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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클린트 리스트우드(월트 코왈스키), 크리스토퍼 칼리 (자노비치 신부),비 방(타오 방 로어)
그의 위대한 선택이 세상을 울린다
자동차 공장에서 은퇴한 채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 한국전 참전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남편의 참회를 바라던 아내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참회할 것이 없다며 버틴다. 어느 날, 이웃집 소년 타오가 갱단의 협박으로 월트의 72년산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 하고 뜻하지 않았던 이 만남으로 월트는 차고 속에 모셔두기만 했던 자신의 자동차 그랜 토리노처럼 전쟁 이후 닫아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밀리언 달러 베이비>, <미스틱 리버>, <용서받지 못한 자> 등을 통해 연기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출력을 겸비했음을 과시한 바 있는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감동 드라마. 제작비 3,300만불이 소요된 이 영화의 출연진으로는,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 역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중심으로, 17세의 신인배우 비 뱅이 소년 타오 역을 연기했으며, TV <링컨 하이트(Lincoln Heights)>의 코리 하드릭트, <디파티드>, <진주만>의 브라이언 할리, <에반 올마이티>, <행복을 찾아서>의 브라이언 호우, <로스트 라이언>의 크리스토퍼 칼리, TV <가십 걸(Gossip Girl)>의 드리마 워커 등이 공연하고 있다. 미국 현지에선 개봉 5주차에 극장 수를 2,808개로 늘이며 전국확대개봉에 들어간 주말 3일동안 2,948만불의 수입을 벌어들여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한국군 참전용사인 월트 코왈스키는 매사가 불만인 홀아비 노인. 가족들이나 이민자 이웃들과도 관계를 멀리하는 그가 아끼는 것이라고는 포드 사에서 만든 1972년산 그랜 토리노 자동차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인 흐몽족 10대 타오가 자신의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하자 라이플로 위협해 그를 ?i아낸다. 이를 계기로 뜻하지 않게 타오의 가족들과 관계를 가지게 된 코왈스키는 어딘가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게 된다. 결국 코왈스키는 이웃 이민자들을 갱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서게 되는데…
미국 개봉시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대해 깊은 호감을 나타내었다. 뉴욕 포스트의 루 루메닉은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 작품은 관용의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흥분했고, 버라이어티의 토드 맥카시는 “<체인질링>이후 올해 들어 두번째로 내놓은 이 이스트우드 영화는 최근 몇 년동안 나왔던 영화들중 가장 적나라하고 꾸밈없는 작품.”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으며, 릴뷰스의 제임스 베랄디넬리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최상급의 반인종주의 우화.”라고 요약했다. 또, 시카고 선타임즈의 로저 이버트는 별 넷 만점에 세개 반을 부여하면서 “이 영화는 두가지를 그리고 있다. 첫째는 뒤늦게 꽃피운 한 남자의 선한 본능이고, 둘째는 21세기 들어 타인종에게 점점 더 마음을 열어가는 미국내 인종들이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시카고 트리뷴의 맷 파이스는 “아직까지 이스트우드가 그 누구라도 육포처럼 씹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분좋은 영화.”라고 만족감을 나타내었으며, 뉴욕 타임즈의 마놀라 다지즈는 “레퀴엠(진혼곡)의 느낌을 지닌 작품.”이라고 결론내렸다.
최근 클린트 이스우트의 신작 [그랜 토리노]를 봤다. 낮 시간이어서 그런지 상영관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수십명 정도의 관람객만 있는 듯 보여졌다. 그나마 남자들 뿐이
고 여성 관객은 거의 없어 보였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좀 볼 줄 아는
사람들만 왔구먼".. (ㅎㅎ) 그런데 러닝타임 2시간 남짓 흘러 어느덧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좀처럼 자리에서 뜨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에 나즈막한 엔딩 테마가
흘러나올 무렵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작은 흐느낌만 감지되었다. 나 역시 눈시울
붉어져 제일 먼저 일어나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일견 평범한 스토리에 작은 영화였지
만, 이 영화가 지닌 힘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영화는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부인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장례식 신에서 코왈스키라는 인물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엄숙한 장례식장
에 장난스럽게 입장하는 손자들의 버릇없는 모습이나 배꼽티를 입고 온 손녀의 어
이없는 옷차림은 완고한 노인 코왈스키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만든다. 딱히 특별
한 대사 없이도 손자, 손녀를 무섭게 쏘아보는 코왈스키의 그 성난 눈빛만으로도 그
의 말로 다할 수 없는 불쾌함이 감지될 정도다. 그런데 아이들이야 그렇다치고, 그
런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고 되레 아버지 코왈스키를 무슨 고약한 노인네 취급하는
자식들의 행태도 참으로 가관이다.
장례식 장면만 봐도 코왈스키의 성품이나 그 가족의 현주소를 짐작할 수 있다. 코왈
스키는 완고하고 고집 센 노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런 아버지
코왈스키와 그의 아들들이 서로 겉돈다는 것이다. 부인이자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에
도 자식들이 아버지를 위로한다거나,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로하는 그런 살가운 분위
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고지식한 아버지와 이기적인 자식들 사이에서 완충지
대 역할을 해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서로가 피곤해질 것이라는 우려만
팽배해 있다.
코왈스키와 자식들간에 흐르는 싸늘한 냉기에선 무슨 세대차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소통의 부재가 느껴질 정도다. 여기에 시도 때도 나타나 부인의 유언이니 참회하라
며 코왈스키를 들볶는 손자뻘 신부의 참견도 환장할 노릇이다. 죽음은 슬픔이며 또
한 기쁨이라는 신부의 말씀도 그에겐 터무니 없는 얘기에 불과하다. "네가 죽음에
대해 뭘 안다고 나불대냐? 내가 한국 전쟁에 참전해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가락 했
거든!"
그런데 가뜩이나 매사가 못마땅한 코왈스키의 옆 집에 몽족이라는 아시아 이민 가족
이 살고 있다.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동양인 할머니의 시선도 불쾌하기 짝이 없
다. 코왈스키는 말도 통하지 않는 몽족 할머니를 향해 버럭 소리 지른다. "제발 내
땅에서 꺼져다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이웃집 몽족 아들(타오)과 딸(수)을 동네 깡패들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준 뒤 그렇듯 경멸했던 이웃 몽족과 가까워지게 된다. 타오는 몽족 깡패들의 협
박에 못이겨 코왈스키가 애지중지하는 72년식 포드 승용차 '그랜토리노'를 훔치러 코
왈스키의 주차장에 잠입했다가 코왈스키에게 들켜 혼쭐이 났었다. 그런데 타오가 차
를 훔치는데 실패하자 몽족 깡패들이 앙심을 품고 타오의 집 앞에 나타나 행패를 부
리는 것을 코왈스키가 총을 들고 힘으로 이들 깡패들을 몰아낸 것이다.
게다가 동네 길거리에서 이웃집 소녀 수가 흑인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여 희롱을 당하
던 위기의 순간에도 코왈스키가 정의의 사도처럼 나타나 수를 구해낸다. 이쯤되면
코왈스키는 이제 단순히 고집 세고 괴팍한 노인네가 아니라 정의의 사나이나 다름없
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하던 마당에 동네가 점점 슬럼화 되어가며 불량배들
에 의해 시끄러워지자 코왈스키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이지만,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는 졸지에 동네 이웃들을 구해낸 히어로로 자리매김한 것.
순박한 몽족은 코왈스키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동하고, 코왈스키가 귀찮아 할 정도로
지극 정성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특히 이웃집 소녀 수는 코왈스키가 성가심
을 느낄 정도로 흡사 친할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리듯 살갑게 그를 대한다. 친 자
식들은 물론 친 손녀로부터도 구세대 왕따 취급을 받던 코왈스키에게 이웃집 소녀
수는 동생 타오와 함께 거의 유일한 말동무인 셈이다. 그러면서 코왈스키와 이웃 몽
족 식구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어간다.
부인과 사별한데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자식들로 인해 우울모드에 빠져있던 코
왈스키에게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동양인 이웃들이 일종의 마음의 안식처 역할을 하
는 대목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 코왈스키는 그야말로 미국적 가치의 신봉
자나 다름없다. 그는 폴란드 이민자로써 한국 전쟁에도 참여했으며 포드 자동차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 그의 주변에서
미국적인 것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이런 상황의 변화는 그를 몹시 힘들게 한다.
인생 말년에 그는 미국적이 아닌 것으로부터 위안을 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72년산 포드 자동차를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는 코왈스키에게 일본차 딜러를 하는
자식이나 배꼽티를 입고 버젓이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손녀의 모습은 괘씸하기 짝이
없다. 자식이나 손자들은 그들대로 그런 코왈스키를 괴팍한 구세대 노인네로 취급
하며 경원시한다. 그런 와중에 귀찮은 존재로 여기던 이웃집 동양인 가족들이 자식
들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더 잘 이해한다는 사실에 코왈스키는 그만 혀를 찰 수 밖
에 없는데.
본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가지 표정을 지닌 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비록 캐릭터
는 조금씩 달라도 영화 속 그의 얼굴은 언제나 일정하고 큰 변화가 없다. 그 옛날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부터 돈 시겔의 [더티 해리]를 거쳐 감독과 배우
를 겸해 오던 시절에도 그는 늘상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표정 자체가 많지 않은 배우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과거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겐 "연
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다"라는 혹평도 있었을 정도다. 어떤 평론가는 "그는 연기를
하는게 아니다. 다만 프레임에 포착될 뿐이다"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를 논평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일정한 표정을 한 채 그 오랜 세월 배우이자 감독으로 헐리웃을 지배해 왔다
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그가 이 정도
표정 만으로도 그 많은 영화들을 훌륭히 소화해낼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 1970년대
에 돈 시겔과 [더티 해리] 시리즈를 찍던 시절까지만 해도 그는 액션 배우로써의 이
미지가 강했다. 과묵하지만 강인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무뚝뚝한 캐릭터가 많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그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잭 니콜슨이나
[프렌치 커넥션]의 진 해크먼 처럼 '괴짜 꼴통'의 역할은 맡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80년대 이후에는 액션에서 드라마로 영역을 넓혀가며 숱한 작품에 출연해 왔지
만 불안정한 내면의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는 적어도 그의 몫이 아니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드물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소위
말하는 '연기'를 펼쳐보이는 작품으로 [추악한 사냥꾼](1990)을 들 수 있다. 이 영
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안정되지 못한 모습으로 순간 순간 격한 감정을 드러내
보이며 종래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선보인 바 있다.
그리고 근 20년만에 영화 [그랜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의 영화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강렬한(!)' 인상의 코왈스키로 등장했다. 부인의 장례식장에 소란스레
입장하는 손자 손녀들의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에 마치 잡아먹을 듯 미간을 잔뜩 찌
푸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 불쾌한 표정은 그야말로 영화의 모든걸 보여주는 듯
하다.
비록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좀 진정되긴 했지만, 못마땅한 자식들이나 시끄러운 이
웃집 동양인들을 대할 때면 벌레씹은 듯 불쾌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신경질적이
고 매사에 불만스럽고 짜증 섞인 노인의 모습은 이전의 그 어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색다른 모습이었다. 비록 [그랜토리노]가 그의 영화
인생에서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라도 영화 속 코왈스키의 그 짜증 섞인 표정은 미국
의 과거와 현재를 유추해 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인상
적인 얼굴이었다는 생각이다.
영화 속 코왈스키는 특별히 옛 것을 숭상하는 보수적인 인물이라기 보다는 그냥 예
전 가치관에 익숙한 사람이다. 세월이 변했다고 해서 변해가는 세상에 자신을 맞추
기 보다는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인물로 보인다. 다만 지조와 가
치관이 워낙 뚜렷하다보니 유연성이 부족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인물로 보
여진다.
그는 삭막한 세상과 타협하거나 그것에 굽힐 줄 모르는 인물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놓고 뻔한 설교를 늘어놓는 신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의 성품에
비추어, 시절이 어떻게 변하든 그는 혈기왕성했을 때의 자신의 모습 그대로다. 자
기 본연의 성품을 버리거나 스타일을 바꾸는건 그의 체질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코왈스키 앞에 동네 갱들이 스멀스멀 나타나 그와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이웃
들에게 위협을 가한다는 것인데.
코왈스키는 다시 한번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불을 참을 수 없다. 그러면서 동네 갱
들을 향해 악센트를 넣어 강하게 소리지른다. "까불지마, 자식들아! 옛날 같으면
니들은 다 뒈졌어!!" 그러면서 동네 불량배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웃
집 소년 타오 역시 강하게 질책한다. "임마! 니가 중심 못잡고 빌빌대니까 쟤네들
이 널 우습게 보는거 아냐!"
그러면서 동양인 타오를 상대로 남자가 되는 법에 대한 미국인 코왈스키의 가르침
이 시작된다.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가르쳐주지 못한 '코왈스키식 인생 바로 알기'
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신기한 것이 어른이 아이를 교육시킨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인생 선배로써 삶에 대해 얘기해주는 듯한 느낌
이다. 의도적인 가르침을 주는 스토리 전개였다면 아마 이 영화가 주는 임팩트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역시 노련한 작가 답게 그
런 상황에서도 의도적인 가르침을 구현해 보이진 않는다.
그냥 옆 집 친구 대하듯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타오를 새로운 인생으로 이끈다.
영화 속 코왈스키는 교육자나, 카운셀러나, 스승으로써가 아니라 그냥 이웃집 할
아버지로써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의 경험만 들려준다. 그의 가르침의 핵
심은 아마도 남자로써의 힘이 아닌 남자로써의 능력과 자립심 그리고 무슨 자존
감 같은게 아닐까 싶다.
그런 와중에 동양인 갱단들의 위협이 점점 가시화된다. 타오의 집이 습격을 당하
고 타오의 누나 수는 갱단들로부터 폭행을 당한다. 이제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
쳐주었던 코왈스키의 대응이 궁금할 수 밖에 없다. 분노에 가득 차 복수를 결의
하는 타오에게 전수해 주는 코왈스키 최후의 가르침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나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든 일단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등장하면 그 영화 속의 주인공 클린트 이
스트우드는 관객들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부조리한 일상이든 불의
로 가득한 환경이든 클라이막스에 도달하면 그가 그런 불합리함을 제거하고 평화
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영화가 막판으로 치달을수록 관객들은 단순
히 정의의 구현이라기 보다는 모순된 상황을 정리해 줄 그의 해결사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건 단시간 내에 이룩된게 아니고 무려 50여년의 영화 인생을 통해 구축된 그만
의 아우라다. 액션 영화든 드라마든 그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영화에서 그의 말
과 행동이 엇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에 대한 관객
들의 믿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랜토리노]에서 코왈스키는 [더티 해리]의 막가파식 형사 해리 캘러한
은 아니며, 추풍낙엽처럼 총잡이들을 쓸어버리던 그 옛날의 [황야의 무법자]는
더더욱 아니다. 영화에서 그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
집스런 노인일 뿐이지만, 여전히 관객들은 코왈스키가 선량한 이웃들을 갱단의
위협으로부터 구출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다. 갱단은 자신들의 승용차
로 타오의 집 주변을 배회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코왈스키는 그런 갱단을 향해
손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표한다.
그런 상황에서 타오의 가족이 습격을 당하고 수는 폭행을 당했다. 갱단들을 향한
코왈스키의 경고도 제대로 먹히지 않은 상황이다. 아니 어쩌면 그의 비타협적이
고 강인한 면모가 갱단을 더욱 자극시켰을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에서 코왈스키
는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인물은 전혀 아니지만, 이웃집 소년을 지도해주는
인생의 선배로써 뭔가 보여줄 것이란 기대감이 있다.
그런데 클라이막스에서 코왈스키는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단순
히 남자로써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노인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남자로써의 자존심과 의기, 그리고
젊은 혈기를 다독이는 노년의 용기와 지혜가 두루 어우러진 잊을 수 없는 명장
면이다.
그랜토리노는 1972년 포드사가 생산한 승용차다. 물론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 과거
의 물건이다. 한마디로 그랜토리노는 영화 속 코왈스키의 또다른 얼굴이라 해도 과
언은 아니다. 가장 미국적인 브랜드를 상징하는 구형 포드 승용차야말로 미국의 전
통적인 가치관 속에서 평생을 살아 온 코왈스키를 대변하는 가장 상징적인 물품일
것이다.
갱단의 협박에 못이긴 타오가 이 그랜토리노를 훔치려다 코왈스키에게 발각되었고,
이를 계기로 코왈스키와 타오의 가족이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몽족 갱단은 이 그
랜토리노의 강취에 실패하자 앙심을 품고 타오 가족에게 보복성 위협을 가하기 시
작했다.
나중에 코왈스키는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이 낡은 그랜토리노를 그의 손녀가 아닌
이웃집 소년 타오에게 넘긴다. 오래된 미국적 가치가 하찮게 취급되던 미국 사회
의 소수 인종의 손에 넘어가는 대목은 참으로 의미심장해 보였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일컬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미리 써둔 유언장"이라는 표
현을 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오늘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들은 단지 미국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문화에 얽매이지 않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더우기 영화 [그랜토리노]에는 인간의 대한 구원적인 요소도 다분하다. 영화 속에
서 손자뻘 신부는 부인의 유언이라며 끈질기게 코왈스키의 뒤를 쫓으며 회개하라
며 그를 재촉한다.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들과는 별개로 나름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코왈스키가 신부의 재촉에 순순히 응할리 만무하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간이 인간을 구원해야 함을 인정한다.
바로 이런 점들이 그의 영화들을 더욱 웰메이드한 드라마로 자리매김하게 한다는
생각이다. 언제부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영화들을 통해 자신의 영화 인
생을 하나 하나 정리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90년대에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
해 자신이 서부와 서부극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소회를 풀어낸 바 있으며, [밀
리언 달러 베이비]를 통해서는 험난한 세상에 던져진 아버지와 딸의 모습을 유추
해내며 가족의 가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런가하면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선 전쟁의 부조리에 빗대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차분하게 성찰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랜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대비를 통해 미국적 가치를 되돌아보
며 인종을 초월한 인간적 믿음과 구원을 되새기고 있다. 이 작품에서 클린트 이스
트우드는 단순히 감독이나 작가적 시각이 아닌 '어른의 모습'으로 인간을 바라본
다는 점이 매우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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