다는 이유
이엇어요. 19세의 옥타비아누스는 침착하고 사려 깊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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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로마로 갈 것을 명령했어요. 로마에 입성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제거
할 생각뿐이었어요. 그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파를 숙청하지 않았고
카이사르를 신격화 하자는 의견에도 반대했어요. 또한 카이사르가 옥타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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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에게 남긴 막대한 재산 상속에도 소극적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최고
실력자는 안토니우스였어요. 그는 군대, 재정, 인맥,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성급했어요. 그는 하루빨리 제1인자가 되어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어받고 싶었습니다. 그의 행보는 독재자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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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원로원 공화파에서 안토니우스에게 반기를 들었어요.
선두는 키케로였어요. 그는 카이사르도 반대했던 철저한 공화파에요.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는 지금 카이사르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맹비난합니다.
안토니우스의 행보에 제동이 걸렸어요. 역설적으로 공화파의 도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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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세를 분석
했어요. 비록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지만 카이사르만한 능력과 리더십을
갖추지 못했고 반면에 안토니우스는 실권은 있지만 명분을 잃었습니다. 원로원
과 시민들은 공화파와 왕정파로 나뉘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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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는 발톱을 감추고 시간을 벌기로 했어요. 그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에게 권력 분점을 제안합니다. 이른바 제2차 삼두정치에요. 옥타비아
누스는 자신의 누이를 안토니우스와 정략결혼을 시켜요 이 세 사람은 집정
관이 되어 로마의 권력을 나눕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치밀했어요. 그는 삼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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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이름으로 원로원 안의 다수를 장악한 공화파 특히 반 카이사르 파를
숙청했어요. 이때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안착에 도움을 준 키케로 역시 숙청
당하고 말았어요. 기원전 40년 3월15일 카이사르 기일을 맞아 옥타비아누스는
무려 300명의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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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암살에 대해 철저한 복수를 하면서 자신이 카이사르의 유일한 후계
자임을 로마에 알린 것이지요. 그리고 이 숙청의 이면에는 세대교체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원로원에 ‘친 옥타비아누스’ 세력이 포진하기 시작
합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와 함께 수십 년을 전쟁터를 누빈 충성스런 로마 정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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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을 장악했고 카이사르의 막대한 유산도 물려받아요.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직속 군단에 공을 들였어요. 그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했고 그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마음을 얻었어요. 옥타비아누스에게 서서히 힘이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옥타비아누스의 행보는 도저히 19세 젊은이의 것이
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노련한 정치가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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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지지층을 결집한 옥타비아누스는 삼두정치의 가장 약한 고리인
레피두스를 숙청해요. 레피두스는 당시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에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었어요. 안토니우스도 이에 동의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제1차 삼두
정치의 주역인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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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조카딸과 결혼한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막강한 해군력을 얻어요.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판단
이 들자 그의 조카딸과 이혼하고 훗날 로마 제국의 최초의 황후가 되는
드루실라와 결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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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의 세력은 내부에서 붕괴했어요.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은 옥타비아
누스에게 폼페이우스의 모든 것을 갖고 투항합니다. 세력을 확장한 옥타비아
누스는 레피두스를 변경에서의 패전 책임을 물어 숙청해요. 비정한 권력투쟁
이죠. 이제 로마의 최고 권력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로 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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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달콤한 제안을 해요. 로마 지배지
분할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은 로마와 서방을 통치하고, 안토니우스에게
는 이집트와 동방을 제안합니다. 당시 이집트와 동방은 로마 재정의 공급
처였어요. 한마디로 돈이 넘쳐나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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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요. 그는 이미 확보한 군권에 재정을 강화
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모셨던 카이사르의 연인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어요.. 옥타비아누스는 치밀했고 그는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취하는 작전을 펼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동방과 아프리카를 포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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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장악하는 것이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고 여론전에서도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신격화를 원로원에서 통과시켰어요.
이제 카이사르는 신이 됩니다. 자연스럽게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로 격상
된 것이지요. 이제 로마의 모든 권력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치마폭에 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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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에서 옥타비아누스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안토니우스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신선놀음에 빠졌어요.
클레오파트라와 실질적인 부부가 된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이혼합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 아들 3명을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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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의 정략적 결합이 깨졌다는 의미였고
안토니우스는 로마 군단으로 점령한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클레오파트라와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임명합니다. 로마는 격분해요. 원로원에서는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배신자다”라는 비난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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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이 봉인되어 있는 신전에 강제로 들어가
유언장을 공개해요. 그 유언장에는 “내가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속주들은 나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들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나와 클레오파트라의 묘는
알렉산드리아 신전으로 정한다.”라고 적혀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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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같이 집정관에서 물러나자는 제안을 합니다.
안토니우스가 당연히 거부하자 이를 “안토니우스가 독재적 권력을 원한다.”
는 명분으로 공격합니다. 그를 한순간에 독재자로 만든 것이지요. 로마 원로
원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설계에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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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이 앞서서 안토니우스를 공격한 것이지요.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는 로마를 버리고 이집트를, 서방을 버리고 동방을 선택했다”고 비난하며 그
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원로원과 로마 시민은 모두 옥타비아누스를지지
했지만 안토니우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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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카이사르의 최측근으로 많은 전쟁터를 누빈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 그에
비해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적 식견, 판단력에서는 뛰어나지만 군사적 전략이나
경험은 일천했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직속 군단과 이집트 연합
군으로 옥타비아누스를 100%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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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오판이었어요. 옥타비아누스 역시 자신의 군사적 미숙함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대신한 탁월한 전략가를 영입해 준비
를 합니다. 그가 바로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영원한 동지 아그리파에요.
아그리파는 헤롯 아그리파와 지금 나오는 아그리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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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미술 입시 단골 석고상은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 아그리파가 맞을
것입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양쪽의 대군이 부딪쳐요. 결과는
아그리파의 대승이었어요. 패전의 충격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갑니다. 기원전 30년,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자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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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인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를 과소평가한
결과는 비참했어요. 호랑이도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하는데 하물며
옥타비아누스는 토끼가 아닌 ‘신의 아들’임을 간과한 것입니다.
▶공화파, 왕정파의 갈등 조정자
33세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모든 권력을 장악해요. 19세의 나이에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 뒤 14년 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폼페이우스
그리고 로마 원로원의 노련한 정객들을 모두 제압한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옥타비아누스의 첫 행보는 정적에 대한 용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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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랜 내전에서 자신과 대척점에 섰던 의원, 귀족, 속주 총독, 로마
군단장 등을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였어요. 진정한 포용의 리더십을 보인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로마의 속주 이스라엘의 헤롯 왕
이었어요. 그는 본래 안토니우스의 지배를 받았고 또한 안토니우스 충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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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자였어요. 안토니우스의 죽음 이후 헤롯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호출
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심문하자 헤롯은 “악티움 해전이 있기 전 동방
에서는 안토니우스가 패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 많은 사람이 안토니우스를
배신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마찬가지다. 이제 제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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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의 것이다. 나는 안토니우스 다음으로 내가 섬기고 충성을 다
할 사람은 옥타비아누스라고 생각한다. 끝까지 충성하겠다.”고 당당하게
밝힙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을 용서하면서 그에게 요르단까지 통치
하도록 허락합니다. 제국의 지배자다운 배포와 풍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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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통치 형태를 공화정이라고 공식 선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지 아그리파를 집정관에 임명해요. 로마의 공화파들은 안심합니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될까 두려워했고 옥타비아누스는 노련했어요.
그는 명분을 중시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쟁취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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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형식은 공화정이었지만 실제는 옥타비아누스 1인 통치였어요.
기원전 29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1인자. 국가 제1시민이라는 칭호를
부여합니다. 당연히 집정관도 겸임했어요.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화답합니다.
원로원을 중시하고 시민정치, 공화정치를 존중한다고 발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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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강력한 로마군단을 자신의 지휘 하에 배치했고 화폐
발행권을 행사해 막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이제 로마 제국에서 권력, 명분,
군사력, 부로 옥타비아누스와 견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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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이는 ‘존엄한 자’라는 뜻으로 황제의 또 다른 호칭인 셈이었어요.
그러자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로마 제국은 평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선언
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특권을 반납하고 공화정을 존속하겠다고 밝혀요.
원로원과 공화파의 끝없는 의심에 아우구스투스 역시 끝없이 대답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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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아요. 그렇다고 아우구스투스가 양보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는 자신의
직할지를 늘려 재정을 확보했고 17만 명의 로마 정예병을 양성해 그 누구도
무력으로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임페라토르’ 즉 ‘승리자’라는 호칭을 만들어 부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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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마지막 계단만 남겨 둔 것입니다. 기원전 23년
몸이 약했던 아우구스투스가 중병에 걸려요. 로마의 모든 사람들은 아우구스
투스가 심복 아그리파에게 임시 권한을 물려주고, 군사권은 사위 마르켈루스
에게 위임할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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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약 이런 조치가 취해진다면 아우구스투스가 회복한 후에 바로
황제로 취임할 것이며 이때는 공화파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허를 찔러요. 그는 자신의 권한을 동료 집정관
피소에게 위임합니다. 절대로 제정 시대를 열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사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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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로마 시민, 원로원 공화파들은 이제야 아우구스투스를 믿기 시작해요.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점차 강화됩니다. 호민관 특권을 영구적으로 부여
받았고 로마군에 대한 최고 지휘권도 영구적으로 부여받았고 게다가 감찰
권까지 확보해 사실상 황제에 버금가는 위치까지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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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임페라트로로 군통수권을, 프린켑스로 원로원의 1인자를, 호민관이 되면서
로마 시민의 대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권력 상속의 길을
열었어요.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이며 양자임을 세상에 다시 알려 자신의
후계자도 자신의 혈통에서 승계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공인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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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을 잘 운영해 풍부한 재정을 확보했고 이를 로마 시민
에게 되돌려주며 그들의 지지를 얻었어요. 또한 군인 연금을 만들어 군대의
충성을 확보했으며 원로원의 구세대와 공화파를 제거해 원로원의 복종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기근이 있으며 국고뿐 아니라 자신의 개인 재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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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해 시민의 안정을 도왔어요. 외교와 무력을 번갈아 사용해 변경을 안정
시켜 전쟁 없는 시대를 이끌어냈어요. 또한 로마에 소방청과 경찰청을 설치해
재해나 범죄로부터 안전한 로마를 만들었어요. 조세제도의 개혁, 교통과
도로망 구축 등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정책은 로마 제국과 시민을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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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로마 시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어요. 물론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강화하는데도 소홀하지 않았어요. 그는 로마 군단과 별도로 자신의 경호와
명령을 직속으로 집행하는 정예부대인 근위대를 창설합니다. 근위대는 로마
군단과 더불어 아우구스투스 권력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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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위대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적을 제거하는 훌륭한 도구였으며 이후
로마 제정에서 황제의 즉위와 체제 유지의 선봉이 됩니다. 기원전 12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이 됩니다. 이제 정치는 물론
종교에 있어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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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아우구스투스의 오랜 정치적 동지 아그리파가 사망합니다. 아우구스투스
는 후계자를 선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차기로 임명해요. 그리고 서기 13년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
하고 베스타 신전에 유언장을 봉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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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언장에는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의 모든 지위와 권한을 물려준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듬해 14년 아우구스투스는 사망합니다. 로마의 실질적인 황제
이자 향후 200년간 지속될 이른바 ‘팍스 로마나’의 황금 평화시대를 연 거인
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가 사망하자 원로원과 시민민회는 그를 신으로 승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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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선포합니다. 이후 그의 모든 후계자인 로마 황제들은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로마 제국의 첫 황제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 절제와 기다림의 미학
역사에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는 실질적인 황제
이었지만 공화주의자로서의 면모 역시 잃지 않았다. 물론 제국 설립 후 공화
파로부터 영리한 방법으로 원수정을 확립해 공화정의 가면을 썼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로마의 수호자’ ‘제국의 시조’로서 아우구스투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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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존경을 받아요. 아우구스투스 리더십의 미덕은 절제와 경청입니다.
그는 불과 19세의 나이에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어 노련한 정적들과의
무려 14년간 내전을 거친 후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는
혈기 넘치는 젊은이의 모습이 아닌 노련한 정치 감각과 판단력 그리고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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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의 선대 카이사르도 갖지 못한 리더십
이었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이 같은 리더십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미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력도, 능력도, 군사력도, 돈도 부족했기에
아우구스투스는 이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기다리고, 인내하고, 절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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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최종 목표를 잃지 않았어요.
그 목표를 향해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한 발씩 내딛은 것이다. 그는 자신
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특권이 부여될 때 더 조심하고 뒤로 물러섭니다.
원로원이 그에게 영구적인 집정관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존엄한 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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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를 부여하고 ‘신격화’를 해도 오히려 이를 사양하고 자신의 권한을 내려
놓는 조치를 취합니다. 의심받지 않은 것이죠. 카이사르의 암살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있는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완성의 마지막 단계, 성공의
정점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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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단 한 번도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거나 머리에 관을 쓰지 않았어요.
실질적인 권력을 존중했을 뿐, 권력의 완성품을 만들기 위해 적을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얼마나 조심스런 성격이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어요. 자신의 양아들로 후계자인 티베리우스가 원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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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 참석했다가 아우구스투스를 비난하는 의원들의 발언에 분노합니다.
그러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대요. “젊은 너로서는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에게
분노하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과거 카이사르에게 했던
것처럼 칼을 들이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지독한 인내와 절제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 능력과 머리를 빌려라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어요. 카이사르에 비해 자신은 카리스마,
대중적 친화력, 정무 감각, 전투 지휘 력 등 모든 분야에서 미숙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경쟁자 안토니우스에게 ‘무능력한 겁쟁이’라는 무시를 당할
정도로 군사 지휘 력은 경험도 능력도 부족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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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으로 만들었어요. 자신의 능력치를 정확히 알고 그 부족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보충한 것이죠. 군대의 지휘와 내치는 아그리파,
외교, 문화, 교육 등은 마이케나스를 중용해 권한을 주고 그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합니다. 후에 권력을 장악해서도 건강상의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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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권한을 참모들에게 위임하는 대리통치를 즐겨 했어요. 그로 인해 참모
들의 실력도 검증하면서 다양한 인재들을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우구스
투스의 리더십은 당연히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권력투쟁,
원수정 통치를 하는 40여 년 동안 단 한 명의 배신자가 없었던 것은 아우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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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스의 인품도 한몫했지만 부하를 신뢰하고 그들의 조언을 경청하는 그의
리더십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3번째 황후인 리비아를
매우 아꼈어요. 그녀는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워 아우구스투스에게 조언을 하는
사실상의 1급 참모였어요.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와 시민을 위한 조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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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을 수 있다면 비록 정치적 반대파의 따가운 비난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격언에 이런 말이 있어요. ‘혼자 가면 빨리 간다. 하지만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바로 아우구스투스에게 딱 들어맞는 말인 것입니다. 황제로, 신성
불가침의 존재가 되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참모와 시민과 동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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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에 스스로 방치하지 않은 겁니다. 그들과 같은 공간, 시대, 정신을 공유
함으로써 1400년 존속할 수 있는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것입니다.
2023.3.29.wed.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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