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주한씨 유래 ]
청주 한씨의 기원은 평양에 기자조선 (고조선)을 세운 기자를 시조로 한다 이후 기자는 은나라가 멸망하자 기자조선을 건립해 문성왕이라 일컬어지게 된다 기자조선의 후기인 마한의 9대 원왕은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우평은 북원선우씨 우성은 행주기씨, 우양은 상당한씨로 정하게 된다. 상당은 현재의 청주를 말한다. 우평은 선우씨, 우성은 기씨, 우양은 한씨가 되었다고 한다.
청주 한씨 집안 어른신의 구전에 의하면 기자조선 말기인 마한의 3왕자가 큰바위 밑에 항아리를 놓아두고 전란이 끝나면 돌을 각각 넣어 두기로 하고 헤어졌다고 전하며 전란이 끝난후에 확인해보니 3개의 돌이 모두 들어있어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후대에 상계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개국공신 한란을 청주 한씨의 시조로 삼고 있다.
[ 청주한씨] 시조 : 한란 (韓蘭) 시조 한란(태위공)은 신라 말기에 현재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한지원(韓智原)의 4형재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40세 무렵에 현재의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方西洞) 대머리(大村)으로 이주하여, 마을 언덕에 무농정(務農亭)을 짓고 우물 방정(方井)을 파고 방정리(方井里) 무농평야 (용개뜰 현재 남들) 농토를 개척하여 부농이 되었다고 한다. (용개뜰을 남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제가 알기론 용개포는 현재 방서동 무심천 상류(아파트자이주변)를 어릴때 용개포라 불렀음)
928년 (고려 태조11)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한란은 왕건을 군례(軍禮)로 맞이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하루 동안 왕건의 십만 군대를 배불리 먹였으며, 왕건과 함께 종군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란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삼중대광태위에 올랐다고 한다. 또한 왕건은 삼국통일에 공이 크다하여 한란을 대인(大人)이란 벼슬을 내리고 대촌(大村)으로 불리다가 변음되어 대머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청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한란 이후 35개로 분파 되었다. 이 가운데 번창한 계열은 양절공파(한확韓確), 문정공파(한계회), 충간공파(한리) , 몽계공파(한절충) 관북파(한련) 충성공파(한명회)등 6개파이며 이를 한씨 6파라고 부른다. 주요인물 { 한명회, 한호, 한경직, 한덕수 한명숙등)
[청주한씨 유적 무농정, 방정, 시조 제단비]
■무농정(務農亭)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170-5 (충청북도 기념물 제 85호) 무농정지는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씨족인 청주 한씨와 관련된 유적이다. 무농정 앞쪽의 《무농정유허비》(務農亭遺墟碑)는 숙종 14년(1688) 한익저(韓益著)가 세운 것으로 무농정의 유래를 적고 있다. 본래 청주 한씨의 시조인 한란(韓蘭)이 청주 남쪽의 넓은 들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낮은 구릉 위에 정자를 짓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49년에 시멘트로 중건한 정자가 한국전쟁 때 불타, 1988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로 재현한 것이다. 정자의 왼쪽에는 《무종정유허비》, 오른쪽에는 1992년에 세운 《무농정중건비》가 있어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 청주 방정 (方井)
충청북도 기념물 제 84호 (1990년 12월 14일 지정) 청주 방서동에 있는 우물로 이 마을은 네모난 샘이 있는 곳이라 하여 방정{方井)마을 이라 불리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이 살았던 곳으로, 어느해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자, 한란이 3일 동안 기도를 드리다 쓰러져 의식을 잃었는데 꿈쏙에 북쪽 장수가 나타나 창끝으로 땅을 찌르자 맑은 물이 콸콸 솟아 나왔다. 너무 기뻐 소리를 지라다 깨어나 꿈속에서 보았던 곳을 파니 과연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뒤 문중사람들과 함께 네모꼴로 큰 웅덩이를 파서 우물을 만들었는데, 이후 부터는 큰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거나 죽지 않았다. 또한 고려태조 왕건이 견훤을 토벌하고 이곳을 지나다 십만 군이 이 물을 먹었는데도 부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물을 만든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고, 1988년 우물 보호를 위해 뚜껑과 담장을 새로 정비하였다. 최근 청주시에서 방서동 옛길 문화제 보존구역으로 지정되어 주변 정비 계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방정 바로옆 초등 동창들이 많이 살고있어 예전 방정 사진 구할수 있는지 문의해 보겠습니다. 사실 보호조치 이후 예전 모습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 방정을 기억하고 물도 먹고 그런지라 예전 방정이 많이 정겹고 그립네요 지면보다 1미터 이상 아래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 청주한씨 시조 제단비
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淸州 淸州韓氏 始祖祭壇碑)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에 있는,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韓蘭)의 유적지에 세워놓은 비이다.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韓蘭)의 유적지에 세워놓은 비이다. 땅 속에 묻혀버린 받침돌 위에 비몸과 지붕돌을 올리고 있는데 비몸이 약간 서쪽으로 기울었고 비문이 심하게 닳아 읽기 어려운 실정이다. 비문에는 한란의 내력을 자세히 서술하여 모든 후손들이 제사 때마다 읽고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선조 38년(1605) 당시 청주목사였던 한백겸이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의 유적을 고증하여 찾은 뒤, 후손들이 이 터를 기억하도록 비를 세운 것으로, 그의 동생인 이조참판 한준겸이 비문을 지었다. 이 때에 위토[1]를 마련하여 제단을 쌓고 담을 둘러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17세기 역사지리학의 대가이며 청주한씨 후손인 한백겸에 의해 시조의 옛 터가 고증되어 세운 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청주한씨 시조 제단비는 저희집 뒤에 조그만 밭에 어릴때부터 방치되어 있던 이름모를 비석인데요 1990년경 비석의 고증을 거쳐 현재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뒷면은 마모되어 글씨를 알아볼수 없으며 정면 아랫부분 비문 일부가 조금 남아 있답니다.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방서동 청주한씨 친구와 통화해본 결과 1990년 이후 매년 청주한씨 후손들이 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이곳의 옛지명은 청주시 남일면 운동리 인데요 예전에는 방서리의 동쪽 방동리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1990년 이전 방치되어 있던 한란 시조 제단비. (살구나무 뒤) 한란 시조 제단비 공원화 이전 사진 (고향집 옥상에서 찍음) 살구나무 뒤 신도비 뒷산 용맥이 왼쪽으로 1KM정도 타고 방서리 무농정까지 들어갑니다. (현재는 도심) 뒷편 산줄기가 청주 우암산의 좌쳥룡으로 알고 있습니다. 뒷산도 조만간 뭉개고 아파트 들어설 예정입니다.
오랫만에 옛길도 다시 돌아보고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방서동 인근 인지라 국민학교 동창중에 한씨들이 많이 있습니다. 초등동창회 카페에도 올려야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