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렴 정치회고록 1 박정희 대통령의 위기관리 국가에 중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총체적으로 나타난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냉철한 분석과 결단,의연한 자세로 위기에 맞섰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과 한.일 대륙붕분규다. 76년 8월18일 오전 유엔군 장병 11명은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에 있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고 있었다. 울창한 가지가 경비의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잠시 언쟁이 있은 후 북한군 70여명은 유엔군측을 습격해 도끼를 휘두르며 미군장교 2명을 살해했다. 슈나이더 미국대사와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이 급히 朴대통령을 찾아왔다. 朴대통령은 단호했다. “68년 북한게릴라 30여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던 1.21사태등 지금까지 북한이 도발할 때마다 한국은 강력한 보복을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이 조치를 취하지 않으니까 북한이 미국을 종이호랑이로 보고 계속 도발하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는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어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다음날 제3사관학교 졸업식에서“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고 잘라 말했다. 朴대통령의 단호한 자세에 자극받아서일까. 스틸웰대장은 20일 朴대통령에게 문제가 됐던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작전을 보고했다. “나무를 자를 때 북한이 무력으로 대응하면 미군은 북한으로 진격할 겁니다. 우리는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이 진출해 서울이 겪고 있는 서부전선의 위험을 제거할 것입니다.”“개성탈환이라니….”배석했던 나는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긴장감을 느꼈다. 朴대통령은 즉각 동의했다.“그렇게 해야지요.그런데 작전의 제1선은 우리 군이 맡겠습니다. 도끼만행으로 미군장교 2명이 고귀한 생명을 잃었는데….” 朴대통령은 배석한 서종철(徐鐘喆)국방장관.노재현(盧載鉉)합참의장에게 특전사 정예부대와 서부전선의 육군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그날 저녁 늦게 朴대통령은 두사람과 이세호(李世鎬)육군참모총장을 다시 불러 북한으로 진격할 때에 대비한 전략을 숙의했다. 드디어 다음날 작전이 시작됐다. 건십 헬리콥터, F-4 팬텀전폭기, F-111 전폭기, 괌에서 날아온 B-52 중폭격기가 4중으로 판문점 상공을 지켰다. 한국해역에는 미항모 미드웨이가 들어와 있었다. 작전개시 20분후.“북한군 2백여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으로 집결중”이라는 긴급보고가 내 전화를 때렸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만약 북한이 싸우려들면 전쟁인데….”나는 입안이 타들어갔다. 그러나 북한군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진만 찍어댔다. 오전7시55분 우리 작전반은 나무를 완전히 자르고 불법 설치된 북한초소도 때려부수고 유유히 돌아왔다. 김일성(金日成)은 휴전후 23년만에 처음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굴욕적인 자세를 취했다. 작전이 끝났다고 보고할 때 朴대통령은 서재에서 다른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는“알았다”고 짧게 대답한 후 국방부 직통전화를 들었다. “장관, 작전에 참가한 전장병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朴대통령은 다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70년 5월30일 한국정부는 한.일간 대한해협의 7만평방㎞를 한국의 대륙붕으로 공포했다. 동시에 이를 제7광구로 정해 석유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양국간 중간지대를 경계선으로 하지않고 일본쪽으로 깊숙이 더 선을 그었다. 그쪽에 깊은 바다밑 골짜기가 있으므로 국제법에 따라 그곳을 경계선으로 해야 한다고 한국은 믿었다. 일본열도가 확 뒤집혔다.“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을 중단해야 한다”“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등.열도는 반한(反韓)열기로 뒤덮였다. 朴대통령은 회의를 소집했다.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 김학렬(金鶴烈)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최규하(崔圭夏) 외무장관. 이낙선(李洛善) 상공부장관등과 급거 귀국한 이후락(李厚洛) 주일대사, 그리고 내가 참석했다. 분위기는 무겁고 심각했다. 주일대사관의 의견은“일본측 주장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외무부는“국제사법재판소에서 우리가 꼭 이긴다고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경제기획원은“일본이 경제협력을 중단하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크게 타격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제7광구 고수를 주장한 사람은 이낙선 상공부장관과 나 뿐이었다. 朴대통령은 결론을 내지 않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기가 불편한 것이 완연했다. 나는 그날 밤을 설쳤다. 나는 제7광구의 장단점,우리가 나아갈 길, 대비책등을 정리했다. 다음날 아침 朴대통령이 집무실로 내려오자마자 나는 건의했다.“각하,일본이 협력을 중단하면 우리 경제에 중대한 영향이 미치겠죠. 하지만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수년을 견디는 것이 백년대계를 위해 더 필요합니다. 또 제7광구는 해저자원이 무척 중요합니다. 독도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주저없이 단안을 내렸다.“나도 어젯밤 여러모로 검토해봤는데 金실장의 건의가 옳은 것같아요. 회의를 다시 열 필요도 없고 그 건의대로 합시다.”한국정부는 미국 코암사로 하여금 석유탐사를 계속하도록 했다. 70년 11월부터 72년 2월까지 한.일 실무자회의가 세차례 있었지만 양국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긴장은 고조돼 갔다. 과연 일본이 경제협력을 중단할 것인가. 나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72년 9월 일본은 뜻밖에 제7광구의 공동개발을 제의해왔다. 우리의 대륙붕선언을 인정한 것이다. 우리측은 이를 받아들였다.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 퇴임할 때 쓰다남은 정치자금이 각각 2천여억원씩 있었다는 사실이 그후의 재판에서 판명됐다.특히 두사람은 업자를 직접 만나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내가 비서실장으로 있었던 9년3개월간 업자를 직접 만나 정치자금을 받은 일은 한번도 없었다. 朴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조달한 방식은 매우 독특했다.72년 10월 유신이 있기 전까지는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중심으로 경제부총리.청와대비서실장.중앙정보부장이 4인위원회를 구성해 정치자금의 협조문제를 공동으로 처리했다. 유신헌법이 제정될 무렵 朴대통령은 내게 분부를 내렸다.“앞으로는 金실장께서 정치자금을 전담해주세요.경제를 잘 아니 국민의 비난을 받지 않는 방법으로 마련해보세요.” 다음날 나는 복명(復命)했다.“반대급부가 있는 정경유착식으로는 하지 않겠습니다.기업의 판공비와 기밀비중에서 일부를 1년에 두번 지원받되 한번에 1천만~1억원 범위내에서 받겠습니다.” 나는 기업의 선택기준 다섯가지도 보고했다. 경영이 건전하고,기업주가 성실하며,국민의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권력기관이나 국회의원을 통해 압력을 넣은 적이 없으며,농어민의 생업과 관련이 없는 기업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朴대통령에게 물었다.“각하,그런데 1년에 정치자금이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朴대통령은 소상히 설명해주었다.“공화당 운영에 한달에 1억원은 필요하고,유정회(維政會.유신헌법식 전국구)에도 한달에 2천만~3천만원은 듭니다.추석과 연말에 이곳저곳 촌지를 주는데 10만~30만원 정도씩이에요. 공무원이나 일선장병을 시찰하면 격려금도 주어야하고….1년에 30억~40억원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나는 곧 이 중요한 작업에 착수했다. 청와대 신관 비서실에서 기업주를 만나“정치자금은 민주주의의 필요악이다.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나는“반대급부는 일절 없다”는 점을 빼놓지 않았다.내가 부탁한 기업주 26명은 모두 기꺼이 승낙하고 협조를 약속했다. 나는 추석무렵과 12월에 비서실장실에서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성금을 받고 바로 朴대통령에게 전달했다.朴대통령은 즉석에서 봉투 위에 날짜.기업체명.금액을 기입했다. 내가 굳이 청와대 본관 2층 사무실에서 성금을 받은 이유는 기업주가 방문한 시간등이 상세히 청와대 정문경비소와 본관경비과에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놓으면 경호실.중앙정보부 또는 보안사령부가 기업주를 찾아가 대통령에게 얼마를 전달했고 그외에 비서실장에게도 전달한 것이 있는지 여부를 수소문할 수 있는 것이다.즉 나는 한점의 의혹도 없이 정확하게 정치자금을 처리했다. 朴대통령은“반대급부가 없는 일방적 성금이라도 부담스럽다”는 소회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는“이들 기업은 정부의 경제정책 덕택에 커졌습니다.그러니 판공비의 일부를 내놓는 것은 무리가 아니고 일종의 성금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래도 朴대통령은 마음에 걸렸던지 한번은 답례로 한지(韓紙)에 인사말을 써서 보냈다.그런데 일부 기업주가 그것을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는 일이 생겼다.인사장은 더이상 없었다. 나는 78년 12월 그만둘 때까지 성금을 내는 기업체의 수를 늘리지 않았다.70년대후반이 가까워지자 경영이 잘되는 기업중에서 자진해 성금액을 배로 내는 데가 있기도 했다. 수를 늘리지 않자 새로 성금을 내고 싶은 기업들은 김재규(金載圭)중앙정보부장이나 차지철(車智澈)경호실장,그리고 내무장관을 통해 朴대통령에게 제의하곤 했다. 그때마다 朴대통령은“金실장께서 검토해 결정하세요”라며 그들 3인을 내게 보냈다. 나는 모두 거절했다.워낙 朴대통령이 아껴 썼고 나도 정치자금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아니라 최소로 모금해 기업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제의를 거절하자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영부인 육영수(陸英修)여사는 장.차관,은행장,국영기업체장의 부인들과 양지회(陽地會)라는 자선구호모임을 조직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陸여사는 일체 기업으로부터 성금을 받지 않았고 회비만으로 단체를 운영했다. 지하에 잠들고 있는 朴대통령이 자기가 지원한 성금이 훌륭히 활용되고 있어 흐뭇해할 이야기가 있다. 朴대통령은 외아들 지만(志晩)군이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선생이 설립한 중앙고를 졸업하고 자진해 육사에 진학하자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朴대통령은 학부형의 입장에서 중앙고에 조그마한 기념이 될만한 것을 해주고 싶어했다. 朴대통령은 재단관계자들에게“후원기금 5억원을 조성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제의하고 정치성금의 여유분중에서 2억2천만원을 내놓았다. 朴대통령이 씨를 뿌린 후원기금은 사용자금을 빼고도 현재 약33억원으로 커져 있다. 중앙일보 - 97.4.28 - 대통령이 자신의 친인척을 엄격히 관리해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제가(齊家)에 실패한 대통령이 치국(治國)이나 평천하(平天下)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이권으로부터 친인척을 떼어놓는 데에 무척 엄격했다. 아무리 가까워도 예외가 없었다. 내가 한국은행에 근무할 때 선배였던 김봉은(金奉殷) 상업은행장이 73년 어느날 조심스럽게 나를 만나자고 했다. 사무실에서 만났더니 그는 어떤 이에 관한 얘기를 하며 “朴대통령의 친척중에 그런 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은행장은“그 사람이'朴대통령과 가깝다'며 담보도 없이 융자해달라고 한다”며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상의해주어서 고맙다. 나도 도울테니 절대로 소신을 굽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람은 朴대통령의 바로 위 누님이었다. 제조업을 하는 아들이 어머니를 통해 쉽게 대출받으려 한 것이다. 그 아들은 원래 잡음이 많아 朴대통령이 청와대출입을 금지해놓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누님은 어머니 대신 朴대통령을 업어 키운 무척 가까운 혈육이었고 아들은 이를 이용하려 했던 것같다. 이런 대출청탁이 바로 청와대에 보고된 것은 이권개입을 감시하는 제도 덕분이었다. 朴대통령은 금융기관과 조달청.전매청에“국회의원이나 권력기관에서 엉뚱한 부탁을 하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라. 보고하지 않으면 기관장을 문책하겠다”는 엄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실제로 몇몇 은행장으로부터 “공화당의원 누구 누구가 대출을 부탁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朴대통령은 의원들에게“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되며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친필 경고서한을 보냈다. 나는 朴대통령 누님같은 청탁건이 또 있겠다 싶어 조치를 취했다. 金행장에게 정례적인 은행장 회합에서“청와대 비서실장의 정식요청”이라며 나의 얘기를 다시한번 전하도록 부탁했다. 나는“대통령의 친인척으로부터 부당한 융자나 다른 요청이 있으면 응하지 말고 꼭 비서실장이나 경제수석비서관에게 연락해달라”는 당부를 전했다. 나는 그 대통령 누님에 관한 일은 朴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朴대통령이 가까운 누님에게 섭섭한 감정을 느낄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친인척중 누가 이권에 개입한 것이 드러나면 청와대 출입을 금지하도록 했다. 내가 근무하는 동안 출입금지를 당한 친인척이 3~4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입금지로 문책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민정비서실에서는 이 사람들을 포함해 이권에 개입할 소지가 큰 인사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비서실 직원들은 가끔 시중은행을 돌며“이런 사람들이 대출을 부탁하지 않더냐”고 확인하곤 했다.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서울 강북의 큰 선거구가 두개로 나뉘어 선거구 하나가 증설되었다. 여기에 朴대통령의 6촌동생이 공화당 공천을 받으려고 당의 내정자인 정래혁(丁來赫.후일 국회의장 역임)씨와 심하게 경합하고 있었다. 그 친척은 상수도공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국회의원에 출마할 정도의 인품은 갖추지 못했다. 朴대통령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친인척중에는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다. 당의 난처한 입장을 보고받은 朴대통령은 일언지하에 丁씨에게 공천줄 것을 결정했다. 그러자 이 친척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는 朴대통령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내가 朴대통령이 마음 속으로 정한 진짜 후보”라며 맹렬히 선거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공화당은 바짝 긴장했고 법적으로는 그의 출마가 하자가 없는 것이어서 손을 쓰지 못했다. 이 사정을 전해들은 朴대통령은 화를 내었다.“국회의원은 아무나 하는 건가. 자격도 없으면서….” 朴대통령은“국회의 존엄성을 위해 그 사람이 자진해서 출마를 취하하도록 하라”고 비서실에 엄명을 내렸다. 민정.정무비서실은 많은 고생끝에 겨우 그를 단념시킬 수 있었다. 朴대통령은 친인척의 이권개입 뿐만 아니라 분수에 맞지 않는 이와 같은 처사도 엄히 다스렸던 것이다. 朴대통령 내외는 일가 친척에게 엄한 얼굴만 보인 것은 아니다. 생계나 다른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는 직접 자상하게 보살펴주었다. 그 대신 친인척 한사람 한사람에게 대통령 일가를 빙자해서 이권에 개입하면 절대로 안되며 이를 위반할 때는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알리고 자숙을 당부했다. 이권개입이 생기면 이를 예방하지 못한 비서실 담당자도 엄한 문책을 받았다. 朴대통령은 문제가 있을 때는 시정을 엄하게 지시했기 때문에 친인척에 관한 정보보고는 사실과 틀려서는 안되었다. 민정비서실 직원들은 다른 비서실 못지않게 고생이 많았다. 중앙일보 - 97.4.30 -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오랫동안 집권해서 그 기간중 많은 인사(人事)가 집행되었다.朴대통령은 공정하고 개방적인 원칙을 지켰다. 사조직이 인사에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부작용을 염려해 민정수석비서관이 가지고 있는 정보비서실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70년 12월 개각 때 朴대통령은 나에게 이런 분부를 내렸다.“내무.법무.국방과 무임소장관(현 정무장관)은 내가 직접 고를테니 나머지 장관은 金실장께서 복수로 후보를 물색해보세요.”이런 원칙은 그 후에도 지켜졌다. 나는 정무1.2,경제1.2,그리고 공보수석비서관과 소리없이 상의해 명단을 만들어 보고했다.나는 정보비서실을 가지고 있는 민정수석비서관과는 상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만약 청와대 비서실이 대통령의 인사에 정보와 첩보를 참고한다고 알려지면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청와대 관계비서실에 지연.학연이나 다른 연줄을 통해 경쟁상대를 끌어내리거나 자기를 올리는 정보와 첩보가 홍수처럼 들어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정보비서실에는 주로 경찰첩보가 들어오는데 나는 차관 때부터 터무니없는 첩보를 경험한 적이 몇차례 있다. 하루는 朴대통령이 불러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내무장관이 올린 첩보를 말없이 주었다.“미국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유학하는 대통령 비서실장의 아들.며느리가 고급 주택가의 일류 아파트에 들어 교포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나는 아들 내외가 대학원 부부학생을 위한,매우 오래된 학교아파트에 입주해 낡고 더러운 화장실과 목욕탕을 청소할 때 며느리가 왈칵 눈물을 흘렸다는 편지까지 받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엉터리 첩보입니다.아이들에게 구설수에 오르는 일은 극력 삼가라고 항상 가르쳤고 그리 행동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고 얘기하고는 첩보를 그대로 놓고 나왔다. 또 한번은 우리 내외가 잘 아는 모범적인 고위공무원에 관해“그 부인과 가정교사간에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린다”는 첩보를 본 적이 있다.그에 대해 흠잡을 것이 없어서인지 터무니없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그 후부터 나는 경찰첩보 읽는 것을 중지했다. 나나 다른 수석들은 그런 인사정보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인재들을 구하려 애썼다.나를 비롯한 수석비서관들은 朴대통령의 연두 초도순시나 각종 회의참석을 꼭 수행했다.그래서 우리들은 관계부처의 장.차관은 물론 고위공무원의 능력과 인품에 접할 수 있었다. 여당인사들은 원내.당내활동을 통해 파악했다.여당과 행정부의 바깥에 있는 인사들은 신문.잡지등의 기명기사.기고,단행본,신문논설등이 좋은 자료가 되었다. 개각구상이 결정되면 朴대통령은 총리와 상의에 들어갔다.이때 일부 명단이 수정되거나 명단에 없는 사람이 기용되기도 했으나 우리들의 추천이 대체로 반영되었다. 조각(組閣)에 있어서는 출신도별 안배도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나는 후보자명단에 출신도를 꼭 명기했다.朴대통령도 자신이 최종 결정한 명단에 출신도를 기입해서 비서실로 내려보내곤 했다. 차관인선에 있어 朴대통령은 원칙적으로 장관 의향을 따랐으며 장관 의사가 없을 때는 상의해서 결정했다.朴대통령은 차관보 이하 국장들의 인사는 장관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 청장은 朴대통령이 직접 지명하는 경우가 있었다.탈세와 밀수등 망국지병(亡國之病)을 다스려야 할 국세청장과 관세청장,물동(物動)의 기간(基幹)을 관장하는 철도청장과 항만청장,그리고 생산현장의 안정적 조업을 보장해야 할 노동청장등이 그러했다. 행정부 인사에는 몇가지 예외가 있었다.첫째,군의 준장 이상 진급과 중요 보직인사는 군통수권에 관한 사항이므로 국방장관이 각군 총장들을 대동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되 비서실 관계자는 일절 배석하지 않았다.법무부 고위간부 인사 때도 같았다. 외교관 임명에 있어 주미.주일.주유엔대사는 朴대통령이 직접 지명했고 기타 주요국 대사는 외무장관 의견을 많이 참작해 결정했다. 여타 대사의 임명에서는 외무장관의 건의를 거의 받아들였다. 정부투자기관중 금융기관의 장에 대한 인사는 대통령의 사전재가사항이었다. 금융기관을 제외한 정부투자기관의 장에 대한 인사는 대부분 주무장관이 백지로 품신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임원중 1명도 백지로 올렸다. 기업체장의 경우 마침 朴대통령이 의중에 인물이 있을 때는 주무장관 의견을 물어 결정했다.없을 때는 주무장관의 천거로 임명되었다. 임원중 백지로 올라온 1명의 자리는 예비역 장성의 취업을 위해 비서실장이 간직하고 있는 국방부요청 명단중에서 채워졌다.예비역 장성의 취직알선은 그 당시 우리나라가 안고 있던 특수사정에 기인했다.朴대통령은 퇴역장성들의 생계안정및 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취업알선에 나섰던 것이다. 중앙일보 - 97.5.1 - 최근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되살아나고 있는데는 그가 국정운영의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생각한다.朴대통령은'계획의 대통령'이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朴대통령은 국정의 주요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연차적 중장기계획을 세웠다.朴대통령은 정기적 또는 수시로 그 진척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한 것을 보완했으며 여하한 경우에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하였다. 朴대통령은 신년초도(新年初度)순시와 회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사실상 국정운영의 중심무대로 여겼다.朴대통령이 부처공무원을 만나고,공무원들이 대통령을 만나는 그 현장들은 국정 공동운영의 긴장감으로 꽉차곤 했다. 유능하고 의욕적인 공무원에게 이 자리는'기회의 순간'이었다.대표적인 경우가 72년 청와대경제2수석(중화학.방위산업담당)으로 발탁된 오원철(吳源哲.기아경제연구소 고문)씨다. 내가 상공장관이던 69년 초도순시때 朴대통령은 10여개 석유화학공장의 건설상황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당시 상공부 기획관리실장이던 吳씨는 브리핑 차트앞에 서서 쏟아지는 대통령의 질문에 멋있게 답변해 나갔다.그는 막힘이 없었고 대통령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국가기본운영계획 심사분석회의'는 남덕우(南悳祐)전부총리에게 잊을 수 없는 무대일 것이다.68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1년간 연구하고 돌아온 서강대의 南교수는 다시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대한 평가교수단에서 활동했다. 南교수는 금융.통화.외환정책에 대한 평가를 보고했는데 朴대통령은 그의 정연한 이론과 충실한 내용에 크게 감명받곤 했다.朴대통령은 南교수를 69년 경제과학심의위원을 거쳐 재무장관으로 발탁했다.그는 나중에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74.9~78.12)에까지 중용되었다. 지금 국무총리인 고건(高建)씨는 朴대통령이 한달에 한번 주재하는 청와대국무회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朴대통령은 73년부터 국무위원에게 새마을운동을 교육하기 위해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 하여금 보고하도록 했다. 高씨는 내무부 지방국장이었는데 새마을담당관을 거친터라 매번 유식하고 감명깊은 보고로 朴대통령을 사로잡았다.37세의 高씨는 전남지사로 발탁됐고 79년초에는 정무2수석으로 朴대통령 가까이에서 일했다. 초도순시는'보통공무원'이 평생 몇번밖에 직접 볼 수 없는 대통령에게 과감하게 국정을 건의할 수 있는 자리도 된다. 60~70년대 경제부처간에는 서로 쌀.비료.시멘트.석탄등을 운송하기 위한'화차(貨車)쟁탈전'이 벌어지곤 했다.이때 결정권을 쥐고있는 쪽은 경제기획원.힘이 약한 농림수산부는 번번이 비료수송에 애로를 겪었던 모양이다. 71년 초도순시때였다.농림수산부의 고위관리들은 배석한 경제기획원장관의 눈치를 보느라 이 어려운 사정을 朴대통령에게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각하,한 말씀 드리겠습니다”라는 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비료과장 李모씨였다.그는 수년동안 농림수산부가 겪은 설움을 애절하면서도 과감하게 털어놓았다.朴대통령은 배석한 부총리에게“그동안 농림수산부가 고생이 많았던 모양인데 잘 좀 배려해주시오”라고 지시했다.그해 비료운송 사정이 나아졌음은 물론이다. 후임대통령들은 현장에 나가는 초도순시 대신 청와대에서 적은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부처별 또는 분야별 합동으로 장관보고를 청취한 것으로 알고 있다.후임대통령에 따라서는 초도순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여러번 초도순시를 준비한 나의 경험으로는 이는 행정수행상 매우 중요하고 효과적인 제도라고 생각한다. 朴대통령은 한번도 빠짐없이 부처로 나갔다.초도순시때는 총리.부총리,국회의 관계분과위원장과 여야간사,여당의 당의장과 정책위의장,대통령특보 전원,산하 국영기업체장등이 배석했다.이렇게 국정의 주요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장관들은 어려운 시험에 앞서 열심히 공부하는 수험생처럼 준비에 애를 쓰니 초도순시는 자연 국정에 이바지하는 약효가 클 수밖에 없다. 朴대통령이 중요하게 추진한 5대회의는 월간경제동향보고.수출진흥확대회의.청와대국무회의.국가기본운용계획 심사분석회의.방위산업진흥확대회의였다. “수출이냐 죽음이냐.우리 영국국민이 앞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수출증대 길밖에 없다.수출을 못하면 영국은 망한다.” 朴대통령은 2차세계대전이 끝난후 영국의 처칠 총리가 국민에게 호소한 이 말을 즐겨 인용했다.잘 알려진대로 朴대통령은 나라의 운명을 수출에 걸었다.그래서 수출진흥확대회의는 사실상 국가의 생존대책회의였다. 회의를 마친후 朴대통령은 중앙청내에 있는 국무위원식당에서 총리이하 경제장관.경제단체장들과 오찬을 같이하면서 경제계 실정을 듣곤 했다. 중앙일보 - 97.5.2 - 청와대비서실을 구성하는 수석비서관.비서관.행정관은 대통령의 그림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대통령이란 큰 나무의 그늘에서 존재가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일해야지 그 그늘을 벗어나 양지로 나와 존재를 과시하면 안된다고 나는 믿는다.그리고 이것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소신이기도 했다. 적어도 내가 비서실장을 맡은 9년3개월간 나는 이 원칙이 지켜졌다고 생각한다.69년 10월 취임식에서 나는 이렇게 당부했다. 나는 비서관(1~3급).행정관(4~5급)들이 지켜야할 지침도 몇가지 얘기했다.“나도 물론 하지 않겠지만 비서실 사람들은 기자회견이나 강연같은 것에 임해선 안됩니다.명함 만드는 일도 안되지요.청와대 마크가 새겨진 봉투를 바깥에 갖고 나가는 것도 삼가 주세요.이런 것을 어기면 나하고 같이 일하지 못하는 걸로 알아주십시오.” 내가 명함과 봉투를 특별히 언급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국민은 청와대를 권력기관이라고 인식한다.그래서 비서관등이 음식점이나 술집 또는 교제석상에서 청와대라는 낱말이 새겨진 명함을 돌리면 명함을 받은 사람이 이를 엉뚱한 곳에 이용할 우려가 많은 것이다. 봉투도 마찬가지다.청와대용을 표시한 용지나 봉투가 많이 유통되면 될수록 불미스런 일도 늘고 적절한 단속도 어려워지는 것이다.나는 특히 직원들이 퇴근할 때 청와대봉투를 들고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다. 내가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소위 가신(家臣)이라는 그룹은 비서실에 없었다.전에는 朴대통령과 개인적 인연이 있었던 비서실 직원이 두명 있었다.대구사범학교 동창생 한명과 朴대통령이 교사생활을 했던 문경초등학교의 제자 한명이다.내가 들어가기전 그들은 청와대를 떠났다. 71년 7월 비서실 축소개편 이후 78년 12월 내가 사임할 때까지 朴대통령과 지연.학연.군연(軍緣)으로 연결된 청와대 부하는 거의 없었다.朴대통령의 사단장시절 헌병부장을 지낸 김시진(金詩珍)민정수석비서관과 朴대통령이 군에 있을 때 당번병과 운전병을 하던 옛부하가 부속실의 부관과 운전기사로 일했을 뿐이다. 나에게는 정계.재계.관계의 고위인사들로부터“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는 초대가 많이 들어왔다.나는 외부에서 사람들과 회동하는 것을 금기(禁忌)로 여겼다.나는 공식행사가 없는한 9년여동안 점심은 청와대 사무실,저녁은 집에서 들었다. 비서실장이 되자마자 집권 공화당의 고위인사 몇 분으로부터 축하저녁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특별한 생각없이 나는 몇차례 응했다.그러자“청와대의 신임실장이 누구누구하고 저녁을 먹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공화당의 당무위원이나 혁명주체 출신 중진의원들도 줄을 이어 나에게 식사를 같이하자고 요청해왔다. 나는 아차 싶었다.이런 식으로 하다간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고 여러가지 잡음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그후로는 일체의 초청을 거절했던 것이다.골프를 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재임기간 비서관 관리문제로 朴대통령에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딱 한번 있었다.그것은 병역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나에게 의용군으로 참전한 정황을 설명하고 사진까지 제시했다.그때의 병역검사 기준에 따르면 정확한 증거가 있는 의용군 참전은 병역을 마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어서 나는 불문에 부쳤다. 朴대통령은 어디서 얘기를 들었는지 나를 불러 그 사람에 대해 물었다. 나는“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돼 그대로 근무하도록 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朴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요새 학도의용군을 다녀왔다는 사람이 많은데 그 진상에 대해 말들이 많아요.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그리고 적어도 대통령비서실에 근무하는 사람은 병역관계에 대해 떳떳해야 합니다.”그 비서관은 결국 그만둬야 했다. 내가 재임하던 9년3개월간 청와대비서관이 이권에 개입해 검찰수사를 받거나 문책돼 사임한 일은 한 건도 없었다.나와 같이 근무했던 수석과 비서관중에서 朴대통령때부터 김영삼(金泳三)대통령정부에 이르기까지 장관에 오른 사람이 모두 24명이다.朴대통령의 비서실이 인재의 보고(寶庫)였다는 점이 증명된 셈이다.나는 그들과 같이 일한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앙일보 - 97.5.4 - 역사는 민족구성원 전원이 만들어가는 것이다.그러나 역사창조의 방향을 제시하고,민족의 힘을 조직하고 개발해 의욕과 자신을 불어넣어주는 지도자가 없다면 영광된 역사는 기록될 수 없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통치철학은 국방과 경제가 두 축이었다.북한의 위협을 눈앞에 두고 朴대통령은 국민의 애국심에 불을 붙여 나라를 지키려 했다. 국방을 통해 지키려한 목적,그리고 국방을 위해 갖춰야할 목표는 가난이 없는 조국,잘사는 조국이었다.朴대통령이 뇌리에 새기고 국민과 함께 나눠가지려 했던 국방.경제표어는 수없이 많다. 증산.수출.건설,근검.절약.저축,근면.자조.협동,한손으로 싸우고 한손으로 건설하자,수출입국,조국근대화,유비무환,자주국방,부국강병 등등. 朴대통령은 1917년 11월14일 경북선산군구미읍상모리에서 농사꾼 부부의 5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朴대통령은 심장 한가운데에 가난에 대한 기억이 배있는 것 같았다.이런 경험이'가난추방'이라는 통치철학을 형성한 것이다.朴대통령은 전국에 밤나무같은 유실수를 심도록 독려했다.그는 밤나무에 대해 이런 사무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국민학생 때 수업을 마치고 20리길을 걸어 집에 오면 배가 무척 고팠어요.어린 마음에 먹을 것을 찾아 부엌에 가서 솥뚜껑을 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하다못해 무말랭이나 장아찌같은 것도 없고….할 수 없이 간장을 손가락에 찍어 먹곤 했지요.그때 뒷산에 밤나무라도 있었으면 밤을 쪄서 먹을 수 있었을텐테….내가 왜 체구가 작은 줄 알아요.어렸을 때 잘 못먹어서 그래요.” 朴대통령은 밤나무가 많이 심어지고 가을에 밤이 많이 열렸다는 얘기를 듣고는“이제는 어린이들이 허기는 면할 수 있게 됐다”며 무척 흐뭇해했다.朴대통령은 한국과학기술원에 지시해 밤을 쉽게 깔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도록 했고 기술원은 훌륭한 기계를 만들어 보급했다. 18년 집권기간중 朴대통령은 '수출주도의 공업화정책'과 더불어'농민이 잘 사는 정책'을 경제정책의 2대 지주로 삼았다.그 결과 쌀생산량이 77년에는 4천1백70만6천섬을 기록해 8.15해방이후 수없이 겪었던 쌀파동을 마침내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농가소득도 74년부터는 도시노동자 소득을 상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농촌을 부흥시킨 결정적인 힘은 朴대통령이 70년 스스로 창시해 농민을 각성시킨 새마을운동이었다.朴대통령은 나태한 농민을 이렇게 꾸짖으며 근면.자조.협동의 자각을 깨우려 했다. “빈곤을 자기의 운명이라 한탄하면서 정부가 뒤를 밀어주지 않으므로 빈곤은 어쩔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농민은 몇백년의 세월이 걸려도 일어설 수 없다.의욕없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은 돈의 낭비다.게으른 사람은 나라도 도울 수 없다.” 朴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70년대 초반 전국 방방곡곡에서 새마을운동의 불이 붙자 여당에서 새마을지도자에게 당원가입을 권유하는 안(案)이 마련된 적이 있다. 공화당 사무총장이 이 안을 보고할 때 朴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던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새마을운동이야말로 농민과 마을을 잘살게 하며 나라가 잘되게 하는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한사람이라도 새로운 당원으로 가입시켜서는 안된다.” 朴대통령은 우리 국사에 관한 책을 애독했고 조예가 깊었으며 뚜렷한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한국이 겪은 국난을 면밀히 분석한 朴대통령은 국가발전전략의 거대한 청사진을 구상했다.그것은 자조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립경제를 건설하고,자주국방의 태세를 갖추며,이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뿌리내려 진정한 독립국가를 이룩한 뒤 통일로 간다는 것이었다. 역사인물중에서 朴대통령은 이순신(李舜臣)장군을 무척 흠모했으며 그의 구국정신을 국방의 정신적 지주로 삼으려 했다.朴대통령은 충무공(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특히 충무공이 온갖 모략을 받고 감옥에 가서도 나라를 걱정하며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충남 아산에 있는 충무공의 사당 현충사를 성역화했고 경내 한구석에는 종손이 사는 집을 짓기도 했다.매년 4월 충무공탄신일이 오면 朴대통령은 빠짐없이 현충사로 내려갔다.朴대통령은 사당에 참배하고 활터에서 활을 쏘곤 했다. 충무공의 헌신을 기억하는 朴대통령은 본인이 병역을 기피했거나 아들을 기피시킨 사람은 요직에 중용하지 않았고 국회의원 공천을 주지도 않았다.특별보좌관단을 만들기 위해 대학교수를 수소문할 때도 이 원칙은 어김없이 지켜졌다. 중앙일보 - 97.5.6 - '대통령비서실장'이란 책을 공동으로 쓴 미국 캘리포니아대의 새뮤얼 포프킨 교수는 이 책에서“비서실장의 권력은 대통령의 일정을 통제하고 대통령의 면회시간을 배분하며 대통령이 검토할 사항을 선택하는 것에서 생긴다”고 분석했다. 대통령이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 누구를 만나 어떤 문제를 논하느냐는 국가운영의 성패에 대단히 중요하다.대통령이 독대(獨對)를 즐기는지,아니면 업무의 균형을 위해 어떤 이를 배석시키는지도 국정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면담을 운용하는데 원칙이 있었다.독대해야할 사람을 제한적으로 구별하고 그외에는 전부 비서실장이나 관계수석이 같이 앉도록 했다.비서실장이나 수석이 그 대화내용을 알아야 국정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실장이 됐을 때 朴대통령은 그런 문제에 대해 일일이 지침을 주지는 않았다.나는 몇번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눈치를 통해 원칙을 알아채고 또 관례를 다듬어갔다. 실장이 된 직후 군수뇌부가 군인사를 보고하는 자리에 나는 무심코 따라 들어갔다.朴대통령은 나에게“金실장,좋습니다”고 했다.나가 있으란 말이었다. 나는 다음번에도 또 들어가 앉았다.朴대통령은 같은 말을 했다.나는 세번째부터는 들어가지 않았다.“군인사나 군수뇌부의 다른 면담은 군통수권과 관련된 일이어서 독대의 필요성이 있겠구나”하고 느낀 것이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주요사건의 수사결과를 보고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비서실장이라도 수사에서 드러난 비위관계를 알게 되면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정보부장이나 보안사령관의 정보보고도 같은 맥락이었다.그러나 이들의 보고가 그렇게 자주 있지는 않았다.정보부장의 경우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 좋은 점도 있지만 독대자리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면 그 또한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은 국회의장.대법원장.총리를 접견할 때도 나를 제외했다.그것은 朴대통령이 그들에게 보이는 예의였다.총리는 업무의 협조를 위해 나의 배석을 요청한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대통령의 독대는 그러나 한해를 통틀어 몇번 없었다. 다른 공적 접견때는 비서실장인 내가 전적으로 배석했다.내가 잘 모르는 분야인 시장.도지사와 경찰국장의 인사문제 보고때는 담당수석이 배석하도록 했다. 대통령면담에 배석할 때 나는 조선왕조시대의 도승지나 사관(史官)이 된 것과 같은 자세로 임했다.왜냐하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대통령을 만나는 인사들이 대통령의 기분을 뚫고 들어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격적으로 일을 처리해버리기 때문이다.이른바 기습작전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비서실의 엄격한 분위기를 잘 모르는 신임장관들은 예정된 보고를 마치면 朴대통령의 기분을 살펴 다른 얘기를 불쑥 꺼내곤 했다.진지한 표정으로“그런데 각하,한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라며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그런 의도는 대개 눈에 보인다.정부예비비같은 것이 필요한 사업이 있는 경우가 많다.朴대통령이 승낙하면 다른 부처에“이미 각하가 허락한 사안”이라고 밀어붙이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나는 여지없이 끼어들었다.“장관님,수석비서관이나 다른 부처와 상의했습니까”라고 묻기도 했고 다른 부처의 일에 관한 것이라면“장관님,소관사항이 아니질 않습니까”라고 잘랐다.그러면 대부분 장관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비서실장으로서 이는 미움을 받는 일이지만 이렇게 잘라내는 것을 잘 해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그런데…”라고 하면서 대통령의 틈새를 노린다고 해서 미국에서도'By the way(그런데)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내가 근무할 당시 청와대본관(金泳三정부가 헐었음)의 1층에 대통령집무실이 있었다.2층공간은 절반 정도에 대통령가족의 침실.거실등이 있었고 비서실장과 실장비서의 공간은 4분의1 정도였다. 비서실장은 본관에서 1백여 아래에 있는 비서실신관에도 사무실이 있었다. 朴대통령이 본관이 비좁은데도 불구하고 비서실장을 본관 2층에 근무하도록 한 것은 접견때 배석을 물리적으로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나는 짐작한다.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의 초대비서실장인 김경원(金瓊元)씨때까지는 비서실장이 본관 2층에서 상근해 접견의 배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후 본관이 개조되거나 신축되면서 지금은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집무하는 본관에서 꽤 떨어진 비서실건물(신관)3층에서 근무하므로 전반적인 배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대통령이 공적 접견때 비서실장이 꼭 배석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조화를 위해 매우 유효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앙일보 - 97.5.7 - 대통령이 경륜가로부터 지혜를 잘 빌리면 국정에 큰 도움이 된다.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사들을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해 폭넓게 활용했다. 특보단은'대통령의 친구들'이었다.특보들의 주임무는 여론을 수렴하고 정책을 연구하는 것이었지만 대통령의 말벗이 되는 것도 무척 중요한 기능이었다. 朴대통령은 특보들과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국가와 역사를 토론했다. 70년 국제정치의 격동과 북한의 무력도발로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은 무척 심각했다.나는 朴대통령에게 건의했다.“각하,미국의 헨리 키신저같은 국제정치특보를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朴대통령은“金실장,그렇지 않아도 나도 특보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국제정치뿐만 아니라 정치.문화.교육.경제.사회등을 담당하는 특보단을 운영합시다”고 했다.朴대통령은“대가(大家)보다는 한참 연구성과를 올리고 있는 장년교수가 좋겠고 병역을 필한 인사중에서 대학과 출신도를 안배해 골라보세요”라고 지시했다. 나 혼자서 극비리에 적임자를 수소문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68년 12월에 선포된 국민교육헌장 제정작업에 참여했던 각계인사 50여명중 병역을 필한 장년인사를 우선대상으로 삼았다. 교육문화특보는 예외로 대가를 모셨다.나는 박종홍(朴鍾鴻)선생이 한국사상을 깊이 연구해 학계의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朴대통령은“교육헌장을 만들 때 몇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훌륭한 분이니 꼭 영입하세요”라는 분부를 내렸다. 나는 혜화동 자택으로 朴선생을 찾아가 朴대통령의 의향을 전했다. 朴선생은“대통령의 뜻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많은 데다가 새벽까지 밤새도록 연구하고 오전에 잠자는 생활을 수십년 해왔어요.관청시간에 맞춰 출근할 수가 없고 또 강을 해칠까 염려됩니다”며 사양했다. 나의 복명(復命)을 들은 朴대통령은“朴선생에 한해서는 오후에 출근해도 좋으니 꼭 모시라”고 했다.朴선생은 朴대통령의 특별배려에도 불구하고 일단 특보가 된 뒤에는 공무원과 같은 시간에 출근했다. 특보로 취임한 70년 12월10일 朴선생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한다. 3선개헌으로 정치적으로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朴대통령의 특보가 되는 심적 부담이 절절하다.“세론이 분분하다.나는 설명이 불필요하다.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뿐이다.교육이나 문화는 백년대계다.여야가 다를 리 없다. 학문은 그저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위한 것은 아니다.나의 철학을 산 철학으로 하느냐는 이 민족이 사느냐와 같다.” 그는 특보로 취임한지 얼마 안돼 국민정신연구원의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재정형편상 그가 76년 별세할 때까지 건립되지는 않았다. 그가 76년 3월17일 세상을 떠나자 朴대통령은 내각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의 추서를 손수 지시했다.그후 朴대통령은 후보지 몇군데를 헬기를 타고 답사했으며 78년 경기도판교에 지금과 같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창립했다. 朴특보는 한 나라의 국가지도자가 인재와 어떻게 의기투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생생한 증거다. 국제정치특보로는 연세대의 함병춘(咸秉春)박사를 영입했다. 나는 64년 동아일보 신문기고를 통해 처음 그의 존재를 알았다. 그러나 咸박사의 유학계획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그는 미국의 저명한 윌슨 대통령 기념연구소에 2년간 교환교수로 갈 참이었다.咸박사는 도저히 수락할 수 없다고 했고 나도 부득이하다고 생각돼 朴대통령에게 사정을 보고했다.朴대통령은 咸박사의 식견과 학식을 포기하지 못하며 무척 아쉬워했다. 나는 마음을 매섭게 먹고 다시 咸박사를 설득했다.咸박사는 완강했다. 3차교섭때 드디어 咸박사는 특보직을 수락해주었다.朴대통령은 그를 아꼈고 주미대사(73~77년)로 중용했다. 나의 천거로 관리가 된 咸박사는 5공의 청와대비서실장이 됐고 81년 북한의 아웅산테러때 순국했다.나는“내가 강권하지 않았으면 그가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죄책감을 씻을 수 없다. 특보단의 초대멤버는 두 사람외에 장위돈(張偉敦.서울대.국내정치).박진환(朴振煥.서울대농대.농업경제). 김명윤(金命潤.고려대.세제개혁).장동환(張東煥.성균관대.사회). 유재흥(劉載興.전국방부장관.안보). 김용식(金溶植.유엔대사.외교).임방현(林芳鉉.한국일보논설위원.공보)씨였다. 특보들은 나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분야에서 대통령을 훌륭히 보필했다. 중앙일보 - 97.5.8 - 국가지도자는 공식 채널과는 다른 방법으로 시중의 여론을 가감없이 듣고 부단히 국정에 반영해야 한다.이 때 물론 공식이 아니라고 해서 지나치게 사견에 치우치거나 다른 의도가 섞인 얘기는 경계해야할 것이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대표적으로 교수.언론인으로 구성된 '수요회'라는 여론자문단을 운영했다.수요회멤버들은 朴대통령의 통치방식을 거리낌없이 비판했으며 세인의 평을 그대로 전달했다.이들의 보고서를 받은 朴대통령은 수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꼭 빨간 연필로 줄을 그면서 이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71년 대선전부터 수요회멤버로 활약했던 이승윤(李承潤.전경제부총리)당시 서강대경제학과 교수는 나에게 이런 경험을 얘기해 준 적이 있다. “대전(大田)유세가 끝난후 자문단이 회의를 가졌는데 한 교수가 '朴대통령의 유세를 들어보니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국민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다.이건 후보의 유세가 아니라 대통령의 연설이다.한마디로 朴대통령은 간뎅이가 부었다.고치지 않으면 표를 많이 잃을 것'이라고 통렬히 비판하는 거에요.” 그 교수의 표현이 하도 과격해 자문단은 보고서를 만들 때 무척 고민했던 모양이다. 李씨는 이렇게 전해 주었다. “한 쪽에서는 '대통령한테 가는 보고서인데 이건 좀 심하지 않느냐'며 삭제를 주장했어요. 다른 한 쪽에서는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표현을 살려야한다'고 맞섰지요.갑론을박이 오고간후 한 사람이 '그러면 우리 얘기로 쓰지말고 유세장에서 한 청중이 대통령이 간뎅이가 부었구만하고 퇴장하더라고 보고하자'는 묘안을 내놓았어요.대통령은 보고서를 보고선 아무런 얘기가 없었고 이틀후 춘천유세때는 많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수요회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지만 대략 교수.언론인 6-7명정도로 구성되었다. 공보수석주재로 한달에 한번 청와대내에서 회의를 가졌으며 내용은 보고서로 정리돼 朴대통령에게 제시됐다.오랫동안 수요회를 관리한 인사는 김성진(金聖鎭)공보수석이었다. 한때의 회원을 보면 정재각(鄭在覺.고려대철학).박관숙(朴觀淑.연세대외교학). 오주환(吳周煥.고려대).손제석(孫製錫.서울대국제정치).구범모(具範謨.서울대정치학). 이승윤교수와 동아일보 논설위원 송건호(宋建鎬)씨였다. 朴대통령은 일년에 한두번정도 직접 저녁을 주재하곤 했는데 수요회는 주로 자체적으로 활동했다. 수요회는 여러 가지 좋은 정책을 건의해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72년 남북회담을 촉진시키기 위한 '남북이산가족찾기'였다.이것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해온 지식인들이 아니었더라면 좀처럼 내놓기 어려운 아이디어였다. 수요회는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수상의 동방정책을 중요문제로 토론한 끝에 “우리나라도 국제적인 데탕트(긴장완화)기운에 발맞추어 장차의 남북통일을 내다보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인적.경제적 교류에 주도권을 잡을 필요가 있다”며 이산가족찾기를 건의했던 것이다.朴대통령은 이 건의를 정보부.통일원.외무부에 주어 검토하도록 했고 건의는 정책으로 실현되었다. 자문단 멤버가 모두 朴대통령에게 협조적이었던 것은 아니다.동아일보논설위원이었던 송건호씨는 朴대통령이 7대대통령에 취임한후 장기집권에 대한 야당공세가 가열되자 수요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나는 김성진씨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고 “여론을 이끄는 중요한 분이니 만류해보라”고 했다. 朴대통령도 宋씨의 식견과 지사적 몸가짐에 호감을 갖고 있엇다. 하지만 宋씨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식적인 이유는 동아일보의 사규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朴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기의 정치적 소신을 金대변인에게 전했다.그는 그러면서도 그런 사정을 바깥에 공개하지 않는 분별있는 처신을 하였다.이처럼 수요회멤버들은 자신이 청와대와 통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적으로 이용하려 하지는 않았다. 수요회와 특별보좌관단이 기구의 형태를 갖춘 여론수렴의 양대축이었다.이밖에 朴대통령은 자신이 신뢰하는 원로들을 가끔 만나 고견을 듣기도 했다. 곽상훈(郭尙勳)전국회의장과 야당총재를 지낸 박순천(朴順天)여사가 면담을 요청하면 朴대통령은 예외없이 그들을 만났다. 朴대통령은 언론보도도 중요하게 생각했다.본청으로 퇴근할 때 조간신문의 첫 제작판을 지참했으며 저녁 TV뉴스를 보고 챙겨야할 일이 있으면 바로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관계수석에게 업무를 지시했으며 다음날 바로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바깥에서 사람을 만나면 잡음이 생기기도 하거니와 朴대통령이 이처럼 불시에 전화를 걸곤해서 나는 저녁식사를 꼭 집에서 했다.朴대통령이 물어봤을 때 놓치는 일이 없도록 TV를 항상 켜놓은채. 중앙일보 - 97.5.9 -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외국의 내정간섭을 배척하면서 자주성을 확립하는데 외교의 승부를 걸었다.또 국가이익을 제일로 삼고 국제신의를 존중하는 것에도 똑같은 비중을 두었다.자주외교를 이룩하려는 朴대통령이 가장 갈등을 빚은 상대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었다.대선유세 때부터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를 공약했던 카터대통령은 77년 1월20일 취임하자마자 이를 정책으로 확정했다.그리고 외교대상국의 인권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소위 인권외교를 내걸었다. 朴대통령은 이에 대해 무척 못마땅해 했다.그는“한국사람인 내가 우리 국민의 인권을 더 아끼고 존중하지,외국사람인 미국인이 어째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지극히 소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79년 6월29일 카터대통령이 서울에 왔다.그때 나는 주일대사로 있었는데 나중에 여러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카터대통령은 서울로 날아오면서 朴대통령이 철군(撤軍)문제를 자기에게 직접 거론할 것이란 말을 듣고 몹시 난처한 기분이었다.카터대통령은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면서 도착성명조차 내질 않았고 마중나간 朴대통령과는 악수 하나로 끝냈다.그는 곧장 동두천에 있는 미군기지로 날아가 그곳에서 방한 첫날밤을 보냈다. 드디어 다음날 정상회담이 열렸다.朴대통령은 회담 1주일전부터 혼자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면서 할 얘기를 정리했다.朴대통령은 철군결정이 왜 현명치 못한가를 45분간 논리 정연하게 피력했다는 것이다. 당시 회담에 동석했던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의 회고에 따르면 카터대통령은 몹시 분노했다고 한다.회담후 미 대사관저로 돌아온 카터대통령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차안에서 동승했던 밴스 장관.브라운 국방장관.브레진스키 안보담당특보와 강도높은 토론을 가졌다.브레진스키 특보를 빼고는 모두 철군에 반대했다.이로부터 20일 정도후에 카터대통령은 철군중지로 돌아섰다.세계전략의 측면에서 철군의 위험을 역설한 朴대통령의 반론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94년 7월8일 김일성(金日成)이 사망하기 20여일전에 카터전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났다.그는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은 위대한 지도자이고 북쪽의 인권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82년 11월 카터의 자필회고록이 출간됐다.나는 자주국방에 심혈을 기울이던 朴대통령을 추모하면서 철군과 인권문제가 어떻게 서술돼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서둘러 일역판을 구입했다. 상.하 양권 9백40여쪽중 한국에 관한 기술(記述)은 단 네줄뿐이었다.나는 朴대통령과 한국국민의 모습이 너무나도 애절하게 느껴져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朴대통령이 신의를 중시한 대표적인 예는 대만과의 관계다. 72년 유엔에 중국이 정식 가입하고 대만이 축출되자 그때까지 중국과 수교하지 않았던 각국은 앞다퉈 대만과 단교했다. 우리 정부내에서도“그렇게 대만을 고맙게 여기던 일본도 대만을 버리고 중국을 택했다.우리도 대만과의 관계를 격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朴대통령은 생각이 달랐다.그는“장제스(蔣介石)총통이 일제때 우리 임시정부를 도와주었다.특히 해방이후에는 국제무대에서 대만이 우리나라를 적극 지원해 주어 우리가 많은 신세를 졌는데 국제정세가 급변했다 하여 목전의 소리(小利)를 얻고자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대만 주재 한국대사관은 모든 나라중에 맨 마지막으로 닫을 것이다.한.대만 관계는 격하시키는 일 없이 그대로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한국은 90년대 초까지 대만이 수교하고 있는 30여개국의 하나로 남아 있다가 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했다.우리나라는 대만과 단교할 때 신의상 대만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충분한 배려가 없었으므로 대만은 한국에 대해 현재까지도 섭섭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월남 파병문제에 대해서도 朴대통령은 마찬가지였다.65년 상반기 육군맹호사단을 월남에 보내는 문제를 둘러싸고 국내는 상당히 시끄러웠다.야당은 물론 여당내에서도 반대가 적잖았다.그해 6월9일 파병여부를 결정하는 최종 당정연석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외신기자 출신인 서인석(徐仁錫)의원은“자유진영의 주요국 언론들이 월남파병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거나 비판적이며 전투부대의 파병은 국가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다”며 강하게 반대했다.하지만 朴대통령의 결론은 간단하고 확고했다.“6.25때 우리 대한민국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을 위시한 16개 우방이 자유의 십자군으로 즉각 참전해 주었다.이 신세를 갚기 위해서라도 희생을 각오하고 월남에 출병해야 한다.우리는 남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남에게 신세를 갚을 줄도 아는 신의와 책임을 가진 민족이다.” 우리의 많은 젊은이들이 월남땅에서 피를 흘렸지만 우리는 국제사회에 신의를 지켰다 중앙일보 - 97.5.10 - 요즘 황장엽(黃長燁)전북한 노동당비서의입에서 흘러나오는 북한의 섬뜩한 전쟁준비 얘기를 들으면 나의 기억은 남북한의 긴장이 한껏 고조되었던 70년대로 달려간다.세월이 많이 흘러 사람들의 실감이 약해졌지만 68년이후 북한의 무력도발은 실로 걱정스럽고 위협적인 것이었다. 북한의 특수부대와 해군은 여러 전선에서 우리와 충돌했다.그중에서도 우리나라 서쪽 영해(領海)의 최북단에 위치한 5개 도서에서는 곧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5개 섬은 백령도를 비롯한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다. 72년에 들어서자 북한은 50척이상의 경비정을 투입해 서해 5도에 도발을 집중시켰다.북한함정은 북방경비한계선을 2백19회나 침범했고 한국 영해에 들어온 것만 11회였다.73년 7월27일에는 백령도 근해에서 북한 경비정 4척이 우리 어선 1척을 격침시켰다. 북한은 73년 12월 군사정전위에서 이런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5개 섬이 유엔군사령관의 관할아래 있는 것을 인정한다.그러나 섬주변의 해역은 휴전협정에 따라 북한의 영해다.여기를 통과하는 모든 선박은 북한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앞으로 검문검색을 실시하겠다.” 북한의 공갈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북한은 서해에 함대사령부를 새로 창설해놓고 있었으며 잠수함과 유도탄을 발사할 수 있는 함정.어뢰정을 배치했다. 북한의 전함은 함대함(艦對艦) 스티크미사일을 장착했는데 우리 해군에는 그런 미사일을 탑재한 함정이 1척도 없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미국측에 미국이 개발한 함대함 하푼미사일 판매를 강력히 요청했으나 미국은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미국은“미국함정에 배치하고난 후 2~3년이 지나야 한국에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육지와 서해5도 사이를 왕래하는 배를 엄호하기 위해 공군과 구축함까지 동원해야 했다. 그러던중 드디어 일이 터졌다.74년 2월15일 백령도 근처 공해상에서 조업중이던 홍어잡이 어선 1척(선원 12명)이 북한고속정에 의해 격침되고 또 1척(선원 13명)은 납북되었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즉각 서종철(徐鐘喆)국방장관. 한신(韓信)합참의장과 육.해군참모총장을 불렀다.朴대통령은“韓장군이 직접 백령도에 가서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시오.북한이 침공할 경우를 생각해 지형지물도 살펴 어떻게 하면 방비책을 세울 수 있을지 보고하시오”라고 지시했다. 韓의장은 서해5도로 날아갔다.스틸웰 유엔군사령관도 같이 갔다.韓의장이 돌아온후 朴대통령과 군수뇌부는 '서해5도 사수(死守)작전'을 세웠다. 한.미연합군은 이들 섬의 경비를 위해 예비군은 물론 학도호국단까지 M16으로 무장시켰다.당시는 국군 현역병도 구식인 M1소총을 신식 M16으로 채 바꾸지 못한 때였다. 朴대통령은 특별히“못쓰게 된 탱크에서 포를 뜯어다 해안포로 설치하라.그 위력으로 북한상륙부대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지시했다. 섬 사수를 위한 대책은 군인뿐만 아니었다. 朴대통령은 전주민이 대피할 수 있는 지하요새를 건설하고 요새안에 주민이 몇달동안 버틸 수 있는 식량도 비축하도록 했다.그리고 朴대통령은 서해5도의 장병과 주민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만일 북한군이 상륙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항전하라. 육.해.공군이 총력을 다해 신속히 탈환할 것이니 1주일만 버텨라.” 무엇보다 중요한 대책은 북한고속정을 격침할 수 있는 함대함 미사일을 구입하는 일이었다.朴대통령은“미국이 팔지 않겠다고 하니 할 수 없다.나라에 돈이 부족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만든 좋은 미사일을 빨리 사자”고 제안했다. 군에서는 프랑스제 엑조세 미사일과 이스라엘이 만든 가브리엘 미사일로 대상을 압축했다.엑조세는 후일 포클랜드해전에서 아르헨티나가 영국함정을 격침시킬 때 사용해 유명해진 미사일이다. 朴대통령은 훨씬 비싼 엑조세를 선택했다.구축함은 물론 항공모함까지 타격할 수 있는 그 위력을 높이 산 것이다.엑조세를 들여오자마자 朴대통령은 대한해협 바다위에서 시사회(試射會)를 실시했다.바람이 몹시 불어 朴대통령과 군수뇌부가 탄 구축함은 매우 흔들렸다. 우리의 눈앞에서 한국해군의 고속정이 엑조세를 발사했다.엑조세는 화염을 뿜으며 날아가 모조물로 제작된 북한고속정을 일순간에 바다에 가라앉혔다. 우리가 엑조세를 사들이자 미국은 태도를 바꿔 서둘러 하푼미사일을 우리에게 팔았다. 우리 해군함정이 북한의 스티크보다 성능이 월등한 엑조세와 하푼으로 무장하자 북한은 서해5도 해역은 물론 동해 군사분계해역에서도 감히 우리 어선을 납치하려는 시도를 더이상 하지 못했다. 이무렵 국민은 적극적으로 방위성금을 내기 시작했다.언론계에서도 모금에 앞장섰다.74년 10개월간 64억5천만원이 모금됐다.75년에도 계속돼 11월말까지 성금은 1백61억3천만원에 이르렀다.이 돈이 초기 율곡사업(방위력증강사업)의 재원이 된 것이다. 중앙일보 - 97.5.11 - 국회의원후보자를 내는 공천(公薦)은 널리 인재를 발탁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후보자는 당선되면 입법부를 구성하게 되니 누구를 공천하느냐는 국가지도층의 수준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내가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71년 8대,73년 9대,78년 10대등 3차례 총선에서 공천을 지휘했다.나는 71년 이전의 상황은 잘 모른다.71년이후 내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지역구와 전국구(유신정우회)후보를 공천하는 데에 일정한 원칙과 시스템을 운용하였다. 지역구후보 공천의 경우 朴대통령은 공화당.내무부.중앙정보부에서 올린 3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심사하였다.당은 도지부장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당지도부가 정리한 추천명단을 제출했다.내무부명단은 시.도와 시.군.구의 지방행정조직이 취합한 내용이다.정보부도 지방책임자들이 보고한 유력후보를 모아서 명단을 만들었다. 朴대통령은 3가지 자료가 공통으로 1순위로 천거한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공천했다.3가지 보고서가 일치하지 않은 지역구는 대략 10-20군데 정도였다.그런 곳에 대해 朴대통령은 다시 한번 확인작업을 거쳤다. 朴대통령은 73년 9대선거의 경우 유혁인(柳赫仁)정무비서관을 현장으로 파견했다.柳비서관은 강원.경북.경남등지를 돌며 도지사를 직접 만나 몇몇 후보에 대한 지역여론등을 조사했다. 이런 보충조사가 끝나면 朴대통령은 공화당의 당의장.사무총장과 비서실장.정무수석을 불러 모아 최종적으로 공천을 결정했다.朴대통령은 당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비서실은 사실상 단순한 배석자였다. 78년 12월 10대총선 때 득표율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공화당은 朴대통령에게 “될 수 있으면 많은 지역에서 복수공천하자”고 강하게 건의했다.당시는 1구2인제여서 1개선거구에 2명을 공천해서 모두 당선시키면 의석수는 물론 정당득표율이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반대했다.朴대통령은 “우리가 의석수의 3분의 1(77명)을 차지하는 유정회(유신식 전국구)를 가지고 있으므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그러면 됐지 복수공천해서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朴대통령은 두군데만 복수공천을 허락했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은 신민당에게 득표율에서 1.1% 뒤졌다.만약 朴대통령이 몇군데만 더 복수후보를 공천했더라면 득표율의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 구미-칠곡-군위-성주-선산의 선거구에도 당에서는 칠곡출신 신현확(申鉉碻.후일 국무총리역임)씨와 선산태생인 김윤환(金潤煥.현재 신한국당고문)씨를 같이 공천하자고 했다.朴대통령은 申씨를 공천했고 金씨는 유정회로 추천했던 것이다. 유정회는 72년 10월유신으로 탄생한 새로운 전국구 제도다.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함으로써 대통령이 정국운영을 주도하도록 한 것이다.나는 朴대통령이 이 제도를 인재등용의 소중한 창구로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유정회의원은 여러 분야에서 발탁되는 것이니 만큼 朴대통령은 분야별로 추천창구를 정했다.우선 혁명주체인사나 퇴역장성등 군계통부분과 전직장관등은 자신이 직접 골랐다. 그밖에 현역은 국방장관,검사.판사는 법무장관.검찰총장,경찰은 내무장관,교육계는 문교장관,학계는 정무수석,언론계는 공보수석,여성계는 정무.공보수석등에게 추천을 맡겼다.내가 아는한 이런 통로외에 朴대통령이 사조직을 활용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비서실은 인재를 고르기 위해 학계.언론계등 5개분야별로 인명록을 만들어 참고했으며 여기에 수록된 인사는 약 3천명이었다.朴대통령은 정원(77명)의 3배정도가 되는 2백명내외를 추천받았고 자신이 낙점했다. 朴대통령은 낙점을 받은 인사들에게 통보하는 일을 나에게 맡겼다.나는 내가 통보해주고 당선자들이 나중에 “사전에 비서실장이 알려주더라”고 소문을 내면 괜한 잡음이 생길 것같아 담당수석들로 하여금 통보작업을 맡도록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친하거나 잘 아는 몇몇 사람에게만 직접 통보했다.예를 들면 이웃에 사는 김신(金信)장군이나 경제학계에서 알려진 이승윤(李承潤)서강대교수같은 사람이었다. 朴대통령과 참모들은 유정회에 인재를 많이 집어넣으려 했으며 고사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했다.73년 첫 유정회를 구성할 때 당시 홍성철(洪性澈)정무수석은 朴대통령으로부터 “여성계인사중에는 이범준(李範俊)이화여대정외과교수를 꼭 넣으라”는 분부를 받았다. 李교수는 부군인 박정수(朴定洙.현재 국민회의의원)씨와 함께 우리나라의 첫 해외 정치학박사부부로 유명했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다.洪수석은 李교수를 청와대로 불러 유정회지명을 통보했는데 李교수는 “나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더 보람있다.그리고 남편보다 먼저 국회의원이 될 수는 없다”고 사양했다. 洪수석은 그후 거듭 朴대통령의 뜻을 알렸고 李교수는 유정회에 들어와 세계의원연맹같은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다. 중앙일보 - 97.5.12 - 대통령의 모습이 국정현장에 나타나는 것은 여러모로 중요하다.대통령 자신은 현장속에서 국정의 냄새를 생생히 맡을 수 있다.현장의 사람들은 “대통령이 우릴 쳐다 보고있다”며 긴장하고 힘을 얻는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현장으로 달려갔다.朴대통령에겐 그것이 무엇보다도 즐겁고 행복한 일인 것같았다.그는 나날이 길이 넓혀지고 새마을운동으로 늘어나는 기와지붕을 보며 생의 동력을 얻었다.그가 직업훈련원과 기계공고에서 기술을 배우는 청소년의 어깨를 만지면 학생들은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곤 했다. 朴대통령이 현장을 돌며 마치 전쟁처럼 지휘한 것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다.朴대통령은 선전을 포고하고 전략을 세웠으며 직접 전투병사들을 지휘했다.67년 4월 29일 朴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그 계획을 공표하자 야당은 물론 여당과 공무원사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외국에서도 “한국이 벌써 고속도로가 필요하냐”며 냉소적인 시각이 주류였다. 朴대통령의 첫번째 전투는 부족한 예산을 어떻게 적절히 쓰느냐였다.朴대통령은 4백28㎞를 3백억원에 건설하겠다는 각오였다.선진국에 비하면 기적같은 일이다. 용지매입을 위해 朴대통령은 혼자서 극비작전을 수행했다.포병장교출신인 朴대통령은 지도를 직접 읽으며 노선 2-3개를 구상했다.朴대통령은 1차로 기공할 서울-수원간 후보노선을 그려본 후 극비리에 시중은행장 2명을 불러 용지의 시가감정을 부탁했다. 67년 11월28일 朴대통령은 건설장관.서울시장.경기지사를 청와대로 소집했다.朴대통령은 시가감정서를 내보이며 용지매입을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공사를 감리할 사람을 구했는데 민간기술자가 매우 부족했다.朴대통령은 강직하고 책임감이 왕성한 육사출신 위관급 독신장교 22명을 군에서 선발했다.2차로는 ROTC출신 12명이 뽑혔다. 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 참석했을 때 나는 朴대통령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는 젊은 위관급 공사감독관들이 부동의 자세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것을 목격했다.그것은 서훈의 영광 때문이 아니었다.2년5개월간 갖은 고생을 겪으며 책임을 완수해냈다는 벅찬 감동과 만감이 교차한 때문인 것이다. 朴대통령은 청와대에 '전투상황실'을 설치했다.朴대통령은 건설계획을 분석.검토하기 위해 공병장교 3명과 건설부의 기좌(技座) 1명을 청와대신관에 상주시키기도 했다. 회의나 접견같은 공식스케줄이 없고 시간이 날 때면 朴대통령은 차를 타고 공사현장으로 달려갔다.기층공사(흙다지기)가 완성돼 트럭이 달리는 길이면 朴대통령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렸다. 朴대통령이 고속도로에 대해 종교같은 신념을 갖게 된 것은 64년 12월 서독방문 때 였다.朴대통령은 본-퀼른간 아우토반(독일고속도로)을 시속 1백60㎞로 달렸다.가고 오는 길에 朴대통령은 두차례나 중간에 내려 노면과 중앙분리대.교차시설들을 주의깊게 살피고 앞뒤의 선형(線形)을 조망했다고 한다. '한국도로공사 15년사'는 이렇게 적고있다.“朴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고속도로건설의 계획과 추진에 깊숙이 그리고 강력하게 개입하여 단군이래의 대토목공사를 훌륭하게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는 거창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헬리콥터로 혹은 지프를 타고 수없이 현장을 시찰하며 공정을 살피고 현장관계자와 인부들을 격려했다.” 추풍령에 세워진 준공기념탑 후면에는 이한림(李翰林)당시건설부장관의 글이 새겨져 있다.“이 고속도로는 朴대통령각하의 역사적 영단과 직접 지휘아래 우리나라의 재원과 우리나라의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에 있어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조국근대화의 목표를 향해 가는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자랑이다.” 자연보호운동도 朴대통령이 현장에서 느낀 것을 국민운동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례다.77년 9월5일 朴대통령은 경북선산 고향에 있는 금오산 도립공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폭포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그 산은 소년 박정희의 추억이 어린 곳이다. 그런데 산꼭대기에서 폭포를 바라보니 경치는 일품이었으나 그 밑의 연못에는 밥찌꺼기.빈포장지.깡통.빈병등이 여기저기 마구 버려져 있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朴대통령은 아름다운 추억과 너무나 다른 불결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朴대통령은 “모두들 여기를 치우고 가자”고 했고 수행원일행은 30-40분간 연못과 주변을 청소하여 적잖은 쓰레기를 거뒀다.朴대통령은 걸어서 하산했는데 등산로주변도 쓰레기와 폐기물로 더럽혀진 곳이 많았다. 朴대통령은 금오산뿐만 아니라 다른 국.공립공원도 같은 실정일 것이라고 판단했다.朴대통령은 며칠후인 77년 9월10일 월례경제동향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자연보호운동을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하자”고 제창하였던 것이다. 중앙일보 - 97.5.14 - 최근 국민들 사이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 대한 추모가 깊어지고 있다.나는 정말로 가슴깊이 흐뭇함을 느낀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우선 朴대통령이 자신을 위해 부(富)를 모으지 않았으며 근검.절약을 실천한 지도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민간인으로서 나만큼 헬리콥터를 많이 탄 사람은 없을 것이다.朴대통령이 달려갔던 그 많고 많은 현장확인과 현장지도의 길에 나는 항상 자동차나 헬기를 타고 수행했다. 헬기위에서 朴대통령은 여기저기 우뚝 솟은 아파트단지,아름다운 농촌주택,크고 작은 공장들과 대규모 다목적댐.방조제 그리고 간척지등을 내려다 보았다.朴대통령은 마치 자신의 아파트나 집.공장이 늘어나는 것처럼 기뻐했다.朴대통령은 개인의 재산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 되는 것만 바랬고 또 그 성장을 기뻐했다. 나는 朴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파리채를 기억한다. 朴대통령이 살던 본관2층과 집무하던 1층에는 에어컨이 없었다.전기를 아끼려는 뜻이었다. 선풍기는 있었지만 朴대통령은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다.한여름에 열기가 닥치면 朴대통령은 창문을 열었고 파리가 날아 들어오곤 했다.朴대통령은 파리채를 휘둘러 파리를 잡았다. 2층 서쪽구석에 있는 내방은 오후내내 뜨거운 햇볕으로 달구어졌다.땀이 많이 흘렀지만 대통령이 틀지 않는데 내가 선풍기를 돌릴 수는 없었다. 朴대통령은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꼭 30%는 보리를 섞었다.지금처럼 건강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쌀을 아끼려는 혼식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점심은 멸치나 고깃국물에 말은 기계국수였다. 영부인 육영수(陸英修)여사와 나, 의전수석. 비서실장보좌관 등 본관식구들은 똑같이 국수를 먹었다.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점심은 국수였다. 차지철(車智澈)경호실장은 경호실장실에 자신의 전용식당을 만들었다.이 식당의 문을 열 때 車실장은 朴대통령을 초청했고 나도 따라갔다.그런데 점심메뉴로 스테이크가 나왔다.나는 속으로 “대통령은 국수를 먹는데 경호실장이 왜 스테이크를 자르나”는 생각으로 언짢았다. 후에도 車실장은 朴대통령을 몇번 더 모시면서 나를 같이 초청했다.그러나 나는 다시는 가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솔선해서 국산품을 애용했다.일상용품중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 3가지를 빼고는 양복. 외투. 내의. 구두 등 모든 것을 朴대통령은 국산품을 썼다.3가지 외제품 사용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넥타이는 매듭이 풀리지 않게 하는 납처리기술이 중요한데 우리나라가 이를 도입하려면 비싼 로열티를 주어야했다.그래서 朴대통령은 대사들이 귀국해서 외국산넥타이 2-3개씩을 선물하면 이를 주로 맸다. 만년필도 국산 빠이롯트회사를 적극 지원하였으나 외국의 일류품에 미치지 못하였다.전기면도기도 독일 브라운사의 명제품처럼 만들어 보라고 했으나 국내기술로는 역부족이었다. 국산이 멋있게 성공한 적도 있다.두산산업이 '마주앙'이라는 상표로 백포도주와 적포도주를 생산해 냈을 때 朴대통령은 무척 기뻐했다.하루는 포도주 생산국 출신으로 국내에 살고있는 외국인 신부와 수녀를 청와대로 초청해서 시음회를 가졌다. 국산상표라는 것을 숨기고 외국산 일류 포도주와 비교해 보도록 한 것이다. 외국인들은 “백마주앙은 세계 일류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으나 적마주앙은 좀 떨어진다”고 품평했다.그후 朴대통령은 국빈을 접대할 때 백포도주는 국산 마주앙을 썼다.한식을 접대할 때는 적포도주 대신 경주법주를 애용했다. 저녁 때 朴대통령이 특별보좌관단과 청와대식당에서 회식할 때 술은 주로 원당에서 가져온 막걸리였다. 朴대통령에게 막걸리는 술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농촌에서 자란 朴대통령은 막걸리가 단순한 술이 아니라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농촌을 잊지 못하는 朴대통령은 운명적으로 막걸리를 놓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朴대통령이 시해당한 궁정동 만찬장에는 시바스리걸이라는 양주가 있었다.그렇게 양주를 마시는 술자리는 청와대내에서는 별로 없었다.그리고 시기적으로도 朴대통령의 마지막 나날인 79년에 들어서 였던 것 같다. 91년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청와대비서실'이라는 시리즈에서 나는 朴대통령의 전속이발사가 이렇게 증언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朴대통령 그 양반만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러닝셔츠를 입었는데 낡아 목부분이 해져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었어요.허리띠는 또 몇십년을 매었던지 두겹가죽이 떨어져 따로 놀고있고 구멍은 늘어나 연필자루가 드나들 정도였다니까요.자기 욕심은 그렇게 없던 양반이….” 79년 10월26일 朴대통령이 흉탄에 서거한 다음날,본관2층 朴대통령의 주거공간을 수색하던 보안사수사팀은 朴대통령의 욕실 변기물통에서 벽돌 한장을 발견했다고 한다.朴대통령이 아꼈던 수도물은 양은 작지만 오랫 동안 시냇물이 되어 국민의 가슴에 흐를 것이다. 중앙일보 - 97.5.15 - 한국은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지 20년만인 65년 12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증오와 갈등을 털고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이 일을 밀어붙인 지도자는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동안 이 사건은 비판자와 반대자들이 朴대통령을 몰아붙인 중요한 소재가 되어왔다.그때 반대자들은'굴욕외교''매국외교'라는 함성을 외쳤는데 그 소리는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대표적인 목소리가 소위 6.3세대라 불리는 사람들일 것이다.6.3세대는 64년 6월3일 朴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사건과 연결된 말로,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이다. 30여년동안 나는 그들에 대해'역사의 진실에 대해 공부를 게을리한 사람들'이란 인식을 가져왔다.그들은 애국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역사에 대해 성실하진 않았다.그들은 격렬히 반대했지만 朴대통령은 밀어붙였고 거기에는 그래야 했던 역사적 당위가 있었다. 6.3세대가 몰랐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근거가 약했음에도 朴대통령이 회담에서 훌륭한 성과를 얻어냈다는 것이다.제2차 세계대전후인 51년 연합국이 일본과 체결한 대일평화조약에 따르면 일본은 참전국에 입힌 피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었다.연합국중 중국과 인도는 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버마(현 미얀마).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은 배상을 얻어냈다. 그런데 한국은 안타깝게도 참전국으로 인정받지 못해 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없었다.대개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는'독립축하금'이란 명목으로 배상적 성격의 자금을 받는 것이 세계의 관례였다. 그런 맥락에서 물론 우리도 당연히'독립축하금'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그런데 다른 사정 하나가 있었다. 한일회담에 참여했던 배의환(裵義煥)전 주일대사는 회고록에서“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는 나에게'일본은 패전하면서 한국땅에 30억~40억달러나 되는 재산을 놓고 나왔다고 주장한다'고 얘기해주었다”고 적고 있다.일본은 그만한 재산을 한국에 주었으니 따로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그만큼 국제법적으로,그리고 논리적으로 우리는 대일청구권 교섭에서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당시 정말로 나라를 위했다면 의식있는 의원.언론인.교수.학생지도자들이 이런 배경을 공부하고 국민에게 설명했어야 했다.그런데 야당이란 사람들은 어떠했는가. 64년 3월24일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일어나자 이틀후'삼민회'소속 김준연(金俊淵)의원은 국회에서“김종필(金鍾泌)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외상이 합의한 6억달러의 청구권중에서 1억3천만달러가 국민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도입돼 있다”고 발설해 데모에 더욱 불을 질렀다. 金의원은“대한민국에서 가장 정통한 소식통에게서 들었다”고 했으면서도 검찰에 출두해서는“장택상(張澤相.무소속)의원에게서 들었다”고 했다.증인으로 불려간 張의원은“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을 뺐다. 金의원은 있지도 않은 일을 무책임하게 얘기해 데모를 더욱 극렬하게 만들었고,그로 인해 朴대통령은 64년 6월3일 계엄령을 발동해야만 했다.朴대통령은 후일 두고두고 金의원의 발언을 개탄했다.“정치인이라면,그것도 다선이라면 국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정략적인 계산에서 터무니없는 얘기로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탄식하곤 했다. 65년 5월18일 미국을 방문한 朴대통령은 기자클럽에서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해 이렇게 연설했다.“이 긴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우리는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손을 잡는 것이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는가.” 무상 3억달러,일본정부차관 2억달러,민간상업차관 1억달러(후에 3억달러로 늘어남)의 대일청구권. 朴대통령이 정권의 생명을 걸고 고독한 싸움끝에 얻어낸 이 귀중한 자금은 우리 경제개발에 투입돼 고도성장의 비료가 되었다.만약 朴대통령이 국민의 욕을 먹는 것을 두려워해 대일교섭을 다음 정권으로 미루었다면 우리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청구권자금이 실로 요긴하게 쓰인 곳이 포항제철이다.우선 연산 60만t규모의 종합제철소를 짓기 위해 한국은 67년 3월 대한(對韓)국제차관단을 결성했으나 세계는 우리에게 냉소적이었다. 69년 4월엔 세계은행이,그해 5월엔 미국수출입은행이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포항제철에 대한 차관제공을 거부했다.한국은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철(鐵)이 필요했는데 돈이 없어 포철을 착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구세주 역할을 한 것이 대일청구권 자금이다.포철에 들어가야 할 외화는 1억6천8백여만달러였는데 朴대통령은 이를 모두 청구권자금으로 충당했다.항일독립유공자들과 어민등 각계에서 청구권자금을 요구했지만 그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낭비보다는 건설'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중앙일보 - 97.5.16 -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통치중에서 '역사적으로 잘못한 일'을 고르는 것은 나로서는 참으로 가슴아프고 내키지 않는 일이다.하지만 세상일에는 반드시 명암이 있듯 朴대통령도 잘못한 것이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인사.권력 관리측면에서 朴대통령의 가장 큰 실수는 차지철(車智澈)경호실장의 전횡과 국정개입을 방치한 것이다.정책면에서 朴대통령의 가장 커다란 과오는 78년 해외건설의 과잉과 부실을 초래한 점이다. 내가 78년12월 물러날 때까지 나와 車실장의 관계는 원만했다.다만 78년 들어 車실장은 매주 월요일 아침에 경호실직원뿐만 아니라 수경사 일부 병력까지 경복궁연병장에 모아 사열을 했다. 車실장은 이 열병식(국기하강식)에 행정부.여당의 고위인사를 차례로 초청했다.경호실의 사기를 올리겠다는 게 이유였다.그는 1차로 나에게 참석을 요청했다. 나는 수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응하지 않았다.평상시 군병력의 일부를 경호실장이 장악하는 문제에 대해 나는 내심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다.나를 제외하고 초청받은 인사는 모두 사열과 열병에 참석한 듯 했다. 78년 여름까지 경호실장의 직무에만 충실하던 車실장은 경호실 식당과는 별도의 경호실장 전용식당을 차렸다.시내 일류 양식집에서 출장을 나와 양식을 제공했다.그는 朴대통령을 두서너번 모셨고 주로 여야정치인.언론인.대학교수를 초청했다.나는 “각하가 기계국수를 먹는데 경호실장이 스테이크를 자르나”고 내심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車실장은 경호실에 있는 정보처외에 자유당때 육군헌병감을 잠시 지낸 이규광(李圭光.全斗煥전대통령의 처삼촌)장군을 장(長)으로 하는 비공식 정보기관을 운용했다.車실장은 여기서 수집하는 정치정보를 朴대통령에게 가끔 올렸는데 朴대통령은 참고하라며 나에게 주었다.경호실장이란 직책이 책임지고 조치할 입장이 아니어서인지 건의에는 '강경한 조치'가 간혹 포함됐다.나는 이런 정보를 경솔히 올려서는 곤란하다고 느꼈다. 내가 78년12월 비서실장을 물러난 이후부터 비서실과 주요 대통령직속기관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기고 대통령 보좌기능을 둘러싸고 마찰음이 발생했다.주일대사였던 나는 동경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가장 많이 들린 우려의 소리는 車실장의 안하무인적 농단과 '車실장-김재규(金載圭)정보부장'사이 마찰에 관한 내용이었다. 내가 듣고 가장 걱정한 것은 보고체계의 문란이었다.매일 아침 대통령이 비서실장으로부터 종합보고를 듣는 것은 정례화된 것인데 경호실장이 먼저 시국주요현안을 보고하고 관계기관에 대통령의 뜻을 지시하는 사례가 차츰 는다는 것이었다.주요기관사이 역학관계도 비정상적으로 뒤틀렸다.매일 아침 경호실 청사현관에 정보부장 승용차가 몇시간씩 서있곤 했다고 한다. 車실장은 또 당과 국회에 자기가 관리하는 광범한 인맥을 만들었고,수시로 이들을 경호실로 불러 각하의 뜻이라는 것을 전달했다.공화당의원들은 車실장에 붙어 다니는 인맥을 자공달(子供達.작은 아이들)이라는 자학적인 은어로 불렀다고 한다. 해외건설의 부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73년 10월 제1차 오일쇼크(유가폭등)로 중동에 달러가 몰려들자 중동국들은 각종 건설사업을 크게 벌렸다.우리 건설업체들은 추진력과 근로자의 근면.성실로 이 시장을 파고 들었다. 75년 하반기 朴대통령은 중동진출업체를 지원해 주기 위해 한국 금융기관들이 지불보증을 해주되 중동진출허가를 받는 업자를 정확히 고르라고 지시했다.그때 건설장관을 지낸 김재규씨는 업체를 20개 이내로 엄선했다. 중동건설이 순조로워지고 20개사 모두 좋은 실적을 올리자 새로 진출하고 싶은 지방건설업체들이 78년 12월 총선을 앞두고 공화당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소문을 듣고 이희일(李熺逸)경제1수석과 함께 이를 막기위한 조치를 취했다.나는 공화당의원출신인 신형식(申泂植)건설장관에게 과잉진출이 가져올 폐단을 역설했다. 그러나 건설부는 경쟁의 자유와 기회균등을 이유로 내걸고 어느날 갑자기 58개사에 새로 해외진출허가를 내주었다.朴대통령은 사전에 보고를 받지 못했다. 갑자기 4배에 가까운 78개 업체가 서로 경쟁하게 되니 우려했던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전문인력과 기술자를 스카우트하려는 싸움이 벌어지고 공사부터 따내고 보자는 출혈입찰도 등장했다. 중동의 환경도 불리하게 바뀌었다.79년 6월 제2차 오일쇼크가 터져 유가가 다시 치솟자 반작용으로 세계적으로 유류소비가 줄고 대체연료개발이 진척되었다.그래서 유가는 크게 떨어졌으며 중동건설경기도 급속히 냉각되었다.그 여파로 중동진출업체중에는 부실기업이 속출했다. 80년대초 5공이 출범한후 김재익(金在益)청와대경제수석이 부실해외건설업체 정리에 대한 나의 의견을 들으러 찾아왔다.나는 나의 노력부족으로 5공경제팀에 부실정리의 어려운 짐을 안겨준 점에 유감을 표했다. 청와대비서실을 중심으로한 관계부처.금융기관 실사팀이 중동에 파견되고 본격적인 정리작업이 진행되던중 83년 10월 버마 아웅산에서 金수석이 순국했다.그후 부실정리에 상당한 시일이 걸려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실채권을 각 은행이 걸머지게 되었다. 중앙일보 - 97.5.17 - 5共정권의 과오 한 대통령이 물러나고 새 대통령이 들어섰을 때 그가 전임자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국정의 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모든 순리가 그러하듯 그는 전임자가 잘한 것은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잘못한 것은 고치거나 취하지 말하야할 것이다. 79년 10월 朴대통령이 서거한 후 신군부가 이끄는 5공정권이 들어섰다.5공은 이런 순리를 져버렸다.농촌을 부흥시킨 새마을운동을 변질시켰고 자주국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시련을 안겼다.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사무총장에 자신의 아우 전경환(全敬煥)씨를 임명했다.그는 유도를 전공한 경호관으로 청와대 본관경호팀 조장의 한 사람으로 근무했을뿐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86년 8월 全씨가 물러나기까지 6년여의 세월을 거치면서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이 외화내빈(外華內貧)으로 흘렀다.朴대통령 서거후에도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고 그 순수성이 유지되었더라면 우리는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한 농촌의 어려움도 새마을운동으로 거뜬히 극복했을 것이다. 오원철(吳源哲)씨는 71년 11월 청와대경제2수석비서관으로 취임한 후 8년여동안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키우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그는 79년말 경제2수석실이 폐지됨에 따라 청와대를 떠났다. 吳씨는 방위산업담당 수석비서관으로 무기와 군용장비의 국산화를 적극 추진했다.그는 국산화가 우리나라 공업전체를 발전시키며 국방과학기술을 향상시키고 무엇보다 외화를 아낄 수 있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반면 군당국은 비싸긴 하지만 성능이 좋은 외국제 무기를 잠재적으로 선호했다.때문에 吳씨와 군당국사이에 간혹 긴장이 조성되는 듯 했다.吳씨는 해임되자 마자 신군부세력에게 끌려가 부정축재라는 부당한 혐의를 받고 모진 고초를 겪었다.그간의 실정을 잘 아는 나는 지금도 신군부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의분을 금할 수 없다. 5공신군부는 미국으로부터 한국의 무기개발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朴대통령의 자주국방을 계승하려면 이를 뿌리쳤어야 했는데 5공은 이에 굴복했다. 5공은 국산무기개발의 중추였던 국방과학연구소(ADD)와 유도탄 개발분야에 대해 숙청을 단행했다.80년 8월 ADD소장이며 유도탄개발을 총지휘한 심문택(沈汶澤)박사가 물러나야 했다.새로 취임한 소장은 주영복(周永福)국방장관의 지시라며 30여명의 간부를 해임했다.이중에는 이경서(李景瑞)부소장과 강인구(姜麟求)박사등 유도탄개발에 크게 기여한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82년 12월말에는 대대적인 제2차숙청이 있었다.김성진(金聖鎭.육사11기,체신부.과기처장관역임)장군은 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ADD 총인원 2천4백여명중 8백여명을 감원해 ADD를 마비시켜 버렸다.몇년에 걸쳐 엄청난 비용을 들여 양성한 유능한 인재들이 ADD를 떠나게 된 것이다. 특히 신군부는 유도탄연구팀을 아예 없애고 말았다.최현호박사는 K-2유도탄의 개발책임자였다.K-2유도탄은 미사일이 목표물에 도달할 때까지 전파로 유도하는 대신 사전에 목표물에 대한 데이터를 입력해 목표물에 명중하도록 고안된 것이다.그도 숙청대상에 포함됐다. 연구팀에게는 선행연구만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선행연구란 실물은 다루지 말고 책이나 읽고 있으라는 뜻이다.이로써 우리나라의 유도탄 개발사업은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78년 북한을 앞질러 세계에서 일곱번째 유도탄개발국이 되었던 우리나라는 지금 북한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다. 신군부는 왜 ADD요원 8백여명을 숙청했는가.숙청당한 사람들은 5공기간중 국방부에 가서 데모를 벌였다.그들은 부당해고에 대한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고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았다.이는 5공의 조치가 잘못이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朴대통령이 서거하자 70년대 朴대통령이 주력했던 중화학공업이 과잉 투자된 것이며 인플레를 일으키는 요인의 하나가 된다는 시비가 일어났다.공장을 지어본 경험도 없는 신군부의 국보위위원들은 중화학공업의 생리도 모르면서 중화학공업의 조정을 들고 나왔다.상공부에서도 중화학공업 건설담당자들이 타의에 의해 떠나게 되었다.중화학공업 조정은 성과도 없이 2-3년간 혼미를 거듭해 국가경제에 주름살을 끼쳤다. 중화학공업의 투자에는 그럴 만한 사정과 목표가 있었다.70년대 한국으로서는 방위산업과 그 기초가 되는 중화학공업을 되도록 빠른 시일내에 건설하는 것이 국가안보상 절대적인 명제였다. 중화학공업은 적어도 10년 또는 20년 앞을 내다보는 것이므로 준공후 일정기간 공장시설의 일부가 가동되지 않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50.60년대 일본도 중화학공업의 일시적 과중투자가 있었고 그 때마다 일본은 중화학제품의 과감한 수출로 이를 극복해 냈다.우리도 수출로 이에 대처할 방침이었다.또 고도성장을 추구했으므로 인플레의 압력은 항상 있었다.유발된 인플레는 방위산업만 완성되면 강력한 안정정책으로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80년대 후반 국제적인 3저(低)호황에서 고도성장과 흑자경제가 가능했던 것은 5공이 비판했던 중화학공업이 수출의 주력을 담당했기 때문이다.90년대 전반부에도 중화학공업 제품이 수출의 과반수를 차지해서 우리 경제를 지탱했다.정리=김진 기자 중앙일보 - 97.5.18 - 79년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대가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 뒤 그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해 국내 일부에서 많은 비판이 제기됐다.어떤 식자(識者)는 실패였다고까지 단정했다. 나는 할 말이 무척 많았지만 묵묵히 세월을 기다렸다.나는 언젠가는 그 옳고 그름이 판명될 때가 오리라 기대하고 있었다.그런데 그 기회는 외국에서부터 먼저 왔다. 93년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을 지도하는 세계은행에서는 뜻밖에 나에게 초청장을 보내왔다.이사회에서 한국과 일본의 경제발전모델에 관해 비공개 간담회를 갖기로 했으니 참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세계은행이 이를 비공개로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개도국 경제개발에 있어 세계은행은'자율경제''경제의 자유화'를 신봉하고 있었는데 한국은 정부주도로 성공한 독특한 케이스였던 것이다.세계은행은 조용히 그 비밀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이것은 지난 15년동안 기다려오던 기회였다.나는 주저없이 받아들였다. 간담회는 3월25,26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렸으며'동아시아로부터의 교훈'이라는 의제였다.세계은행의 이사 전원과 조사담당 고위간부만 참석했다.그들은 한국에 대한 문제는 나에게,일본관계는 하버드대에 객원교수로 와있던 일본인 교수와 대장성 고위관리 출신의 현역 도쿄(東京)은행회장을 상대로 실적을 듣고 따졌다.나는 첫날 벽두에 기조연설을 위해 그들 앞에 섰다.'박정희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 61~79년'이라는 제목으로 45분간 이런 요지로 연설했다. “우리나라 경제개발정책의 특징은 강력한 정부 주도형이었다는 겁니다. 주요 경제시책으로는 수출을 적극 진흥했고 중화학공업을 건설했으며 방위산업을 육성했지요.농업부문은 새마을운동으로 개발했습니다.여러가지 성공사례가 있지만 포항제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세계은행은 개도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반대해왔습니다. 우리는 세계은행의 지원없이 포항제철을 건설했으며 성공했습니다.” 나는 어려움도 소개했다.“우리에겐 수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북한과 대치하는 우리는 과중한 방위비를 견뎌내야 했으며 경제개발을 급속하게 하다보니 지역간에 불균형도 나타났습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에 들어있었다.“한국은 개발도상단계에서 이륙(take-off)해 2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중진국으로 성장했습니다.그러한 경제기적을 이룬 근본요인은 朴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이었다고 나는 감히 얘기합니다.朴대통령은 국민에게 꿈과 미래상을 제시하고'하면 된다''잘 살아보자'고 호소하면서 한국인의 단결을 고무시켰습니다.” 기조연설이 끝나자 우렁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러니 정치정세가 불안해지는 것이다.70년대 중반부터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소득을 넘어선 한국이 부럽다.한국에서 우리나라의 농업정책 연구를 도와달라.” 2일간의 간담회 참석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 아침,세계은행은“우리 은행에 있는 경제개발원의 참고교재로 당신의 경제회고록을 영문으로 출판하겠다”고 제의했다.나는 이를 쾌락했다.세계은행 경제개발원(EDI)이란 개도국의 공무원.중앙은행직원.개발은행직원등을 모아 경제개발정책을 가르쳐 본국에 다시 보내는 일종의'세계경제개발 교육센터'다.세계은행이 출판하기를 원한 책은 90년 10월 중앙일보에서 출판한 나의 경제회고록'한국경제정책 30년사'였다. 세계은행은 경제개발원의 학생들에게 참고서로 활용하고 은행에서 주최하는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세계의 학자.공무원등에게 공급하고자'정책수립회고총서'시리즈를 기획했던 것이다.나의 책은,아니 한국의 경제개발정책은 그 시리즈의 첫번째로 뽑혔다.나는 번역학 박사인 며느리의 도움으로 책을 번역해 그해 9월 세계은행에 보냈다.세계은행 간부 바트는 심사서평에서“한국의 경제기적을 이룬 정책에 관한 흥미진진하고 적절한 설명이며 개도국과 자유경제로 전환하는 구(舊)공산국가들에 큰 참고가 되겠다”고 총평했다. 나의 영문회고록은 94년 10월 1차로 4만부가 출판되었다.개발원 원장은 서문에서 이렇게 소개했다.“이 책은 개도국과 자유경제로 전환하는 공산권의 공무원과 중앙은행.개발은행의 임직원을 위해 출판되는 것이지만 경제개발론.정치학.국제관계론및 지역연구를 전공하는 학도들에게도 참고가 될 것이다.” 朴대통령의 경제정책과 그가 이룩한 업적은 세계은행이 존속하는 한 1백80여 회원국은 물론 관심을 갖는 학도들에게 계속해 널리 알려질 것이다. 중앙일보 - 97.5.19 - 덧글 쓰기 엮인글 쓰기 공감 |
[출처] 김정렴 정치회고록 1|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