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방짜유기가 사료에 나온 건 삼국시대 때부터 나오는데 743년(신라 경덕왕 2년) 신라에서 사신 500명이 일본의 당시 큰 절 나라현 나라시 소재 동대사(도다이지) 준공 기념 참석 시 갖고 간 선물이 방짜유기였다. 2012년 이 절의 보물 보관소인 정창원이란 곳에서 보관되어 있는 방짜유기의 성분에 대하여 알고 싶어 일본에서 공문을 먼저 보낸 후 공무원 2명이 우리나라 국가 무형문화재 제77호 방짜 유기장으로 지정 받은 내 부친과 형님을 찾아왔다. 내용인즉슨 일본에는 방짜기술이 없는데 문서로만 방짜유기로 알고 있어 실재 방짜유기 법으로 제조된 것인지 자문을 구하고 감정을 의뢰하기 위해 방문을 요청했다. 6월에 방문하여 당시 수저, 밥그릇, 접시 등이 신라시대 사용한 포장지에 그대로 싸여 있는 걸 조심스럽게 열어 감정하고 왔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오래된 신라시대 만든 많은 방짜유기를 일본에서 보관중이었다.
그 이전에도 작은 소품이지만 백제 무녕 왕릉(523년 사망)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수저가 방짜유기였다. 즉 방짜유기는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소 1,50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 식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기는 크게 주물유기와 방짜유기로 나눈다. 주물 유기란 틀에 부어서 대량 생산을 하는 방법이고 방짜는 직접 손으로 두드리고 자르고 하여 만드는 제품이다.
재료를 기준으로 말하면 구리, 주석, 아연, 니켈등을 합금하여 만드는 게 유기인데 구리로만으로는 제품을 만들 수 없어 다른 단단한 물질을 합금하는데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면 황동이라고 영어로는 brassware가 되고 주석과 합하면 청동 영어로는 bronzeware가 된다. 니켈을 합금하면 백동이 된다. 보통 유기하면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제품을 말하는데 주석은 4%만 넣고 구리를 96%를 합금하여도 그릇이 완성된다. 그런데 방짜유기는 반드시 구리 78%와 주석 22%의 합금을 유지해야 가능하다. 여기에 주석을 더 넣을 수도 덜 넣을 수도 없다. 단 꽹과리등 타악기를 방짜로 만들 때 소리를 청명하게 하기 위해 금이나 은 등을 넣을 수 있으나 1%이상은 넣을 수 없다. 그럴 경우 구리78, 주석 21%, 금이나 은 1%로 가능한데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78:22의 구리, 주석의 비율로 만든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여름엔 사기그릇, 겨울엔 놋그릇을 이용하였고 수저는 4계절 놋수저를 이용하였다. 임금님 수라상에는 늘 방짜유기가 올라갔고 MBC 드라마 대장금에 나왔던 그릇이 모두 방짜 유기였다. 방짜유기는 독극물이 함유된 음식이 들어 가면 색이 변색되어 확인이 가능했고 살균작용을 하여 방짜로 된 양푼이에 미나리를 씻으면 거머리, 물벌레등이 다 떨어져 나가 깨끗해 지며 방짜 꽃병에 꽃을 두면 오랫동안 시들지 안는다. 절에서 스님들이 머리를 자를때 예로부터 방짜칼을 써왔는데 이유는 베어도 곧 아물기 때문에 상처날 염려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주물로 결합했을 때는 두 성분이 물리적 결합이 되나 망치로 두드리고 불에 넣었다 물에 넣었다의 여러 차례 반복된 과정으로 화학적 결합이 완벽하게 되어 강화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중국과 조공무역을 할 시 우리나라가 받는 상품은 주로 비단이었고 중국이 원하는 게 주로 방짜 유기였다. 전 세계에 방짜유기 기술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단 78:22의 황금 비율의 합금을 하는 나라는 터키, 인도, 인도네시아, 네팔 등으로, 매우 제한적으로 있으나 그중에 수작업 즉 망치와 작두와 협업 (여러 명이 같이 만들어야 한다) 등 복잡한 제조 과정이 들어가는 방짜 유기는 한국밖에 없다. 세계에서 타악기 회사로 명성을 갖고 있는 질지안(Zildjian)이란 미국회사는 현재 터키 이민 5세대로 17세기 초에 터키에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업체 중 한 곳이다. 이곳에서 만드는 심벌(cymbal)이 78:22의 합금 비율인데 한국의 장인들이 만드는 징 기술을 배우기 위해 1981년도 내 부친이 하던 방짜 유기 공장을 온 적이 있다. 그들은 기계화된 기술로 전 세계 타악기시장 1위에 올랐지만 그들의 선조들이 하던 방짜기술은 전수되지 않고 현대화된 기계로 생산하는 악기제조업체가 된 것이다. 그럼, 왜 이렇게 귀한 식기와 악기로 사용될 수 있는 방짜 유기 기술이 우리나라에만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이 기술의 난이도와 전통 계승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는 방짜유기를 식기로 사용하고 제삿날에는 놋그릇으로 제사를 지낸 나라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시 일제 강점기에 전쟁 물자 보충을 위해 놋그릇 공출을 하였다. 이를 피하고자 우물 속이나 깊은 땅속에 숨기기도 하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몰래 제작하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 많은 유기 공장이 생겨났으나 수요를 따라갈 수 없어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유기 제조가 한창 발전하려던 차에 6.25가 터져 많은 집과 건물에, 불에 타면서 유기도 같이 불에 타 없어지게 되었다. 9.28수복 후 종로1가에 평북 박천 출신의 고 탁창여 씨가 유기점을 열었고 방짜유기 공장이 많았던 평북 정주에서 피난 온 장인들을 모아 방짜유기 공장을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차렸다. 많은 피난 갔다가 귀환한 부인들이 불에 탄 방짜유기를 광주리에 갖고 와 새것으로 교환(불에 탄 제품은 불에 다시 녹여 제조) 했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러다 1960년대 연탄을 사용하는 가정이 한국에 늘어나면서 일산화탄소에 민감한 방짜유기는 색이 쉽게 변색해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가격이 저렴한 양은과 스테인리스가 나오면서 한국의 전쟁 후 극심한 가난과 중복되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60년대 70년대는 식기로의 방짜유기는 수요가 거의 없었고 징, 꽹과리 등 악기는 수요가 있어 내가 어린 시절인 60년대 건평 10명짜리 가내 수공업 공장에서 주로 징, 꽹과리 세숫대야, 요강, 양푼이 등을 만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 길을 지나가면 징 공장 집 아들 지나간다고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소규모 가내 수공업이었지만 동네에선 유명했다. 이유는 매일 공기 망치(Air hammer)의 쿵쿵 소리, 망치 두들기는 소리와 징 울음 잡기 위해 치는 소리가 하도 커서 500m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늘 들려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방짜유기 제조는 원대장(축구로 치면 선수 겸 코치), 앞망치 대장, 가질대장, 네핌대장, 겟대장, 곁망치, 센망치, 안풍구, 밖풍구, 제질풍구, 외1명으로 11명의 역할이 분류되어 있으며 중복으로 일을 해도 최소 6명은 있어야 작업이 가능한 일이다.
즉 구리 전선에서 분리한 구리와 주석을 78:22 비율로 흑연 도가니에 넣고 소형 용광로 안에 넣고 쇠를 녹여 용해된 쇳물을 곱돌(우리가 말하는 곱돌 비빔밥에 나오는 그런 강한 돌)로 된 판에 넣고 기포를 줄이기 위해 톱밥을 치면 쇠가 만들어진다. 생긴 게 바둑알 같다고 해서 바둑이라고 한다. 크기는 아주 두꺼운 피자 중간 크기 정도 된다. 이를 망치로 두둘겨서 네핌질이라고 하는 공정으로 넓히고 우김질이란 공정을 통해 여러 개를 포개서 망치로 두들기고 불에 넣고 하는 작업을 하여 1,300도의 온도에서 달궈진 두꺼운 쇠를 작두로 자르고 망치로 두들기며 모양을 만든다. 닥침질이란 공정을 통해 옆면을 세우고 가질이란 작업을 통해 산화된 부분을 깎으면 노란빛의 방짜유기가 나온다. 이 과정 중 닥침질이란 공정은 5명이 달궈진 쇠를 동그랗게 둘러서서 같은 힘으로, 망치로 치면서 늘리고 옆면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 5명 중 한 명이라고 낮술을 먹으면 그날은 못 만들고 그다음 날 모두 정신 멀쩡할 때 다시 해야 한다. 즉 협업이 중요하다.
한국에 연탄을 더 이상 주요 땔감으로 덜 쓰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방짜유기는 부활했다. 1983년에는 내 부친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고 그 이후 다시 방짜유기로 만든 예단, 제사용품, 풍물놀이, 데모 시 이용하는 꽹과리 등으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는 MBC 사극 드라마 대장금, 상도, 허준 등에 소품으로 자주 나왔고 KBS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받은 작품이 방짜유기여서 많이 알려졌고 그 이후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알려졌고 2010년 한류 바람과 함께 해외에 드라마 등을 통해 문화가 알려지면서 이제는 구글에 bangjja를 치면 많은 자료가 올라가 있다. 방짜유기의 해외 판매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엔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던 한국인 실업인 고 이영현 회장(Young Lee Trading 대표 및 OKTA회장 역임)이 방짜유기 요강을 캐나다에 고급 캔디를 담는 통으로 대량 수출하여 백화점에 진입하는 등 큰 성공을 하여 방짜유기가 알려졌다. 방짜유기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해외에서도 커지면서 영국의 빅토리아 박물관(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2014년부터 내 부친이 만든 방짜 좌종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이젠 매출의 비중이 해외에 더 많아져 해외 고객이 찾는 디자인도 개발하게 되고 이 기술을 배운 많은 장인들과 제품을 파는 유통업체가 생겨나 앞으로의 시장은 더 커질 것 같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방짜유기 술잔에 소주를 따라 마셔보고, 자연 살균작용이 강한 방짜유기에 물냉면을 먹고, 방짜유기로 만든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파장이 신체에 전달되면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방짜 징 소리와 종소리의 긴 진동을 느껴보자.
첫댓글 상세한 내용으로 방짜유기를 비로소 알게되어 감사와 감탄이 동시에 일어나는 좋은 수필입니다. 천 번의 시간을 매질로 두드려 불과 물이 번갈아 담금질로 탄생하는 생명의 그릇, 혼이 담긴 장인의 명품입니다.
더우기 작가이신 이형만 선생님은 세계적 고유의 전통 문화 유산을 계승한 집안의 가족으로서 자랑스럽고 같은 문협 동기로서 자긍감이 일어납니다. 백세가 넘으신 부친의 회고록인 "매질이 많아야 황금빛으로 빛난다." 라는 제목에서 인간승리의 울림이 전해옵니다.
전체적인 수필의 실팍진 문장으로 한결 방짜유기의 밝은 미래를 감지합니다. 결미에 살피신 방짜유기의 효율성은 놀랍기만 합니다. 음식의 신선도를 특별히 유지하며 살균과 항균의 구실로 유명 셰프도 반할 고급스런 테이블 스타일링으로 애용될 것이라고 봅니다. 나아가서 징과 꽹과리와 좌종의 맥놀이 소리를 들으면 신비스럽기만 합니다. 소리의 파장과 공명에서 오는 은은한 황금빛 영롱함을 느껴보자는 종결문이 깊이 다가왔지요.
"H- 마트에서 울다"를 쓴 미셸 자우너의 노래, 파프리카(PAPRIKA)가 떠올랐답니다. 이 곡에서 표현된 악기,징소리가 깊고 넓게 퍼져 가듯이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일으키리라 봅니다.
얼마전 한국에 갔을때 한국 한옥 마을안 식당의 수저가 아름다워서 처음에는 금수저 인가 했답니다. 아마 이것이 방짜 아니면 주물 수저이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세하고 깊이 있는 글 덕분에 방짜유기에 담긴 역사와 과학,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온전히 배우게 되었습니다. 구리와 주석의 78:22 라는 황금 비율을 지키기 위한 고집과, 5명의 대장장이가 한마음으로 망치질을 해야 하는 협업의 과정에서 묵직한 장인정신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합니다. 일제의 공출과 연탄가스의 시련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박물관에 전시되기까지, 우리 전통을 지켜낸 가문의 역사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은은하고 영롱한 방짜의 소리와 빛깔이 앞으로도 전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기를 응원합니다.
전선생님 안녕하세요?. 주물과 방짜를 육안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색상과 기포 자국입니다. 구리는 색이 노란색이고 주석은 은색에 가까운 백색입니다. 주석 값이 비싸 재료비 절약을 위해 구리를 90%이상 넣고 주물로 만들면 아주 진한 노란색이 나옵니다, 78:22로 하여도 주물로 하면 방짜라고 부르지 않고 주물방짜라고 합니다. 주물로 만들면 기포(bubble즉 쇳물의 열에의해 발생)가 생깁니다. 그래서 주물은 기포를 가리기위해 보통 조각을 넣어 가립니다. 그런데 방짜는 하도 많이 두둘겨서 기포가 없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고 방짜유기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