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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독일 강단에 새싹 틔운 헬무트 틸리케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1908-1986)는 메말라가는 독일교회 강단의 원인을 이렇게 지적했다.
“설교가 과거와 비교하여 생동감과 활력을 잃어버린 채 죽어가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설교자의 설교가 옛 사람들보다도 수사적인 기교가 부족하기 때문인가? 우리의 설교가 정신적으로 둔화되고 케케묵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설교자의 삶이 ‘설교’와 ‘생활’로 분열(Dichotomy)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패는 신앙생활의 ‘병리적 상황’(Pathological Condition)에 기인한다. 병리적 상황이란 ‘지체들의 마미증세’(Numbness in the Extremities)이다”(헬무트 틸레케의 에서).
그가 말한 ‘지체들의 마비증세’란, 설교자가 정작 자신이 선포하는 설교 밖에서 살아가면서도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설교와 생활이 분리되어 있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침은 오늘날의 설교자에게도 절실하게 와 닿는다.
틸리케는 독일 나치 시대에 히틀러(Adolf Hitler)에 저항함으로써 행동하는 신앙을 보여준 신학자다. 동시에 메말라가는 독일 강단에 새싹을 틔운 설교자다. 독일의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불트만(Rudolf Bultmann), 칼바르트(Karl Barth),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그리고 몰트만(Jurgen Moltmann) 등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틸리케는 낯선 인물이다.
다만, 목회자라면 그의 저서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를 통해서 이름과 설교 사상을 잠시 접했을 뿐이다. 하지만 영미 권에서는 아주 친숙한 인물이다. 그의 설교는 살아 있는 언어, 그림언어로 표현되어 있어서 기독교인은 물론이고 일반 지성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틸리케는 1960-70년대에 미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남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까지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신학자, 윤리학자, 사상가요, 무엇보다 탁월한 설교가로 사람들 곁으로 다가갔다.
신앙의 기초를 쌓은 어린 시절
헬무트 틸리케는 1908년 12월 4일 독일 부퍼탈-바르멘(Wuppetal-Barme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높은 수준의 역사가이자, 신학을 아는 평신도 신학자였다. 어머니는 청교도적인 엄격함과 자상함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는 즐거움을 희화시키는 낙천적인 기질을, 어머니로부터는 삶을 진지하게 형성하는 태도를 물려받았다.
그가 신학을 전공한 계기는, 개인주의적인 경건을 몸소 보여준 어머니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어머니 소원 또한 아들이 신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틸리케는 바르멘 게마르케(Barmen-Gemarke)의 ‘개혁교회’(Reformed Parish)에서 성장하며 신앙을 배웠다. 당시, 이 교회의 영적 분위기는 칼빈주의적인 냉정함이, 신학적으로는 ‘능력 있는 성경적 경건주의’가 주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틸리케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순수한 신앙전통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혔다. 문화적으로 춤, 연극, 영화관람 등을 허용하지 않는 청교도적인 성향도 함께 갖고 있었다.
틸리케에게 입교 교육을 시행한 목사는 라우프(Adolf Lauff)였다. 라우프는 목회 중심을 강단에 두었다. 하지만 병자, 가난한 자들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방문하여 위로하는 데도 열심이 있었다. 그는 묵시록적인 본문을 특히 좋아하여, 종말과 주님의 재림에 관한 설교를 자주했다. 라우프 목사의 신앙과 인격은 어린 틸리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질병의 고통과 기적적인 치유의 체험
1928년, 틸리케는 독일 보수신학의 본산지로 알려진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첫 학기에 조직신학자인 헤르만(Rudolph Hermann)을 통해, 신학적 열정에 대해서 배웠다. 그는 틸리케에게 종교개혁 사상부터 슐라이어마허(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에 이르는 조직신학의 이론적 기초를 전수해 주었다. 신약학자 쉬니빈트(Julius Schniewind)는 실재론적으로 신약성경을 읽는 법을 가르쳤다. 당시, 독일신학계는 역사비평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대였다.
본(Bonn) 대학에서 칼바르트의 교의학 강의를 들으면서 틸리케는 변증법적 신학의 틀을 배웠다. 그때 명석하게도 바르트 신학에 윤리적 차원이 배제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틸리케는 바르트 신학이 도외시한 ‘일상적 삶’의 지평과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신학윤리에서 정치윤리와 경제윤리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동기가 된다.
그는 대학 시절, 호흡장애를 일으키는 ‘갑상선종’(Pulmonary Embolism)’이라는 질병을 앓았다. 이 질병은, 신진대사에 필요한 호르몬인 티록신을 분비하는 갑상선에 생긴 혹으로 인해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이다. 이에 따라 마아부르크(Marburg), 엘랑겐(Erlangen)과 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병의 후유증으로 심한 마비현상이 나타나면, 걸을 수도 없고 몸을 구부릴 수도 없어 휠체어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는 스스로 옷을 입을 수도 없었고, 시험 답안을 겨우 써낼 정도였다. 간질병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였다면, 갑상선종은 틸레케의 육체적 가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논문에 열정을 쏟았고,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1931년, 엘랑겐 대학의 헤리겔(Eugen Herrigel) 교수에게서 “윤리적인 것과 미적인 것 사이의 관계”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틸리케는 ‘피조물로서의 불안’과 죽음을 체험하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어느 날, 신경위축을 억제시키는 데 사용하는 약이 자신를 살릴 것인지, 아니면 죽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결단의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날 밤, 틸리케는 병상 침대에 마주 서 있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는 자신을 만지는 손과 구원받았다는 느낌 그리고 충만한 능력이 온 몸으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사건을 통해서 1933년 ‘성 금요일’에 병상에서 일어났다. 이 치유사건은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후 틸리케는 질병으로 인한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기적적인 치유의 체험을 통해, 신학을 강의실이 아닌 인간 실존의 고통과 영성에 관련된 성령론적 신학으로 전개하게 된다. 학문적인 신앙이 아니라 실존적인 신앙을 체험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이론적인 강단신학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의 신학은 칼바르트, 불트만 그리고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의 신학과는 다른 것이었다. 다분히 종교개혁적이며 신앙 우위적이었다. 그의 신앙과 신학은 이렇게 해서 새롭게 태어났다.
시대적 아픔에 저항하다
틸리케는 개인적으로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시대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아픔을 경험했다. 그는 신정론(Theodicy)의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하나님은 악과 불의가 동시에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는가?”
“왜 우리의 삶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의미 없는 비극과 잔인성과 허무를 동반하는가?”
“이 세계가 전쟁의 소요 속에서 부상자와 죽어가는 자의 신음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실존적인 질문들에 대해 틸리케는 하나님은 침묵과 말씀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대답을 얻었다.
“우리는 죄와 벌 사이에 연결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해서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러 내려와서 분명한 사례를 보여주도록 기대할 때, 그분은 어찌해서 침묵을 지키며 그토록 소극적인가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소극적인 것 같이 보일 때 아무런 일도 벌어지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상 심판 자체는 그의 침묵과 소극성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헬무트 틸리케, “세계 역사와 세계 심판: 침묵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와 삶의 의미」(Christ and the Meaning of God?, 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틸리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심판과 은총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읽었다. 그는 고난에 대한 질문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에 참여하는 해방을 경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죽음과 심연의 절망 속에 계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두려운 침묵이다. 그러나 겟세마네와 골고다 배후에는 부활의 영광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처럼 ‘존재의 질문’으로 보지 않았다. 대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요한복음 말씀에 근거하여 ‘진리 안의 존재’로 해석하였다. 당시 독일의 지성계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곳을 향하여 틸리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에 관하여 역설하였다.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설교자
틸리케는 1935년에 전도사 자격을 갖추기 위한 ‘교회 시험’에 합격했다. 1그 이듬해에는 엘랑겐 대학 조직신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알트하우스 교수의 조교 생활을 시작한다. 동시에 1936-1940년까지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대학에서 협동교수로 봉직했다.
그러나 그가 히틀러에 대항하는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의 대표자가 되었을 때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1940년 이후에는, 비텐베르크(Wittenberg) 라벤스부르그(Ravensburg)에서 대리 목사로 일했다. 하지만 독재정부로부터 강연, 저술, 여행 금지를 당하고 만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목사가 되었을 때, 나는 ‘모든 권세는 하늘로부터 그리고 땅에서부터 나에게 주어졌다’는 예수님 말씀을 믿고 뛰어들었다. 나는 당시 권좌에 있던 히틀러와 그의 권력 기구조차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매달린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신시켰다. 이를 위해, 이 말씀을 혼자서 되뇌었다”( 중에서).
1942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될 때까지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 있는 국가교회 소속의 신학 행정 관청에서 일했다. 틸리케는 이때 주일마다 설교를 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수천 명의 청중들을 매료시켰다. 동시에 비밀경찰 게슈타포(Gestapo)를 자극하기도 했다.
이때 그가 집필한 책들은 익명으로 스위스에서 출간됐다. <죽음과 삶>(1944), <현대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질문>(1944) 등이 그것이다. 틸리케는 이 책들을 통해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1945년 종전 후, 그는 신학교수로 복직되었다. 1951년에는 서독대학 총장연합회 회장이 된다. 1954년 독일 북부 자유도시 함부르크(Hamburg) 대학에 신설되는 신학부 학장과 조직신학 정교수로 옮겨 봉직하다가, 1960-1961년에는 함부르크 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는 1974년 정년퇴직 후에도 함부르크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였다. 동시에 함부르크의 성 미카엘(St. Michael) 교회에서 여러 인종과 계층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는 등 목회활동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1937년, 목사 딸 마리루이스(Hermann, Marie-Luise)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1986년 3월 5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설교하던 ‘성 미카엘 교회’를 바라보며 폐질환으로 78세로 그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서전 제목처럼 “이 아름다운 별 위의 손님”으로 머무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엄청난 연구물과 저작들
틸리케의 저작은 대략 700개의 제목들로 이루어졌다. 주요 신학저작으로는 <신학윤리>(4권, 초판 1951, 5판 1981), 교리서인 <개신교 신앙>(3권, 1968-78: 1권 <개신교 신앙>, 2권 <신론과 기독론>, 3권 <성령신학>), 기독교 인간론인 <인간존재-인간됨>(1976, 3판 1982), <새 시대의 신앙과 사유-신학과 종교철학의 대 체계>(1983) 등이 있다. 그 외에 <계시, 이성, 실존-레싱(Lessing)의 종교철학>(5판, 1966), <신에 대한 비밀스런 질문-우리 정신상황의 배경>(1972), <괴테와 기독교>(1983), 단편모음집인 <논쟁의 신학>(1950), <신학과 시대정신>(1967), <자유롭게 존재하는 인간>(1981) 등이 있다.
신학윤리에 관계된 책으로 <누가 죽음을 허용할 수 있나- 현대의학에 대한 첨예한 질문>(1979), <만남의 경험>(3판, 1977), <항해여행가-동아시아 여행일기>(4판, 1968), <우자와 성자의 웃음-위트와 유모에 대해>(1974), <죽음과 더불어 사는 삶>(1980), <상실한 언어를 찾아서- 기독교의 미래에 대한 사유>(1986) 등이 있다. 그의 자서전 <아름다운 별에 있는 손님>(1984)도 기억해야 한다.
설교에 관계된 책들로는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1965), <기다리는 아버지>(1959),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1960), <하늘에 계신 아버지>(1960), <어떻게 다시 믿을 것인가>(1972), <침묵하시는 하나님>(1962), <신학은 얼마나 현대적인>(1969) 등이 있다. 그의 저작은 철저한 현실참여 정신에 기초한 강연과 설교들이다.
틸리케의 신학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의 신학사상은 마르틴 루터와 칼 바르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형성되고 발전된다. 틸리케는 루터와 바르트에게 역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루터의 ‘두 왕국론’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에 반대하여 자신의 초기 역사신학을 전개시킨다. 두 왕국이란 ‘영적 왕국’(Spiritual Kingdom) ‘세속적 왕국’(Secular Kingdom)을 말한다.
그는 스승 알트하우스(Paul Althaus)를 포함한 신루터주의 신학도 잘못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신루터주의는 루터의 ‘두 왕국’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여, 세상 질서를 하나님 나라와 공존하는 상대적인 독립적 영역으로 이해했다. 그 결과, 세상 질서는 또 다른 하나님의 계시의 장소가 되며 하나님 나라와 세상은 서로 평화롭게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세상 질서는 파괴되지 않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나타내며 국가 권력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 이해했다. 이 때문에 신루터주의 신학은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틸리케에게 역사는 세상적 사실성만도 아니요, 또한 신적인 영역만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두 차원을 연결시키려고 했다. 이런 입장은, 신학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그 당시 대립적 갈등관계를 형성했던 대표적 두 신학자의 학문적 경향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한 사람은 ‘역사의 신적인 차원’을 강조했던 계시신학의 대표자 칼 바르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역사의 인간적 차원’을 강조했던 창조신학의 대표자 브루너(Emil Brunner)다. 이런 의미에서 틸리케 신학은 동시대의 역사신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적 신학 vs 비데카르트적 신학
틸리케는 그 당시 기존의 신학적 두 흐름인 진보와 보수신학을 각각 ‘데카르트적 신학’(Cartesian theology)’과 ‘비데카르트적 신학’(Non-Cartesian theology)으로 이름을 붙였다. 그는 양 진영의 신학적 입장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덧붙였다. 다양한 현대신학의 발원은 ‘데카르트 학파’이다.
이 입장의 근간은 ‘선포되는 메시지가 무엇인갗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메시지가 들려지는 현대의 청중’과 ‘그 청중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제’를 초점으로 삼는다. “인간학이 없는 신학은 존재치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 입장이다.
이런 입장 위에서 그 강조점이 메시지에서 청중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 또는 거절케 하는가? 현대적 사고와 말씀이 주어진 최초의 구시대 사이의 괴리는 무엇인가?
틸리케는 데카르트적 신학 방법을 인정하면서도 비판도 제기한다. 인간에 대한 집중이 그들의 최초 순수한 동기와는 달리, 복음 자체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신학 진영의 중심에 위치한 비신화화(Demythologisation)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비신화화 주장은 의도와는 달리, 복음의 역사성을 상실케 하고 일체의 초월이 파괴되며 독백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틸리케는 모든 논의 초점을 ‘변화되는 인간’이 아닌 ‘변화시키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 맞추었다. 이런 인식과 변화는 인간 자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말씀에 의해 이루어지는 ‘밖으로부터의 사건’이다. 이것을 인지하는 신앙 역시도 말씀의 창조이다. 이것을 ‘성령에 의한 새 창조’라고 표현한다. 그는 자유주의에 의해 무시되어진 ‘말씀’과 ‘개혁신앙’의 가르침을 일깨우는 데 진력했다. 현대의 모든 문제들을 복음의 빛 아래 조명, 해석 그리고 처방하려 노력했다.
틸리케는 바르트나 불트만 등 현대 신학의 거장보다는 한 세대 후배다. 이들 거장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현실문제에 대한 상황 분석에 있어서는 개혁신학적인 사고의 틀을 사용했다. 당시 신학계를 주름잡던 신학자들의 맹점, 즉 그들이 놓쳤던 부분을 지적한 후에 이를 극복했다.
틸리케는 바르트 신학이 도외시한 창조세계의 고유한 질서, 불트만 신학이 도외시한 나사렛 예수의 계시의 역사적인 사실성, 틸리히 신학이 간과한 성경 본문이 갖고 있는 케리그마의 의미를 놓치지 않고 복권시켰다.
윤리적 신학
윤리학은 틸리케의 전공이다. 그는 1964년에 ?윤리학? 전 3권을 20년의 세월에 걸쳐서 완성시켰다. 책의 분량이 3천 쪽을 넘는다. 그는 이 책에서 윤리학의 방법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과 세계, 정치 윤리, 성과 예술의 문제까지 언급한다. 윤리학에 대한 강한 집념은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중대시했기 때문이다. 신학은 교회에서 말하는 설교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교와 관계없는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틸리케의 윤리 사상이 설교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첫째, ‘연대(Solidaritat)’를 통해서 연결된다. 어떻게 해야 설교자와 청중이 연대, 일치, 단결하여 서로 협력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설교자는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지불하지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둘째, ‘신뢰성(Glaubwurdigkeit)’을 통해서 연결된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 가운데서 자기가 참으로 믿고 있는 것만을 말해야 한다. 신뢰성을 문제 삼는 것은 설교자는 자신이 증언하고 있는 그 복음에 의하여 얼마나 진지하게 살고 있는가를 질문받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증언하는 신앙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틸리케의 윤리설교는 철저하게 기독론에 기초한다. 설교할 때 성경 말씀을 예수님의 정신에서, 즉 예수님의 심장으로 해석하며 윤리를 설명한다. 그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의인으로부터의 선한 행위를 직설법(indicative)인 동시에 명령법(imperative)으로 설정된 것으로 간주한다. 명령이 의무로 부과되지 않고 초청의 보완으로서 또는 은혜에 부응하는 과제로서 자발적으로 나온다.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신앙으로 해석
당시, 대부분의 독일 신학자들은 관념적이고 사변적 사상에 안주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틸리케는 학문의 세계를 현실 세계가 갖는 문제들과 연결시키려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는 윤리학을 먼저 독파한 후 교의학에 접근했다.
그의 관심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그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었고 신앙양심을 실천에 옮길 줄 아는 신학자였다. 하이델베르그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나치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것은(1940년) 그 좋은 반증이다. 그는 전쟁의 맹공격을 견뎌내는 것뿐 아니라, 백성들이 나치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항거하는 것도 도왔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마침내 대교회 또한 화재로 파괴되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유서가 깊은 하나님의 집에 높이 솟아오른 횃불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집이 타버리고 거의 동시에, 그리고 내 손에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문을 여는 열쇠를 쥐어들고 거기에 서있는 때조차도 내 마음은 그렇게 괴롭지 않았습니다.”
틸리케의 설교관
틸리케에게 있어 설교는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이 우리와 만나고 또 우리를 변화시키는 자리이다. 설교는 영적인 작업으로서 회중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이를 통해 기독교에 대해 회의를 품고 또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자들을 돌려놓는 데 이바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과제를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한다.
첫째, 설교자는 성경 본문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히 포착하여 오늘의 청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설교자는 시간적 제약에 둘러싸인 분문을 ‘오늘 여기서’ 나를 위한 소식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설교언어가 현대적, 비종교적 언어가 되어야 한다.
둘째, 설교는 현재 ‘상황’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 점이 바르트로 대변되는 변증법적 신학의 설교 이해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는 상황을 도외시한 설교는 있을 수 없으며, 이 상황과 경험은 설교에서 반드시 ‘영원성’에 의해 조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설교자의 삶이 뒤따라야 한다. 틸리케는 설교의 문제는 곧 설교자의 문제라는 등식을 제시한다. 그는 이 시대를 말씀선포의 쇠락으로 진단한다. 그의 등식대로라면 이것은 설교자의 쇠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틸리케는 설교자가 삶이 일치된 설교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설교자는 말씀을 대할 때 먼저 자기에게 주신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설교에 어떻게 써 먹을까’하는 충동으로 읽고 있다. 설교자가 청중을 가르치려고만 하면 청중은 오히려 설교자를 배우지 않는다. 나를 먼저 가르치는 삶이 청중을 잘 가르치는 삶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청중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틸리케는 ‘종교공무원’으로 전락하다시피 한 독일 설교자들을 염두에 두고 회중에 대한 사랑을 강한 톤으로 강조한다.
이런 사랑의 필요는 청중들을 말씀으로 구원하려는 목자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을 존경하고 영향을 받았다. 그는 스펄전과 연관하여 후배들에게 권면한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물론 지금 유행중인 설교학 문헌 포함) 모두를 팔아버리고, 헌 책방을 뒤지며 쏘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하더라도 스펄전을 사라.”
틸리케의 설교 내용분석
현실 문제를 설교강단으로
틸리케가 설교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부터다. 그는 캄캄했던 시기에 모든 가면이 낱낱이 벗겨진 처절하고 적나라한 현실 상황의 심연에 서 있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신앙의 참된 의미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질문은 설교 속에서 묻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간 실존의 측량할 길 없는 종착과 미망과 절망을 직시하면서 거짓 예언자와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절규했다. 그는 교회 강단에서의 설교는 성경연구에 관한 강연이 되는 것을 단연코 배격했다.
그는 혼탁한 시대사조와 무신론의 공간이 확대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말씀으로 묶으려 했다. 그는 머릿속의 복음으로 관념화되기 쉬운 독일 강단에서 깊은 지식과 뜨거운 가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마음에 품고 역사적 현실에 드러나거나 교묘히 감추어져 있는 사회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하며 설교강단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신학과 인문과학, 종교와 세속 사회의 대화를 추구했다.
상처 입은 회중을 감싸고 싸매는 메시지
전쟁 때문에 삶의 현장에서 고통당하고 상처받은 자들이 누구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뿐이시다. 그의 메시지에는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그의 신학적 통찰이 밑받침되고 있다. 그는 교리적 예수님보다도 인간의 삶 속에 동행하시는 동행자와 위로자로서의 예수님을 줄기차게 설교하고 있다.
“이제 내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의 모든 것은 이것입니다. ‘이 신비에 찬 인물(Figure)이 누구인가? 나에 대한 기소장을 찢어버린 분이 누구인가? 나의 양심의 고소를 억누르며 내게 새롭고 기분 좋은 미래를 허락해 주며, 다시금 마음껏 자유로이 숨 쉴 수 있게 해주신 분이 누구인가? 누가 나로 하여금 숲속에서 나올 수 있는 용기를 주며, 비극적인 환상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해 준 분이 누구인가?’ 그리스도 예수, 그가 그분이십니다”(How The World Began- Man in the first Chapters of the Bible 중에서).
더불어 사는 모습을 제시
틸리케는 성도들이 비록 힘든 세상에서 살고 있을지라도 더불어 살아야 하는 근거를 두 가지에서 찾는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보았다. 동시에 예수님은 그 대적 자에게서 아버지의 자녀요 형제자매의 모습을 보았다. 이것은 의미의 행위가 아닌 ‘시각교정’의 행위였다. 그는 바로 이 이웃사랑에 대한 ‘시각교정’이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바로 이웃이다.
생산적인 사랑을 지향
교회는 사랑의 이름으로 상처를 싸매는 일만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가 생기는 것을 막는 일을 해야 한다. 교회는 잘못된 사회질서의 희생자들을 돌보는 것만이 아니다. 나아가 사회질서 자체의 갱신 문제, 즉 하나님의 계명이 사회를 지배하도록 하는 문제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얻도록 세상에 불행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행을 예방하는 것도 사랑에 속한다. 이것을 ‘생산적 사랑’이라고 부른다. 생산적인 사랑은 시각교정으로부터 시작한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사랑 곧 다른 사람에 대한 전적 헌신이 하나의 ‘계명’ 또는 단순한 ‘의무’로 해석될 때 그것은 강압에 불과하게 됩니다. 마음보다는 신경 조직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사랑은 왜 명령이 될 수 없나요? 칸트(Immanuel Kant)는 우리 행위의 윤리성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정복할 정도로 의존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윤리적인 것은 항시 ‘너는 해야 한다’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너는 해야 한다’에 따라 살지 못하면 자신의 충동에 복종하게 됩니다. 결국 비윤리적으로 살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주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명령될 수 없습니다”(“이웃을 사랑하는 법”, ?그리스도와 삶의 의미? 중에서).
사회개혁보다 개인의 변화를 강조
“많은 형제들이 예배 의식의 개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언제 노래를 부르거나 말을 해야 하는지, 그 다음에는 어느 조로 노래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권과 긴급성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천사의 호산나-예배의 개혁-를 모방하기 전에 목자 없는 양떼들에게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밖에서는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교회당에 파묻혀 있을 수 있습니까? 목자 없는 양떼에게 한 방울의 사랑은 대양과 같은 신학적 지식과 의식적 열심주의보다 훌륭합니다. 우리는 흰 빵을 무시하면서 후식을 요구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들에게 가기 전에 그들은 죽을 것입니다”(“설교의 제 1주제”, ?그리스도와 삶의 의미? 중에서).
당시 독일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정책결정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 대부분 제도의 개혁과 구조의 변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신앙과 변화에 우선권을 두는 것은 복음주의적 신학자인 틸리케의 위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행동하는 믿음
틸리케는 개인의 신앙은 반드시 외적인 방향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믿었다. 신앙이 내부에만 머물러 있을 때는 ‘곰팡이의 경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이 갖는 개인적 차원을 경계한다. 특히 독일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지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실천하는 차원을 역설한다.
행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가 무엇을 믿느냐고 결코 묻지 마라. 그가 무엇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을 보아라. 믿음이 다만 단어일 때 그것은 죽은 믿음이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가 죽은 믿음에 대한 돌격의 함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참된 믿음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신다. 사용되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은 오직 주님께서 그의 넘치는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도록 요청하는 능력 있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생길 때, 우리는 우리 이웃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서 사랑의 기적이 나를 변화시킬 것이며, 나만이 아니고 세상도 역시 변화시킬 것이다”(“이웃 사랑”(눅 10:25-37), ?어떻게 다시 믿을 것인가(How To Believe Again)? 중에서).
이웃 사랑의 능력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능력은 기도하는 생활에서 생긴다. 그가 이렇게 사랑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현대신학의 풍조 때문이다. 현대신학은 예수님의 모습을 난도질하여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에 적합하게 맞추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현대신학은, “신학은 하나님을 논하는 학문이며 하나님은 인간 이성의 영역 밖에 계신 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잊어버렸다. 이들은 다양한 작업가설들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두는 실수를 범해 왔다. 독일의 설교 강단은 메말라갔고 교인들의 사랑도 식고 말았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
틸리케는 하나님 중심적 신학 위에서 모든 논의를 풀어가려고 한다. 이런 그의 모습은 그가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 그분은 주님이시며 세계의 창조주시며, 그가 만드신 모든 것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위엄 가운데 거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 위에서 명령을 통하여 세계를 다스리는 주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나를 만나러 오시고 나를 아시며 그 분의 가슴속에 나를 포용해 주십니다. 그분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태초의 증인들”(창 1:1-2),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중에서).
21세기 한국 강단에 틸리케가 주는 교훈
우리 시대 한국교회의 설교의 양과 횟수는 그 어느 시대보다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통한 변화의 능력은 현격하게 저하되고 있다.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시대의 타락과 복음에 대한 배타적인 청중의 태도에서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설교자에게서 찾아야 하는가?
틸리케는 설교의 문제는 곧 설교자의 문제라는 등식을 제시했다. 그의 등식대로라면 이것은 설교자의 쇠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현대인은 설교에 피곤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설교에 피곤을 느낀다”며 설교자의 갱신을 강조한다.
어떤 점이 갱신되어야 하는가?
첫째, 설교자는 성경 본문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히 포착하여 오늘의 청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청중의 변화에 있다. 청중의 삶은 신학적 정보 전달이나 목회자의 담론으로 변화되지 않는다. 무엇이 청중을 변화시키는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설교자는 성경공부에 좀 더 마음을 쏟아야 한다. 성경을 제대로 알 때 성경적 설교가 나온다. 성경적 설교가 선포되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설교자들이 지나치게 교회성장 프로그램 및 세미나에 마음을 쏟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도전이 된다.
둘째, 설교자는 현재 ‘상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청중의 얼굴에서 시작하여 얼굴로 돌아가야 한다. 청중의 얼굴에서 읽은 모든 문제들과 그 해결점이 설교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적용이 있는 설교를 말한다.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가 메시지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게 할 것이며, 이미 구원 받은 백성이라면 온전한 삶을 향한 거룩한 결단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인 설교 앞에서 변화 받지 못할 영혼이 없고 변화 받지 않아도 될 영혼 역시 한 사람도 없다.
셋째, 인간의 본질문제를 꿰뚫고 해결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설교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세대, 특히 젊은이들은 ‘의로움에 대한 갈증’으로 팽배하다. 생동감 있는 설교가 행하여지는 곳이면 그 어디라도 사람들은 아직도 몰려들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수많은 토의를 통해서 종교에 대한 물음이 숨겨진 형식이나 또는 명백한 형태이거나 아무튼 질문들은 수없이 제기된다. 사람들은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물음을 묻는다. 이들의 물음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깊이 있는 설교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의 설교는 너무 가볍다. 청중들이 쉽게 반응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좋은 점이 있다. 하지만 한 주 동안만이라도 그 설교를 곱씹을 수 있는 깊이 있는 설교는 많지 않다. 청중을 생각해야 하는 점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설교의 수준이 가벼워지는 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설교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버려야 한다. 오히려 깊이 있는 설교가 사람들 속에 역사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넷째, 영혼에 대한 사랑이다. 설교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청중에 대한 사랑이다. 어떤 청중을 사랑해야 할 것인가? 물론 설교자는 모든 청중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 입은 양떼들을 감싸고 싸매줘야 한다. 이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이들의 쓰라린 가슴을 보듬어 안고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틸리케가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 메마른 설교강단에 새싹이 나게 할 수 있었던 점은 무엇인가? 청중에 대한 사랑이다. 그가 ‘성경-주제’식으로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양들의 아픔 마음을 달래주고 위로해 주고 소망을 심어줄까 고민하는 가운데 이런 설교형식이 나왔다. 그는 진정 양들을 사랑한 사랑의 목자였다. 양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힘이 메말라가는 설교강단에 새싹을 나게 했다. (2008. 2. 10. 교회와신앙 / 권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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