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5월 한국 가람문학회 고창 문학기행 고창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_1 [풍경편]2013.05.30.(목) * 촬영 : 이재익 시인
▣ 위치 :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231 (질마재로 2-8)/ 전화 063-560-8058 *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 * 2001년 11월 3일 개관
질마재 가는 길
이 재 익 시인
선운사 동백숲을 돌아서 변산반도 아련한 외바닷가 질마재 마을 생가 마당에 세한歲寒의 눈이 쌓여 새아침에 밟은 이 없고 우물터는 정적靜寂을 삼킨다.
마음 나이 십오륙세, 여든 노인 복분자주 풍천장어가 무슨 소용이었으랴 자식 다 미국 보내놓고 고향에 쓸쓸히 잠들었다.
10시 방향에는 생가, 2시 방향 언덕엔 유택幽宅, 상거 1km 황량한 겨울바람 속에 유혼幽魂이 왕래한다.
폐교를 개조한 소연蕭然한 문학관에 분주한 일생의 유품들이 다 쌓였고 일생의 영욕榮辱은 다실의 주전자 속에 끊고 있다.
* 이재익은 한국가람문학회 회원이다.
* 시작노트 : 미당 시문학관이 갖 문을 연 2002년 1월 3일 하얀 눈이 소복히 온 겨울에 방문하여 시인의 꿈을 키우며 지은 시이다. 그로부터 수년후 2010년에 문예시대를 통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였다. 이 문학관은 이재익 시인의 마음의 성지이다.
2001. 01.03. 이재익 시인
2002.01.03. 가족
1. 미당 서정주 선생은 2000.12.24 오후 11시7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미당선생의 고창 질마재 고향마을에는 폐교를 인수하여 서정주 시문학관으로 개조하였다. 미당은 고향의 언덕에 묻혔고, 해마다 국화꽃에 뒤덮인다.
2. "`생명파'라는 이름을 얻은 미당의 초기 시의 탐미적 관능의 세계와 불교로 대표되는 동양정신을 추구한 후기 시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하지만 미당 시를 관류하는 공통점은 우리말을 다루는 그의 천부적인 감각과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그의 시언어적 특성이라고 평가된다.”(한겨레 최재봉 기자)
3. 현대의 시인들 중에서 만해, 소월, 지용 등과 함께 가장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시인 평가에 대한 각종 자료에서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된 한국문학 자료 중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생전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다섯 번이나 추천되었지만 수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 문학관에 보존된 흉상 그는 생전에나 사후에나 한국문학이 도달한 최고의 미학적 형상력, 또는 후대에게 미치는 가장 강렬한 미학적 감화력의 주인공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 후반의 친일작품 발표 문제 및 독재정권 지지와 찬양 문제로 인해 문학계 안팎의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4-1 미당 연보, 안내 팜플렛에서 미당 서정주는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창작활동 기간만 70년에 이르는 장수 시인이며, 천여편의 시를 발표했다.
5. 문학관에 전시된 사진. 젊은 날의 미당 선생, 왼쪽에서 세번째. 시, <선운사 동구>비 제막기념인듯.
6. 그는 생전에나 사후에나 한국문학이 도달한 최고의 미학적 형상력, 또는 후대에게 미치는 가장 강렬한 미학적 감화력의 주인공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 후반의 친일작품 발표 문제 및 독재정권 지지와 찬양 문제로 인해 문학계 안팎의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7. 미당문학관 게시물
8. 미당문학관 게시물
9. 미당문학관 게시물 추천사(鞦韆詞)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놓이듯 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波濤)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10. 미당문학관 게시물
11. 미당문학관 게시물
12. 미당문학관 게시물
13. 미당문학관 게시물 귀촉도(歸蜀途)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歸蜀途)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14. 미당문학관 게시물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메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낸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15. 미당문학관 게시물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16. 미당문학관 게시물
17. 미당문학관 게시물
18. 미당문학관 게시물 꽃밭의 독백 - 사소단장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19. 미당 친필
20. 미당 친필 선운사는 생전의 미당이 자주 찾으며 시혼(詩魂)을 닦았던 사찰로, 절 입구에는 그의 육필을 그대로 새겨서 만든 〈선운사 동구〉 시비(詩碑)가 서 있다. 법만 스님은 "미당 시문학관과 선운사를 잇는 '시 문학 벨트'를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당의 친일(親日) 시비로 반대여론도 있지만 그의 업적에 대한 정당한 재평가가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21. 미당 친필 춘향유문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에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에요! 무등(無等)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玉)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신부(新婦)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견우의 노래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 갔다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22. 건물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경치 후배 시인들로부터 <시의 정부> 또는 <신화>로 불리운 그는 우리나라 시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인인 동시에 대표작이 가장 많은 시인이다.
23. 전망대 경치 그가 남긴 1만 5천 여점의 유품들은 미당 시문학관과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으며, 30년 동안 집필활동을 하던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자택은 현재 원형 복원 및 보수공사를 기다리고 있다.
24. 전망대 경치, 변산반도가 아련하다. 오늘은 시야가 좋지 않다. 20세기 한국의 최고의 시인이라고 믿는 분들이 여전히 많지만, 그러나 미당이 정치적 감각이 전혀 없는 천하의 천치라거나 한 때 친일문필활동을 함으로써 민족 반역의 도덕적 범죄를 저질렀던 죄인이라고 비판하는 흐름도 자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평가는 좀처럼 조정하거나 화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미당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일개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매우 복잡한 문제들과 함께 얽혀있기 때문이다.
25. 전망대 경치 호 미당에는' 아직 덜 된 사람' 이라는 겸손한 마음과 '영원히 소년이고자 하는 마음' 이 모두 담겨있어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 그의 삶과 잘 어울린다.
26. 전망대 경치 우리말을 가장 능수능란하고 아름답게 구사해 한국어가 도달할 수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27. 전망대 경치
28. 전망대 경치
29. 전망대 경치
30. 전망대 경치
31. 전망대 경치
32. 전망대 경치
33. 문학관을 지키는 순한 진도견, 짓지도 않는다.
34. 미당 생가로 가는 미당교
35. 미당 시판
36. 질마재 미당의 생가는 참으로 소박하다. 미당이 생의 마지막 30년을 보낸 봉산산방(蓬蒜山房·서울 관악구 남현동 소재) 고택(古宅)도 폐가 상태를 벗어날 새 전기를 맞았다. 서울시가 관할 관악구에 예산 10억원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봉산산방은 지난 2003년 11월 건축업자에 팔려 헐릴 뻔한 것을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로 구입했지만 이후 개·보수 예산을 마련치 못해 사실상 방치돼 왔다. 관악구측은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하되 넓은 마당을 이용해 전시실과 세미나실 등을 증축한다"는 기본 방침을 세웠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37. 미당 생가
38. 미당 생가
39. 미당 생가
40. 미당 생가
41. 미당 생가
42.
43. 미당 생가
44. 부안댁 : '물동이를 이고 나니는 맵시가 마을에서 제일 이쁘던 부안댁댁네집 ......' 이미지 표현, 조각가 정춘표 작
45. 미당 생가옆
46. 노초산방 형상 조각
47. 문학관에 핀 꽃 : 샤스타 데이지꽃
[ 쉼터] ; 시의 효용성
1) 한편의 시가 하루를 너끈히 견디게도 해주고 한편의 감동적인 시가 마음을 살려 평생을 따뜻하게 살아가게도 한다.(천양희), 시가 없는 세상은 어머니가 없는 세상과 같다’고 말한 시인도 있다.
2) 사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100개쯤 된다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50개쯤은 더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작가 임희정) 시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황동규 시인은 “세상에서 안보였던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것”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독자에게 달렸고, 내게서 떠난 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3) 시는 다른 사람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나의 가장 낮은 노래를 보내는 것이다. 그 노래를 나도 같이 듣는다. 좋은 시는 ‘나’를 움직인다.(장석남) 최영미 시인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시를 쓴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그 말과 같다.
4) 너무 난해한 것은 문제다. 나는 시는 될수록 쉽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 사대부층이 어려운 한문 단어를 나열하면서 자기들끼리만 즐기던 경기체가는 평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바로 퇴출당했던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5) 시는 21세기형 인재를 위한 가장 저렴하면서도 순수한 최고의 교재이기도 하다. 창의성은 물론이고, 논리가 아닌 직관의 예술로, 오늘의 추세인 감성의 회복, 감성마케팅·감성경영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김경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