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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성소(1) / 돌들의 함성
이우식 베드로 (월간 성서와함께)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
요즘 환타지 소설 《해리포터와 혼혈왕자》가 초판을 100만 부나 찍을 정도로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환상의 날개를 펴고 우리에게 소곤소곤 말을 걸어오는 환타지와 같은 대목이 나온다. 그중의 한 구절이 루카 복음 19장 40절이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니? 무슨 뜻일까 어리둥절해 앞뒤 문맥을 눈여겨 읽어보니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 19,38)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보이시는 예수님의 응답이다.
어찌 돌들이 소리 지를 수 있을까? 사람들이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을 목격하고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진다는 따끔한 질책의 말씀이 아닐까. 그런데 요즘은 이런 일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곧잘 벌어진다. 목격자가 없는 사건이 벌어졌을 경우에 그 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조사해서 침묵의 증언을 읽어낸다. 몇 천 년이나 되는 오랜 역사가 흐른 일들도 그 시대의 유적을 발굴하고 연구해서 종합적으로 재구성해낸다. 이제는 원천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돌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시대가 활짝 열렸다.
비단 과학으로 면밀하게 검증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돌들이 소리 지르는 것은 아니다. 신앙인들은 누구나 돌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다. 묵상이나 관상 등의 방법을 통해서, 감정이입을 통한 사물과의 대화나 내게 불현듯 떠오르는 어떤 강렬한 느낌으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인 휘트만은 잎사귀 하나에서도 하느님의 지문을 느낄 수 있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기본적으로 풀포기 하나 돌멩이 하나에서도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감지할 수 있는 은총을 넘치도록 받은 사람들이지 않은가.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그들이 살던 시대에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서 도란도란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진장 수록되어 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이 서로 빼앗고 싸우고 사랑하며 희생하는 감동적인 무대가 펼쳐진다. 그런데 막상 성경의 사건이 펼쳐지는 무대에 두 발을 내딛고 보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요즈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는, 아니 끊임없는 영토분쟁의 회오리에서 늦추어진 경제성장으로 우리나라의 70-80년대에 볼 수 있는 풍경만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큰 맘 먹고 떠난 성지순례가 곧잘 허탈감만 가져오는 여행이나 유람에 그치고 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해 공관복음 연재에 이어 새해 들어서는 이스라엘의 성소(聖所)를 둘러보고자 한다. 사람과 하느님의 만남이 가장 극적으로 실현된 장소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한평생 하느님과 함께 신앙인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려 애썼던 신앙선조들이 예기치 않게 밀어닥치는 사건에 직면하면서 한탄과 애소, 찬양과 감사 등의 온갖 반응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던 성소에서 행여나 우리의 고민과 청원을 풀어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린 길재(吉再)는 폐허만 남은 고려 수도 개성을 둘러본 감흥을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하며 시조로 읊었다. 성서의 무대에서 활약하였던 신앙선조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이 살았던 산천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산천에서 오래도록 침묵으로 일관해 온 돌들의 아우성을 듣는 귀와 시공간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눈을 그분께서 순례의 길을 떠나는 우리 모두에게 열어주시기를….
[이스라엘의 성소(2)-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우식 베드로(월간 성서와함께)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며”(2사무 24,2)
지난해에 인구주택총조사가 5년만에 시행되었다. 조사원을 대대적으로 모집 선발해서 11월부터 보름간에 걸쳐 실시되면서,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즐겨 부르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로고송을 매스미디어로 내보냈다. 개인정보 누출을 꺼리는 사람들의 반발을 미연에 조금이나마 방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렇게 해서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벌이는 조사 작업은 꽤 많은 인력과 자금을 대거 투입한 대작업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IT산업도 발전하지 않고 교통편도 발달하지 않은 예전에도 인구조사를 했을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지역을 모두 장악한 다윗 시대에 인구조사를 한 기록이 나온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2사무 24,2) 다윗의 명령을 받은 요압은 군대의 장수들과 함께 이스라엘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아홉 달 스무 날만에”(2사무 24,8) 인구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인구조사의 영역을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로 언급한 까닭은, 이 두 도시가 이스라엘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이기 때문이다. 헤르몬 산기슭에 위치한 단은 이스라엘 영토의 북쪽 경계선을 나타내고, 사해 무릎쯤에서 왼쪽으로 지중해와 사해의 중간쯤 되는 곳에 위치한 브에르 세바는 남쪽 경계선을 나타낸다. 그중에서 브에르 세바는 사해의 남단 도시 아라바와 해안을 잇는 길과 헤브론에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 서로 교차되는 지점에 있어서 대상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분쟁이 자주 벌어지곤 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도 브에르 세바에서 아비멜렉과 분쟁을 일으킨 끝에 우물을 차지할 수 있었다. 브에르 세바의 뜻은 전승에 따라서 조금씩 달리 제시된다. 아비멜렉에게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주고 아브라함이 우물을 팠다는 증인으로 삼았다고 해서(창세 21,28-30) ‘일곱의 우물’로 풀이하기도 하고, 이사악이 아비멜렉과 불가침 서약을 맺고 난 다음에 우물을 팠다고 해서(창세 26,28-33) ‘서약의 우물’로 풀이하기도 한다.
브에르 세바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은 파란만장하다. 아브라함의 첩 하가르와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나 빵과 물 한 가죽부대로 브에르 세바 광야에서 헤매며 생존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창세 21,14-19). 야곱은 기근이 들자 이집트의 실력자가 된 아들 요셉을 찾아 이주하는 길에 브에르 세바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룻밤을 묵는 가운데 환시 중에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창세 46,3). 또한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가 나이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곳도 브에르 세바였다(1사무 8,2).
삼년이라는 극심한 가뭄을 맞아 비를 내리게 하는 기도를 드려서 어느 신이 참된 신이지를 가리자며 카르멜 산에서 대결하여 바알의 예언자들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모두 몰살시킨 예언자 엘리야가 왕비 이제벨의 분노를 피해 도망치다가 시종을 남겨둔 곳도 브에르 세바였다. 엘리야는 브에르 세바에서 광야로 하룻길을 더 들어가 기도하다가 천사가 마련해 준 음식을 먹고 무사히 호렙 산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1열왕 19,1-8). 아합 가문의 여인으로 유다 왕국에 시집 와서 왕의 혈육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아탈야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요아스의 어머니 치브야는 브에르 세바 출신이었다(2열왕 8,26-27; 12,2).
이런저런 사연을 안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며 주고받았던 이야기들! 그 이야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지만, 어느 상황에 처해서든 하느님을 찾았던 그들의 신앙 열정만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이스라엘의 성소(3)-헤브론으로 가거라]
이우식 베드로(월간 성서와함께)
“다윗은 헤브론에서 일곱 해 여섯 달 동안 다스리고”(1역대 3,4)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통상로는 국경도시 브에르 세바 다음으로 헤브론을 거친다. 브에르 세바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통상로의 중간쯤에 위치한 헤브론은 예루살렘 남쪽으로 26.6km 정도 떨어져 있으므로 어느 쪽에서 걸어도 한 나절 거리이다. 예로부터 우물과 샘이 풍부했으므로 물도 보충하며 하룻밤 묵어가기에는 최상의 요건을 갖추었다. 이래저래 사람들이 모여들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갈수록 활기찬 성읍으로 번창할 수밖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찰하러 각 지파에서 한 명씩을 차출해서 보냈을 때, 그들이 가져와 공동체 앞에 보인 포도송이, 석류와 무화과 등은 헤브론의 에스콜 골짜기에서 따온 과일이었다(민수 13,21-24). 정찰단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떠는데, 여호수아와 칼렙만 정복하러 가기를 주장하였다. 주님의 명령에 끝까지 충실한 이 두 사람은 훗날 가나안 땅을 무사히 밟을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고달픈 생을 마쳤다. 이후 칼렙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헤브론을 자신의 몫으로 받을 수 있었다(여호 14,6-15).
헤브론은 다윗과 관련되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다. 사울이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사망하자(1사무 31장), 그동안 사울을 피해 필리스티아에 망명까지 한 다윗도 본격적으로 자신의 터전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는 여차하면 이집트나 필리스티아로 달아날 수 있도록 국경도시 브에르 세바 부근에 있는 치클락에 머물러 있었는데(2사무 1,1),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유다의 성읍들 가운데에서 머무를 터전을 골라잡을 정도로 대담해진 것이다(2사무 2,1).
다윗 진영이 예루살렘에서 이틀 거리에 떨어져 있었는데 북상하여 헤브론에 정착함으로써 하루 거리로 가까워지자, 사울 진영은 그동안의 터전이었던 기브아(1사무 13,1-2)를 포기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기브아가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성읍이었기에 아예 요르단강을 건너 암몬 땅 마하나임에 새 터전을 마련함으로써(2사무 2,8-9), 다윗 진영과 사흘 거리를 두고 군사적으로 대치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윗이 내놓으라는 듯이 예루살렘으로 북상하는 상승세를 띠자, 이때다 싶어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우선, 그의 가문인 유다 사람들부터 혈연을 내세워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유다 집안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2,4). 그 후 사울을 이은 이스보셋이 살해당하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몰려가서 계약을 맺고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는 것으로 급물살을 탄다(2사무 5,1-3). 히브리어로 ‘연합, 동맹’이라는 뜻의 헤브론과 잘 어울리는 결말이다.
그로부터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마흔 해인데(1역대 29,27), 처음 일곱 해 여섯 달은 헤브론에서 다스렸다(1역대 3,4). 여기서 다윗은 맏아들 암논을 비롯하여 여섯 아들을 얻었다(2사무 3,2-5). 그중에 셋째인 압살롬이 훗날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기 위해서 내건 이유가 “제가 헤브론에 가서 주님께 한 서원을 채우게 해 주십시오”(2사무 15,7)였다. 헤브론에 인접한 북쪽 마므레의 참나무에 아브람이 주님을 위하여 쌓은 제단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창세 13,18).
이스라엘에는 아직 중앙 성소가 세워지기 전이기에 각 지역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성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성소가 위치한 곳은 주로 샘이나 나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헤브론의 근방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도 생명력이 넘쳐나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일 만큼 가지가 무성한 나무였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성심껏 받들어야 할 성소가 반란의 중심기지가 되어 부자간의 칼부림으로 발전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길을 따라 벳 세메스로 올라가면-이스라엘의 성소(4)]
이우식 베드로(월간 성서와함께)
헤브론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한 나절 거리에 있는 성읍이라면, 벳 세메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한 나절 거리(38.4km)에 있는 성읍이다. 그 방향으로 한 나절을 더 가면 지중해변에 세워진 성읍 아스돗에 이르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동서의 교역로를 잇는 요충지이다. 이 성읍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에 헤브론과 마찬가지로 레위인들의 성읍으로 배정받았다(여호 21,16).
벳 세메스가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인상적으로 부각된 계기는 엘리가 판관으로 다스리던 시대에 벌어졌던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이다. 에벤 에제르에 진을 친 이스라엘 군사와 아펙에 진을 친 필리스티아인들의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가 사천 명이나 죽는 패전을 기록하였다(1사무 4,2). 이에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실로에 안치되어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를 가져오게 하였다.
당대 사람들은 전쟁을 당사자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그 당사자들이 믿는 신들의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느님이 머무르고 계심을 잘 나타내는 계약 궤가 성소에서 나와 전쟁터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친히 군사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가신다는 강력한 표징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진영에서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이 터져 나올 수밖에(1사무 4,4). 그리고 필리스티아인들은 그들과 맞서는 이스라엘 진영에 신이 도착했다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두 번째 전투가 벌어지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스라엘군 보병이 무려 삼만이나 쓰러지는가 하면, 하느님이 현존해 계신 것으로 생각되었던 하느님의 궤마저 빼앗기는 얼토당토 않는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웠는지는 이 소식에 접한 사제 엘리가 의자 뒤로 넘어가 목이 부러져 죽고, 하느님의 계약 궤를 지키다 전사한 피느하스의 아내가 갑작스런 산통으로 아이를 낳으며 남긴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구나”는 유언으로 잘 대변된다(1사무 4,17-22).
하느님의 계약 궤가 이스라엘 진영에만 파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필리스티아인들은 하느님의 궤를 빼앗은 후 다곤 신전이 있는 아스돗으로 궤를 안치시켰는데, 아침마다 다곤 신상이 궤 앞에 쓰러진 채 얼굴을 들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1사무 5,1-5). 뿐만 아니라 아스돗 일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종기가 나는 불상사에 서쪽으로 이스라엘 진영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에크론에 하느님의 궤를 떠밀다시피 내보냈다. 이스라엘에서 직접 하느님의 궤를 찾아오지 못하자, 궤 스스로 이스라엘 진영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던 셈이다.
에크론에서는 종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일곱 달 동안 소동이 끊이질 않자 필리스티아인들은 긴급회동을 갖고, 하느님의 궤를 이스라엘 진영에 속해 있는 벳 세메스로 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다. “만일 수레가 제 고장에 난 길을 따라 벳세메스로 올라가면, 그가 우리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의 손이 우리를 친 것이 아니라, 재앙이 우리에게 우연히 닥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사무 6,9).
그런데 하느님의 궤를 실은 수레가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벳 세메스로 똑바로 나아가지 않는가. 벳 세메스인들은 불시에 돌아온 하느님의 궤를 기쁨으로 맞이하며 제사를 드렸지만, 하느님의 진노는 필리스티아인들만이 아니라 벳 세메스인들에게도 내렸다. 벳 세메스가 태양신(샤마쉬)의 성전(벳)이라는 뜻을 지닌 성읍이었기 때문일까? 이런 재앙 때문에 하느님의 궤는 벳 세메스를 떠나 예루살렘에서 서북 방면으로 10km 떨어진 키르얏 여아림에 옮겨져 이십 년 동안 안치되었다(1사무 7,1-2).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이스라엘의 성소(5)
이우식 베드로(월간 성서와함께)
예루살렘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성소이다.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오래도록 이스라엘 백성의 정치적 중심을 잡아주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솔로몬 시대에 건립된 이래 신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런 비중과 위치에 비추어 볼 때에는 성경에 일찍 언급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가는 대목에 가서야 비로소 나온다. “예루살렘 임금 아도니 체덱은, 여호수아가 아이를 점령하여 그 곳을 완전 봉헌물로 바쳤다는 소식을 들었다”(여호 10,1). ‘살렘’이라는 줄인 이름은 멜키체덱을 소개할 때에 살짝 언급된다(창세 14,18).
여호수아가 펼친 가나안 정복 전쟁은 청동기 시대에 벌어졌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에 정착한 인구가 적고 결성된 조직도 소규모라, 작은 성읍을 다스리던 도시국가가 난립하던 시대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이때 여호수아가 자체적으로 방어하던 가나안의 성읍을 연달아 손쉽게 무너뜨리며 진격하자, 위협을 느낀 예루살렘 임금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다른 도시국가의 임금들과 연합전선을 펼쳐서 대응할 수밖에(여호 10,2-5). 교전 결과는 참패로 끝나고 예루살렘에 거주해 왔던 여부스족은 이스라엘 백성에 몸 붙여 살게 되었다(여호 15,63; 판관 1,21).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은 이미 여부스족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북쪽 지파들과 남쪽 지파들과의 싸움이 오래도록 지속된 데다가, 어느 지파의 영역에도 속해 있지 않았기에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그전까지는 북쪽 지파들과 남쪽 지파들의 완충지대에 위치해 있었기에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온 지파를 통치하기에 적합한 최적의 요충지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어느 지파의 영향력도 받지 않는 그 자신만의 도성을 그 자리에 건설하게 되었다(2사무 5,6-7).
그리고는 곧바로 하느님의 궤를 다윗의 성으로 옮기려는 조치를 취한다. “다윗은 유다 바알라에서 하느님의 궤를 모셔 오려고,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그곳으로 떠났다”(2사무 6,2). 유다 바알라는 필리스티아인들의 전투에서 빼앗긴 하느님의 궤가 20년 동안 안치되었던 성읍 키르얏 여아림의 다른 이름이다(여호 15,9; 1역대 13,6). 예루살렘에서 서북 방면으로 10km 떨어져 있었으므로, 다윗이 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추며 행차할 만한 거리이다(2사무 6,5.14). 다윗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그를 후원해 준다는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퍼포먼스를 행함으로써, 이후 다윗 왕조는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사상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지형적으로 보아도 예루살렘은 명당자리이다. 해발 760m의 고원지대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푸근하게 감싸여 있는 형상이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감싸고 계시다”(시편 125,2)는 노래가 흘러나올 만하다. 예루살렘의 지형에 착안하여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즈카 2,9)는 예언이 선포되어도 자연스러울 만큼.
산에 둘러싸인 도시는 아무래도 해돋이와 해넘이에 민감하다. 우가릿 신화에 나오는 새벽과 여명의 여신 ‘샬렘’의 기초라는 뜻으로 도시 이름이 지어진 것도 그 영향인지도 모른다. 히브리어는 본래 모음이 없고 자음뿐이다. ‘샬렘’을 자음만 표기하면 ‘ㅅㄹㄹㅁ’이다. ‘샬렘’으로도 읽을 수 있고, ‘샬롬(평화)’으로도 읽을 수 있다. 예루살렘을 ‘평화의 도시’로 보는 통속적인 풀이에는 성지 중의 성지인 예루살렘의 이름에 좋은 지향을 담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라마에 있는 집으로(1사무 1,19)]
/이스라엘의 성소(6)
이우식 베드로(월간 성서와함께)
한 성읍이 명성을 떨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그 성읍의 주민 가운데 유명한 인물이 나타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곧바로 명소로 둔갑해 버린다. 라마도 그런 성읍에 속한다. 이스라엘에 라마로 불리는 성읍은 네겝에 있는 시므온 지파의 성읍서부터 아셀의 국경성읍에 이르기까지 다섯 곳이나 된다. 그중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되어 조금이나마 알려져 있는 성읍은 에브라임의 산악 지대에 위치한 성읍과 예루살렘 북쪽 8km 위에 위치한 성읍이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에브라임에 있는 라마는 라마다임이라고도 불리며, ‘높은 곳’이라는 뜻에 걸맞게 산악 지대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읍은 사무엘이 태어난 고향이자 묻힌 장소이기도 하다(1사무 1,19; 25,1; 28,3). 사무엘의 부모는 해마다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릴 정도로 경건한 부부였는데, 한나는 오래도록 아이가 없어서 간절하게 기도한 끝에 사무엘을 가지게 되었다. 한나는 그 기쁨으로 사무엘을 주님께 봉헌하였고, 사무엘은 엘리의 뒤를 이어 주님의 예언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라마는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시대에 신흥성소로 각광을 받았다. 사무엘이 기존의 성소로 자리를 잡은 베텔과 길갈과 미츠파를 돌며 이스라엘을 위하여 판관으로 일하면서도, 라마에 거주하면서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기 때문이다(1사무 7,15-17). 그러기에 사무엘이 나이가 들자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기 위하여 라마에 올 수밖에 없었다. 사무엘은 라마의 산당에 제사 드리러 가는 도중에 우연히 만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라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충실히 따랐다. 이로 말미암아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져, 바빌론에 멸망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왕정사가 파란만장하게 펼쳐지게 되었다.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라마는 예루살렘 위에 위치해 있으며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분단된 이후에 전쟁터가 되었다. 북왕국을 창설한 예로보암에서 나답으로 왕위가 이양되어 불안정한 정국을 틈타 모반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바아사는 남왕국 유다의 임금 아사와 내내 전쟁을 벌였다(1열왕 15,16). 이때 바아사는 유다를 치러 올라와 예루살렘을 봉쇄하기 위하여 라마를 요새화하였다. 코 앞에 있는 도시가 적진으로 떨어지자 아사는 서둘러 아람 임금에게 은과 금을 예물로 드려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였다. 바아사 임금이 두 나라의 협공에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아사 임금은 라마를 요새화하는 데 사용된 돌과 목재를 옮겨 인근의 성읍 게바와 미츠바를 요새화시켜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처럼 라마는 위치상 예루살렘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게 하는 성읍이라 무척 중시되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시리아의 침공이 위협적임을 생동감 있게 선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근방의 성읍 게바와 라마와 기브아를 잇따라 열거한다. “그들은 협곡을 지나면서 ‘우리는 게바에서 하룻밤을 묵으리라.’ 한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는 달아난다.”(이사 10,29). 이런 위치로 말미암아 라마는 기원전 587년 나라가 망했을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포로들을 바빌론으로 데려가기 위한 집결지가 되기도 하였다(예레 40,1).
그러기에 예레미야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 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예레 31,15)는 예언을 선포하지는 않았을까. 이 성읍의 근처에 라헬의 무덤이 있다는 전승을 바탕으로…. 이 예언은 신약성경에 들어와 예수님의 탄생 기사와 맞물리면서 헤로데의 명에 따라 죽은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죽어간 사건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인용되었다(마태 2,17-18).
[온 이스라엘 백성을 미츠파로(1사무 7,5)]
/이스라엘의 성소(7)
이우식 베드로(월간 성서와함께)
성경에는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지역인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달에 소개한 ‘라마’도 그렇고, 이달에 소개할 ‘미츠파’도 그렇다. 미츠파는 팔레스티나 북쪽과 길르앗, 유다와 베냐민, 그리고 모압에 같은 이름의 성읍이 세워져 있다. ‘살피는 곳 내지 망대’라는 ‘미츠파’라는 뜻에 걸맞게 이들 성읍에는 이해 당사자들 간에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거나, 하느님을 따라 살겠다는 서약을 맺었다는 전승이 전해 내려온다.
우선, 성경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미츠파는 이스라엘의 성조 야곱과 관련되어 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밑에서 더부살이 20년을 보내고 몰래 도망칠 때에 뒤쫓아 온 라반과 계약의 돌무더기를 세우면서 ‘미츠파’라는 이름을 붙인다. 두 딸을 야곱과 함께 떠나보내는 아버지로서 딸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우리가 서로 볼 수 없는 동안 주님께서 우리를 살피시기를 바라네.”(창세 31,49)는 지향을 담았던 것이다. ‘살핀다’는 뜻을 지닌 ‘미츠파’란 이름을 떠올리며 일생을 신중하게 살아가라는 덕담을 남긴 셈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야곱 일행이 야뽁강을 건너기 전에 벌어진 사건이므로, 미츠파라 불리는 이곳은 팔레스티나 서쪽의 길르앗 지방에 위치해 있다. 판관 입타는 암몬 자손들을 몰아내고 길앗 주민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서약을 맺기에 앞서 유서 깊은 이 성읍을 찾았다(판관 11,1). 입타가 이 성읍에 와서 주님 앞에서 서약의 내용을 되풀이했다는 것은 곧 미츠파에 성소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성읍보다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더 유명한 미츠파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요새이다. 필리스티아인들에게 계약의 궤까지 빼앗겼다 돌려받은 치욕적인 사건 이래로 그 기세에 20년 동안 눌려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 하염없이 탄식만 드릴 때, 판관으로 일하던 사무엘이 그들을 불러 모았던 성읍이 바로 미츠파다. “온 이스라엘 백성을 미츠파로 모이게 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를 드리겠소.”(1사무 7,5).
사무엘의 제안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치러 올라왔다.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휩싸인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 그들을 구해달라며 쉬지 않고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사무엘이 바치는 번제물을 받으시고는 필리스티아인들 위에 천둥을 울려 이스라엘을 편들어 주는 이적을 펼쳐 억압의 굴레를 벗겨주었다(1사무 7,7-11).
그 이후에 사무엘은 성조 야곱처럼 미츠파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는 “주님께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면서 돌의 이름을 에벤 에제르라 하였다(1사무 7,12). ‘에벤 에제르’란 뜻은 ‘도움 주는 돌’ 또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셨음을 기념하는 돌’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셔서[‘미츠파’의 뜻] 도움을 주셨음을 되새기는 기념석인 셈이다.
이 미츠파 성읍은 지난달에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기 위해서 요새화한 라마 부근의 성읍이다. 그러기에 바아사가 아람군의 위협을 받아 물러서자 라마를 요새화하는 데 들어간 건축 재료를 뜯어다가 곧바로 미츠파를 요새성읍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살펴주시기를 기원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일생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힘으로는 이겨내기 어려운 고난이 밀어닥친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느님께서 굽어 살펴주시기를 간청하며 기원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돌’을 마당에 세우지 못한다면, 내 마음속에라도 ‘미츠파’라는 돌을 하나 세워보자.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쉬지 않고 부를 때에 하느님께서 어려움을 이겨내게 도와주셨다는 놀라운 체험이 뒤따르지는 않을까.
[베텔에서 하느님을(호세 12,5)/이스라엘의 성소(8)]
이우식 베드로(월간 성서와함께)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의 양상은 사람들마다 다르다. 날마다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서 만나 뵐 수도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극적인 순간에 하느님을 체험하기도 한다. 그런 대표적인 예로 이스라엘의 성조 야곱의 베텔 체험을 꼽을 수 있다.
베텔은 예루살렘에서 지난 호에 다룬 라마, 미츠파를 거쳐 올라가는 산악도로에 위치해 있다. 예루살렘 북쪽으로 23km쯤 떨어져 있으므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을 종주하는 거리(약 25km)쯤 된다고나 할까. 산악도로라고는 했지만 높낮이가 크게 차이나지 않으므로 하루 걸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야곱이 하란으로 가다가 해가 져서 밤을 새운 곳이 베텔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했다면야 완만한 능선길이라 크게 무리가 되지 않는 거리이겠지만, 야곱이 출발한 곳은 이스라엘 국경의 최남단인 브에르 세바이다. 브에르 세바에서 헤브론을 거쳐 예루살렘을 지나는 산악도로라, 행상을 떠날 때에는 보통 2박을 하는 거리를 하루 만에 돌파했으니 엄청난 속도로 주파한 셈이다. 해가 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체력이 고갈되고도 남았을 거리이다. 그만큼 형 에사우에게서 받는 생명의 위협이 급박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꾸었던 꿈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던 야곱에게 크나큰 위로와 희망을 선사했으리라. 하늘까지 뻗어 있는 층계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가는 장면은 지상에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 야곱에게 하늘로 가는 길만이 탈출구임을 시사해 주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종족이 복을 받으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은 자신의 이권에 연연해 형 에사우의 몫을 비열한 방법으로 가로챘던 야곱의 양심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되었으리라. 이 체험에서 그 장소는 야곱에게 하느님이 계시는 성소로 각인된다.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구나.”(창세 28,17) 이십 년 후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야곱은 하느님을 체험한 자리에 돌아와 제단을 쌓았다(창세 31,38; 35,7).
이스라엘의 성조와 얽힌 유래가 전해내려 오기에 베텔은 하느님의 신탁을 받는 중요한 성소로 입지를 굳혔다. 판관 시대에 이스라엘의 온 지파가 연합해서 벤야민 지파가 지은 죄를 응징하기 위하여 쳐들어갈 때에, 하느님의 뜻을 묻기 위해 찾은 성소가 베텔이었던 것을 보아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판관 20,18). 그러기에 사무엘도 베텔과 길갈과 미츠파를 순회하면서 판관으로 활동하였다(1사무 7,16).
이렇게 명성이 높은 성소이기에,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갈라질 때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릴 당시에 핵심성소였던 예루살렘으로 쏠리는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북왕국을 다스리게 된 초대 왕 예로보암은 베텔과 단에 금송아지상을 세워서 백성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 성소를 방문하지 못하게 하고 그곳에서 분향을 드리게끔 유도하였다(1열왕 12,26-33). 약속의 궤나 금송아지나 모두 하느님이 그 위에 앉아 계신다는 하느님 현존의 상징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승리자의 시각으로 기록된다. 예로보암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1열왕 12,28)는 말로 하느님 현존의 상징으로 제시했는데, 후대의 역사가는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탈출 32,4)고 변형시킴으로써 북왕국의 성소분리정책을 우상숭배로 몰아간다. 북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멸망하고 그후의 역사는 남왕국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기록되었기에. 개개인의 순수한 신앙이 정략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슬픈 사실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실로에서 주님의 축제가(판관 21,19)
/이스라엘의 성소(9)]
이우식 베드로(월간 성서와함께)
성소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푹 빠져 있어서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에 서면, 새삼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는 시야가 열리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고대인들은 성소에서 하느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제의를 가지며 흥겨운 축제의 장을 마련하였다. 요즈음처럼 휴가니 여가선용이니 하는 것이 없었던 시대에 주님 앞에서 드리는 축제는 그야말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성소에서나 이런 축제가 벌어졌겠지만, 성경에서 벌어진 사건과 밀접히 연관된 성소는 실로이다. 단오날을 맞아 아름답게 단장한 아낙네들이 그네를 타고 뛰어오르는 모습에서 선남선녀의 눈이 맞았듯이, 주님의 축제의 날에 모여든 선남선녀들 가운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스라엘도 대가 끊길 위험에 처한 벤야민 지파의 용사들에게 주님의 축제를 맞아 윤무를 추러 나오는 실로 여자들을 보쌈해 가도록 허용했으니까(판관 21,15-23).
실로는 스켐, 길갈과 함께 초기 이스라엘의 3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지난 호에 다룬 베텔에서는 북쪽으로 약 5Km 떨어져 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로 등장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어느 정도 정복한 후에 그들을 한데 불러 모은 장소가 실로였다(여호 18,1). 그동안 이스라엘의 행군의 중심 역할을 했던 만남의 장막은 이동성이 강한 성소였으나, 정착할 땅을 차지한 상태에서 실로에 만남의 장막이 펼쳐졌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의 중심성소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더군다나 12지파 가운데 르우벤 지파, 가드 지파, 므나쎄 지파, 유다 지파, 에프라임 지파 등 다섯 지파가 야훼의 상속 재산을 받은 상태에서, 아직 영토를 차지하지 못한 일곱 지파들이 차지할 영토를 분배하는 중요한 결정이 실로에서 내려졌으므로(여호 18,10), 그 위치가 더욱 확고부동해졌음에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판관 시대 말기에 엘리 사제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에 왕정을 도입한 사무엘이 판관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곳도 실로였다.
이렇게 명성을 떨치던 실로가 성소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리게 된 계기는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실로에 모셔진 주님의 계약 궤를 뺏기게 된 사건이다. 패전과 더불어 계약 궤를 모셨던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을 뿐만 아니라(1사무 4,11), 엘리 또한 그 소식에 놀라 의자에서 넘어져 죽었다(1사무 4,18). 우여곡절 끝에 주님의 계약 궤는 돌아왔으나 실로에 안치되지 않고, 키르얏 여아림에 안치됨으로써, 성소로서의 실로의 위상은 크게 추락했을 것으로 보인다. 엘리를 이어 판관으로 활동하였던 사무엘은 베텔과 길갈과 미츠파와 라마를 돌아다녔을지언정 실로에 들렀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1사무 7,15-17).
엘리의 증손인 아히야가 실로에서 주님의 사제로 나열되는 것을 보면(1사무 14,3), 성소로서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영향력이 감소한 것만은 분명하다. 더구나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할 때 엘리 집안의 에브야타르가 반대 진영인 아도니야를 지지하다가 사제직에서 내쫓김으로써 중앙권력층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1열왕 2,27). 이런 전력이 있어서인지 실로 출신의 아히야 예언자는 예로보암을 부추겨 솔로몬에 반기를 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왕국을 남북으로 분열하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1열왕 11,2939).
주님께 축제를 지냈던 실로 성소는 이런 역사를 통해 예레미야 시절에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급기야는 하느님의 징벌을 내린 대표적인 장소로 기억되었으니 아이러니하다(예레 7,12-14). 우리의 성소가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여호 24,1)
/이스라엘의 성소(10)]
이우식 베드로(월간 성서와함께)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아브람은 일흔 다섯 살에 이와 같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은 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곧바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창세 12,7)는 말씀을 들은 곳에 제단을 쌓고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어디일까? 모레의 참나무가 서있는 스켐의 성소이다. 스켐에서 아브람은 처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약속의 땅에 마침내 도착했음을 알렸던 것이다.
그러나 스켐은 유목민이었던 아브람이 정착해서 살 만한 충분한 초원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니 양과 소들을 먹일 초원을 찾아 남쪽의 네겝 방향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유목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도 그 일대에 기근이 들면 이집트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에서 아브람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면서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였다. 그렇게 어려운 순간이 지나고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왔을 때, 아브람은 자신을 불러주신 하느님께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스켐으로 돌아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거듭 확인받을 수 있었다(창세 13,1-18).
아브람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징표는 손자인 야곱 대에 와서야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야곱은 형 에사오와 갈등을 겪던 끝에 할아버지 아브람이 떠나온 하란으로 도망쳐 이십 년 동안이나 고생한 뒤에야 가나안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제일 먼저 한 행동도 아브람처럼 제단을 세우는 일이었으나, 스켐 성읍에 도착해 천막을 친 땅을 먼저 사들였다(창세 33,18-20). 얼마 되지 않는 땅이나마 가나안 땅의 일부라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몇 세대가 흐른 뒤 이집트를 탈출해 온 이스라엘 백성이 야곱의 아들로 이집트에서 재상이 된 요셉의 유골을 모셔와 스켐에 안치시킴으로써, 스켐은 명실공히 이스라엘 백성의 성소가 되었다(여호 24,32). 더군다나 모세에 이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가나안에서 전투를 벌여 예리코와 아이를 점령한 이후에, 스켐에 인접해 있는 에발산에 제단을 쌓았다(여호 8,30).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실제로 차지하게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후 가나안 정복 전쟁을 어느 정도 치룬 뒤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해, 하느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면서 누구를 섬길 것인지를 결단하게끔 이끌었다.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여호 24,15).
이런 배경이 있기에 스켐은 이스라엘 온 지파의 의견을 수렴하는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떨쳤다. 르하브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선조들이 가나안에서 새 생활을 시작할 때 스켐에 모여서 야훼 하느님만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듯이, 온 이스라엘의 인준을 받기 위해 스켐으로 가야만 했다(1열왕 12,1). 그러나 르하브암은 선조들로부터 이어 내려온 이스라엘 온 지파의 화합을 도모하지 못하고 권력으로 내리누르려 했기에 이스라엘은 남북 왕국으로 분열되는 비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후 스켐은 예로보암과 그의 아들 나답이 다스리던 이십 여 년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어 정치적․종교적 중심지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바아사가 예로보암 집안을 치고 왕위에 올라 수도를 티르차로 옮기면서부터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스켐은 히브리어로 ‘어깨’라는 의미인데, 하느님과 백성의 어깨가 되지 못하고 권력행사에만 눈을 돌린 탓에 그런 길을 걷게 된 것은 아닌지….
[단에 이르기까지(1역대 21,2)
/이스라엘의 성소(11)]
이우식 베드로(월간 성서와함께)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약소국이다. 따라서 주변의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사대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남쪽으로는 이집트 제국의 영향권에 있었고, 북쪽으로는 아시리아, 바빌론 제국의 외풍에 시달려야만 했다. 결국에는 친이집트 정책을 펴다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 제국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 제국에 남왕국 유다 또한 무너질 수밖에 없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
그런 약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전성기를 누렸던 시대가 있었다. 남북의 제국들이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에 주변 왕국들을 힘으로 누르고 그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였던, 다시 누리지 못할 꿈 같은 전성기가 바로 다윗-솔로몬 시절이다. 그때의 이스라엘은 바로 사막도시 브에르 세바에서 레바논 산맥에 위치한 산악도시 단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그래서 다윗 왕도 요압에게 명을 내려 인구조사를 하는 영역을 영토의 남쪽 끝인 브에르 세바와 북쪽 끝인 단으로 지정하였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2사무 24,2).
이런 꿈은 나라를 모두 잃고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팔레스티나로 돌아온 귀환민들에게도 그대로 통용되었다. 예루살렘과 인근 지역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던 그들에게는 그 옛날 영화를 누리던 왕국을 이상향으로 삼아 자신들의 초라한 신세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북녘 단의 영역은 가까이 갈 수 없는 곳이었기에 영토를 나타내는 방향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한다. 열왕기 사가가 북쪽 단에서 시작해서 남쪽 브에르 세바를 인구조사의 영역으로 이야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역대기 사가는 남쪽 브에르 세바에서 출발점으로 삼아 북쪽 단을 자신들이 꿈꾸는 영토로 지향한다. “자, 브에르 세바에서 단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여, 그들의 수를 알 수 있도록 나에게 보고하시오”(1역대 21,2).
성경에서 제일 처음 언급되는 단이라는 지명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연계되어 있다. 이집트에서 재산을 불려온 아브라함에게서 분가한 조카 롯이 전쟁에 휘말려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 추격하다가 멈춘 곳이 바로 단이다(창세 14,4). 실제로 단은 페니키아 영토인 티로와 같은 위도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헤르몬산 기슭에 위치해 있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성소들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이 지역이 이스라엘의 영토로 여겨진 것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단 지파와 얽힌 사화 때문이다. 예루살렘과 베틀레헴 지역의 서쪽 평야를 차지하였던 단 지파에서 정착할 땅이 부족하자 북쪽으로 눈을 돌려 납달리 지파의 북동쪽에 위치한 라이스를 무력으로 점령하고는, 자기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서 성읍의 이름을 바꾸었던 것이다(판관 18,28-29). 이와 함께 미카 집안의 사제였던 레위인을 지파의 사제로 삼아 단을 성소로 꾸몄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될 때에 북왕국을 다스리던 예로보암은 자국민이 더 이상 남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순례가는 일이 없도록 막기 위해서 나라의 성소를 지정할 때, 남왕국의 접경에 위치해 있는 베텔과 함께 북쪽 영토의 끝인 단에 금송아지 상을 세웠다(1열왕 12,29-30). 그만큼 단이 성소로서 중요시된 것은 헤르몬산 기슭이라 온갖 나무들이 우거져 있을 뿐 아니라 헤르몬산에 쌓인 만년설이 녹아서 솟는 커다란 수원지였기 때문이다. 온갖 동식물에게 생기를 주는 단 성소의 생명력이 ‘한라에서 백두까지’를 외치며 하나됨의 염원으로 타오르는 우리들을 적시는 생명의 샘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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