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의 꿈
-삼국유사 제 39화-
옛날 신라에 '세규사'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이 절은 멀리 명주(지금의 강릉 지역) 땅에 농장을 하나 가지고 있었지요. 세규사에서는 '조신'이라는 스님을 명주로 보내 농장을 맡아 살피게 했습니다.
명주에 온 조신은 농장 일에 힘쓰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신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닌 태수(주2) 김흔 공의 딸이었지요.
'아니,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조신은 김흔 공의 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조신은 자나 깨나 김흔 공의 딸 생각뿐이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지낼수록 그녀를 향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답니다. 마침내 조신은 낙산사 관세음보살(주3)상 앞에 가서 남몰래 기도를 드렸습니다.
"부처님, 제발 그녀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날이 갈수록 낙산사를 찾는 조신의 발걸음은 잦아졌습니다. 그러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월만 흘러 어느새 몇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흔 공의 딸에게 혼인을 약속한 배필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조신은 놀라고 슬픈 마음에 관세음보살상 앞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을 원망했습니다.
"부처님, 너무하십니다! 지금껏 그녀와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왜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부처님을 원망하며 슬퍼하는 동안 어느새 날이 저물고 밤은 점점 깊어 갔습니다. 조신은 혼자 불당에 남아 김흔 공의 딸을 그리워하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울다 지쳐 깜박 잠이 든 조신은 이내 꿈속으로 빠져 들었지요. 부처님이 조신의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요? 굳게 닫혀 있던 불당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김흔 공의 딸이 활짝 웃으면서 들어오는 것이었어요. 그녀는 조신 앞으로 다가와 수줍게 고백했습니다.
"스님, 일찍이 스님을 뵙고 난 후 잠시도 스님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려 하셔서 몰래 이곳으로 왔습니다. 스님, 부디 저와 죽어서도 한 무덤에 묻힐 부부가 되어 주십시오."
순간 조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거짓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조신은 뛸 듯이 기뻐하며 힘차게 말했어요.
"그럼 나와 함께 고향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 봅시다."
이렇게 해서 조신은 평소에 바라던 대로 김흔 공의 딸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제대로 먹을 수도 없고 예쁘게 꾸밀 수도 없었지만, 마냥 행복했답니다.
그렇게 몇 년을 꿈꾸듯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살림살이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아이들도 다섯이나 생겨 일곱 식구의 끼니 걱정만으로도 하루해가 짧을 지경이었지요. 집이라고 해 봐야 네 벽을 둘러 그저 바람이나 막을 뿐이었고, 나물죽 조차 마음껏 먹을 수 없었습니다.
"잉잉, 배고파요."
"먹을 것 좀 주세요, 아버지."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늘 울어 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집안 살림은 기울기만 했습니다. 조신 혼자 품팔이를 해서는 식구들 입에 제대로 풀칠하기도 어려웠지요.
마침내 조신은 식구들을 이끌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리저리 동냥을 하며 떠돌아다니다 보니 이제 누덕누덕 기운 옷마저 다 낡고 해져서 몸을 제대로 가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주 해현의 어느 고개를 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열다섯 살 된 큰아이가 비틀거리더니 힘없이 쓰러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얘야! 왜 그러니? 눈 좀 떠 봐라!"
조신이 달려가 아이를 흔들어 보았지만,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아이는 영영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조신은 목 놓아 울며 아이를 길가에 묻었지요. 그러고는 아내와 아이들을 달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조신은 남은 식구들과 '우곡현'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길가에 움집을 짓고 살기로 했습니다.
이제 조신과 그의 아내는 늙고 병이 들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휴우, 이제 기운이 없어서 동냥도 다니지 못하겠구려."
"이 아이들은 어쩌면 좋을까요?"
"…"
조신과 아내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습니다.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자 열 살짜리 어린 딸까지 나서서 먹을 것을 얻으로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하루는 동냥을 하러 나갔던 그 아이가 사나운 개에게 물려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이는 아픈 다리를 잡고 울다 이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조신과 아내는 가엾은 아이를 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답니다.
그때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닦고는 입을 열었습니다.
"서방님, 제가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당신은 젊고 얼굴도 잘생겼으며 옷차림도 깨끗했지요. 서방님과 부부의 인연을 맺어 함께 살아오면서 한 가지라도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서로 나누어 먹었고, 얼마 안 되는 따뜻한 옷감도 서로 나누어 입었습니다. 그렇게 지낸 오랜 시간 동안 정은 깊어만 갔고, 은혜와 사랑도 한없이 깊어져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여겼답니다."
조신은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요 몇 해 사이 몸이 쇠약해져 병은 점점 심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는 날이 갈수록 더해 갔습니다. 남의 집 한 귀퉁이에 얹혀 살면서 변변찮은 음식조차 얻어먹을 수 없었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일은 부끄럽기 한이 없었습니다. 부모가 되어서 이렇게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돌보아 줄 수 없었으니, 무슨 여유가 있어 부부 사이에 따뜻한 정을 서로 나눌 수 있었겠습니까?"
아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어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신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잠시 후 아내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젊었을 때의 생기 있던 붉은 얼굴과 어여쁜 미소도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졌고, 꽃다운 굳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개지(주4)처럼 사라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기쁨이기보다는 짐이 되고 있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난날의 짧았던 기쁨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큰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과 제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일까요?"
조신은 아내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잠자코 고개만 떨구고 있는 조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변변찮은 여러 마리 새가 함께 굶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외롭지만 귀한 새가 되어 거울을 놓고 자기 짝을 그리워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추우면 버리고 따뜻하면 가까이하는 것은 사람의 정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고 멈추는 일은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헤어지고 만나는 일도 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여기서 헤어집시다."
아내의 말은 어느 것 하나 틀리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조신도 여러 차례 아내와 같은 생각을 했던 터라 기꺼이 그 말을 따르기로 했지요.
"서로 두 아이씩 맡아 기르는 게 어떻겠소?"
"그러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내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떠날 채비를 마치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저는 제 고향으로 갈 테니, 서방님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렇게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져 길을 떠나려는 순간, 조신은 눈을 번쩍 떴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낙산사였습니다. 모든 것이 어젯밤 그대로였지요.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하룻밤 꿈이었던 것입니다. 타다 남은 등불이 깜박거리며 어느덧 어둠이 물러가고 날이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틈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에 얼굴을 비추어 보니 놀랍게도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어 있었습니다. 마치 하룻밤 사이에 50 년은 늙어 버린 것 같았지요.
조신은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듯 멍했습니다. 어느새 인간 세상에 품었던 마음이 모두 사라지고 평생 동안 해야 할 고생을 이미 겪고 난 것처럼 탐욕스러웠던 마음도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조신은 관세음보살상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웠어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그릇된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그제야 똑똑히 깨달았던 것이지요.
조신은 꿈속에서 아이를 묻었던 해현의 고개에 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자리를 파 보았지요. 그러자 놀랍게도 그곳에는 돌미륵이 묻혀 있었습니다. 조신은 돌미륵을 깨끗이 씻어 가까운 절에 모셨습니다.
그후 조신은 명주의 농장 일을 그만두고 서라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정토사'라는 절을 세우고, 부지런히 부처님을 섬기며 착하게 살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