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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색권(財色權), 욕망을 어찌할 것인가?
약 1:15, 딤전 6:7-10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약 1:15)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딤전 6:7-10)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전한 야고보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박해와 이방인들의 냉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적 압박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서로의 것을 나누는 신도의 공동생활을 해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가난한 자와 부자간의 갈등이 벌어진 것입니다.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빈부 갈등에 대한 야고보의 대답은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형제는 하느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을 기뻐하고 부요한 형제는 하느님께서 낮추어주시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아무리 부요한 사람이라도 들에 핀 꽃처럼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움이 없어져 버립니다(약 1:9-11).
“유혹을 당할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약 1:13-15).”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겠다던 사회주의 혁명이 100년을 채 못가고 사그러 들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사회주의 혁명은 공산주의적 이상에서 출발합니다.
'공산주의(communism)'란 본래 공유재산을 뜻하는 '코뮤네(commune)'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용어입니다. 사유재산제를 철폐하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재산을 공동소유하는 사회제도를 의미하였습니다. 사유재산제로부터 빚어지는 사회적 타락과 도덕적 부정을 바로잡고, 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공동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이상론이었던 겁니다.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칼 맑스이고 그 이론의 실천적 방법론을 구체화한 사람은 레닌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이론을 맑스-레닌주의라 하지요.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모습을 목격하며 이 모순을 극복하고 건설할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였습니다. 자본과 생산관계로 부터 생산의 주역인 노동자와 농민이 소외되는 모순을 극복한 세상, 그것이 맑스가 꿈꾼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맑스는 극대화된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독재를 통해 공산주의가 완성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러시아 볼쉐비키 혁명으로 시작된 사회주의 국가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몰락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대다수 민중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던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 아닐까요?
영국에 망명해 있던 칼 맑스는 당시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을 목격합니다. 수많은 여자와 어린이가 비참한 노동환경에서 신음하는 것을 매일 보면서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왜 이런 고생을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자본과 자본가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즉 사회의 주인이 자본과 자본가들이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노동자들은 소외와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생산과 생산관계, 생산물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잉여가치를 자본과 자본가들이 편취하고 있다는 것이죠.
맑스는 이 모순을 극복하고 노동자와 민중이 주인이 되는 그런 사회를 꿈꾸게 됩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자본을 사회화 하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는 소외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세상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 했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꿈은 어찌되었을까요? 러시아 혁명을 기점으로 한다면 사회주의 국가들은 100년여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세대를 30년쯤으로 보면 혁명 1세대는 황제와 귀족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바꾼 세대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자존심이 매우 강했던 세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건설한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들은 월급을 똑같이 받아도 불평불만 없이 최선을 다한 세대들입니다. 그들의 헌신으로 초기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가 이룩하지 못하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합니다.
하지만 2세대가 되면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사회주의 혁명 성공과 국가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도취되었던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사회주의 체제에 회의를 갖게 됩니다. 왜 나는 다른 사람보다 질과 양에서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는데 똑같은 봉급을 받아야 하나? 열심히 일해서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데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똑같이 분배 한다는데 신분과 빈부의 차이가 생기는 건 무엇 때문일까? 사회주의의 모순에 대한 회의가 일며 2세대들은 그의 부모세대처럼 열정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국가 경제도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기를 맞게 됩니다.
3세대 쯤 되면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고 마지못해 따라가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 생산성은 급격히 하락하고 국가 경제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를 극복해 보고자 사회주의 국가들은 앞다투어 시장경제를 도입해 보지만 그로 인한 사회주의 본래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그들이 꿈꾸던 공산주의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보다 사회주의 체제가 더 열등하다거나 자본주의 체제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공산사회를 꿈꾸며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국가를 만들고 이끌어 왔던 이들이 간과한 점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 함입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하게 보았다는 사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욕망에 대해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맑스는 인간사회가 원시사회→고대노예제사회→봉건사회→자본주의→공산주의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을 충분히 목격하고 경험한 맑스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순으로 인해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극대화 되면 될수록, 민중들의 사회의식이 높아질수록 자본주의는 그 스스로의 모순과 민중의 반발로 인해 붕괴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면 민중의 사회통제와 사회적 평등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체제 즉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 평등사회가 이루어질 것을 믿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 예언은 너무 빨리 시작된 사회주의 혁명으로 빗나가고,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북유럽 국가 등에서 실험 되고있는 복지 사회에서 오히려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욕망은 3가지 범주로 나타납니다. 색욕(色慾), 재물욕(財物慾), 권력욕(權力慾)이 그것입니다.
색욕은 자기의 생명과 가족, 그 주변에 대한 욕망입니다. 연애감정, 결혼, 출산, 양육 등 종족 보존과 관련된 모든 욕망을 포함합니다. 재물욕은 색욕을 유지하기 위한 욕망입니다. 생명과 가족, 주변의 동료와 친지가 있더라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을 것, 입을 것, 주거할 곳 등 많은 재화를 필요로 합니다. 이 재화에 대한 욕심이 재물욕입니다. 그리고 이 색욕과 재물욕을 빼앗기지 않고 보호하며 더 얻으려고 하는 욕망이 권력욕입니다.
그러니 색욕(色慾), 재물욕(財物慾), 권력욕(權力慾)은 인간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요조건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 가지 욕망을 적절히 제어함으로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너무 지나친 욕망은 자신의 삶을 불행으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의 경전이나 양생을 추구하는 집단에서는 이 세 가지 욕망이 육체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욕망의 적절한 분출과 제어에는 정신적인 수련과 그로 인해 얻어지는 영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대표적으로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 욕망이 탐진치(貪瞋痴)라는 삼독(三毒)의 작용이므로 경계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탐욕은 탐애(貪愛)라고도 하며 자기가 원하는 것에 욕심을 내어 집착하는 것, 자기의 뜻에 맞는 일에 집착하는 것, 정도를 넘어서서 욕심을 부리는 것, 명성과 이익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색욕에는 식욕(食慾)·색욕(色慾)·재욕(財慾)·명예욕·수면욕 등 5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여자가 가지는 색욕에는 5가지가 추가된다는데 이렇습니다. 형모욕(形貌慾: 얼굴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위의욕(威儀慾: 옷치장에 관한 욕망)·자태욕(姿態慾: 아름다운 몸매에 관한 욕망)·언어욕(言語慾: 아름다운 음성에 대한 욕망)·세활욕(細滑慾: 피부의 윤기에 대한 욕망) 등 입니다만 지금은 남자들에게도 해당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구하는 것 자체는 탐욕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정도를 지나칠 때를 탐욕이라고 합니다.
진에(瞋恚/눈 부릅뜨며 성냄)는 분노하는 것으로서, 산목숨에 대하여 미워하고 성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진에 속에는 분노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거죠. 진에는 수행을 하는 데 가장 큰 허물이 되는 것이며, 다스리기도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치(愚痴)는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마음으로서, 이로 인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우치 때문에 모든 번뇌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삼독은 모두 ‘나(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에 미혹한 것이 우치이고, 그 어리석음(우치)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맞으면 탐욕을 일으키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분노(진에)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의학에서는 앞의 세 가지 욕망이 몸의 기운에 좌우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욕망은 12경락의 허실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동의학에서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운을 여섯 가지로 분류합니다.
크게 보면 양(陽)의 기운과 음(陰)의 기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양과 음은 각각 3개의 기운으로 나뉩니다. 양에는 태양(太陽/ 水), 소양(少陽/ 相火), 양명(陽明/ 金)의 기운이 있고 음에는 태음(太陰/ 土), 소음(少陰/ 君火), 궐음(厥陰/ 木)의 기운이 있습니다. 이 기운은 우리 몸속의 경락을 따라 흐르며 그 허실에 따라 영향을 미칩니다.
이 여섯 가지 음양의 기운은 호흡과 음식으로 우리 몸에 흡수되고 소화기능을 통해 에너지로 사용됩니다. 이 에너지를 생기라 부르는데, 이 생기는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우리를 살려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동의학에서는 이 원기들이 제 때에 보충 되고 사용되면 건강한 삶을 그렇지 못한 경우는 병들게 된다고 봅니다.
이 여섯 가지 기운은 각각 손과 발로 흐르는 2개의 경락을 관장합니다. 그리고 12 경락이 색욕(色慾), 재물욕(財物慾), 권력욕(權力慾)이라는 3가지의 욕망을 각각 관장합니다.
태음과 양명에 속하는 4개의 경락 ▲수태음폐경(濕) ▲족태음비경(習) ▲수양명대장경(燥) ▲족양명위경(燥)은 재물을 관장합니다.
소음과 태양에 속하는 4개의 경락 ▲수소음심경(暑) ▲족소음신경(火) ▲수태양소장경(寒) ▲족태양방광경(寒)은 색욕을 관장합니다.
궐음과 소양에 속하는 4개의 경락 ▲수궐음심포경(風) ▲족궐음간경(風) ▲수소양삼초경(暑) ▲족소양담경(火)은 권력욕을 관장합니다.
이 경락 등이 너무 실하거나 너무 허하면 문제가 생기게 되죠. 그래서 옛사람들은 분수를 지키라고, 중도의 기를 걷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가르쳤나 봅니다.
요즘 천정부지로 치솟는 아파트 값을 보면서 인간의 무지몽매와 욕심의 끝을 봅니다. 갈 곳을 잃은 유동자금 1,117조 원이라는 돈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웃고 있습니다. 정부가 제시한 종부세 인상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부동산 재벌들과 부동산 업계, 부동산 매체들이 총력을 다해 부동산 값 하락을 막고 있습니다. 여기에 국토부도, 기재부도 덩달아 춤을 춥니다.
국토부는 집이 남아도는데도 또 다시 공급정책을 내놓습니다. 1차로 교통 좋은 서울 인근의 그린벨트를 풀어 공공주택을 짓는다고 합니다. 공명시도 밤일마을 주변의 18만평이 1차 공급지로 지정되었습니다. 옛 보금자리 지역에 제 3기 미니 신도시를 짓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부동산 학자들은 이 정부의 공급정책은 부동산 광풍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유동자금의 공격 빌미를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동산 가격을 안정화 시키고 유동자금이 경제 발전을 위해 쓰 지길 바란다면 정부는 인간의 한없는 욕심과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정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너무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일깨울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지금 일본은 일자리 풍년이라고 하며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일본도 부동산 값 반 토막 시대를 지나 저성장의 인고의 세월 끝에 맞이한 정상적인 경제 흐름을 타고 있을 뿐입니다. 부동산 경기를 살려 국가경제를 떠받치겠다는 것은 오래전 개발독재 시대에나 가능했던 정책입니다.
더 이상 불로소득이 우리 백성들의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과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자족의 지혜를 배우라고 가르칩니다.
디모데 전서 6:7-10절에 있는 말씀을 봅시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솔로몬의 전도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재산이 많으면 그만큼 먹여 살릴 사람이 많은 것, 그러니 많은 재산은 눈요기밖에 될 것이 없다. 막일을 하는 사람은 많이 먹든 적게 먹든 단잠이나 자지만, 부자는 아쉬운 것 없어도 뒤척이기만 하며 제대로 잠을 못 이룬다. 하늘 아래서 나는 기막히게 억울한 일을 보았다. 일껏 재산을 모아놓았는데 그 재산 때문에 우환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전 5:10-12).“ 재산의 가치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데 있으므로 욕심낼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내 형에게 말하여 유산을 나누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면서 뛰 따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눅12:13-15).
우리의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진정한 행복의 삶이 목표라고 한다면 우리의 욕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족, 그리고 가족의 행복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화,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한 권력은 얼마나 또 어디까지 필요하고 충분한가를 살아가는 걸음마다 가늠해 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삶에서 깨어 있는 신앙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