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저우 여행14 - 북대문을 나와 대명사내에 당성유지박물관에서 최치원을 만나다!
여행 8일째인 10월 26일 양저우 扬州(양주) 에서 거위안 정원 을 보고는...
서우시후궁위엔 瘦西湖公园 (수서호공원) 에 도착해 남문 으로 입장합니다.
영화 “홍루몽(紅樓夢)” 을 촬영했다는 장제춘류 (長堤春柳)
강변에 난 길을 천천히 걸어서 국화 전시회 를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五亭桥 (오정교) 를 보고는 바이타(白塔 백탑) 탑을 거쳐 희춘대 (熙春臺) 를
구경하고는 二十四橋(이십사교) 다리를 건너 만화원(萬花園) 꽃동산을 거닙니다.
잔화정 (簪花亭) 과 정향서옥(靜香書屋) 그리고 春江花月夜演出(춘강화월야연출) 을 지나서....
石壁流淙(석벽류종) 에서 물안개 를 보고 송나라 우물 지나 北大門(북대문) 으로 나옵니다.
그러고는 도로 건너편에 큰 탑 이 바라다 보이는 다밍쓰 大明寺(대명사) 절로
들어가는데.... 여긴 남북조 시대인 460년경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 입니다.
경내에 삼존대불상 과 십팔나한상 이 있는 대웅보전 과 천왕전 외에
양저우에서 태어난 고승 감진 을 기리는 감진기념당 이 있습니다.
양주시 촉강의 중봉 위에 위치하고 있는 대명사 는 송의 효무제 를 위해
세워진 절로 "중국과 일본의 친선" 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더 유명합니다.
절의 가장 주된 건물은 8세기 양주 출신 승려 로 "일본에 불교" 를 전해 주었고 지금까지도 일본
에서 존경 받고 있는 감진화상(鑑眞和尙) 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감진기념당 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제가 일본에 불교 를 전해준 줄로만 아는데 그건 초기이고, 오늘날 일본
불교 종파와 교리 는 7세기부터 일본 승려들이 당나라에 유학 가서 중국불교를 직수입 한 것입니다.
기념당 안에는 "감진화상의 상" 이 있으며 건물 밖에는 일본에 불교 와 여러
문물을 전해준데 고마워 하는 일본 신도들의 성금 으로
건축된 "9층탑" 이 있는데... 감진화상 은 688년 이도시 양주 에서 태어났습니다.
감진 스님은 양주를 떠나 장안과 낙양에 유학 하고 돌아와 대명사에서 율학 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하는데 훗날 청나라 건륭제 가 절에 들러
법정사 란 이름을 내려주기도 했으나 훗날 다시 대명사 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절에는 당나라 감진 스님의 기념당과 동상 이 있는데 75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천황)
에게 직접 계를 주었으며 나라에 도쇼다이지 唐招提寺 (당초제사) 라는 절을 세운
일본 불교 율종의 시조 로 불법 뿐만 아니라 건축, 미술, 의약 등을 일본에 전했다는데
그러니 일본은 한반도 외 "견수사와 견당사" 를 보내 중국에서 직접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최초로 일본에 불교가 도입된건 이보다 앞선 538년 백제 성왕(聖王) 때 도장(道藏)
이 불상과 경전 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성실종(成實宗)의 개조 가 된 때 라고 합니다.
성왕은 552년에도 노리사치계 에게 불경을 일본에 보내지만 2년후 관산성에서 전사 합니다.
이때 상황을 1145년 김부식 이 지은 한국의 삼국사기 의 백제본기에 보면....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싸웠으나 복병에게 해침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720년 도네리친왕이 편찬한 일본서기 의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 조는...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했다.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옥천)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우도도 라는
사람이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명과 군사 2만 9천6백명 의 목을 베니 한 마리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의 기록이 더 세밀하고 정확한 것은 당시 백제와 일본이 긴밀한 접촉한 결과 일테지요?
당시 관산성(옥천) 전투에 출진한 백제군에 대가야와 왜병 이 소수나마 참전
하였고 또 한국의 삼국사기는 사건이 일어난 554년에서 무려 591년이나 지난
1145년의 기록 이지만... 일본서기는 불과 166년 후인 서기 720년의 기록 이기 때문이라?
대명사 는 황제들 이 많이 찾아온 사찰 이라 다른 사찰과 달리 3층으로 된 대웅보전 ,
평원루, 서령탑, 감진스님 기념당, 평산당과 천하제오천(天下 第五泉) 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대명사 절 한켠 에 위치해 있는 “당성유적지” 향하는데......
여기에는 신라 사람 인 " 최치원 기념관" 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당성유지박물관 (唐城遺址博物館) 은 당나라 시대 양주 지역의
성곽과 문화, 역사 에 대한 자료를 모아 놓은 곳으로.....
최치원 기념관 은 양주시에 의해 2001년에 100평 규모 “최치원 사료 진열관”
이 먼저 마련되었고.... 2003년 8월 한.중 문화 교류
촉진을 위해서 최치원 기념관 건립 을 결정하고 2007년 7월 완공되었습니다.
"최치원" 은 신라의 대학자이며 문장가 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경주 최씨 시조 로 869년 13세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 하여 18세때 빈공과(賓貢科)에 장원 으로 급제하여 벼슬했는데
중국인들이 응시하는 진사과는 아니고 발해인과 신라인등 외국인들을 위해 마련한 별시 입니다.
외국인들을 위한 빈공과 급제 라 바로 괸직에 나가지는 못하고 낙양에서 서류 대필을 하다가 2년후
876년에야 난징 근처 선주 율수현 현위 가 되었으나 3년후 임기 만료로 백수가 되니... 양양의
이위의 문객으로 박학굉사과를 준비하다가 고운을 통해 자천서를 2번 바친후 회남절도사 고병의
문객이 된후 양저우(楊州 양주) 에서 관직을 얻어 남긴 책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이라고 했던가요?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은 최치원 이 당나라 고병의 필연(筆硯 종사관) 을 담당한
4년간 (880~884) 지은 1만여 수의 시문 중에서 정화만 모아 엮은 것 입니다.
신라에 귀국한 후에는 886년 “사기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5권과 함께 헌강왕 께 올렸습니다.
문장은 310수 이고 시는 총 60수 인 셈인데 문장 중에 238편은 "고병(高騈)
의 글을 대필" 한 것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천자에게 상주한 것에...
황소의 반란 진압군 대장 고병 이 제관에게 보내는 사신, 반적 및 절도사
에게 보낸 격서, 인사이동 통지서, 재사, 제문, 고기문(告記文) 등이라고 합니다.
도사나 도관, 사찰을 대신하여 쓴 글이 5편이고 67편이 자신의 입장에서 쓴 글 인데, 이 중에서
44수는 고병 에게 올린 것 입니다. 문집 의 형태로 전해지는 신라 유일의 자료 로 저자
자신이 선정했고 한자 문화권의 중심지 에서 그 수준을 인정받았다는 점 등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고병(高騈) 은 당나라 희종 때 태평(太平) 과 진해(鎭海), 회남(淮南) 의 절도사
를 지냈고, 제도행영도통과 염철전운사 등을 역임했는데... 880년에
선주(宣州)의 율수 현위이던 최치원을 관역순관(館驛巡官) 에 추천 하기도 합니다.
고병(高騈) 은 항소(黃巢) 반란군의 기세 에 놀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사력을
다해 이 도시 양저우(揚州 양주) 를 사수 했으며..... 그의 종사관인
최치원 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을 지어 진압에 조금은 이바지 했습니다.
하지만 고병은 군사적으로 무능 한데다가 소극적이라 양주를 방어하기는 했지만 움직이지 않으니
장안을 점령한 황소 반란군 은 이민족인 사타족의 이극용 과 황소의 부하였다가 귀순한
주전충 두 사람의 힘으로 진압했는데... 대군을 가지고도 도교에 빠진 고병 이 움직이지 않자
당나라는 882년에 그를 파직 했고 이후 부하들에게 살해되니 끈이 떨어진 최치원은 귀국 하게 됩니다.
高騈(고병) 이 지은 시에 허공을 거닌다는 뜻 의 보허사(步虛詞) 가 있습니다.
청계도사인불식(淸溪道士人不識) / 청계의 도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상천하천학일척(上天下天鶴一隻) / 학 한 마리 하늘로 날아 오르내리네
동문심쇄벽창한(洞門深鎖碧窓寒) / 동굴의 창은 잠기고 푸른 창은 찬데
적노연주점주역(滴露硏朱點周易) / 이슬로 붉은 먹을 갈아 주역에 점을 찍네
이후 최치원 은 이 도시 양저우(양주) 에서 벼슬살이 중에 885년에 신라로 귀국
하여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등 외교 사무 를 담당하는 관직에 있다가....
신라말 문란한 국정을 통탄 하여 진성여왕 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를 올립니다.
시무책 10조를 상소 하고는 외직을 자청하여 함양 태수 를 지내다 아찬이 되었는데 그러나 자신의
뜻은 통하지 않고 거기에 국정이 더욱 문란해 지자..... 실망하여 관직을 내 놓고 가야산 으로
들어가서 해인사에서 여생 을 마쳤다고 합니다. "신라는 뼈다귀가 우선인 골품" 사회라.....
진골 귀족 이 아이면 나라 경영에 참가할수 없었으니 무시된 것이지요? 6두품 주제에? 6두품 따위가!
신라 가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와 백제에 신라등 5국사기를 저술하지 못한게 통탄 스럽습니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에 당으로 유학가는 과정과 관료생활, 귀국후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김부식 은 최치원이 썼다는 문집 중에서 태사시중에게 올리는 장계 를 소개합니다.
"고구려와 백제 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 백만이 남으로 오, 월나라 를 침입 하였고,
북으로는 유주, 연, 제, 노나라 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局巨蠡 )"
고대 국가에서 유주와 연나라 는 중국의 하북성과 산서성 에 있었고, 제와 노나라 는 산동성과
하남성 에 있던 나라이고..... 오와 월나라 는 양자강 을 중심으로 하는 강소성과 절강성
지역으로 양주 는 이 지역에 속하니 그럼 여기까지 "백제" 의 손길이 미쳤다는 것일러나?
중국 남조 송나라와 제나라 사서 에 보이는 저 기록은 유적과 유물등 물증이 없는게 아쉽습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 고풍스런 "시티투어인 관광버스" 가 도착하길래
올라 타고는 버스 기사에게 5元 을 지불하고 1일 티켓 을 끊습니다.
시티투어 버스 는 서우시후궁위엔 瘦西湖公园 (수서호공원) 북문 을 출발해
남문 을 지나 개원 을 거쳐 바로 우리 호텔 앞 에 정차 하네요?
汶河北路 75号 에 소재한 우리 호텔 扬州文昌阁智洗假日酒店 은 영어로는 Holiday Inn
Express Yangzhou City Center 로 네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고보니 차에서 내려 둘러보다가 이 시티투어 버스 가 서는 정류소 에
"녹색 페인트" 를 사각형으로 크게 칠해둔 것 이 눈에 들어옵니다.
밤거리를 구경한 후에는 하룻밤을 자고 내일은 난징 으로 갈 생각입니다.
첫댓글 이 먼곳 이국땅에 우리 선조 최치원선생님의 기념관과 기념탑이 있다니 대단합니다
분명히 최치원선생님은 진짜로 대단한 천재십니다.
흔히 일본에 불교를 백제에서 전햇다고 저희들은 역사시간에 배웟는데
일본은 당나라에 유학가서 바로 직수입햇군요.
일본에 불교를 처음 전해준건 백제 성왕입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인들은 직접 중국
당나라에 가서 수십년간 머물며 불법을 배워
귀국해서는 저마다 한 종파를 창립하게 됩니다.
아 백제성왕때엿군요. 잘 알겟습니다.
네! 백제 성왕 때 입니다!
동진에서 들어온 불교가 백제를 거쳐 일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