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티하
강미나
나는 별난 재주가 썩 없다. 누군가가 그나마 목소리가 좀 낫다고 추겨주면 그런가 하고 목청을 ‘흠흠’하며 가다듬기는 한다. 소리. 소리로서 봉사활동을 해 봐야 되나 생각하던 중 이었다. 마침 지인이 권해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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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록 잎사귀가 쫑긋 거릴 즈음. 진주시민미디어센터. “다문화, 주파수를 쏴라” 라는 인터넷 라디오 제작에 참여하였다. 다문화 결혼이주여성들과, 다양한 경력의 일반인과 관심 있는 대학생들로 모인 알리미 자원봉사자들의 첫 만남이다. 길에서 한번쯤은 스쳐지나갔을 얼굴들은 모두 밝아 보였다. 그날 첫 주제가 ‘나의 이주 경로’. 참석자들은 어색함과 쑥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자신의 이주 경로를 발표했다. 먼 이국,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그들의 이주 경로에 호기심 묻은 내 눈을 크게 떴다. 난 보폭이 아주 짧은 토박이였다. 내 발자국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마음 밭에 씨 하나를 심었다.
매주 금요일을 기다렸다. 어린 날의 아련한 향수를 건져준 라디오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라디오 이해와 사용법, 음향기기 녹음 실습, 신기한 음향편집, 큐시트 작성, 인터넷 업로딩 등 이론과 실습을 접했다. 초여름 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 KBS 라디오 스튜디오 견학도 다녀왔다. 드디어 방송제작 실습을 위한 녹음 장비가 스텐 바이 되는 순간이다.
너 덧 명씩 세 모둠이 만들어졌다. 제작 실습을 위한 그 달 주제를 정하면 각 모둠별 토론은 회의실을 달구었다. 각 모둠은 정보전달. 고민상담,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 등등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두 번째 코너에 배정되었다. 우리 팀은 일단 틴티하를 주인공으로 결정했다. 토의 끝에 ‘틴티하의 새댁일기’를 드라마 형식으로 만들기로 했다. 자원봉사자들은 PD, 기술, 작가, 진행을 나누어 역할 분담을 했다. 작가를 맡은 나는 베트남새댁 틴티하와 마주 앉았다. 긴 생머리와 앳된 외모, 눈이 생글하게 웃는 갸름한 그녀는 27살. 사실 나의 큰아들과 동갑이다. 인근 농촌으로 시집 와 한국에서 세 번째 봄을 맞았다고 했다. 딸 양원이를 키우며, 농사짓는 시어머니와 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함께 3대가 살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수줍어 목소리도 모기만 했다. 우리말이 약간 서툴지만 곧잘 알아듣고 대답하는, 한글도 또박또박 쓰는 그녀가 너무 대견하고 예뻤다. 대본을 만들기 위해 틴티하의 먼 친정, 고향얘기를 물었다. 가난해서 공부 안했어요. 엄마 아파요. 동생들 보고 싶어요.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물설고 낯선 곳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괜히 내 가슴이 짠해졌다. 무얼 해 줄 수 있겠나? 살며시 손을 잡아 주었다. 집으로 초대해 같이 밥을 먹었다. 처음 시집와서 겪은 다른 문화, 미래에 대한 걱정, 이제는 사는 게 많이 나아졌다며 배시시 웃는다. 나는 가짜 시어머니가 되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알콩달콩, 좌충우돌 에피소드로 공감하며 글거리, 이야기꺼리를 찾아냈다. 그녀의 호흡에 맞추어 대본을 교정하고, 발음하기 쉬운 말투로 바꾸기도 여러 번, 조금씩 적응하며 자신의 역할에 자신감을 가졌다. 서너 번의 연습과 격려로 드디어 첫 방송. “쓰레기 국과 계” 녹음을 무사히 마쳤다. 주인공 틴티하의 열연과 보조 등장인물들의 조연이 어우러져 만든 방송을 다 함께 듣고 평을 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아이! 이렇게 하면 안돼.’ ‘다시 해 볼게요!’ 조심스런 틴티하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살갑게 대해주니 그녀는 더 가까이 와 있다. 그렇게 두 번째 방송, 여름휴가. 세 번째 방송, 생일 이야기로 송출이 이루어졌다. 여물지 못한 밭에 틔운 여린 싹은 작은 꽃대를 세우고, 조금씩 서서히 대궁을 밀어 올렸다.
가을이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오던 무렵이었다. 공개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토의했다. 그동안 각 코너에서 진행되어 송출된 방송을 토대로 멋진 결실을 맺기 위해 고민했다. 장소섭외, 외부인이나 다문화 가족들과의 깜짝 인터뷰. 축하 공연, 실시간 전송되는 메시지. 최종 대본까지 미디어센터와 서로 챙기며 준비했다. 긴장 속에서도 틴티하는 즐겁게 참여했다. 최종 리허설까지 마치고는 숙제 검사 맡는 아이처럼 종종거렸다.
드디어, 보이는 라디오 공개 방송 날. 가을 하늘은 더없이 높고 화창했다. 오색 풍선으로 한껏 뽐내 치장한 강당에는 긴장과 흥분이 떠다녔다. 초대한 내 외빈과 다문화 친구, 가족들의 참석으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아름다운 정원’. 마지막 테마다. 오프닝 음악이 경쾌하다. 사회를 맡은 마리사의 실수도 귀엽다. 모국어로 코너를 소개하는 틴티하의 양 볼이 발그스레하다. 봄에 꽃씨하나 심었던 정원에는 그동안 최선을 다해 가꾸고 손길 받은 실한 대궁에 꽃들을 활짝 피워 올렸다. 살사리꽃 닮은 베트남 새댁 틴티하, 해바라기 같은 태국 아지매 마리샤, 백합 같은 중국 새댁 영주씨. 함박꽃 같은 틴티후아, 국화 닮은 투언, 가우티딘, 후언, 누르자아…….
바람 냄새도 다른 이국에서 뿌리내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하늘에다 대고 쏘아 올리는 다문화 그녀들. 자신만의 꽃을 피우고 향기를 머금은 이곳의 열기는 높이 올랐다. 그녀들의 환한 미소, 손을 잡고 푸른 배경으로 둘러 선 자원봉사자들과 축제의 장은 모두가 하나였다. 엔딩 뮤직에 서서히 숨을 고르며 서로 가지를 내어 맞잡았다.
틴티하는 무척 아쉽다고 잠긴 목소리를 냈다. 그동안 애써 준 가짜 시어머님께도 감사드린다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도 딸 같은 그녀의 가녀린 몸피를 안아주며 속삭였다. 틴티하, 참 잘했단다.
올해는 운이 좋다. 라디오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과 모국어와 한국어를 함께 사랑하는 틴티하를 만난 그것이다. 진솔한 그녀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불볕더위도 화끈한 열정으로 이겨냈다. 나는 믿는다. 아쉬움과 환희의 순간에 목을 축여 피운 꽃들은 영원한 뿌리와 아름다운 향기를 품고 있을 거라고.
하지만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출발이다.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멋진 세상을 꿈꾼다. 소리, 소리를 통해 온 세상과 소통하고, 낮은 곳의 다른 소리를 듣기위해서는 내 매력이라던 목소리는 더 낮게, 여리게 내야 됨을 깨달았다.
이제 문을 살며시 밀어둔다. 언제나 열고 들어올 또 다른 틴티하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