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문향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없다
더듬어보면 우리가 만난 짧은 시간 만큼
이별은 급속도로 다가올 지 모른다
사랑도 삶도 뒤지지 않고
욕심내어 소유하고 싶을 뿐이다
서로에게 커져가는 사랑으로
흔들림 없고, 흐트러지지 않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할 뿐이다
외로움의 나날이
마음에서 짖궂게 떠나지 않는다 해도
내 너를 사랑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말을 하지 않겠다
말로써 다하는 사랑이라면
나는 너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환한 마음으로
너에게 다가갈 뿐이다
조금은 덜 웃더라도
훗날 슬퍼하지 않기 위해선
애써 이유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신병진
가끔 보고 싶은 사람이 너였으면
가끔 보고 싶은 사람이 너였으면..
문득 옛 기억 속에 남겨진 흑백영화처럼
가끔 보고 싶은 사람이 너였으면..
한바탕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잊혀짐의 그늘 속에서도
불쑥 찾아가고 싶은 사람이 너였으면..
가벼운 웃음으로 만나
농담 반 진담 반 나눠도 아무런 부담없고
술 한잔 하고 싶을 때
비오는 날 누군가와 그 빗속을 걷고 싶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너였으면..
이렇게 가끔 보고 싶은 사람이 너였으면..
정호승
거짓말의 시를 쓰면서
창밖에 기대어 흰눈을 바라보며
얼마나 거짓말을 잘 할 수 있었으면
詩로써 거짓말을 다 할 수 있을까.
거짓말을 통하여 진실에 이르는
거짓말의 詩를 쓸 수 있을까.
거짓말의 詩를 읽고 겨울밤에는
그 누가 홀로 울 수 있을까.
밤이 내리고 눈이 내려도
단 한번의 참회도 사랑도 없이
얼마나 속이는 일이 즐거웠으면
품팔이 하는 거짓말의 詩人이 될 수 있을까.
생활은 詩보다 더 진실하고
詩는 삶보다 더 진하다는데
밥이 될 수 없는 거짓말의 詩를 쓰면서
어떻게 살아 있기를 바라며
어떻게 한 사람의
희망이길 바랄 수 있을까.
슬픔으로 가는 길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원태연
인연
당신 친구들이 당신의 생일 케익에 촛불을 켜 주었을때
내 친구들은 힘없이 물고 있던 내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고
당신이 오늘 약속에 입고나갈 옷을 고르고 있을때
나는 오늘도 없을 우연을 기대하며
당신이 좋아했던 옷을 챙겨입고 있었고
당신이 오늘 본 영화내용을 친구들과 얘기하며
그 영화에서 느낌이 좋았던 장면을 떠올리고 있을 때
나는 우리가 왜 만났고 왜 싸웠고 얼마나 행복하게 지냈는지를
빈 술잔을 채우는 친구에게 얘기하며 채운잔을 또 비우고 있었고
당신이 아무 생각없이 호출기에
메세지를 남기면 연락드리겠다고 녹음 했을때
나는 그 목소리라도 밤새도록 반복해 들으며
전할수 없는 메세지를 달래고 있었고
당신이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놀라
어느 처마 밑으로 피해 있을때
나는 내리는 그비를 다 맞으며
당신이 피한 그 처마 밑을 찾으러 뛰어다니고 있었고
당신이 일기장에 오늘 하루를 정리하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을때
나는 보여주지 못할 편지를 끄적이며
어김없이 찾아올 내일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당신이 그해의 첫눈이 반가워 누구를 만날까 생각하고 있을때
나는 당신이 내 호출기 번호를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호출이 올때마다 철렁 내려 앉는 가슴을 느끼며 첫눈을 맞이하고 있었고
당신이 책상정리를 하다 미처 버리지 못한 내 편지를 읽으며
의미 없는 미소로 아무런 느낌없이 그 편지를 휴지통에 넣을때
나는 그 옛날 내가 보낸 편지의 어느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머리속으로라도 다시 고쳐쓰고 있었고
당신이 생일 며칠전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무슨 선물이 필요해'라고 얘기 했을때
나는 너무나 건네주고 싶었던 선물 앞에서
당신과 너무나 어울릴거라 생각하며
준비해논 돈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고 있었고
당신이 새로 나온 음반의 어느 가사가
너무 좋더라며 음미하고 있을때
나는 나하고 절대 상관없는 슬픔인지 알면서도
무너지는 그가사에
또 한번 가슴이 내려앉아 함께 무너지고 있었고
....
당신이 한 남자를 얻었을때
나는 영원히 한 여자를 잃었습니다.
이해인
고독을 위한 의자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조병화
하루만의 위안
잊어 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 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 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 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