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재미
김은영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뜨자 방문을 본다. 방문이 얌전하게 잘 닫혀 있는 걸 보니 남편이 귀가를 한 모양이다. 밤마다 침대에 들기 전 방문을 살짝 당겨만 두는데 남편은 새벽에 혹은 아침에 집에 오면 잠에 든 나를 확인하고 문을 꼭 닫아 놓는다. 코골이가 심한 나의 생사가 염려되어 아침마다 확인하는 모양이다.
아침잠이 많았던 내가 환갑을 지나며 아침형 인간이 된 듯하다. 일찍 눈을 뜨면 먼저 물 한 잔과 몸에 필요한 약과 건강식품을 먹고 나의 정원(앞 베란다에 늘어선 화분들이 놓인 곳)에 나가 꽃들과 눈맞춤을 한다. 벌레가 있나 살펴보고 목초액도 뿌려주고 목마른 뿌리에 물을 준다. 꽃가지는 딸아이 머리 골라주듯 잘라주고 다듬어 준다. 새잎을 뾰족이 내밀고 있는 그것들이 어찌나 귀엽고 기특한지...... 밖에서 들려오는 등교하는 여학생들의 재잘거림도 참새들의 수다 소리만큼 정겹다.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일찍 일어난 탓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 갈 시간을 기다린다. 시계 바늘의 느긋한 움직임을 본다. 일찍 눈 뜬 덕에 아침이 여유롭다.
학생들 일정에 맞추어 살아오다 보니 날짜나 달의 개념보다 요일 개념이 더 익숙해 있다. 친정 엄마와 점심이 있는 수요일, 글쓰기 모임이 있는 금요일 외에도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겨도 반갑고 신난다. 나이가 드니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아등바등 연연해하는 마음이 줄다 보니 한결 관계에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만남들이 더 즐겁고 정겹다 여겨진다. 힘이 들고 스트레스를 받는 만남은 우선 좀 멀리하고 나이나 성별, 성향에 좀 더 선을 두지 않고 새로운 모임에 참여 하다 보니 그 또한 얻는 것이 많다. 나이가 들어 자녀 양육과 남편 봉양에서 놓여난 옛 친구들과도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락호라.’ 늘 신나고 뜻깊게 만나게 된다.
휴일이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삶을 산 지 십오륙 년, 올해 처음으로 일요일에 완전한 휴일을 갖게 되었다. 단 한 시간의 일도 없는 휴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루를 느슨하게 해준다. 아침 느즉히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고 소파에서 딩굴딩굴 게으름을 피워보기도 하고 고소한 향을 풍기며 과자를 굽고 환한 햇살을 받으며 손톱을 깎는다. 창밖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도 하고 원두커피를 드립으로 내려 커피 향을 거실 가득 피워 놓으며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음미한다. 행복이란 이런 게 아닐까.
우리 부부는 퇴직금도 연금도 없다. 그래서 노후 계획이 아직 서 있지도 않다. 어떻게 할 거냐고 우리보다 주변에서 더 난리다. 하지만 막상 환갑을 넘기고 나니 생각이 좀 편해졌다. 건강만 하다면 노후에도 조금씩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될 것 아닌가. 큰돈 들 일이 많지 않으니 알뜰하게 꾸려 나간다면 별 문제 없지 않을까. 미래에 낙관적일 수 있음도 나는 늙지 않고 익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작은 맥주 캔 하나를 탁자에 놓고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예능 프로를 보며 혼자 실없이 껄껄 웃는다. 간혹 텔레비전의 상황에 혼잣말로 시청평을 하기도 한다. 별다른 일정도, 처리해야 할 버거운 문제도 없는 내일을 가진 이 나이가 좋다. 삼십년지기 남편과 먼 곳에서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있을 자식들, 가족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잘하고 있을 거라 믿으며, 설사 다소 힘들더라도 기도 외엔 해 줄 게 없음에 기대어 마음 놓고 잠자리에 든다.
반듯이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두 다리를 쭉 뻗어본다. 온몸을 타고 퍼지는 안온함. 아,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나는 오늘 하루 또 익어가는구나!
첫댓글 저도 이렇게 익어가고 싶어요 그럼 저도 안온한 행복이 온 몸을 퍼지겠죠?^^ 내일 뵙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