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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중국 선종사
6. 선종 오가五家의 확립
보리달마에서 비롯된 선종은 능가종과 동산법문, 북종선, 그리고 남종선의 시대를 차례로 맞이한다. 그중 남종선은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의 문하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이, 청원행사(靑原行思, ?∼740)의 문하에서는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이 나와, 당唐말 오대五代에 이르기까지 대략 250년간 선의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이어 강서江西에서는 마조가 홍주종을, 호남湖南에서는 석두가 석두종을 일으켜 세운다. 남악-마조 계열에서 임제종臨濟宗, 위앙종潙仰宗이, 청원-석두 계열에서는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이 나오면서 오가五家의 형태로 발전하며 중국 선불교의 원류를 이룬다.
1) 마조도일馬祖道一
마조의 전기는『조당집(952)』『경덕전등록(1004)』『송고승전(988)』『사가어록四家語錄』등 수많은 전적들에 마조와 관련된 자료와 일화들이 전한다. 그중 마조어록을 독립적으로 전하는 것은 사가어록 뿐이다. 마조는 한주漢州 시방현(什勃: 현 四川省 什勃市 馬祖鎭) 출신이다. 속성은 마馬 씨로 그 지방에 있는 나한사羅漢寺로 출가하였다. 마조는 용모가 기이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소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었고 호랑이 눈빛을 가졌다. 혀를 빼물면 코끝을 지났고, 발바닥에는 법륜 문신 두 개가 있었다고 한다.
마조는 어린 나이에 자주資州 당화상唐和尙에게 머리를 깎았고, 투주渝州 원률사圓律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화상은 덕순사德純寺의 처적(處寂, 665∼732)을 가리키는데, 정중종淨衆宗을 건립한 신라승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의 스승이다. 그렇다면 무상과는 같은 문하라고 할 수 있는데,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이 지은『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抄』에는 ‘검남劍南 사문沙門 도일道一은 속성이 마 씨로 김화상金和尙의 제자이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김화상은 정중무상이다.
무상선사가 주목받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상이 馬祖道一(마조도일:709∼788)의 스승에 해당된다는 점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통설은 마조가 南嶽懷讓(남악회양:677∼744)의 제자인 것처럼 알려졌으나 진짜 법맥은 그것이 아니라 무상의 문하에서 수업한 제자라는 사실이다. {원각경대소초}를 근거로 한 이 주장은 중국의 선학자 胡適(호적:1892∼1962)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마조야말로 철저하게 돈오사상에 입각한 남종선을 가지고 당시의 선종계를 풍미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마조가 신라 출신 무상의 제자라고 한다면 중국과 한국의 초기선종사는 상당부분 다시 쓰여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趙龍憲, 원광대 대학원 불교학 박사과정 수료. 동양종교학과 강사,「淨衆無相의 楞嚴禪 硏究 정중무상의 능엄선 연구」. 정중무상에 대해서는 법보신문 [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가 아주 자세하다.)
마조는 당唐 개원[開院: 713-742] 연간에 형산衡山 전법원傳法院에서 머물면서 종일 좌선坐禪하였다(대체로 735년으로 추정). 이는 무상으로부터 사사 받은 선법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상은 ‘매번 입정入定하여 5일을 넘겼다.’라는 기사가 보일 정도로 선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마조는 회양을 만난다. 이에 대해서는 회양과 마조가 얽힌 ‘마전성경磨磚成鏡(마전작경(磨磚作鏡)’이라는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는 뜻이다.
회양스님은 스님의 근기를 알아보고는 물으셨다.
“스님은 좌선하여 무얼하려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회양스님은 암자 앞에서 벽돌 하나를 집어다 갈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려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겠습니까?”
“벽들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소수레에 멍에를 채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스님이 대꾸가 없자 회양스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는 앉아서 참선하는 것(坐禪)을 배우느냐, 앉은 부처를 배우느냐. 좌선을 배운다고 하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데 있는지 않으며, 앉은 부처(坐佛)를 배운다고 하면 부처님은 어떤 모습도 아니다. 머뭄 없는 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리지 않아야만 한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며,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가르침을 듣자, 스님은 마치
제호(醍醐)를 마신 둣하여 절하며 물으셨다.
다시 물으셨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만 모습 없는 삼매(無相三昧)에 부합하겠습니까?”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를 배움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요(法要)를 설함은 저 하늘이 비를 내려 적셔주는 것과도 같다. 그대의 인연이 맞았기 때문에 마침 도를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물으셨다.
“도가 모습(色相)이 아니라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심지법안(心地法眼)으로 도를 볼 수 있으니, 모습 없는 삼매도 그러하다.”
“거기에 생성과 파괴가 있습니까?”
“생성이나 파괴, 모임과 흩어짐으로 도를 보는 자는 도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게송을 듣거라.”
심지(心地)는 모든 종자를 머금어
촉촉한 비를 만나면 어김없이 싹튼다
삼매의 꽃은 모습 없는데
무엇이 파괴되고 또 무엇이 이루어지랴
心地含諸種 遇澤悉皆萌
三昧華無相 何壞復何成
스님이 덕분에 깨우치게 되어 마음(心意)이 초연하였으며, 10년을 시봉하면서 그 경지가 날로 더하였다.
(馬祖錄․百丈錄 (선림고경총서 11) 백련선서간행회 pp. 17~19.)
육조가 마조의 스승 회양에게, “인도 반야다라가 예언하기를 ‘그대의 발아래서 망아지 한 마리가 나와 세상 사람을 밟아 버리리라’고 하셨다.”고 했다는데, 이는 마조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회양의 제자 여섯 사람 중에서 스님만이 심인心印을 비밀스러이 전수받았을 뿐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도승 반야다라般若多羅는 달마의 스승으로 제27조 존자이다.
『조당집』에는 마조의 친승제자親承弟子가 88인, 현도玄徒가 천여 명이라고 하고,『전등록』에는 입실제자入室第子가 139인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 문하에 조직적인 교단을 형성하고 있고 수없이 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선종이 이미 마조계 홍주종洪州宗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事例이다. 홍주종의 종명은 마조가 홍주 개원사開元寺에서 오래 주석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홍주종의 뛰어난 선승으로는 서당지장, 백장회해, 남전보원, 대주혜해 등이다.
중국의 선(禪)은, 달마가 아닌 마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조야 말로 이전의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불교로 귀경(歸結)되는 선적(禪的) 이념을 명확히 자각하여 이를 선명히 부각시킨 동시에 그 자각을 교의(敎意)의 해석이나 연구 형태가 아닌 구체적인 일상의 살림살이 가운데에서 실천적으로 체득(体得)해 나아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마조가 무려 800 내지 1,000 여 명이 넘는 대회상(大會上)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또한 그 정도의 대중을 흡인할 만한 온전한 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당(唐)의 전성기로부터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걸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마조선의 매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리야 요시타카/박용길 옮김, 다르마 총서 11 『마조어록』p. 5.)
혜능으로부터 시작된 조사선의 종지는 마조계 홍주종에 이르러 만개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선종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는 ‘비심비불非心非佛’, 그리고 ‘도불용수道不用修’,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 선종의 사상들이 모두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설법(示衆)하셨다.
“그대들 납자여, 각자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도록 하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달마대사가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중국에 와 상승(上乘)인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여 그대들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는 「능가경(楞伽經)」을 인용하여 중생의 마음바탕을 확인(印)해 주셨으니, 그대들이 완전히 잘못 알아 이 일심법이 각자에게 있음을 믿지 않을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능가경」에서는 ‘부처님 말씀은 마음(心)으로 종(宗)을 삼고, 방편 없음(無門)으로 방편(法門)을 삼는다. 그러므로 법을 구하는 자라면 응당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하니,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으며, 부처 밖에 따로 마음 없기 때문이다’하셨다. (馬祖錄․百丈錄 (선림고경총서 11) 백련선서간행회 p. 23.)
마조는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도록 하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各信自心是佛。此心即佛].’,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으며,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心外無別佛。佛外無別心].’고 한다. 경전에 등장하는 성스럽고 이상적인 인격체인 부처보다도 바로 눈앞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에 주목하라고 역설한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네가 바로 부처다. 마조는 즉심시불卽心是佛, 즉심즉불卽心卽佛, 시심즉불是心卽佛, 심즉시불心卽是佛 등 ‘마음이 부처’라는 깨달음의 틀을 완성한 것이다. 조사祖師의 탄생이고, ‘조사선祖師禪’의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다.
이와 같이 철저한 본래적인 입장에서 마조는 평상심을 강조하였다. 애당초 번뇌에 물들지 않고 가장 완전한 자연을 닮은 행위를 평상심이라 하였다. 때문에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말은 평상심에 완전하게 계합되어 그대로 활동하고 있는 마음일 수밖에 없다. 그 평상심은 분별조작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신분과 지위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완전하게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고유한 성품이다. 그 본래심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중생이다. 그것을 자각하여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면 그가 다름 아닌 조사이고 부처이다. 이런 입장에서 비로소 일체의 만물이 그대로 진리이고 해탈이며 전체적인 자기가 된다. (김호귀, 선종사 - 13. 마조어록.)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오염된 마음이 아닌 평상심에 완전하게 계합되어 활동하고 있는 순수한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이다. 불성佛性이니 여래장如來藏, 진여자성眞如自性이란 추상적 언어를 던져버리고, 이를 일상의 평상심平常心으로 일반화하는 혁신으로 선을 생활의 종교로 정착시켰다. 그러나 이를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험난함 그 자체였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말을 하십니까?”
“어린 아이의 울음을 달래려고 그러네.”
“울음을 그쳤을 땐 어떻게 하시렵니까?”
“비심비불(非心非佛)이지.”
“이 둘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오면 어떻게 지도하시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겠다.”
“그 가운데서 홀연히 누군가 찾아온다면 어찌하시렵니까?”
“무엇보다도 큰 도를 체득하게 해주겠다.”
(馬祖錄․百丈錄 (선림고경총서 11) 백련선서간행회 p. 43.)
기존에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는 수행자에게는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하고, 그리하여 마음이 부처라는 것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하고, 또 이 둘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그 무엇도 아닌 ‘한 물건도 아니다’라고 설한다. 이에 대해 남전보원 선사는 ‘강서의 화상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지만, 이건 일시적인 방편이다. 이것은 바깥에서 도를 구하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고, 노란 나뭇잎으로 아기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다’라고 했다[江西和尚说‘即心即佛',且是一时间语,是止向外驰求病,空拳黄叶止啼之词。所以言‘不是心,不是佛,不是物。'<祖堂集 제16권, 南泉章>].’고 착어했다.
즉심즉불도 방편의 말일 뿐, 실은 마음이라 했다 해서 마음인 것도 아니며, 부처라 했다 해서 부처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니, 인식의 주체이기는 해도 인식의 대상은 되지 않음이 마음이기에 마음은 마음이 아니며, 그런 주체로서의 마음을 확인하여 더 이상 구함이 없는 사람이 부처이기에[佛是無求人] 부처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의 참뜻은 ‘마음도 부처도 중생도 아닌’ 데 있었던 것이니, 마조와 남전의 말이 하나임을 알게 된다. (이원섭 지음,『깨침의 미학』 p. 179.)
대매는 마조의 제자로서 명주(明州:浙江省鄞縣)에 살았다. 휘호는 법상法常. 양양(襄陽:湖北省襄陽縣) 사람이며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에서 득도했다. 계를 받은 후 수많은 경전을 공부하였으며, 이윽고 크고 작은 경론을 강의하였다. 지식은 나날이 늘어만 갔으며, 그의 강의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났다. 그러나 스스로 위화감에 깊이 번민하다가 드디어 도를 찾아 널리 유행에 나섰다. 마침 마조 선사가 수행승을 지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매는 곧 그에게로 갔다. (이리야 요시타카/박용길 옮김, 다르마 총서 11 『마조어록』p. 186.)
대매가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자네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대매가 다시 당돌히 물었다.
「그것은 어떻게 체득 합니까?」
「빈틈없이 지켜 나가야 한다.」
「법이란 무엇입니까?」
「자네의 마음이 또한 그것이다!」
「달마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자네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대매가 다시 당돌하게 물었다.
「그럼 달마에게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는 말입니까?」
「족한 것 아무것도 없는 그 마음을 간파하라!」
마조의 이 말에 대매는 비로소 심오한 뜻을 깨달았다. 그는 곧 석장을 짚어가며 구름이 걸려 있는 대매산을 올랐다. 이윽고 산 중턱에 이른 그는, 머무를 곳을 미리 작정이나 해두었는지, 먹을 것을 약간 가지고 산속으로 깊이 헤쳐 들어가더니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리야 요시타카/박용길 옮김, 다르마 총서 11 『마조어록』pp. 186~187.)
한번은 염관제안(鹽官齊安, 755~817) 선사의 한 제자가 주장자에 쓸 나무를 찾아 산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대매의 암자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에 혼자 사는 노승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이 산에 얼마나 계셨습니까?” “다만 사방의 산이 푸르렀다가 노래졌다가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가야 하겠습니까?” “물의 흐름을 따라 가라.” 이때가 대매가 산으로 들어간 지 40년이 흐른 뒤였다. 이리하여 법상이 대매산에 숨어 있다는 소문이 나고, 이 말을 들은 마조는 제자를 보내 묻게 했다.
대매산(大梅山) 법상(法常:752-839)스님이 처음 참례하고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바로 마음이 부처다(卽心卽佛).”
법상스님은 그 자리에서 깨닫고는 그때부터 대매산에 머물렀다.
스님은 법상스님이 산에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는 한 스님을 시켜 찾아가 묻게 하였다.
“스님께선 마조스님을 뵙고 무엇을 얻었기에 갑자기 이 산에 머무십니까?”
“마조스님께서 나에게 ‘바로 마음이 부처다’하였다네. 그래서 여기에 머문다네.”
“마조스님 법문은 요즈음 또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요즈음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하십니다.”
“이 늙은이가 끝도 없이 사람을 혼돈시키는구나. 너는 네맘대로 비심비불(非心非佛)해라. 나는 오직 즉심즉불(卽心卽佛)일 뿐이다.”
그 스님이 돌아와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실(梅實)이 익었구나.”
(馬祖錄․百丈錄 (선림고경총서 11) 백련선서간행회 pp. 36~37.)
마음이 곧 부처라 할 때 ‘마음’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일상적 마음이다. 일상적 마음이 부처임을 알기 위해서는 마음의 본체本體는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란 것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마음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다’라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에 매이는 병폐를 고치기 위해 단지 이를 부정해야 했던 것이다. 병 없는 자에게는 약이 소용없으니, 약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매는 ‘매화 열매가 익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매실이 익었다는 것은 대매의 깨달음이 성숙했음을 인정한 말이다.(이원섭 지음,『깨침의 미학』 pp. 273~274.)
대중에게 설법하셨다.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들음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무엇이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경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범부의 행동도 아니고 성현의 행동도 아닌 이것이 보살행이다.’
지금 하는 일상생활과 인연 따라 중생을 이끌어주는 이 모든 것이 도(道)이니, 도가 바로 법계(法界)이며 나아가서는 향하사만큼의 오묘한 작용까지도 이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馬祖錄․百丈錄 (선림고경총서 11) 백련선서간행회 pp. 27~28.)
마조는 또 도道는 닦을 필요가 없다[도불용수道不用修]고 하였다. 다만 오염되게 하지만 않으면 된다[단막오염但莫汚染]고. 도를 구한다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니고 다만 본성 자리를 물들이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초기 조사선의 상징 같은 말로, 여기서 본선을 물들이는 것은 생각이다. 사람들은 생각으로 법을 규정하고, 생각으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 그것이 본성을 오염시키는 일이다.
남전南泉에게 조주趙州가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평상심이 바로 도다.”
“어떻게 닦아 나가야 하겠습니까?”
“향해 나가려고 하면 그르친다.”
“향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도는 안다거나 모른다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다고 하면 망각妄覺이요, 모른다고 하면 무기無己다. 진실로 헤아리지 않는 도에 이르렀다면 허공처럼 텅 비고 툭 터져 있을 터인데 억지로 시비할 것이나 있겠느냐?”
조주는 이 말에 즉시 깨달았다.
(南泉, 因趙州問: “如何是道。” 泉云: “平常心是道。” 州云: “還可趣向否。” 泉云: “擬向卽乖。” 州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 不屬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己, 若眞達不擬之道, 猶如太虛, 廓然洞豁, 豈可强是非也?” 州於言下頓悟。(無門關 第19則 平常是道))
도를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다. 평상심이란 꾸밈이 없고, 옳음과 그름도 없고, 취함과 버림도 없으며, 짧고 긴 것도, 범부도 성인도 없는 것이다. 범부의 행도 아니요, 성현의 행도 아닌 오직 행주좌와行住坐臥,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행위가 모두 도이다. 환경에 순응하면서 사물을 접하는 것이 모두 도인 것이다.
도란 물 긷고 나무하는[운수급반시運水及搬柴] 범부가 일상생활을 하는 바로 그것이다. 다만 때 묻지 않은 마음, 번뇌가 없는 마음으로 일상생활에 몰두하는 마음이 바로 도다. 도 따로, 수행 따로, 평상시 생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일상 생활하는 그 마음이 바로 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선사상은 조사선의 기조가 된다.
2) 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임제臨濟
마조의 제자로 삼대사三大士를 꼽자면 백장회해(百丈懷海, 720(749)~814),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 그리고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이다. 그러나 마조의 법계法系는 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임제臨濟로 이어진다. 사가四家의 전통은 사가어록四家語錄,『마조록』『백장광록』『황벽록(전심법요와 완릉록)』『임제록』으로 남아 종문의 보고寶庫가 된다.
백장회해의 속성은 왕王씨로 복주(福州: 福建省) 장락長樂 출신이다. 백장은 수행에 생산노동을 도입,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창하였다. 새로운 선종 사상으로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행생활 규범과 함께 교단의 조직 및 운영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제정한다. 이로써 선원 수행생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선종이 오늘날까지 생존해 오는데 크게 기여한다.
<백장청규>의 원래 내용은 다 알 수 없으나, <선문규식>과 관련 전적에 인용되어 있는 것을 참고하여 대략의 내용과 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1)선사(禪寺)를 율사(律寺)로부터 독립시키고, (2)선원청규를 제정하고, (3)장로(長老)를 방장(方丈)으로 추대하여 법을 설하게 하고, (4)불당(佛堂)을 세우지 않고 중앙에 법당(法堂)을 세우며, (5)전 대중이 보청(普請)법에 의거하여 노동생산에 참여하며, (6)대중생활에서 규범을 어긴 자에게 벌칙을 내리는 것이다. (김인수,「선농불교의 태두 백장회해」)
백장의 제자로는 위산과 황벽을 들 수 있다.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는 제자 앙산혜적(仰山慧寂: 815~891)과 더불어 선종 오가 중 가장 먼저 위앙종噴仰宗을 개창하였다. 가장 먼저 개종開宗하여 한때는 위앙종을 정통으로 보았던 시기도 있었으나, 앙산 이후 법맥이 희미해져 가장 일찍 쇠망하고 말았다.『선가귀감禪家龜鑑』에는 위앙가풍潙仰家風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가 부르고 화답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안이로다. 옆구리에 글자를 쓰니 머리 뿔이 높고 험하게 솟네. 방안에서 사람을 증험하니 사자 허리 부러지노라. 네 구절을 여의고 백 가지 아닌 것도 함께 끊기를(離四句 絶百非) 한 망치로 부셔버리도다. 입은 둘이 있어도 혀는 하나도 없어 아홉 구비 굽은 구슬을 꿰뚫노라(九曲珠通). 위앙종을 알려는가? 조각난 비석은 옛 길 위에 옆으로 놓여있고 무쇠 소는 작은 집에서 잠을 자도다.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인용.)
황벽은 ‘직하무심直下無心’의 무심법문을 강조하였으며, 그 문하에 유명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이 배출되어 그를 시조로 임제종臨濟宗이 탄생된다. 야나기다 세이잔은『임제록』해설에서 중국선의 구조를 본체론적 직관에서 인식론적 체험으로, 그리고 마침내 인의 실존적, 실천적 자각이라는 사상사적 변천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혜능(慧能 638~713) : 견성見性을 역설한다.「본성이 바로 불佛이니 성性을 여의고 달리 불은 없다[本性是佛 離性無別佛]」「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깨닫고 부처를 이루게 한다[直指人心 見性成佛]」등의 본체론적 의미를 갖는「성性」자를 많이 사용한다. 혜능선慧能禪의 가장 큰 특색은 인간의 본마음을 청정淸淨하다고 설파하는 데 있다. 청정이란 바로 공空이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본래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중략)
「선지식들이여, 우리의 이법문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근본으로 한다. 잘못 생각하여 선정과 지혜가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선정과 지혜는 한 몸이며 둘이 아니다. 선정은 공 지혜의 주체요, 지혜는 곧 선정의 작용이다.」(돈황본《육조단경》)
2) 신회(神會, 670~?) ․ 종밀(宗密, 780~841) :「지知의 한 글자는 모든 묘용妙用의 문이다[知之一字衆妙之門]」와 같이「지知」자를 강조한다.「성性」자보다도 인식론적 동태성動態性이 강조되고 있다.
3) 마조(馬祖, 709~788) ․ 백장(百丈, 749~814) ․ 황벽(黃壁, ?∼866) :「즉심즉불卽心卽佛」「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역설한다.「성性」자 보다도 작용의 뜻이 있는「심心」자를 사용한다.
4) 임제의현 (臨濟義玄, ~867) :「인人」자를 많이 사용한다. 성性, 지知, 심心보다는 구체적이고 행동적이다. 임제의 스승 황벽의 즉심즉불卽心卽佛은 임제에 이르러 인人이 되는 것이다. 달마로부터 시작된「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선불교의 슬로건은 고전古典이나 범람하는 잉크 문화에 압살당하지 않고 각자의 마음을 근본으로 하는 자유정신의 표현이다.
임제로 이어지는 선종의 사상사적 변천사를 알 수 있게 하는데, 마조 ․ 백장 ․ 황벽에 이르러 강조되던 <平常心是道>의 “心”이 임제로 오면 “人”으로 바뀐다. 임제는 평상심을 실천하는 사람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한 것이다. 어떤 틀에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유인, ‘무위진인 외에, 임제는 할 일을 다 마친 일없는 사람 ‘평상무사平常無事, 그리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진리라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등 수연자재한 대자유인으로서의 인간을 강조한다. 그는 대 자유인인 ‘무의도인無依道人’이었던 것이다.
3) 선종오가禪宗五家
회양계통에서 마조 백장 문하의 위앙종噴仰宗, 임제종臨濟宗과 더불어, 청원행사(行思: ?~740)의 계통에서는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문하에도 인재들이 있었다.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와 조산본적(曹山本寂: 839~901)의 조동종曹洞宗, 운문문언(雲門文偃: ?~949)의 운문종雲門宗, 그리고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의 법안종法眼宗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임제종에서 분파된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의 황룡파黃龍派 황룡종黃龍宗과 양기방회(楊岐方會: 992∼1049)의 양기파楊岐派 양기종楊岐宗을 더해 선종에서는 일반적으로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 부른다.
선종 5가의 종파들은 각기 다른 특징들을 보인다. 그것은 종지宗旨나 교의敎義가 달라서라기보다는 문풍門風 또는 선사들 가풍家風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선풍의 차이를 역대 선사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평한 바 있다. 먼저 법안종의 개조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 선사는 선가에서 지적되는 병통을 열 가지 조목으로 분류하여 밝힌『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서 4가의 가풍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조동曹洞은 작용을 위해 북치고 노래하고[曹洞則敲唱為用], 임제臨濟는 기틀을 위해 자재하게 뒤바꾸며[臨濟則互換為機], 소양운문韶陽雲門은 하늘과 땅을 덮고 흐름을 끊지만[韶陽則函蓋截流(雲門三句를 요약), 위앙爲仰은 원상으로 조용히 계합한다[溈仰則方圓默契].
당시 4가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다음 최초로 <무>자 공안을 참구하게 했던 오조법연五祖法演(五祖法演, ? ~1104) 선사는 5가의 가풍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임제 문하의 일입니까?” 스님(법연)이 대답하였다. “오역 죄인이 우레 소리를 듣는다.” “어떤 것이 운문 문하의 일입니까?” “붉은 깃발이 번쩍인다.” “어떤 것이 조동 문하의 일입니까?” “급히 소식을 보냈으나 집에 닿지 않았다.” “어떤 것이 위앙 문하의 일입니까?” “동강난 비석이 옛길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 스님이 절을 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법안 문하의 일은 묻지 않는가?” “스님께 남겨 드립니다.” 스님께서 “야경꾼이 밤도둑이 되었다.” 하고 말씀을 이으셨다. “깨치면 한 집안 법이요 못 깨치면 천차만별이다.”
(退翁 性撤,『禪門正路評釋』「18. 정(正)과 편(偏)의 현묘한 도리[玄要正偏]」 p. 256.)
임제 문하의 일을 ‘오역 죄인이 우레 소리를 듣는다[五逆聞雷].’고 한 것은 부모, 부처, 나한을 죽이거나 승단을 파괴한 오역 죄인이 우레 소리를 들은 것처럼 간담이 서늘하고 혼이 달아날 정도라는 뜻이다. 무서운 가풍을 비유로서 표현한 것이다. 다른 종파들도 똑같이 비유로서 읊고 있다.
중국선종사는 대체적으로 전후 두 단계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전기를 육조 이후 조사선을 대표로 한다면, 후기는 오조 분등(五祖分燈) 이후 분등선(分燈禪)이다. 분등선은 당말 오대 후에 다섯 개 종파가 점점 분화돼 특성화한 것으로 위앙종 조동종 임제종 법안종 운문종 등이다.
그중 위앙종은 당말오대에 가장 번성했고 먼저 창종했지만 가장 일찍 쇄망했다. 전후 오직 4세까지만 전해졌으며, 앙산혜적 후 4세 법통이 불분명하다. 법안종 창립이 가장 늦으며 오대말과 송대 초에 흥성해서 송대 중엽 쇄망했다.
운문종은 오대에 발흥해서 송대 초에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설두중현에 이르러 더욱 흥성했다. 조동종 운거도응(雲居道膺)이후 점점 쇠락해졌지만 부용도해(芙蓉道楷) 후에 다시 종풍의 명성을 되찾으면서 단하자순(丹霞子淳)하의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묵조선을 제창하면서 송대의 대표적 선풍이 되었다.
임제종은 오종 선풍 중에 유전된 시간이 가장 길었고 영향도 가장 커 임천하(臨天下, 임제종 천하)라고 했으며, 석상초원(石霜楚圓)하에서 황용 양기파로 나눠지면서 송대 중엽에 크게 번성하면서 불과극근 하의 대혜종고가 간화선을 제창하면서 일세를 풍미했으며 후세에 널리 영향을 크게 미쳤다. 이어 묵조선과 간화선으로 송대 선종 양대 선맥이 이뤄졌다.
사실 오조분등 이후 선법이 비록 오가칠종으로 나뉘어졌지만, 각종 선법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수행방법상 모두 공통점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무증무수(無證無修)를 주장하였다.
무수무증은 문자 그대로 정면에서 보면 반야계통 이론체계를 말하는 것 같지만, 송대로 오면서 무수무증 단어는 또 다른 각도에서 선경의 표현인 본성(불성 심성 진여 법신불 천진불)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수행 형태를 말한다.(性本天 隨緣任運) 이는 송대 이후 삼교(유불도)일치사상이 주종을 이루면서 약간의 도교문화를 흡수한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들은 자연본성불이(自然本性不二)사상의 기초위에서 출발한 모티브로 후기 선종을 대표하는 사상들이다.
(현견스님, 중국 베이징대 철학박사〈46〉 ①분등선(分燈禪)과 후기 선종 [불교신문2984호/2014년2월12일자])
5가의 가르침과 특징을 밝힌 회암지소晦巖智昭의『인천안목(人天眼目, 1188)』에는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 선사가 지은「원오오가종요圓悟五家宗要」를 싣고 있다. 오조법연의 제자인 원오는 거기서 각 종파의 문풍門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임제종臨濟宗은 온전한 기틀과 큰 쓰임으로 방棒과 할喝을 번갈아 휘두르니, 칼날 위에서 사람을 구하고 번갯불 속에서 가르침을 편다. 운문종雲門宗은 북두北斗에 몸을 숨기고 가을바람에 본체를 드러내니, 삼구三句를 판별하고 화살은 멀리 허공을 날아간다. 조동종曹洞宗은 임금과 신하가 도道를 합하여 편정偏正을 서로 나투니, 험한 길[鳥道]과 현묘한 길[玄途]를 가는 금바늘에 옥실이다. 위앙종爲仰宗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노래하고 아버지와 자식이 일가一家를 이루니, 밝음과 어둠에 자재하면서 언어나 침묵 모두를 드러내지 않는다. 법안종法眼宗은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치고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밝히니, 글 속에 칼날을 숨기고 말 속에 울림이 있다.
(全機大用。棒喝交馳。劍刀上求人。電光中垂手 (臨濟)。北斗藏身。金風體露。三句可辨。一鏃遼空 (雲門)。君臣合道。偏正相資。鳥道玄途。金針玉線 (曹洞)。師資唱和。父子一家。明暗交馳。語默不露 (溈仰)。聞聲悟道。見色明心。句裏藏鋒。言中有響 (法眼)。(『人天眼目』券之六「圓悟五家宗要」)).
한편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의 설암조흠(雪巖祖欽, 1215~1287) 선사는 선종 5가의 특징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대답한 바 있다.
“위앙종을 뭐라 하시겠습니까?” “스승은 자비롭고 자식은 효도를 한다[父慈子孝].” “임제종은 어떻습니까?” “(번개가 지나간 후) 미처 귀를 막을 틈도 없이 천둥소리가 울린다[迅雷不及掩耳].” “조동종은 어떻습니까?” “삼경에도 발[簾] 밖의 달빛을 빌리지 않는다[三更不借夜明廉].” “운문종은 어떻습니까?” “가을바람에 온 몸을 드러낸다[體露金風].” “법안종은 어떻습니까?” “산은 스스로 맑고 물은 스스로 푸르다[山自清水自綠]
(曰如何是溈仰宗。師曰。父慈子孝。曰如何是臨濟宗。師曰。迅雷不及掩耳。曰如何是曹洞宗。師曰。三更不借夜明簾。曰如何是雲門宗。師曰。體露金風。曰如何是法眼宗。師曰。山自清。水自綠。(卍新纂續藏經第 84 冊 No. 1579 續指月錄))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제자인 천목중봉天目中峰의『산방야화山房夜話』에는 5가의 차이에 대해 묻는 질문에, 다섯 가문이라 하지만 사람들이 다섯 부류이지, 도道가 다섯 종류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각 파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였다.
객승이 또 물었다.
“분파된 5가의 차이점을 살펴보니 소속된 인원수뿐만 아니라 각파의 종지(宗旨)도 동일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무슨 까닭 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같고 약간 다른 점이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이 같다는 것은 달마스님이 전한 한 등불[一燈]과 동일하다는 것이고, 약간 다르다는 것은 쓰는 말과 표현하는 방법이 우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위앙종(溈仰宗)의 근엄함과, 조동종(曹洞宗)의 자상함과, 임제종(臨濟宗)의 통쾌함과, 운문종(雲門宗)의 고고함과, 법안종(法眼宗)의 간단명료함이 그것입니다. 이런 차이점 등은 각각 그 종파의 인물들의 천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자지간에 걸음걸이가 서로 닮은 것과도 비슷합니다. 쓰는 말과 표현하는 방법이 서로 비슷하게 닮는 것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저절로 서로 닮아지는 것입니다.
(선림고경총서 2, 백련선서간행회 편,『山房夜話』 p. 44.)
이어 ‘요사이에 참선한다는 무리들이 종지宗旨에 얽매여 허공을 쪼개려는 듯한 허망한 견해를 일으켜 서로를 비방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런 꼴을 열반에 드신 5가의 스님 네들이 본다면, ‘그 하는 꼴이 냄새나고 더러워서 코를 틀어막을 것이 분명’하다고 통탄하고 있다. 이를 두고 성철 스님은『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 평을 붙이고 있다.
다섯 가문이라 하지만 인맥이 다르다는 것이지 도가 다르다는 것은 아니다.
위앙의 근엄함, 조동의 세밀함, 임제의 통쾌함, 운문의 예스럽고 고고함, 법안의 간명함은 각각 그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부자간에 옛 발자취를 잃지 않고 말과 경계가 비슷하게 이어짐은 요컨대 의도하지 않았어도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의 참선하는 사람이 각각이 종지에 뒤덮여 가위로 허공을 자르는 망견을 일으켜 기니 짧으니 하니, 5가의 조사들이 대적정 가운데서 코를 틀어막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겠구나.
<평석>
5가의 우열과 장단을 함부로 논함은 예나 지금이나 큰 법을 깨치지 못한 눈먼 장님들의 공통되는 병이다. 그러므로 정안종사들은 이를 통탄하고 깊이 경계하였으니, 중봉의 법을 이은 천여도 그의『종승요의 : 천여록 9』에서 5종의 우열과 심천을 함부로 논함은 착각 중의 착각이라고 상세히 반박하였다.
(退翁 性撤,『禪門正路評釋』「18. 정(正)과 편(偏)의 현묘한 도리[玄要正偏]」 p. 260.)
五家者는 乃五家其人이요 非五家其道也니라 - 頻迦藏經 如潙仰之謹嚴과 曹洞之細密과 臨濟之痛快와 雲門之高古와 法眼之簡明은 各出其天性而夫子之間에 不失故步하야 語言機境이 似相踏習은 要皆不期然而然也라 今之禪流가 泥乎宗旨而起夾截虛空之妄見하야 互相長短하니 余知五家之師가 於大寂定中에 莫不掩鼻로다 - 中峯錄 11 之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