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아(琴兒) 피천득의 자취와 수필세계
1. 서론
1>금아(琴兒)의 문학사적 의미와 개인적 고찰
수필은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자기 성찰이다.
『떠도는 그림자』를 쓴 키냐르는 “나는 누군가가 인류전체의 진실을 다룰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의 총체적인 진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진실이란 매우 분열된 상태에 있는 것이니까요. 나는 분열된 진실,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진실을 문제시함으로써, 그것에 접근하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하였다.1)
키냐르는 진실에 가까운 글쓰기를 갈망했지만, 어떤 문제든지 진실에 온전히 접근한다는 것은 쉽지 않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금아(琴兒) 피천득(이하 금아, 또는 피천득으로 부름)도 진실의 척도에 도달하기 위해 오월의 따뜻함을 사랑하며 진실한 삶을 내보였지만, 겨울 같은 음지의 진실, 치열한 인간의 고통은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 실크로드 길이, 영원으로 펼쳐지고
금아(琴兒) 선생을 보내는 삼성병원 장례식장 - 실크로드 같은 그 길은 생각보다 많이 담백했다. 우리 문학단체 편집위원(현대수필)이 다른 문인들과 시간이 어긋나서 그런지, 문단의 거대한 별이 땅에 떨어졌음에도 영전이 많이 적막했다.
장남 피세영 씨, 차남 피수영 씨, 딸 피서영 씨와 병원 측 도우미, 한 두 명의 문인만이 고인의 영전에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었다. 금아 선생과의 고별식을 침묵으로 일관하는 수많은 조화(弔花)만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시골에선 객지에서 내려온 생면부지의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주변은 웅성웅성, 낡은 멍석이라도 깔아 고스톱 판이라도 벌이며 고인의 명복을 빌기도 하지만, 도시생활에서의 여건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처럼 금아(琴兒)의 영결식장은 떠나는 길까지 그 성품을 닮았는지 고요하기만 했다. 일 만 명에 가까운 문인시대라고 하지만 금아(琴兒)의 영전을 모신 곳엔 적막함만이 흘렀다. 문인들이 풀어 나가야 할 과제라고 느껴졌다.
금아(琴兒)의 영상을 기리기 위해 2008년 5월 25일, 묘소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모란공원에서는 1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금아(琴兒)의 얼이 담긴 시비가 세워졌다. 2)
눈보라 헤치며
날아 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 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3)
- 너
묘 옆에 세워진 이 시비는 상단에 고인의 며느리 - 홍영선 씨가 쓴 ‘琴兒詩碑(금아시비)’가 새겨졌고, 그 밑으로 서예가 조주연 씨의 글씨로 시(詩) 전문이 새겨졌다.
고인의 묘소가 있는 그곳에서는 유족과 교수 재직시절 인연을 맺은 제자,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행사가 치러졌으며, 추모식은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의 추모 기도로 시작되었다.
시비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심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올 4월 금아(琴兒)의 학부ㆍ대학원 제자 800여 명 중, 연락이 닿는 70명에게 협찬을 부탁해 스승의 소식을 알리면서, 시비 제작비용이 준비되었다고 전했다.
행사에는 김남조 시인의 추모사(『책과 인생』. 2008. 7월호. 범우사)에 이어 참석자 모두가 고인의 문학 정신과 넉넉한 인품에 대해 회고하였고,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도 1968년 말 고인이 강연 차 뉴욕을 방문했다가 예고 없이 김우창의 유학하던 보스턴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찾아왔던 일을 소개하였다.
금아(琴兒)는 “십 수 년 전 인연을 맺은 제자 - 미국에서의 교수를 만나고, 보스턴심포니 공연을 관람하고 싶어 주최 측이 마련한 호텔까지 마다하고 8, 9시간 버스를 타면서 나의 기숙사를 찾으셨던 것”이 생각난다며, 당시 룸메이트 도움을 받아가며 기숙사 지하실에서 선생께서 주무실 매트리스를 가져오던 일을 회상하니, 선생의 소탈한 면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다.
문상득 서울대 명예교수도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곳은 1951년 피난 시절 부산에 마련된 임시 캠퍼스였다”며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대조적인 금아(琴兒) 선생의 영시(英詩) 강의는 판잣집 강의실을 환상의 세계로 인도했다고 추억했다.4)
금아(琴兒) 선생은 제자들을 친구처럼 대하고 함께 여행하길 즐겼다.
고인이 별세하기 얼마 전까지도 제자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사제지간의 융화력을 보여 주었다.
유족을 대표해 아들 피수영 교수도 참석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피수영은 고인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독자들은 아빠가 딸 피서영에 대해 지극한 사랑을 담은 글을 여러 편 썼기에 무남독녀를 뒀나보다 오해 하는데, 아빠는 두 아들에게도 비밀 없는 친구였다고 말했다.
금아(琴兒)를 기리는 행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서울 ‘금아(琴兒) 피천득(1910-2007) 기념관’5)이 잠실 롯데월드 3층에 개관되였다. 기념관 중앙엔 고인의 대표 수필,「인연」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배치되고, 그 둘레엔 고인의 반포동 자택 서재에 있던 육필 원고와 사진, 금아(琴兒)가 안고 자던 인형 난영이, 여러 가지 유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2. 담백한 수필과 청청한 시처럼
금아(琴兒)피천득은 시인, 수필가, 영문학자로서 1910년 5월 29일 서울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上海) 공보국 중학을 거쳐, 1937년 호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피천득은 1954년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한때 서울 중앙상업학원 교사로 근무했고, 1945년 경성(서울 대)대학교 예과 교수를 시작으로, 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를 배출해 냈다.
작품집으로는 1930년 <신동아>6)에「서정소곡」을 처음으로 발표하고, 1932년<동광>7)에 시「소곡, 1932」, 수필「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 1933」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투명한 서정으로 일관하며 사상과 관념을 배제한 - 순수한 정서에 의해 시정(詩情)이 넘치는 생활을 노래했다.
첫 시집 -『서정시집, 1947』에는 그리움을 꿈으로 승화시킨,「꿈」이나「편지」 처럼 소박하면서도 전통적인 삶의 서정을 노래한 시(詩)가 상당수 실려 있다.
하지만 피천득의 문학세계는 교과서에도 볼 수 있지만, 시(詩)보다 수필을 통해 그 진수가 드러난다.
서정적이고 주관적· 명상적인 것을 소재로 삼는 금아(琴兒)의 수필은 섬세하면서도 다감한 문체로 서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대표적 수필로 1933~1934년에 발표한「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기다리는 편지」,「은전 한 닢」,「인연」,「오월」을 들 수 있다. 특히 작품 「수필」은 수필 형식으로 쓴 ‘수필론’으로, 은유법을 적절히 구사해서 수필의 본질과 특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 외에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토머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8)의 시구를 부정하면서, 봄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봄」, 여성의 아름다움은 생생한 생명력에서 나온다는「여성의 미」, 지휘자보다 무명의 연주자를 택하겠다는「플루우트 플레이어」, 영국 대사관에서의 엘리자베스 여왕 생일 축하 가든파티에 참석하여 소회(所懷)를 쓴「가든 파아티」, 성모 마리아상과 같은 구원의 여인상을 찾는 「구원의 여상」같은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수필’ 이 외의 작품으로는 시집『금아 시문선, 1959』과『산호와 진주, 1932』, 번역서인『소네트의 시집, 1975』, 평론인「노산 시조집을 읽고, 1932」와「춘원 선생, 1961」 등이 있다. 하지만 금아(琴兒) 피천득은 이 모든 자취를 후세들에게 물려주고 1년 전인 2007년 5, 25일 세상을 떠났다. 붉은 앵두와 딸기, 모란꽃이 피는 ‘오월’을 좋아하더니 ‘오월’ 속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샘터>에서도『피천득 문학전집』을 발간하였다.9)
제 1권인『인연』에서는 소년 같은 진솔한 마음과 꽃 같은 순수한 감성, 성직자 같은 고결한 인품과 해탈자 같은 청결한 무욕을 엿볼 수 있고. 제 2권인 『생명』에서도 금아(琴兒)의 유일한 창작 시집으로 간결한 시어(詩語), 반짝이는 위트를 담은 금아(琴兒) 선생의 순수한 동심과 투명한 서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제 3권 『내가 사랑하는 시』에는 블레이크, 워즈워스, 예이츠, 도연명, 타고르의 시를 발췌해 금아(琴兒)가 직접 번역한 세계의 명시들이 소개되어 있다. 제 4권은『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을 번역한 154편의 시편으로 풍부한 인간미와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 대문호의 주옥같은 시어(詩語)들이 우아하면서도 재치 있게 녹아 있다.
금아(琴兒) 선생은 담백한 수필과 순수한 시처럼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향해서는 연민의 샘을 강하게 품고 있었으나 자신에게는 엄격했으므로, 그 삶은 떠났어도 그 자취는 떠나지 않아,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꽃이 필 것이므로 문단 사에 큰 의미가 아닐 수 없다.
2. 본문
1>작품의 파시즘을 통해 살펴 본 금아(琴兒)의 세계관
1.인생관
금아(琴兒) 선생은 국민작가이면서도 서울 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임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모시같이 섬세하고 깔끔하며 옥양목같이 깨끗하고 차가웠다’는 어머니를 닮으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 노력은 해방 후 한국전쟁, 이데올로기 대립시대, 독재시대, 산업시대, 경제 고도성장의 시대, 소비가 미덕인 시대를 거치면서도 세속에 전혀 물들지 않아, 그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10)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있던 보트, 덧문이 닫혀있던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오월」중에서
금아(琴兒) 선생은 봄과 오월을 많이 사랑했다.
작품「오월」이 대표작이 될 만큼 ‘오월’을 사랑하다가, ‘오월’의 소년처럼 아흔 일곱 번째 생신인 5월 29일에 발인을 하였다.
금아(琴兒)는 간소한 생활을 지향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작품도 일상의 신변사에서 소재를 발견해 아름다움과 기쁨의 계기를 놓치지 않으며 특유의 문체로 우아하게 그려냈다. 서정적이고 섬세한 가운데 간결체, 우유체를 사용하면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라고 했던 김진섭11)의 수필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금아(琴兒)는 유월이 오면 녹음이 짙어갈 것이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하겠지만, 젊어서 한 때 죽음을 각오했던 시절을 되돌려 놓은 ‘오월’이 가고 있어, 아쉽다고 노래했다.
「오월」을 읽다보면 ‘내 나이 셈하여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라는 글귀가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得了愛情痛苦(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 금아(琴兒)는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스물 한 살의 젊은 시절, 금아(琴兒)는 애정의 고통 속을 헤매면서 죽으려고 피서지로 갔던 일을 회고했다. 당시 금아(琴兒)는 애정의 고통을 얻어 방황하던 때, 가눌 길 없는 감수성으로 인해 도피하는 심정으로 짙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는 섬들과 신록이 짙어가는 5월의 피서지로 갔던 것이다.
「오월」을 읽으니, 좌절하여 홋카이도 바닷가 하코다테로 떠났던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2)의 시(詩),「나를 사랑한 노래」가 떠오른다.
동해바다
자그만 갯바위 하얀 백사장, 나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다네.
모래 언덕의 모래 위에 엎드려 첫사랑의 쓰라림을
아련하게 떠올리는 날
촉촉이 흐른 눈물을 받아 마신 해변의 모래
눈물은 이다지도 무거운 것이런가
이 시(詩)에서도 고통이 유성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그럼, 무엇이 금아(琴兒)에게 젊어 죽은 중국 시인의 시 구절 - 애정의 고통을 버렸다(失了愛情痛苦)는 시(詩) 구절을 모래 위에 써 놓고 돌아오게 했을까. 무엇이 금아(琴兒)에게 애정의 고통을 얻어 죽음의 언저리에 선 채 서성이던 마음을 버리게 했을까.
푸른 ‘오월’이 금아(琴兒)의 20대를 구했다. 다른 작품을 보더라도 금아(琴兒)는 ‘봄’과 ‘오월’을 찬양한 작품이 적지 않다. 생명력이 넘치는 신록의 계절 ‘오월’이 애정의 고통을 버리게 했다. 그 싱그러움은 어떤 음침한 죽음의 색조와 비교해도 광채가 난다.
작품「오월」에서 죽음의 빛깔이 금아(琴兒)를 위협했지만, 금아(琴兒)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담담하게 수필을 써내려갔다. 얼마나 놀라운 여유이며 탄탄한 기법인가. 작품「오월」은 여러 가지 함축미로 볼 때 의미 깊은 시(詩)이면서, 구성이 탄탄한 단편소설이고, 차원 높은 ‘수필’이 아닐 수 없다.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오월’ 속에 서 있던 금아(琴兒), 독자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하는 ‘오월’은 바다처럼 잔잔해 때 묻지 않는 순수함이 묻어난다.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중에서
작품「나의 사랑하는 생활」에서는 금아(琴兒) 피천득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금아(琴兒)의 은은한 사랑의 세계가 아름다우면서도 크게 반사되며 글 속에 따스하게 녹아 흐르고 있다. 그 세계가 소박해 작은 것 같지만 금아(琴兒)의 세계는 결코 협소하지 않다. 깨끗하고 부드럽고 조촐한 것들 속에 금아(琴兒)의 이상(理想)이 가득 차 있어, 그 세계가 넓고 크게 클로즈업 되고 있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 한다”는 금아(琴兒)의 인생관을 보더라도, 금아(琴兒)의 평생은 얼마나 고요하고 맑았는지 짐작이 간다. 이런 금아(琴兒)에게 무슨 집착이 있고 들뜸이 있으며 혼탁이 있겠는가.
금아(琴兒)의 삶에는 요란하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은 자리할 곳이 없다.
예전 어떤 집에는 일어 상용(日語常用)하는 주인을 따라 “오하요(안녕)” 하고 인사를 하는 앵무새가 있었다. 그러나 종달새는 갇혀 있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 종달새는 푸른 숲, 파란 하늘, 여름 보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가 꿈을 꿀 때면 그 배경은 새장이 아니라 언제나 넓은 들판이다.
-「종달새」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