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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한국문학신문 연재-14
工藝디자인 원(原)주소
1, “디자인은 삶이다”
장윤우 (한국미술협회고문. 성신여대 명예교수)
서울 인사동에 들어서면 하루같이 사람들로 붐빈다, 대체로 외국관광객들이거나 젊은 남녀들로 골목안까지 걷기 힘들 정도의 만원이다,<사진:인사동 어느골목>
길옆에 “쌈지"라는 전통문화상점들이 줄을 이어서 4층까지 올라가게 되어 있다, 바로 건너편 골목길에는 (재)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4층건물이 웃뚝 서있다, 거기에서 초대이사장 발령을 문광부장관실에서 받고(2000,4,19) 새건물을 높이 올리고 5년동안 근무한적이 있다. 성신여대 대학원장과 박물관장을 겸직하여왔기에 비상임으로 초창기 기틀을 잡아서 우리 한국 공예문화산업과 디자인진흥을 결합한 구심처로 오늘 이르른다,
지난 60여년간의 공예·디자인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화와 팽창, 그에 따르는 논란과 문제점 등으로 점철되어 왔다. 산업발전과 인구팽창, 홍수 같은 외래문화의 유입범람 등은 과거 어느시대보다도 큰 영향을 급속히 미친 것이다. 인간생활과 환경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고 생활에 직·간접으로 연결되는 공예디자인 영역을 해방(1945) 당시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분하여 개관하고 변화와 발전에 따르는 문제점을 점검하며 현황과 대책, 전망을 요약해 본다. 1945년 민족해방이후와 그이전 일제하에서의 공예의 개념과 오늘의 개념은 확실히 다르다.1949년 국전(대한민국미술대전)이 탄생하다 수공예(Handi craft)적이고 민예적, 실용적인 한정적 상황에서 일종의 쟁이(匠人)로 무시당하던 당시에 비해 양산공예, 산업미술로서의 개념확대와 작가예우로서의 수적, 질적 향상 및 세분화, 사회의 기여도 정규교육의 숱한 인재배출들은 미미한 전승공예적 직공 및 장인과 도제식, 공방식, 전수로 명맥을 잇던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였을 것이다. 하물며 디자인에서야 말할나위 있으랴.
Design이란 어휘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밑그림, 意匠, 圖案, 考案, 下圖, 設計로도 쓰일 정도였다. 근대공예의 시기를 조선조가 일본에게 합병당한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식민지시대와 이후 조국 광복 이후부터 1970년을 전후한 때로 본다면 여명은 왕궁미술관(돈화문)안에 진열된 외국현대공예품의 구입과 합방이전에 태동되었던 李王職미술품제작소의 창설, 여기에서 나오는 조악(粗惡)한 모조품이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숭문천기(崇文賤技)의 폐쇄적사상이 공예를 천박하게 만들었으며 다만 생활용구로서의 민예품만이 순박하게 명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이 시기에 공예 진작을 위해 관립공업전습소와 경성미술품제작소가 창립되어 金工, 陶磁, 나전칠(漆工), 염색,직조(染織)部 등을 두었으며 1917년에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 공예학원이 설립되어 木工, 鐵工, 등공(藤工), 장식공(飾工), 주석장식(錫裝), 사진, 인쇄의 6과를 두고 실기와 이론을 교습하였다. 그 이후 日人 유종열이 세운(1921. 5. 22) 조선민족미술관과 1925년 김봉룡이 창설하여 20여년 간 후진을 양성한 나전칠기공예소, 그리고 鮮展(조선미술전람회 약칭) 11회때(1932)부터 추가된 공예부는 해방전해(1944) 23회까지 지속되어 오늘의 공예를 형성하는 시대적 배경이 된다. 日人의 차별 속에 출품한 작품들은 전통적인 목칠, 자수, 염직, 도자, 완초, 벼루 등의 석공예, 죽세, 금공 등이었으나 조형적 가치보다는 토산품 인상이 짙고 일인에 영합하려는 직공출신의 전승적 기능인들이었다. 1946년 미군정 밑에서 결성된 조선공예가협회는 지속한 공예의 질적 향상과 저변확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난립된 공예품 생산업자를 정비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1949년 우리 손으로 다시 탄생된 국전은 1회를 넘기자 마자 동족상잔의 6·25전란으로 다시 끊겼다가 1953년에 이르러서야 2회전을 맞이하였다. 이순석은 일본에서 졸업한 뒤(1931) 그해 최초로 도안전을 가져 우리나라 디자인운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3회에 이르러서야 국전이 정돈되고 있는 것은 작가들이 작품을 할 수 있는 생활기반 안정이 돼가고 있는 때문이라고 이경성은 설명하였으며 강창원, 김재석, 이순석, 김중현, 장선희, 장기명, 김춘희, 김진갑 등이 심사위원 또는 추천작가로 참여했고 유강열, 백태원, 백태호, 권순형 등이 출품하여 특선되고 있다. 이 무렵 서울대 미대(1946)와 홍대 미술학부(1952) 이대 등에 공예계학과가 설치되어 공예와 디자인의 새로운 교육이 실시되고 인재가 배출되며 국전에도 응모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정리가 되던 국전공예부가 발전과정에서 관전의 독점이라는 비판과 심사위원, 추천·초대작가 선정, 수상작 등의 잡음과 시련을 피하지 못하였다. 결국 30여년의 功過와 우여곡절 끝에 한국문예진흥원에서 민간주도형식의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변형되었고, 이제 다시 순수한 민간주도라는 입장에서 국전초대작가출신 모임과 한국미술협회 그리고 별도의 기구구성으로 공모전인 미술대전의 이관을 주장하고 있다. 귀추가 어떻든 간에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뚜렷한 행사로 많은 공예미술가를 배출해 왔고 이정표를 세웠음은 부인할 수 없으며 발전을 위한 전통이라고 해석한다. 한편 산업구조와 量産(Mass product)에 따르는 생산디자인(Product Design)의 문제가 해외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젊은 작가들에 의해 대두되면서 또한 필연성에 의해 확대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과 인체공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시각디자인(Visual Design) 包裝디자인(Package Design) 공업디자인(Industrial Design) 환경디자인(Environmental Design) 공예디자인 등으로 전공의 세분화가 비롯되었다. 그 중요한 양상이 1968년에 발족된 상공부 주관의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였다. 국전 공예부가 심미성, 일품(逸品)적인 공예미술지향인데 비해 상공미전의 공예와 디자인은 다분히 기능적, 양산적인 제품지향이었다. 양립된 결과는 작가들의 主전공을 분명히 하였고 수적, 질적 발전을 가속시키었다. 명칭도 1979년에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으로 개칭되었으며, 한국디자인 포장센터(1969설립,현 산업디자인진흥원,성남)가 주관하여 수출상품 및 내수제품, 포장, 디자인개선과 전문디자이너 양성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이를 성취케한 준비단계로서 정부시책으로 발족된 상공부 산하의 공예시범소(1958.3)를 빠뜨릴 수 없고, 민간단체로서의 조선산업미술가협회(1945. 12. 27 설립, 현재까지 37회전을 갖고 있는 가장 수명이 긴 대한산업미술가회의 前身) 또한 민전으로서 현재도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1970년까지의 근대공예는 2대 관전과 민전, 그룹전, 개인전 및 각 미술대 전공생들의 미전 등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창의적 디자인(Imaginative Design)과 기술적 능력(Technical Proficiency)의 합일이 등한시된 치기(稚氣)어린 시대의 고비를 넘기려 하고 있었다. 1972년 10월20일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한국디자이너협의회(약칭 KDC)가 창립전을 가졌다. 박대순, 이신자, 엄광섭, 이우성, 장윤우등 현직 대학교수, 강사와 관련업체의 디자이너 등이 주축으로 시각디자인, 공예미술, 공업디자인의 3부로 구성되었다. 같은 해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가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등 시각디자이너를 중심으로 신세계미술관에서 창립전을 가졌으며 한국인더스트리얼디자인협회(KSID)도 민철홍 회장 부수언 등을 중심으로 9인이 같은 장소에서 출범되었다.
한국공예가회(KSCD)도 74년 9월 신세계미술관에서 9인의 창립멤버로 스타트하였으나, 6회전인 79년에는 강찬균, 김덕겸, 임무근등 39인으로 늘어나더니 80년도에는103명이나 된다. 그외에 한국현대도예가회, 한국도작가회, 녹수회, 한국귀금속공예가협회, 공예동우회, 토전, 채염회, 전승공예회 등과 각 대학동문전(중앙공예회, 홍익금속공예회, 화경도예회, 난공예회, 성신금속회, 서울금공예회, 向湖展, 온공예회, 염미회, 동미회, 雲美會, 陶牛會, 가을工藝會, 陶象展, 중앙공업디자이너협회, 홍익섬유조형회 및 지방전(경북공예가회, 부산디자인협의회, 전남산업디자인협회, 부산공예가회, 제주디자인회, 경북시각디자이너협의회) 등 그룹전이 창립되면서 갈수록 확산하고 활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관공서의 관전(官展)의 경직,폐쇄성과 계속 배출되는 예비작가 혹은 중앙과 지방이라는 지역의 편차를 지양한다는 명분의 민전도 활성화경향이고 해외로 이끌고 나가는 작품전 및 작가의 숫자도 갈수록 불어났다. 20세기의 예술로 일컬어지는 산업디자인과 현대공예의 70년대는 한마디로 뜨거웠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공예와 디자인은 뿌리를 내렸다. 큰 비바람이 몰아쳐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꾿꾿하게 섰으며 가지를 많이 뻗었다. 그것은 80년대를 향한 아프고 긴 진통의 행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픔이 없이 새로운 생명이 창조 될 수 있을까" 1980년을 들어서면서 문예진흥원간행 문예연감 공예·디자인 개평(槪評)에 필자가 얹은 기억이 새롭다. 첫째, 개인전과 공공전이 두드러졌다. 둘째, 시대에 맞춘 산업공예의 방향이 정착되어간다. 셋째, 해외교류가 활발하여진다. 넷째, 도예, 염색 일색에서 汎공예디자인화의 경향이 나타난다. 다섯째, 지방작가들의 활동이 괄목할 만하다. 이렇게 요약했거니와 다음 해엔 학회의 결성과 문제점의 부상을 첨가시켰다. 우선 서울과 지방의 공예, 디자인계열 학과나 연구소가 설치된 교육기관을 일견하면(無順) 서울대미대, 홍대 미대, 이대 미대, 한대, 중앙대, 경희대, 숙대 미대, 건국대, 단국대, 성대, 국민대, 동국대, 성신여대 예대, 세종대, 동덕여대, 경기개방대(현,과학기술대), 상명여대, 서울여대, 경기대, 인하대, 인천대, 명지대, 영남대, 경원대, 계명대, 효성여대 미대, 부산대, 동아대, 동의대, 부산산업대, 부산여대(현 신라대), 목원대, 배재대, 한남대, 호서대, 원광대, 전북대, 전주대, 군산대, 조선대, 전남대, 충북대, 청주대, 청주사대, 강원대, 관동대, 상지대, 공주사대, 경남대, 경상대, 마산대, 제주대 등과 서울예전, 숭의여전, 서일공전, 신구전, 부천공전, 부산여전, 울산공전, 인덕공전, 대유공전 및 각 대학교 부설전문대 그리고 고교과정에 이르기까지 거의 망라되고 있다. 해방 이듬해에 서울대 예술학부에 유일하게 설치된 당시를 회고하면 격세지감이 있고 수출 산업육성 및 관광자원화의 정부시책과 '88올림픽 대회를 계기로 증과되였다. 그러나 70년대는 양적인 팽창으로 돋아나는 작가군과 작품전, 이합집산하는 그룹으로 골치를 앓기도 했다. 현대공예와 새로운 디자인 Concept의 미명아래 뿌리가 없는 작품(?)이 횡행하고 국적도 불분명했다. 직공이나 도제식 전수로 명맥이 이어진 시대에서 급속한 외래문물에 기인한 외형만의 변화, 알맹이가 없는 교육이 새세대들에게 과연 합당한가. 가르치는 입장에서의 자성론도 있었다. 전통이 없다. 낡았다고 투덜댈 일이 아니라는걸 느꼈다. 이론적, 사적 배경을 정립시키기 위한 운동이 있었기에 공예인 스스로 학회를 결성하고 모임을 재정비하는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한다.
한국문학신문 연재-15
2.한국공예,디자인의 현주소
장윤우 (사)한국미술협회고문, 성신여대 명예교수
.한국미술 5,000년전이 일본 교오또오(京都)에서 비롯되어 동경으로, 다시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스미소니안 박물관, 독일 전시와 영국의 대영박물관 전시를 통해 특히 금세공, 도자기 등 공예미술의 진수를 보여주었을 때 경탄밖에 없었던 사실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연이은 학회발족과 세미나 개최된다. 1979년 11월 한국디자인학회가 창립되었다. 시각·공예·환경·제품·섬유·장식·포장디자인과 디자인평론, 디자인심리학, 디자인미학, 디자인史의 부문 연구회를 두고 80년 7월 1일 1차 연구발표를 가졌다.(연구책임자 朴大淳) 다음해 81년 7월 24일 '디자이너의 고객과 소비자'를 주제로 정기세미나를 가졌다.(한양대 콘서트·홀) 미국 시라큐스大 디자인학 부장이며 ICSID회장인 아더 J·플로스교수가 주제발표를 했다. 현대디자인학회(회장 권순형)도 뒤이어 발족하여 6월 12일(무역회관) 한일디자인세미나를 가졌다. 일본측에서 勝見勝. 우리측에서 정시화교수가 주제발표를 했다. 2개의 디자인학회가 공예·디자이너들에 의해 출범된 것이다. 1980년의 스타트는 학회 연구활동으로 번거롭다.
'81국제산업디자인대회(ICSID)가 서울에서 처음 개최되었다.(1981년 7월28일·한국무역협회) 주제는 '미래의 산업디자인' - 산업디자인에 대한 미래의 도전 - 도구의 생태 - 산업디자인 없는 산업디자인이란? - 미래의 산업디자인 美, 日, 자유중국, 오스트랄리아(濠洲), 홍콩의 대표가 발표를 했으며 우리측에서 민철홍교수가 '한국산업디자인의 정착과 현황'에 대해 발표한 뒤 토의를 가졌다. 한국은 1973년 10월에 정식 가입되었으며 대회의 유치효과는 컸다. 81년 3월 31일 민속공예학술회의가 있었다(신라호텔) 주제는 '민속공예의 현대적 의의'와 '민속공예의 현대적 방향' 참석자는 장문호, 이경성, 임동권, 장윤우, 권명광, 맹인재, 정담순 등이었다. 민속공예의 개념은 무너지고 말았다…현대공예의 목표가 과거의 귀족공예처럼, 단 한사람의 주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만인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듯이 민속공예의 방향도 세계공예의 일원으로서 민속양식의 확정에 두어야 한다. 다시말해 오늘의 공예가는 우선 기술자 이전에 사회학자가 되어서 자기가 만든 공예가 인류의 행복을 촉진한다는 생각밑에서 디자인하고 제작하여야 한다, 우리에겐 본뜸이라는 게 있다. 이 근거는 탁월한 창의력을 지닌 작가를 가르치는 방편으로서 사용한 표본을 그 추종자가 스승(師匠)의 작풍을 따라 공예품의 模作을 만드는데 있다고 하겠으나, 이 본뜸의 수요는 현대의 유행풍조에 따라 급격히 확대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유명품의 본뜸은 그렇다손치고 방불한 것은 도리어 골동품상을 현혹시키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인간문화재 지정 등의 기록을 따르는 것만이 전통공예의 계승(繼承)이 충분히 달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결국 민속공예의 전통은 인간에서 인간에로 전달되는 창조적 예술의식 즉 마음이 이어져야만 그 전통성이 현대 속에 뿌리를 뻗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게 장문호의 견해이다. 무서운 제3세대의 부상이 지속된다. 전통공예기술의 보존, 보급을 위해 당국이 지정한 인간문화재의 공예전이 5회부터(80년 9월) 전승공예전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규모를 확대시켰다. 그러나 해를 거듭해도 출품자의 면모나 수상자, 심사위원의 면모가 바뀌는 것 같지 않았다. 옛 사람들도 고학금용(古學今用)이라 했다. 전통의 현대화를 누구나 이야기하고 당국에서도 지원하고 있음에도 여섯가지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첫째, 무형문화재의 보호냐, 전승공예의 발전이냐, 둘째, 심사위원의 구성, 셋째, 출품자의 같은 면모, 넷째, 출품의 분야별 기복이 質量 모두 극심, 다섯째, 전시의 문제, 여섯째, 분야별 확대. 우리 생활이 史的 변천에서 내외적인 상황과 自生的인 원인으로 많이 바뀐만큼 시대성을 부각시키는 의미에서 1부 전승, 2부 현대, 3부 인간문화재식으로 확대하자는 제의가 나왔다. 일각에서는 창작공예 우위를 주장하는 나머지 전승공예를 경시하여 침체를 부채질하고도 있다. 차라리 시대에 부응하는 관광민예품이나 토산품 개발에 역점을 두자고 한다. 여명기의 공예에서 근대공예를 거쳐 세계선진국들과의 현상을 수렴하고 호흡을 같이 하려는 현대공예의 시점에서 1988년도는 커다란 분기점이 된것임에 틀림없다. 푸대접을 받던 공예가 한 술 더떠서 이젠 한시라도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일상생활과 환경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간 것이다. 만인이 고루 쓸 수 없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W.모리스.영국) 전통과 질서에 충실하고 무명에 자족하며 우리의 선과 형을 순박하게 빚어내는 선대 장인들에 감사를 드린다. 서민의 희노애락이 점철된 질박한 용품들. 그에 비하면 창작발표전인지 상품판매전인지 이해못할 전시를 연례행사로 치루며 지방순회까지 곁들여 賣名과 바겐세일하는 사이비 작가들의 후안무치가 횡행하는 연대가 부끄러워진다. 전시회의 러시도 재고돼야하고 동문끼리 혹은 지역성으로 아류를 형성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이중, 삼중으로 가입된 그룹전, 성격도 없이 과중한 부담과 형식에 흐르는 안이한 작품태도를 조장하기도 한다. 치열한 작가정신은 결여된 채 세월만 흐르면 자동적으로 서열이 높아지는 허장성세도 없어져야 한다. 해방이후부터 공예와 디자인무대에서 적지않은 작가들이 부침(浮沈)했다.
국내외에서 제3세대들이 무섭게 떠오르고 있다. 활동이 빈번했던 작가를 정리해 본다. 고(故) 이순석·김재석·박성삼·한홍택·김봉룡·황종구·원대정·백태원·남용우·권순형·박대순·임홍순·황종예·이명구·남상교·이신자·백태호·김태희·배만실·김교만·민철홍·한도용·조영제·문수미·이우성·곽원모·엄광섭·김근배·강수화·신권희·최승천·박선의·최현칠·서재행·권명광·김석환·장윤우·강찬균·송용섭·유리지·김승희·곽계정·곽대웅·박병철·김덕겸·김영태·신상재·고문자·김지희·김태순·김헌언·남철균·김재영·김윤환·서길용·신광석·박향숙·유현주·박수철·박종식·성옥희·서한달·신상호·손정리·오순희·양행기·오륭경·오천학·오영민·유성오·유윤진·유철연·윤광조·유혜자·이규성·윤근·이부웅·이양섭·임무근·이종수·이혜선·이승원·주예경·정대유·정정희·조일상·조정현·정담순·한길홍·최숙경·한봉림·최열자·최영자·이동일·정진원·장수홍·부수언·양호일·이순혁·양승춘·백금남·이효일·김영기·김길홍·최대석·안종문·안정언·김학성·김명호·김홍련·봉상균·김수석·박해동·유제국·김기한·고을한·장권봉·김철수·유관호·최동신·김진평·윤호섭·박종운·조벽호·권영걸.정보원.김현.등…. 전통공예의 현대화와 우리것의 세계화에 공예와 디자인을 연대적으로 조명했다. 기능시대의 공예는 그렇다치고 종합과학으로서의 산업디자인(ID)은 이제부터가 주목된다. CAD(Computer Aid Design)와 인체공학, 시각언어로서의 전달(Communication)기능 전자매체 등이 갈수록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과거에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총체적으로 보건대 한정된 재료와 기법의 수공예시대에서 기계를 동원한 量産공예와 새로운 재료, 기법의 구사(軀使)를 통한 오브제적인 방향이 섰고, 작가와 작품전이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치 늘어났다. 국가산업발전과 국민생활향상에 기여하면서 産學協同체재가 잘이루어지고 있다. 활발한 해외교류 및 견문을 통한 선진국과의 격차해소와 이익을 증진시킨다. 파생되는 문제점은 스스로 해결하는 노력이 있다. 사적고찰(史的 考察)을 통해 민족적 맥락(脈絡)을 찾는 활동이 활발하다, 대중의 공예디자인을 보는 안목과 애정이 21세기에 들어서 더 높아졌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공예와 디자인산업, 그들이 가져간 제품(관광민예품 등)을 통해 기억될 우리의 참모습 “한류”로서 큰 의의를 지닌다. 디자인은 인간의 “삶” 자체이며 창조과학이다. * 2015. 게재
첫댓글 주간 한국문학신문 청탁으로 공예와 디자인의 흐름과 현위상을 연재하고 있으며 철저한 고증, 인명의 인용등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필자는 1962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직과 산업 일선 현장에서 지도 제작과 답사등으로 철저한 집필 교육에 임하며 관계기관의 책임자로서 각국을 답사하기도 하였씁니다 서울시 문화상과 황조근정훈장도 수여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