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C의 일원으로서, 대만 총독과 일본 대사를 겸하며 남중국해에서 가장 큰 권리를 가지게 된 청년, 피터르 누이츠. 이 사람은 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젊고, 거만하고, 오만하고, 경험이 일천한 인물이었습니다. 소설 등에서나 볼법할 정도로 매우 전형적인 인물이라 더 특이하기도 합니다.
피터르 누이츠에 대한 당시 네덜란드 인들의 기록은 그를 '프레젠트 카레(Present-kaasje)로 일컫었습니다. 이는 '좋은 집안 출신' 인 유복한 집 도련님이 '인척들의 든든한 후원과 연줄을 바탕으로' '경험도 적으면서 요직을 담당하게' 된 인물들을 가리키는 그 당시의 관용어 비스무리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이 낯선 동남아시아 바타비아나 남중국해 대만까지 온 손뼈가 굵은 네덜란드 인들에게 있어 이런 인물들은 술 한잔 하면서 비웃기엔 적절한 존재였습니다.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로, 나중의 영국의 경우는 영국 현지인들이 식민지에서 으스대는 식민지를 기반으로 한 부자들에 대해서 Failed In London, The Hong kong 즉 런던에서 대망해서 홍콩으로 밀려 난 양반 이라는 의미인 FILTH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이츠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대만으로 왔습니다. 그가 대만과 일본에서 본 모습은 현지 네덜란드 인들이, 대부분 본국에 여자가 있음에도 일본이나 대만의 여자들과 질펀한 생활을 즐기며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샌님 도련님인 누이츠는 이에 매우 분개합니다. 하지만 그가 진짜로 신경을 써야할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는데, 일본과의 마찰이었습니다.
역대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대만 총독
1622년 Comelis Reigersen
1624년 Martinus Sonk
1625년 Gerrit de Witt
1627년 Pieter Nuijts
1629년 Hans Putmans
1636년 Johan van der Burg
1641년 Paulus Traudenius
1643년 Maximilian le Marie
1644년 Francois Caron
1646년 Pieter Antoniszon Over' Water
1650년 Nicolas Verburg
1653년 Comelis Caesar
1656년 Frederik Coyett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마카오를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이단의 주선으로 대만에 근거지를 처음 마련한 초대 대만 총독인 레이예르센은 당초에 일본인들에게 "어떤 명목의 세금" 이나 "항만 사용료" 에 대해서 전혀 받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임 총독이었던 송크는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 본사로부터 남중국해에 막대한 자금이 투자된 만큼 수익을 내라는 압력을 크게 받았고, 이 면세 결정을 철회했습니다.
이는 일본인들의 어그로를 끄는 일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제한 조치로 중국으로 갈 방법이 없었던 그들은 대만을 이용해서 중계 무역을 하는것이 중국산 비단을 구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데, 세금 조치는 그들의 사업에 큰 타격을 줄 것이 자명해보였습니다. 누이츠는 이러한 일본인들의 반감 때문에 낭패에 처하게 됩니다.
1627년 누이츠는 네덜란드의 대만 영유권에 관한 일본의 공인을 얻을 생각으로 일본에 도착을 했는데, 분명 금방 만나리라 생각한 쇼군은 5주가 되도록 얼굴 조차 구경을 하지 못했고 , 결국 면담은 거절당하고 집에 가라는 말이나 듣게 됩니다.
목적했던 일을 달성하지도 못한 누이츠이지만 일은 또 다시 엉뚱한 데서 터지고 맙니다.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담당하는 나가사키 다이칸(長崎代官)인 스에쓰구 헤이조(末次平蔵)라는 인물은 대만관련 네덜란드 인들의 문제로 골머리를 앎다가 다른 방법을 취하기로 했는데, 하마다 야효에라는 인물에게 명령을 내려 대만 현지 원주민들을 몇명을 잡아 쇼군에게 "네덜란드 인들에게 약탈을 당하는데 일본에게 도움을 구하러 온 사람들"로 소개하고 ─ 어차피 그들은 일본어를 한 단어도 몰랐기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 네덜란드의 이미지를 크게 악화시키려고 하는가 하면, 현지 일본인 상인들에게는 "네덜란드 인들이 모두 곧 일본에서 추방될것" 이라는 뜬소문을 흘렸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일본인 채권자들은 곧바로 네덜란드인에 관한 대부금을 동결시켜버렸습니다. 거기다 원주민들을 본 쇼군은 누이츠에게 "대만에 있는 일본인들의 활동에 다시는 개입하지 않을것" 을 약속하는 협정에 서명하라는 압력을 주었습니다. 격분한 누이츠는 "천한 일본놈들" 하면서 욕을 해댔지만, 욕이나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히라도에 거주하는 최고참 네덜란드인이자 저 마카오 공격에 참가했으며 남중국해에서 8년여를 보낸(누이츠는 4개월째) 인물인 판 니옌로드가 일본인 애인을 두 명 데리고 노는것을 알고 이 문제에 관해서 극렬하게 모욕적인 말을 하여, 판 니옌로드를 분노하게 했습니다.
누이츠의 일본 행은 온갖 사방에 적과 문제만 만들어놓았고, 그는 대만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다의 제왕 정지룡이었습니다.
당시 정지룡은 남중국해 최강의 세력이었고, 그 기세와 군사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중국의 관리들은 익명으로 네덜란드인들에게 접촉을 시도했는데, 그 접촉은 본질적으로 허심조와 정지룡을 저울질 했던 그떄와 똑같았습니다. 네덜란드인들더러 해적 정지룡을 격파하라고 말하고, 댓가로 무역 허가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신빙성 있는지 ─ 그 전에 가능이나 한 일인지 ─는 둘째치고, 누이츠의 전임 대만 총독이었던 게리트 데 비트는 자신이 바타비아로 귀환하는 길에 한번 정지룡을 상대해볼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바타비아에서 정지룡의 선단을 평가하길 "최소 정크선이 400여척에 병력은 적게 잡아도 6~7만." 이라고 판단을 했었는데, 게리트 데 비트가 이끌고 바타비아로 귀환하는 선단은 5척이었습니다. 미친 짓이었죠.
아마 게리트 데 비트는 뒷일의 수습은 누이츠가 알아서 하겠지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정말로 5척의 함선으로 정지룡의 선단 중 한척을 공격했습니다. 바다의 제왕은 이 공격에 대해 곧바로 대응했습니다.
전투에 대한 전형적인 수사법인지, 아니면 그 당시 데 비트가 이끌던 부대원들에게 진짜로 그렇게 보였던지, 그도 아니면 진짜로 정지룡이 그만한 함선을 보유했었는지, 여하간에 데 비트의 부대원들은 "1000척이 넘는 정크선이 모든 면에서 우리를 압도하고 유린했다" 고 말했고,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미친듯이 달아났습니다. 정지룡의 명령으로 인해 그 즉시 정지룡 휘하 전 선단은 네덜란드 배들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고, 대파 당한채 간신히 침몰을 면한 네덜란드 함선들은 대만으로 간신히 돌아왔습니다.
누이츠는 치솟는 화를 꾹꾹 눌러참으며 먼 바다만 며칠이 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대만의 VOC는 정지룡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누이츠는 히라도에 있는 니옌로드에게 솔직하게 심정을 털어놓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신께 감사하게도, 정지룡은 그때 나타나지 않았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이곳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정지룡의 수중에 떨어졌을 것이오."
며칠이 지나도 정지룡의 "바다를 뒤덮을" 함대가 대만 해협쪽으로 보이질 않자, 누이츠는 어느정도 안심을 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불청객이 왔습니다. 일본인들이었습니다. 대만 원주민을 잡아 쇼군에게 대령했던 하마다 야효가, 그 대만인들을 본래 사는곳에 되돌려 놓기 위하여 배를 끌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태도가 몹시 적대적이라고 여겼던 누이츠는 부하들을 시켜 일본 선박들을 수색했습니다. 대포, 칼, 총, 단검, 활 등이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하마다는 당연히 이 수색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이전에는 그런일이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누이츠는 단호하게 나왔는데,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이라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명예로운 신사이자 자신의 이상대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임기를 마친 데 비트 총독 시절에는 물론 그런 일이 없었지. 하지만 지금 총독은 나다! 나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면서 수색해서 나온 다량의 무기들을 하마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잠시동안의 정적이 흐른뒤에, 하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것들은 항해 중 방어용이라오."
누이츠는 딱히 이 설명에 반론할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평상심을 되찾은 하마다는 누이츠가 일본에서 쇼군을 보지 못하고 쫒겨난 일을 언급하며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는데, 누이츠는 그러자 그들이 중국산 비단을 새로 구매하거나 중국 본토로 항해하는것을 막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예 배를 따고 떠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정지룡의 해적질에 당하는건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기에, 만약 VOC와 일본 두 세력이 마음을 먹는다면 이 시점에서 정지룡에 대항하는 동맹 세력이 구축될만도 하지만 누이츠와 하마다는 마구 대립하며 서로간에 싸우기도 바빴습니다.
누이츠는 하마다가 팽호 열도로 가겠다는것도 막았고, 심지어 일본 본토로 되돌아겠다는것도 막았습니다. 그렇게 3주 가량 하마다 일행은 대만의 제란디아 요새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만을 보냈는데, 출항 허가를 받지 못해 불안감에 시달린 하마다와 그 부하들은 이쯤 되자 공포에 질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맙니다.
그날은 1628년 6월 29일 이었습니다. 하마다는 부하들과 함께 누이츠의 숙소로 찾아가 집에 돌아갈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누이츠는 또 다시 거절했고, 일본인들은 자못 무례하게 보일 정도로 격렬하게 출항 허가를 거듭 요구했습니다. 누이츠는 계속 거절했고, 그러자
일본인들은 누이츠를 때려눕히기 시작합니다.
사자처럼 포효하며 누이츠를 때려눕히고 그를 꼼짝 못하게 제압한 일본인들은 긴 끈으로 손과 발, 허리를 결박하고 협박했습니다.
"함부로 소리를 지르면 머리통을 날려 버릴 테다!"
숙소에서 소리가 들리자 호위병들이 이변을 눈치채고 달려왔지만, 하마다의 부하들과 싸움이 붙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모습을 밖에서 보게 된 누이츠의 부관은 부하들을 불러모아 발포 명령을 내렸습니다. 총소리가 미친듯이 울려 퍼졌고, 누이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쏘지마! 쏘지 말아라! 이 자들이 날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단 말이다!'
사격은 중지되었습니다. 불안한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누이츠는 사로잡혀 꼼짝을 못하고 있고, 누이츠를 사로잡은 일본인들은 네덜란드 병력 때문에 꼼짝을 못하고 있고, 네덜란드 병력은 누이츠 때문에 꼼짝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협상이 벌어졌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네덜란드 병사들은 "숙소를 기습할것" 이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누이츠는 계속 반대했습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아들도 잡혀있었는데, 무사히 나가려면 사고가 없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비밀 전갈로 탈출 하겠다는 연락을 몰래 보냈지만, 정작 탈출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누이츠는 일본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요구 조건을 이러했습니다.
1. 안전한 통과
2. 인질 5명을 줄것. 이쪽에서도 인질 5명을 내놓겠다.
3. 네덜란드 선박들의 방향타를 떼내서 해변에 두어라. 그래야 일본 선박들이 안전하게 먼저 떠날 수 있다.
4. 900Kg의 비단을 내놓아라.
네덜란드 인들은 누이츠의 태도도 있고 해서 순순하게 승낙했습니다. 그러자 하마다는 조금더 욕심이 생겼는데, 비단 200석을 더 내놓으라고 말했습니다. 지난번에 일본인들이 중국으로 비단을 사기위해 돈을 보냈는데 도중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사라진 돈은 정지룡의 수중에 있었겠지만, 네덜란드 인들은 그런 불평을 내지도 못하고 비단 창고를 털고 현금과 어음을 마련해 부족분을 충당했는데, 그 액수가 13,540냥이나 되었습니다. 심지어 누이츠의 숙소를 떠나면서 일본인들은 금고리 1개, 은제 오일캔 1개, 소금통 1개, 식판 3개, 칼과 포크 2개까지 몸에 숨겨서 빠져나왔습니다.
하마다의 일본 선박이 출항하고, 뒤를 일본인 인질을 태운 네덜란드 에라스무스 호(그 마카오 전투에 참전했던 유서깊은 전함)가 따라갔습니다.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에라스무스 호는 인질을 석방했지만 일본인들은 지독하게 대응하는데, 인질을 풀어주긴 커녕 인질과 에라스무스 호 승무원들을 모조리 투옥시켰고 에라스무스 호는 죄다 해체해 버렸습니다. 사태를 모르고 시암이나 대만에서 나가사키에 도착한 다른 네덜란드 선원들도 무엇이라 항변할 겨를도 없이 죄다 억류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누이츠는 경악했습니다. 사태는 상상 이상으로 커졌고, 일본과 바타비아에 있는 지인들에게 곧바로 연락을 취하면서 사태를 최대한 축소시켜 말하려고 애를 썻습니다. 그는 더 큰 문제가 벌어지기 전에 어떻게 일을 해결해 볼까 궁리하다가, 자신의 경험에서 기가 막힌 책략을 짜내게 됩니다.
정지룡에게 갑자기 누이츠의 서한과 사절이 뺀질나게 드나들었고, 내용도 공손하기 그지 없는 서한들이 계속 도착했습니다. 누이츠는 정지룡에게 예전과 같은 우호를 권했고, 양측 함대가 하문에서 만나 대표자끼리 회담을 하자고 권했습니다.
정지룡은 이 정중한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리고 기막한 꼴을 당하게 됩니다.
누이츠는 그를 인질로 붙잡았습니다.
자신을 노리고 있다기 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어서 누이츠가 그러했다는것을 알기에, 정지룡은 깜짝 놀라기보단 불쾌하게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여하간에 3년 협정이 맺어져 네덜란드 선박들은 정지룡 선단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정지룡의 동생 정지호를 인질로 잡아두게 됩니다. 그는 이제 최소한 1631년까지는 네덜란드인들과 손을 잡아야 했고,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이에 응하기로 합니다. 그는 정씨 집안을 책임져야할 가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인질 사건은 조직내 정지룡의 위신을 깎아먹는 일이었습니다. 사건이 터지고 몇 주후에 정지룡은 조정 관리의 자격으로 복건의 도독을 만나기 위해 상륙해 있었습니다. 해적 처리에 대한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는데, 조직 내에서도 최고참급이던 이괴기(李魁奇)라는 인물이 사단을 벌인 것입니다. 그는 반란을 일으켜 정지룡 함대의 거의 대부분을 이끌고 떠나버리고 맙니다.
과장이건 아니건 네덜란드 인들로부터 1,000척의 정크선을 이끌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정지룡은 일을 마치고 고향 안해로 돌아오자 50여척의 고깃배를 마주하게 됩니다. 사실 아무것도 없었지만, 근처 어부들이 정지룡을 위해 싸우겠다고 하며 몰려온 것들이었습니다. 이 정도 병력이 정지룡이 키운 대함대와 상대가 될리는 만무했지만, 정지룡은 그 배들을 이끌고 이괴기가 있는 바다로 나갔습니다. 이괴기의 부대는 숫자는 최소로 잡아도 정지룡의 고깃배들에 비하면 3배는 되었으며 무장은 비교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선들이 다가오자 이괴기는 겁을 먹고 달아나버리고 맙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지룡은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었던 것인데 정지룡 함선 내에 있는 정씨 집안의 인척들과 협력자들이 전투가 벌어지면 편을 바꿀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괴기도 이를 눈치채고 있어 싸움을 회피했습니다. 이괴기는 정지룡의 협력자가 될만한 인물들을 판단해서 모조리 해변에서 처형했습니다.
이제 정지룡은 또다시 빈털터리가 되었고, 이괴기라는 막강한 적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은 정지룡의 벼슬을 박탈하지 않고, 이 바다의 제왕이 무슨 모습을 보여줄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아마 명나라 조정은 이괴기가 정지룡을 없애면 그 대역을 맡길 생각임에 분명했지만 ─ 네덜란드인들 중 일부는 이미 이괴기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판단했습니다. ─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정지룡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 조그만 고깃배들을 가지고, 어부들로 구성된 병력을 유지하면서 입출항하는 선박들로부터 증세를 거두어 함대를 다시 복구해나갔습니다. 이괴기가 머뭇거릴 동안 그 주변에서도 우려섞인 시선들이 나와, 이괴기의 대오에서 떨어져 나와 정지룡에 붙는 사람들까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정지룡은 든든한 지원군을 확보하게 됩니다. 과거 일본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네덜란드 사람 쟈크 스페크스 였습니다. 예전에 그 둘은 동인도 회사의 평사원과 이단 조직 내의 젊은 부하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시점에서 정지룡은 바다의 제왕이 되었던 사람이었고, 쟈크 스페크스는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바타비아에 있는 VOC 본사의 총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쟈크 스페크스는 본래 네덜란드 본국에 가 있었는데, 당시 법률 상 현지인 아내 사이에서 생긴 딸 사라를 데려 갈수 없었습니다. 사라는 12살이었는데, 15살 짜리 애인이 노예들에게 뇌물을 주고 사라의 방에 함부러 들어왔습니다. 사라 입장에선 억울한 일이지만 당시 바타비아의 총독이던 (마카오 공격을 계획한)얀 피터루스존 쿤은 사라가 애인과 놀아났다고 하며 남자는 죽이고 사라는 건물 청사 앞에서 태형을 때려 공개적인 망신을 주었습니다. 동인도 회사의 총독이 된 쟈크 스페크스는 분노에 차서 함선을 이끌고 바타비아로 달려왔고, 그 함선을 보고 자신의 임기도 끝장났다는것을 알게 된 쿤은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맙니다.
스페크스는 총독으로 바타비아에 오래 부임한건 아니었지만, 짦은 시간 내에 관계의 정상화를 가져왔습니다. 쿤의 정책을 폐기하고 문제를 일으킨 누이츠를 귀환시키고 좀 더 적절한 인물을 그 자리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친구 정지룡에게 네덜란드 선박들을 지원했습니다.
1년 가까이 지난 1630년 2월. 정지룡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다시 한번 바다의 제왕이 되기 위하여 어선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네덜란드 함선들과 연합하여 정렬했습니다. 그리고 이 연합 부대는 이괴기의 함대를 괴멸시켰습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뒤집기에 성공했던 정지룡이지만, 또다른 문제가 닥쳐왔습니다. 명 조정에서 그에게 바다를 떠나 산간 지역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정지룡은 고민 끝에 이를 승낙했습니다. 바다를 떠난 것입니다.
첫댓글 내가 1빠네요 잇힝~
2빠 잇힝~ 이제 산적인가요
흥미 진진한 이야기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