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간의 연휴가 내겐 너무나 소중했기에
그래서 1박2일 가족여행을 떠났다,
가장 먼저 간곳은
우리나라 유일의 습지보호구역인 순천만
뛰어 오르는 짱뚱어와 게를 관찰하고 자연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게 되는 곳이다,
쇠오리,개개비,오목눈이등 작은 새들과 농게,칠게,방개등 게들을 볼수 있으며 가끔
너구리나 수달 발자국도 보인다
800 만평의 광활한 갯벌,60만평의 하구 갈대밭
스멀스멀 뒤뚱거리는 농개
날개짓하며 창공을 나는 왜가리들 그야말로 순천만은 자연교과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처럼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때 순천만을 찾으면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기 때문만은 아닐것이다.
그저 세상사는 것이 힘겹고 할때 이곳을 찾고 싶을 것이다,
언젠가 1박2일 강호동이 나오던 프로에 소개되면서 형성된 꼬막정식집 들이 읍내에 즐비하다,
우리는 출발하면서 남도지역의 맛집을 찾아 맛난거 먹고 놀자는 취지다
아침도 거르고 출발한 우리는 늦은 점심이기에 사진 찍을 정신도 없이
먹어 치우다가 찍어 댄다,
벌교 갯벌에서 채취한 것들로 꼬막정식 이란 이름 걸맞게도 갖가지의 반찬들은
참으로 맛깔스러웠다,
그중 꼬막으로 버무린 야채 넣고 비벼낸 비빔밥이 젤 인기였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 태백산맥
질곡 역사를 살아온 민초들의 아픈 삶을 가장 진솔하게 그려낸곳
소설 태백산맥 주무대인 벌교를 찾아서
살아있는 현장을 보고싶어 달려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조정래씨의 올가미에 단단히 걸려든 모양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이 과연 실존 인물일까
금융조합은 현재 벌교읍 농민상담소로 쓰인다,
벌교에서 점심 배불리 먹고 나서 우린 소록도로 향한다,
1950년-1960년대 소록도에는 직원대대와 병사대대 즉 두곳으로 나뉘어진다,
환자의 탈출을 막기위해 날카로운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일명 경계선
아무리 나환자 촌이라도 사랑은 꽃을 피우는법
병사지대 원생에게서 자녀가 태어날 경우 육지에서는 아무도 이 아이들을 받아주는곳이 없다고 한다,
결국 전념을 우려해 직원지대 미감인 보육소에 격리시킨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지식은 생이별을 해야한다,
그러나 한달에 딱 한번 부모와 자식은 철조망 도로 즉 경게선 양편에 서서 한달에 한번
면회를 하게 된다, 위치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바뀐다고 한다,
자녀는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안고
부모와 지식은 상봉하게 된다.
부모와 자식 간 거리는 불과 5미터 물리적 거리는 가까웠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나 길은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
전염 때문에 서로 만지거나 안아볼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당장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었을 것이고 어머니는 아이의 볼을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은 냉혹했다
그저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던 어머니
정신을 추수리고 아이를 위해 사탕을 던져준 만남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수 없었던 자식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이렇게 딸아이를 데리고 가족이 여행할수 있다는 것에 새삼 고마움이 든다
(대한다원)
붓재를 넘을때 아슬아슬 하지만 워낙 아름다은 절경들이
펼쳐져 있기에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보성의 차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있는 적지를 찾다가 이곳을 발견한 것이다,
추워야 하고 비가 많아야 되는데 이곳은 내륙성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교차하는곳이다,
결국 이곳은 전통 한국차의 원류라고 불러도 된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부드러움에서 절집의 처마선을 그려낸듯 싶다
(다산초당 담쟁이 덩굴 사그락 거리는 소리에 저녘이 저물어 오다)
유배지를 상상하며 느긋한 기분에 감상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은
출발전부터 설레였다,
순천만, 소록도 ,대한다원 에서 이곳까지 오니 노을이 물들어 온다,
철없는 답사객은 초당마루에 걸터 앉아 울창한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 들으며
딸아이와 낭군님 한테 다산에 이야기를 혼이 빠지도록 들려주고 싶었는데
강진만 구강포의 유유한 물결을 눈에 담아 두고
다산 동암에서 조각달이 뜰때까지 이곳 강진에서
하룻밤 묶을 속셈이였는데
맛난 강진의 상다리 부러지는 저녘을 먹고나니
읍내 장날도 아닌지라 깜깜한 어디 유배지에 끌려라도 왔다는 생각이 들던가
숙소를 잡을려고 하니 부녀의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
(목포항의 뱃고동 소리에 유달산을 품었노라)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강진에서 목포까지 한시간도 안걸린다고 하더만
호텔까지 예약하고 난리를 떨더니
강진에서의 하룻밤의 꿈은 사그라들고 말없이 부녀의 꾀임에 난 넘어갔다,
으메 그럴것이지
목포항 선창가 선술집에 춘자가 그리워지는 것인가
어찌그리 신이나 쌓던가야
목포항 밤바다에 불빛 찬란한 대교 바라보며
라이브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곳에서 생맥주도 한잔 마셔가며
김만수의 영아 노래도 한곡 신청해가며 밤을 맞는다
그래 나혼자 기분 내자고 그 시골 구석
여관방하나 얻어 무슨 유배온 짓거리라도 해볼끼라고 감상에 젖는질 하다가
큰일랄뻔 했지라 이
(목포항의 뱃고동 소리에 새벽을 열다)
(유달산에 올라 목포의 노래를 부르다)
1597-10월부터 1598-2월 까지 목포에 머물던 충무공이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물리치기위해 이 봉우리에 짚을 쌓아 놓고
군량미를 쌓아 놓고 노적봉처럼 우리 군사가 많은것 같이 속여
적을 함부로 쳐들어 오지 못하게 했다,
(유달산에서 바라다본 목포시내전경)
개항과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사의 전면애 선 목포
좌절과 보람의 역사를 지닌 목포 새천년 목포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학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닮은 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노래
1930년 일제 수탈의 현장인 목포
그 응어리진 서러움을 안으로 삭이며
핍박한 삶을 노래로 달래며
이유야 어떻튼간에 목포의 눈물이 한국 정치사에 미친 영향이 결코 작지는 않다,
대통령도 불렀고 해태타이거스 팬들도 목놓아 불렀다,
5,18을 겪은 호남사람들에게 유일한 낚은
김응룡이 이끄는 해태타이거스였다,
선동열의 눈부신 호두가 있을때마다 김봉연의 역전 홈런을 날릴때마다
광주 무등경기장 에는 어김없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이란 노래가 메아리쳤다,
(낙안읍성 그곳에서 사그네 메미골을 보얐다)
임경업장군이 이곳 군수로 재직해 있을때 읍 면 사람들을
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쌓은성이다,
안동 하회마을의 대가집에 비유할수 없는
마치 내 고향에 살던 그 추억속으로 빠져든다,
반나절동안 돌아다니자니 이제 가느린 빗방울이 떨기 시작한다,
이틀간의 남도 여행 내 블로그에
6월의 또 하나의 추억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