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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름다운 우주에는 사막이 있다
#1. 우주력 5세기. 우주선교사 수선013의 회고
-당신, 지구로 간다더군.
-선교사 자격이 살아날 것 같습니다. 지구 종교 총연합회의 청문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호위가 필요한가?
-도와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마덕 대장의 이야기도 듣고 싶고 하여…… 제 선교사 자격이 살아나서 장미13호가 우주선교선으로 부활하게 되면 선장으로 모실 분이 마덕 대장이시니.
-그 친구야 자격이 넘치지. 그 때에는 나도 데려가주게.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론 가(家)의 분들에게는 지난 번 여행 때에 신세를 많이 져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솔직하지 못하군. 우주사의 이면 이야기를 듣고 싶어 청한다고는 말할 수 없나?
-실은, 그렇습니다만…….
#2. 우주력 5세기. 지구행 우주선. 앞 장면의 연속. 론774의 이야기
…그때에 그렇게 우주로 나선 지구계 인류는 우주력 3세기 후반에 제1차 은하대전을 벌였는데, 마덕은 그 직전 타이탄으로 돌아와 용병대를 지휘하게 되네. 그는 은하대전에 휩쓸려 들어 멸망의 위기를 맞은 타이탄을 구하는 일에 한몫을 하는데 그 직전의 흉흉한 시기에…
#3. 우주력 260년. 타이탄의 주점 ‘언제나 장미가 있는 곳’. 이번 이야기의 서장
우주력 260년의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은 타이탄의 장미장원(薔薇莊園)이 외계의 여행자들을 위하여 만든 무료 주점이었다. 외계 우주와 태양계 제1의 유인 행성 지구별과의 정기 항로의 최종 기착지이도 한 타이탄은, 은하연방과의 협정에 의해 우주 유일무이의 비사법지역으로 선포되어 있었으므로 본래 의미의 나그네 외에도 범법자 등의 도망자들도 즐겨 찾기 마련이었다.
장미장원은 태양계 제6행성의 위성 중 하나인 타이탄의 사실상의 지배자였다. 비사법지역이라고는 하지만 외계의 세력에 대해 독립된 권리를 획득했다는 의미뿐이었고, 별 안의 치안을 맡은 장미장원은 강력한 무력을 갖추고 별 안의 행정 사법권을 장악한 일면, 우주 안팎에 일정한 지분을 가진 세력으로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장미장원은 네 명의 여성들이 주인이 되어 꾸려 나가고 있었다. 우주력 원년 이전부터 역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옛 지구시대의 정취를 현재의 지구 이상으로 잘 간직하고 있다 하여 우주 안에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였다. 장미장원의 여주인 네 자매는 ‘중립은 가장 강력한 무력을 소유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주의를 가지고, 별 내의 전 인구를 전사로 만들어 놓고 철권통치를 하였다. 다만 여행자들에게는 우주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호의를 베풀어 무료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을 개장한 외에도 숙박시설 등을 무료로 개방하여 평화의 시간을 즐기게 해주었는데, 외계 우주로부터 지구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우주선이 정박하는 최종 기착지라는 명예를 가진 외에도, 오늘날의 우주 시대를 연 최초의 외계행 우주선 신천지호의 발원지였다는 명예를 아울러 갖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라고 하였다.
#4. 우주력 260년. 타이탄의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이 주점에 오면 공짜 술을 준다고 해서 찾아 왔시다.”
챙이 넓은 차광용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중년의 사내가 불쑥 들어서며 계산대에 앉은 유라035에게 던진 말이었다. 허리에 찬 대검으로 보아 해적이나 용병의 한 꼭지쯤으로 보이는 사내는 제멋대로 유라035의 면전에 앉아 술을 청하는 시늉을 했다.
유라035는 최고급 황금장미주(黃金薔薇酒)를 꺼내어 투명 금속 잔에 가득 따랐다.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여주인들은 술손의 신분이나 주머니 사정을 구별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내는 손을 내미는 수고만 하면 우주 안에 명성이 높은 타이탄의 장미장원(薔薇莊園) 생산의 명주를 취하도록 마실 수 있었다.
유라035의 고운 손이 사내의 투박한 손에 잔을 건넸다. 사내는 잠시 자신의 손에 들린 황금색 액체를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먼 외계로부터 날아와 고향별인 지구로 가던 도중 최종 기착지인 타이탄에 잠시 내린 여행객들이 으레 찾는 곳인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에는, 늘 그렇게 고향 냄새를 미리 맡으려는 술손이 있기 마련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혀끝으로 핥듯, 장미주의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고향의 맛과 냄새를 즐기려는 외계 나그네 공통의 반응이었다. 유라035는 무심한 듯 시선을 주점 안으로 돌렸다. 사내 스스로 감정을 달래어 술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한 배려였다. 유라035의 시선이 향한 주점 안의 풍경은 무시로 들르는 지구행 나그네들을 위해 술과 신선한 안주거리와 꽃이 활짝 핀 장미 화분이 준비되어 있는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본연의 풍경 속에서 술을 즐기는 남자들과 술을 권하는 여자들이 역시 풍경이 되어 한 무리의 혼돈상으로 어울려 있었다.
사내가 갑자기 잔을 훌쩍 기울여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음미의 시간이 끝나고 폭주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었다. 대개의 여행자들은 그렇게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특산인 장미주의 맛을 보게 되면 고향의 주막에 앉은 듯 해방감에 취하기 마련이었다.
유라035는 말없이 사내가 내민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사내는 다시 홀짝 들이마셨는데 연거푸 석 잔을 더 비운 후에야 잔을 거꾸로 세워 놓았다. 그만 만족했다는 뜻이었다.
타이탄의 장미장원이 자랑하는 특급주를 네댓 잔씩이나 마신 술손들은 대개의 경우 술값을 대신한 여러 가지 예물들로 성의를 표시한 후 비틀걸음으로 일어나거나 풀어진 이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정을 하는 것이 공통된 행보이곤 하였다. 사내는 후자인 모양으로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고 푸념을 시작했다.
“난 말이야. 지구로 갈 거야. 땅을 조금 사서 농사를 지을 거야. 마누라도 얻고, 자식새끼도 낳고, 남들처럼 그렇게 살다가 다시는 재생이 안 되는 진짜 죽음을 맞을 거야. 나 돈 있어. 벨제뷔트 놈들에게 안 죽고 살아남았더니 우리 대장이 제 무덤에 이름 걸고 죽을 팔자라고 부대 돈을 톡톡 털어 주더라구. 지구에 가면 한 재산 넉넉할 거라고 하던걸.”
문득 고개를 쳐든 사내의 눈가에 이슬이 어려 있었다. 유라035는 사내가 다시금 내민 술잔에 장미주를 채워주며 사내의 눈빛에 비친 이슬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벨제뷔트 우주인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면 지난 세기 내내 계속되었던 해적선 신천지호 추격전에 참전한 지구계 용병의 하나일 터, 행색으로 보아 필시 용병의 한 꼭지로 목숨 값을 대신해 받은 황금 증서를 품에 안고 고향이랍시고 지구별을 찾는 모양인데, 가엾게도 떠나온 동료들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구나…… 한 잔 술을 비우는 동안에 유라035가 순간적으로 계산해 낸 사내의 현주소였다.
“아가씨, 예쁘다.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없었을까?”
사내가 다시 잔을 비우다 멈추고 유라035를 지그시 쳐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어딘가 뒷골목의 노예 암시장에서 나를 닮은 복제를 본 모양이군. 유라035는 근자에 갑자기 늘어난 그런 유의 물음의 의미를 해석하고 오물을 밟은 듯 불쾌감을 느꼈다. 조금쯤 잘난 여자가 나타나면 이내 복제를 만들어 시장에 내보내곤 하는 인신매매업자들의 부도덕성이 소름이 끼칠 만큼 혐오스러웠다. 암시장에서 팔렸을 나를 닮은 복제가 어딘가 사창가에서 막창 노릇을 하거나 졸부의 하렘에서 성적인 노리개가 되어 있으려니 생각하면 전라의 몸으로 대중 앞에 버려진 듯 수치심이 느껴졌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표정이 변한 유라035의 안색을 살핀 사내는 마시던 잔을 마저 비운 후 이내 사과의 말을 했다. 자신의 기억 속의 여성이 실제인 유라035에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는 듯싶은 어조였다.
“미안해. 어디선가 꼭 본 듯싶어서 그만…”
유라035는 사내의 눈빛에 사심이 보이지 않아 최소한 자신의 엉터리 복제가 사창가에서 구르지는 않았음을 짐작하고 이내 평소의 표정을 회복했다. 그러면 그렇지. 감히 타이탄의 장미장원 사람의 모사품을 하급 복제인간들 속에 내놓았을 리가 있겠어?
사내는 유라035의 표정이 본래의 미소를 회복한 것을 확인한 후 다시금 술꾼 고유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주정을 시작했다. 미인의 앞에서 돋보여 보이고 싶은 남성들 공통의 호기였다.
“아가씨니까 하는 말인데 말야. 나 제법 여자가 많았다구. 부대 앞 꽃거리에서는 한몫하는 건달이었다구. 데리고 나오고 싶을 만큼 예쁜 애들도 몇 되었는데…… 대장이 말렸어. 지구로 가서 진짜 여자 데리고 살라고.”
당연히 말렸을 게다. 전란 속의 꽃거리 여자들 중에 진짜 인간이 있었겠는가. 대부분 현지에서 급조된 하급 재생인간으로 잠자리의 기술만이 능숙한 위안부용 3급 복제들이었을 텐데, 지구행 여비를 만들어 주었을 만큼 부하를 사랑하는 대장이었다면 말리는 건 당연했을 게다.
“사랑, 그거 별 거 아녔어. 그저 한 침대에서 뒹굴다보면 정이 생기더라구. 그렇게 사랑 같지도 않은 풋사랑은 몇 번 해보았드랬는데……”
사내는 잠시 옛 추억 속의 연인을 그리는 양으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술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라035는 사내가 술잔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꼈다. 역시 나를 닮은 누군가를 어디선가 보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가씨, 나랑 지구 가지 않을래? 우리 대장이 그러더라. 사내 사람만이 아니라 계집사람들도 아들 새끼 딸 새끼 낳고 알콩달콩 살다가 제 명대로 죽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이야.”
사내가 갑자기 진지한 어조로 유라035에게 청을 했다. 유라035는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가장 절실한 눈빛으로 구애를 하는 사내를 보며 새로운 형태의 술주정을 본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겨 주었다. 호의를 보일 경우 구애의 강도를 높여 청혼으로 이어지곤 했던 사례를 자주 겪었기 때문이었고, 자신이 속한 유라 가계를 비롯한 장미장원의 주인으로 불리는 네 자매는 대대로 결혼을 하지 않은 단종 복제로 역사를 이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말이야. 생명보다 더한 의지의 대상이 있을 때 진짜 삶이 된다고 우리 대장이 그랬단 말이야. 잘 만들어졌거나 잘못 만들어졌거나, 전사한 용병들의 지갑을 뒤져보면 모두 제 나름의 우상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더란 말이야. 아내이거나 연인이거나 잃어버린 과거 속의 기억이거나를 막론하고, 삶의 지주가 될 우상을 품고 죽어 가는 게 인간이라는 이름의 미완성 지성체의 공통된 죽음이더란 말이야.”
언젠가 비슷한 유의 귀향 용병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유라035는 그때 “숭배의 대상을 잃었을 때 지성체는 진정으로 죽음을 맞는다. 고독은 죽음의 가장 완벽한 형태이다”라고 말한 선대 유라 중 하나의 이야기를 기억해 내고 쓰게 웃었었다.
사내는 유라035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제풀에 기세가 꺾여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주량을 넘어선 음주로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례를 자주 보아왔던 터라 유라035는 사내의 의지를 칭찬해 주려 하였다.
뜻밖의 사건 발발로 한가롭던 시간이 파괴된 것은 그때였다. 술을 마시던 주객들 중에서 중년 사내 둘이 일어나 예의 취한 사내에게 무차별 사격을 해댔다. 사내가 가슴에서 피를 뿌리며 길게 쓰러지고,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경호원들이 달려와 암살자들을 사살한 것은 잠깐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5. 위와 같은 날. 태양계 제6행성의 위성 타이탄의 장미장원. 통제실
“감히 우리 ‘언제나 장미…’에서 살인을 하다니, 어떤 놈들이었지?”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본원인 장미장원(薔薇莊園)의 통제실에서는 둘째 여주인인 샤넬040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샤넬040는 초록색 바탕의 비단 천에 푸른색 장미를 그린 이브닝드레스를 즐겨 입었는데, 차가운 느낌의 얼굴과 잘 조화되는 차림새였다. 첫째인 흑장미023이 늘 침묵을 지키고 있는 탓에 샤넬040은 장미장원의 대변인 역할을 맡아 하고 있었다.
“벨제뷔트의 암살자들도 아닌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재생 방법과는 많이 다른 전쟁용 안드로이드였습니다. 특별히 잘 만들어진 솜씨는 아니지만 목표로 한 적은 끝까지 쫓아 파괴하는, 목적의식에 투철한 암살 전용 복제인간들입니다.”
유라035의 답변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는데 자존심이 상한 유라035는 중무장의 전투복 차림을 갖추고 출동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두뇌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오직 하나, 마덕113을 죽여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을 뿐, 증거가 될 만한 점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덕113이 암살자들의 총탄에 죽은 노병의 이름이었음은 그의 소지품에 대한 분석으로 조사가 되어 있었다. 흑장미023이 결론을 내린 것은 마덕113의 이름이 나온 직후였다.
“일개 전투병의 전생테가 백 열 셋이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의 본래 신분과 우리 타이탄에 온 목적을 알면 암살자들의 정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6. 열흘 후, 벨제뷔트 성계와의 경계 전장
벨제뷔트연맹은 우주력 원년부터 존재해 온 이단자 집단을 말함이었다. 지구연방이 은하연방으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소외된 세력이 하나 둘 모인 결과라는 게 공식적인 정체였는데, 세상의 인심은 해적선 신천지호가 막후 세력일 것이라는 짐작이 대세였다.
유라035가 이끈 장미장원의 전사들이 용병대장 김진욱B015를 납치해 온 것은 앞서의 주정꾼 용병 마덕113의 암살 사건이 있은 후 열흘 만이었다. 김진욱B015의 용병부대는 은하연방군에 속해 벨레뷔트연맹군과의 대전에서 최일선을 맡고 있었다.
“날 부른 친구가 당신이었수?”
김진욱B015는 우주 안에 유명한 김진욱 계열 복제인간 특유의 서늘한 눈매를 한 중년 사내였다. 납치라고는 하지만 결박된 것도 아니어서 유라035에게 덥석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당신은 전생테의 숫자가 열다섯이라더군요. 우리 장미장원과 신천지호의 은원사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해도 흠이 아닐 연륜이지요.”
장미장원의 여주인 흑장미 제1대와 신천지호의 선장 김진욱의 제1대, 은하연방 제1의 명문가인 류우 가문의 제1대의 사이에 은원간의 사연이 있었음은, 우주 안에 유명한 연애사로 음유시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랫말의 하나였다. 김진욱 계열의 후대가 가장 넓은 지역에 복제를 남긴 이유는 해적이라는 특수한 신분 탓에 많은 전장에 피를 뿌린 탓이었다. 한 방울 피로 하나씩의 복제 가계가 생겨나곤 했던 것이다. 본가인 해적선 신천지호의 선장 김진욱048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용병대장 김진욱B015의 전생테는 그가 정통 김진욱 계열의 복제인간이 아닌 전투용 안드로이드와의 혼합체인 혼혈 개조인간의 후예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유라035의 말은 그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마덕113은 탈영병이야. 헌데 우리가 찾았을 때는 죽은 시체로 발견됐어. 옛날부터의 부하도 아니었으니 탈영도 아닌 셈이지만. 용병이란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떠나는 걸 자랑으로 알고 살아가는 존재이니 소속을 따질 바도 없기는 해. 아무튼 타이탄까지 가서 또 한번 죽었다니까 내가 본 마덕113의 시체는 허깨비였던 모양이군.”
김진욱B015가 주절주절 답변을 늘어놓는 도중에 유라035는 그의 눈동자의 홍체 변화를 조사하고 있었다.
“눈빛이 맑군요. 당신의 말을 믿기로 하지요.”
김진욱B015는 또 다른 마덕113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덕가는 우주의 복제 윤리상 금기로 되어 있는 쌍둥이 복제를 남용하여 종족의 번영을 꾀했으나 암살자들의 총구는 어느 쪽에도 용서가 없었던 것이다.
“당신들이 오기 전에 우리에게도 소식이 전해져서 조사해 보았지. 상황이 심각해요.”
김진욱B015의 눈동자에는 답변의 사실성을 나타내는 잔잔함과 열다섯 차례의 재생으로 얻어진 열다섯 생애의 기억과, 15의 숫자로 덧씌워진 전생테의 더께로 얻어진 깊은 심려가 심어져 있었다. 유라035는 부하 용병들에게 김진욱B015를 배웅할 것을 명령했다.
“잠깐, 그 친구가 내 이야기를 하였다 했던가?”
유라035의 부하들에게 팔을 끌려 문을 나서려던 김진욱B015가 문득 돌아서며 말했다.
#7. 위와 같은 날. 용병부대의 전산 자료실
마덕113의 신상 자료는 짧지만 재미있는 것이었다.
마덕113 : 우주력 원년부터 가계를 시작한 마덕가(家)의 113번째 복제. 마덕가는 태양계 제6행성의 위성 타이탄 주둔 우주군 장군의 후예가 시작한 가문으로 다나카가(田中家)와 함께 연방 유수의 명문가로 가계를 이어왔으나 훗날 류우가(家)의 부상으로 위세를 잃고 이면 세력으로 전락함. 마덕110의 대에 이르러 이면 세력끼리의 싸움에 패한 후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잠적함. (유명한 ‘석신(石神)의 싸움’의 두 주역 중 하나라는 견해가 있음.)
‘석신의 싸움’은 유라035도 알고 있는 암흑가의 전쟁이었다. 거대한 석인(石人)의 대군이 우주의 어느 곳에서 발견되었다 하여 화제가 되었을 때, 옛 지구의 어딘가에 남겨 놓았던 고대 문명의 현현으로 보고 그 후예의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이권다툼을 벌인 국가들의 이면 세계에서의 대리전쟁이 그것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단순한 암흑가의 패권전쟁이었던 그 싸움의 주역 중 하나였던 마덕가의 패잔병이 노병의 모습을 하고 타이탄을 찾았던 것이었다.
유라035는 마덕113의 자료 끝에 김진욱B015에게 전해들은 일화를 덧붙였다.
마덕 일가의 쇠락 원인은 원형을 잃은 탓이라는 견해가 있음. 가계의 번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대량 복제를 거듭한 결과 순혈주의를 유지해 온 여타 세력들과 달리 본래의 지구인적인 진취성을 급격히 잃게 되었다 함. 현상 보존에만 급급하여 쌍둥이 이상의 복제를 일삼은 일부 명문가들이 종래의 기억과 면목을 잃고 사라져 간 사례의 하나로 기록됨.
김진욱B015는 말했었다.
“내 15대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기억 속에도 그런 이름의 친구가 있었어. 늘 지구로 가겠다고 말했었는데 전투 중에 실종되었다고 했지. 설마 그 옛날부터 마덕가의 사람들이?”
#8. 위와 같은 달. 해적선 신천지호의 통제실
해적선 신천지호의 선장은 김진욱048이었다. 그는 김진욱계 본류의 맥을 이어온 복제로써 전장에 흩어졌던 전사의 피를 복제한 방계 B계열 김진욱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타가 공인하는 존재였다.
“마덕 일가의 사람들이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때도 있기는 했지. 타이탄 탈출 때에 마덕가의 최초 인사는 연방군의 장군이었어. 우리의 탈출과 외계행 이후 류우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되자 추적을 핑계로 태양계 밖의 우주로 따라왔더군. 아마 그들이 최초로 외계 우주로 나온 지구계 군인이었을 걸. 우리가 최초의 해적이었듯이 말이야.”
통제실에는 우주 안에 소문 높은 해적선 신천지호의 간부급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김진욱048의 대화 상대가 되어 있는 간디039는 간부급 중에서도 단 하나 친구의 격을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간 재생 전문가로 그 솜씨를 인정받고 있는 간디039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이어서 그의 모습은 몸보다 큰 머리통과 겁먹은 듯 부릅뜬 파란 색깔 눈을 가진, 전형적인 기형인간의 것이었다.
“용병대에서의 죽음은 당연한 일처럼 흔한 사건이기는 한데, 불의에 죽는 인사들이 수상해서 조사해 보았더니 모두 마덕가의 사람이더군. 방계이건 본계이건 잡혈이건, 마덕가와 연원이 있는 인사라면 눈에 뜨이는 대로 모두 죽이는데, 이유를 모르겠어.”
그들은 마덕113 살해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유라035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김진욱 가계의 본류인 해적 김진욱048에게는 방계 김진욱이거나 혼혈 김진욱 등으로부터 모든 정보가 모여들고 있었다.
“용병대의 김진욱B015에게서 타이탄의 여자 대장의 뒤를 쫓고 있다는 연락이 왔어. 사건이 계속 터지고 있다는군.”
#9. 같은 달. 태양계 제4행성 안의 장미농원
“백 열 일곱 명 째입니다. 갈수록 처형 방법이 잔인해지고 있어요.”
끝없이 넓은 농원 가득 장미꽃이 피어 있었다. 처형은 농원 가운데 태양빛을 증폭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렌즈의 초점 아래에서 벌어져 있었다. 증폭된 태양열로 인하여 까맣게 탄 시체를 앞에 놓고 유라035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달래기에 애를 먹고 있었다.
“장미장원의 직할 농원에서 사건을 만든 것은, 도전의 의미를 확실히 한 것에 다를 바 없어.”
화성의 엷은 공기층과 농원 안의 지구형 기압을 분리해 놓은 합성수지의 차단막 안 세계는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풍경이 차이가 났다. 누런 색깔 모래밭이 연속된 화성의 대지 속에 홀연 솟은 초대형 도움형 농원 안에서는 온갖 색깔의 장미가 만발해 있었고, 장미장원의 농부들이 꽃과 꿀을 수확하고 있었다. 외계의 곤충인간들에게 용역을 주어 꽃의 수분과 꿀의 생산을 맡긴 화성의 장미농원은 타이탄의 장미장원이 우주로 수출하는 장미주의 원료 공급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구로 가자. 놈들이 우리를 유인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용의자가 지구로 향했다는 것은 조사가 되어 있었다. 추적을 결심한 유라035의 목소리에는 맺힌 데가 있었다. 타이탄의 주점 ‘언제나 장미…’에서 시작된 사건이 용병대의 사령실과 화성에 이르기까지 유라035가 닿는 곳마다 희롱하듯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10. 우주력 260년 5월. 태양계 제3행성 지구. 우주 공항이 있는 도시
유라035가 공항에서부터 뒤를 따라 온 일단의 젊은이들을 포위하여 사냥을 시작한 이유는 다가올 전투에 대한 대비였다. 타이탄의 장미장원으로부터 사람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느새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애써 피하여 빠져 나온 뒤에도 몇몇 젊은이들의 추적은 피할 수가 없었다. 지구의 20대 젊은이들은 자연산 생명이었으므로 유라035의 전생테 서른다섯이 말하는 연륜으로 보면 200~300년 연하인 젖먹이들인 셈이었는데, 우주 안에 전설이 되어 있는 타이탄의 장미장원의 여주인 중 하나가 온다는 말에 열광하는 그들을 말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미장원의 첫째인 흑장미023으로부터 지구로 모여들고 있는 몇몇 세력에 관한 정보를 전달받은 것은 지구별의 공항에 내린 직후였다.
“은하연방의 류우 가계 본가의 사람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지구로 출발했다는 소문이 있다. 벨제뷔트, 혹은 신천지호의 해적 집단에게 고용된 듯싶은 용병대와 기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무법자 집단의 이동도 포착되었다.”
우주력 260년은 지구력 24세기였다. 우주 문명의 발원지인 지구는 우주 제일의 낙후된 별이기도 했다. 젊은이들이 장미장원의 사람들에게 모여든 이유는 지구라는 무덤으로부터 탈출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유라035는 자신의 부하들이 지구의 젊은이들을 조준 사격하여 그들의 기억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키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3세기 전, 유라가의 제1대도 젊은이의 모습으로 우주로 떠났었다는 감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11. 지구력 21세기 말. 지구. 동아시아연방 어느 도시의 우주 공항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전속 예술단인 ‘4색 장미 곡예단’의 단원들이 화성으로 출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휴게실로 전달된 선물 중에 가장 많은 것이 각종 장미의 원종이었다. 단체의 장이 예명으로 삼고 있는 흑장미를 비롯해 흑백녹황의 네 가지 색깔을 이름으로 삼은 자매들의 춤, 노래, 연극, 곡예는 당시대 주요 화제의 하나가 되어있을 정도였는데, 첫 번째 외계 공연에 나선 행로가 화성이었고 대외적으로 공표된 목적이 ‘장미 가꾸기’였기 때문이었다.
유라는 백장미가 그려진 옷을 즐겨 입었다. 네 자매의 출신지인 구한국의 민속 의상을 개조한 간편복을 제복으로 삼는 ‘4색 장미 곡예단’은 지구별의 대표적인 장미 애호가로 소문이 높았다.
“이건 조금 특별한 선물인데요?”
선물 상자들을 정리하고 있던 단원들 중의 하나가 상자에 붙은 명함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명함에는 달리 설명이 없이 ‘류우’ 두 글자가 적혀 있을 뿐이었는데, 그 이름을 본 단원들 전체의 탄성을 불렀다.
“큰언니, 또 류우가의 도련님이네요.”
류우는 동아시아연방 제1의 가문인 류우 씨족의 다음 대 당주로 예약된 사람이었다. 연방의 현 수상인 선대 류우의 하나 뿐인 아들로 다음 세대의 연방 정치 지도자로 주목을 받고 있었고, 연방 안에 첫손 꼽히는 신랑감으로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기도 했다.
“이건 네 몫인가 보다.”
류우와의 정분의 상대역으로 공인된 흑장미가 상자 하나를 집어 들며 하는 말이었다. 상자에는 보낸 사람의 서명이 없이 ‘백장미 유라씨에게’라는 메모만 달랑 꼽혀 있었다.
“그 때는 나도 꽤 인기가 있었지. 그 상자 속의 선물이…”
#12. 우주력 260년 5월. 지구 상공의 탐사선
유라085는 서른다섯 세대 전의 원본 유라의 기억을 서른다섯 세대 후의 자신이 당대의 일인 양 기억해 내려 애쓰고 있는 현실을 슬퍼하고 있었다. 지구별을 떠나던 때의 감상은 한 시대와의 단절과 같은 극한적인 절망이었다. 장미장원의 대외적 얼굴인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넝쿨장미를 올려 만든 아치형 정문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게다가 화원에 가득 꽃피우고 있던 순수 자연산 장미 원종들은…… 우리 네 자매가 심혈을 기울여 쌓아온 기업을 헐값에 넘기고 떠나 올 때의 기분은 또 어떠했던가.
그때의 선물상자의 내용물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특수 상황 속에서의 사건이었던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보내온 인사의 특이한 행동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선물을 보내 왔을 뿐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데, 포장 상자에 그려진 독수리 문양의 비상하는 모습으로 보아 지구연방 공군 소속의 군인이라는 추정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 이런 내용이었지. ‘월급봉투를 털어 산 것입니다. 가난한 살림이라 보잘것없는 선물이 되었지만…’”
화성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곳의 자연 환경이 장미를 키우기에 악조건인 탓이었다. 돌연변이가 나올 확률은 조건이 좋지 않은 땅이 월등 높은 법이었기 때문에 장미를 가꾸고 그 부산물인 꿀을 발효시켜 빚은 술을 팔아 생계를 이어온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은 꿀의 소출이 많은 신품종 장미를 개발할 수 있는 신천지를 개척하기 위해 지구별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것이 화성행 고별 무대가 준비된 진정한 이유였다.
“지구별의 착륙 예정 장소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관측병의 보고였다. 유라035는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13. 위와 같은 날. 지구별의 어느 섬
중무장의 특급 전사들이 서로 죽이고 있었다. 우주력260년의 지구별은 우주 유일무이의 원시적인 사회였으므로 전사들의 무기는 칼과 창이었고 방어수단은 청동 방패와 철주 갑옷이었다.
빛의 속도에 연계된 시간 진행과 중력의 제어로 인한 견제로부터 해방이 이루어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다만 우주 문명의 발원지인 지구별에서라는 특수성이 그들로 하여금 육탄전으로서의 격검을 하게 할뿐이었다. 시작 이전에 현재의 사건에 개입해 있을 수 있는 우주력 3세기의 시대에 서로의 가슴에 칼을 꼽아 넣는 행사가 예사로 벌어지고 있는 지구별에 도착한 유라035는, 전장의 중심에 무력하게 서 있는 자신을 깨닫고 자괴감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 세월 온갖 전쟁에서 생명 파괴의 솜씨를 다진 전사형 복제인간들이 유라035를 중심으로 한 전장에서 서로를 죽이는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유라035를 뒤따르던 장미장원의 호위병들은 싸움판 속으로 휩쓸려들어 주인을 보호하다가 유탄에 희생된 지 오래였다. 관측병의 보고를 받고 상륙할 때까지의 기세는 타이탄의 장미장원의 한 대장으로서 위세에 부족함이 없었는데, 끝이 없을 듯이 계속된 전쟁용 복제인간들의 공세에 시나브로 대원들을 잃었던 것이다.
전사들은 서로 상대의 가슴에 칼날을 꼽고 얼굴을 깎아 전생테의 흔적을 지웠다. 그리고 그때마다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비틀어댔다. 괴로움을 참는 표정이 역력한 전사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마덕가의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죽여 하나가 되며 당신을 기다렸다. 우주 안에 유일하게 단일 가계를 이어온 유라 가계 당대 가주의 상대역으로 부끄럽지 않을 하나만의 마덕이 되기 위해, 우리는 고통을 공유하는 자신의 복제를 죽여 오늘의 이 자리를 만들었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전사 마덕의 눈을 감겨 주었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유라035를 경외하여 해치지 않았을 뿐, 서로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던 흉포함과는 비교될 수 없는 다정한 언사였다.
전사의 죽음을 지켜준 것을 계기로 유라035는 지구를 떠나던 때에 마지막으로 받았던 선물의 정체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그것은 작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만들어진 돌인형이었고, 유라가의 제1대가 소녀시절에 살던 섬의 여인들이 수호신으로 모시던 신상의 축소형이기도 하였다. 유라035의 기억 속에서 300년 전의 섬은 크고 작은 석신의 대군으로 보호된 성역과 같은 곳이었는데, 죽음의 행사가 한창인 300년 후의 전장에서 발견한 풍경 속에서도 석신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14. 지구력 21세기 말. 동아연방의 어느 섬. 우주력 원년 30년 전
소녀는 불치병이라고 했다. 20년쯤 동면시킨 후에 다시 살려내서 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한 제약회사에 모르모트로 몸을 팔았고, 그 날은 동면을 위해 실험장소로 떠나는 날이었다. 배웅을 나온 소년 소녀들은 병든 소녀의 학교 친구들이었다. 20여명의 친구들에게 차례로 작별 키스를 하던 소녀는 한 소년의 유별난 행동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소년은 미완성 돌인형을 선물로 가져왔으나 등 뒤로 감추고 내놓지 않고 있었다.
“아직 조각이 덜됐어. 다 만든 후에 줄게.”
소년다운 힘찬 장담이었지만 그 약속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녀는 냉동인간이 되기 위해 떠나는 길이었고, 20년 후의 재생이란 희망사항일 뿐 실험용 모르모트에 불과한 소녀가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소녀의 웃음은 그런 이유를 담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한껏 소리를 높인 것이었지만 웃음 본래의 즐거운 색깔을 갖지는 못하고 있었다.
#15. 지구별의 어느 섬. #12의 연속
유라035는 주위의 마덕들이 하나 둘 차례로 죽어 가는 양을 보며 지구별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받았던 선물 상자의 내용물을 추리해 냈다. 그때의 돌인형은 소녀가 실험용 냉동인간이 되기 위해 떠나던 때에 소년이 훗날을 기약하며 주기를 거부했던 미완성 돌인형의 완성품이었다. 23년 동안의 긴 동면 끝에 소녀 유라는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4색 장미 곡예단’의 흑장미에게 발탁되어 인기를 모으다 화성행을 하게 된 사정으로 고별 무대를 갖던 중에, 뜻밖에 잊고 있었던 과거 속의 돌인형을 선물 받았던 것이었다.
“내가 바로 마덕이야.”
“아니야. 내가 마덕이야.”
“나야. 날 보라구. 내가 진짜 마덕이라니까.”
마덕은 옛 추억 속 소년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화성행을 하던 제1대 유라에게 돌인형이 담긴 선물 상자를 보내 왔던 지구연방 공군 장교이기도 하였고, 지금 유라035를 노리고 서로 싸우고 있는 전사들 모두의 이름이기도 했다.
“내가 이겼어. 나를 보라구. 내가 진정한 마덕이야. 기억하고 있어?”
마지막 승자가 그렇게 중얼대며 유라035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같은 형상의 마덕들을 무수히 죽인 그의 양손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고, 몸에서는 온통 피비린내가 풍겨 오고 있었다. 유라035는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욕지기를 참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30년을 기다려서 다시 찾았더니 당신은 화성으로 떠난다고 하더군. 게다가 23년을 냉동되어 있었던 까닭에 한 세대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났어. 그래서 나타나지 못했지. 다시 타이탄에서 만났을 때에도……”
마지막 마덕은 말을 잊지 못했다. 그의 가슴을 뚫고 지나간 총탄 때문이었다.
“형제여, 마지막 마덕은 바로 나일세.”
용병 대장 김진욱B015였다.
#16. 우주력 260년 말. 타이탄의 장미장원
“우리 마덕가는 류우가와의 쟁패에서 패한 후 종족의 성원이 부족해지자 대량 복제를 시도했지요. 마덕 본가가 ‘석신의 싸움’에서 사라진 후부터는 방계의 마덕들은 멸망을 경험한 자의 절박함으로 종족의 재흥을 꾀하여 편법을 동원했어요. 그 결과 마덕113의 대에 이르러 부작용으로 인한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문득 3세기 전의 과거를 돌이키려는 욕심이 생겼던 겁니다.”
김진욱B015는 황금장미주를 맛있게 들이마신 후 말을 이어갔다. 유라035는 흑장미023을 비롯한 자매들에게 지구행의 결과를 보고하던 중이었는데, 주로 말하는 쪽은 뜻밖의 구원자로써 지구별 원정의 마지막을 장식한 김진욱B015였다.
“나는 마덕가와의 혼혈 김진욱입니다. 내 전생테가 열다섯인 이유입니다.”
김진욱계의 본가 격인 해적선 신천지호의 선장 김진욱은 전생테가 마흔 여덟이었다. 복제로 대를 이어가는 사회에서 피와 피를 섞어 혼혈을 만드는 이유는 종족의 강성을 꾀한 고육지책이었다. 강한 전사를 배출하기로 유명한 김진욱가는 곳곳의 전장에 전사한 시신을 남긴 탓에 구하기 어렵지 않은 피의 하나였고, 당연히 혼혈 대상으로 선호되는 첫 번째 씨족이곤 하였다.
“유라 가계가 단 하나의 복제만으로 가문을 이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덕가의 사람들은 자신의 복제 형제들을 서로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짝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걸었지만, 실은 복제 피로 현상이었지요. 오랜 세월 핏줄의 종적(縱的) 발전이 없는 복제 명문 공통의 문제점인 종족 노화…… 신천지호의 간디039는 종족의 횡적(橫的) 보전의 부작용이라고 풀고 순혈주의만이 해결책이라고 강조하더군요. 우리 김진욱 가계의 본가가 수하들에게 출동을 명령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숫자의 김진욱이 마덕가와 혼혈이 되어 있었거든요.”
유라035는 마덕113의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인 김진욱B015를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정녕 3세기 전의 지구별, 석신이 많았던 섬의 부끄러움 많던 소년의 후신인가. 해적선 신천지호의 선장 김진욱으로 대표되는 김진욱 가계의 제1대는 타이탄의 장미장원의 첫째 주인인 흑장미 가계 제1대와 정분이 있었다고 했다. 우주 안의 유랑 시인들이 즐겨 노랫말로 삼는 김진욱 가계 제1대와 흑장미001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는 유명한 은하연방의 명문가인 류우 가계의 제1대가 개입된 비사가 있었고, 그에 연관된 은원사로 인해 지구계 인류의 우주사가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거기에 우리 유라가가 마덕 가계의 혼혈과의 인연으로 은원의 실타래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구나……’하는 감상으로, 유라035는 시종 침묵을 지키는 이유를 삼고 있었다.
“마덕가는 김진욱가와의 혼혈인 나로써 마지막이 됩니다. 나는 당대에서 생을 끝낼 것을 신천지호의 김진욱 본가로부터 명령받았습니다. 그럼 안녕히……”
유라035는 신천지호에 있을 어떤 추억의 상대역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내 진정한 그리움은 그곳에 있었어. 우리 네 자매가 장미장원을 지키고 있는 이유도 역시……
#17. 우주력 5세기. 론774의 회고. #2의 연속
…타이탄의 장미장원은 마덕을 살려냈네. 잡혈을 제외한 순수한 마덕으로…… 마덕 대장이 장미장원에 연연하는 이유는 그런 때문일세.
마덕 대장은 행성의 주위를 도는 달별일세. 중력이라는 굴레에 묶여 떠나지 못하는…… 하기는 어느 시대의 누구라고 정념(情念)의 업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마는……
다음은 제1차 은하대전 때의 비화일세. 나도 그 전쟁 때에 전생테를 수십 개씩 늘인 사람이지만, 타이탄의 장미장원과 신천지호의 해적들, 류우의 황금전함 함대는 이야기꺼리를 많이 만들어 놓았다네.
첫댓글 우주에 사막이 아니라 공허 한 마음에 사막이네요
복제된 자기자신을 죽임으로서 자신의 과거로의 회귀를
갈망하는대 .....
인연이 인연이 아니고 사랑이 사랑이 아닌것을 .....
다음편을 기다리며 감사합니다 ^^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금 번에 올리신 공상소설은 우주전쟁과 복제인간들의 갈등 및 김진욱 대장과 유라의 개별적인 스토리로 전개되어 가고 있네요. 빗- 춤 님의 지적처럼 우주에 있는 사막이 아니라 전쟁과 황폐로 인하여 복제 인간들을 비롯 등장 인물들의 마음 속에 내재된 갈등과 공허 내지는 삭막한 마음이 글 전반에 펼쳐져 있음을 느낍니다. 읽다보니 복잡한 스토리를 막힘없이 잘 풀어가는 형님의 작가적 솜씨가 좋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평안하시고 건필하세요.
'빗방울의 춤'님의 말씀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사막을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재물을, 명예를 잃은 사람들이 저마다 감추고 사는 삶의 애환.....
미흡한 글에 좋은 평을 주셔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의도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중간중간 줄 띄우기를 해주시면....읽기가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잘읽고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