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의 죽음은 세자빈 친정의 멸문지화 되었고 이때 부터 강문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소현세자빈 강씨는 조선 왕실의 여인중 유일하게 조선 땅을 벗어났던 인물이다.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인질로였다. 세제빈으로 간택돼면 평생궐 밖으로 구경을 못하는 법이었다. 그런 대궐을 떠나 수천리 나라밖으로 심양에 같다.
인조15년(1637) 2월 서울을 떠난 강씨일행이 압록강과 만주 벌판을 지나 심양에 도착한 때는 4월이었다 강씨가 도착한 곳은 심양궁궐근처 瀋陽館.(현제 심양시 아동 도서관자리) 이곳은 사실상 주청 주선 대사관이었다, 이곳에서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직접 상대하기를 꺼리는 인조를 대신해 많은 일을 수행했다.
소현세자가 정치적인 일에 몰두하는 동안 강씨는 심양관 경재문제 해결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심양관에 정착한 조선인 일행은 192명 이었는데 이 대식구의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큰 일이었다. 당시 심양의 남탐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거래하는 노예시장이 있었는데 돈이 있으면 이들을 贖還할 수 있었다. 이 무렵의 사정을 적은 '심양장계' 인조15년 5월조는 속환가가 수백 또는 수천냥이나되어 희망을 잃고 울부짓는 백성들ㅇ; 도로에 가득 찼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비은 현실적으로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이 돈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녀는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인조 17년에 심양의 八王이 은밀히 銀子500냥을 보내 綿布, 표범가죽호皮 수달피, 꿀 등을 요구 할 정도로 청나라는 물품부족에 시달렸다. 강씨는 청나라 지배층의 두둑한 지갑을 조선의 질좋은 물품과 연결시키면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면포 가죽만아니라, 종이와 槐花괴화 등 약제와 생강도 좋은 무역품이었다, 담배도 마찬가지 였다
그녀가 무역을 통해 경제에 눈을 뜨던 인조19년 1641년, 기회가 찿아왔다, 청나라에서 농사짓기를 권유해 온 것이다, 청나라는 野里江 동남 王富村과 魯哥村노가촌 두곳에 각각 150일 갈이와 沙河堡사하보 근처의 150갈이와 士乙古근처 중 150갈이를 농토로 제공했는데 하루갈이는 장정한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의 토지였다
강빈은 처음에는 한인 노예와 소를 사서 농사를 지었다,
한인들의 값은 은 25-30냥 이었고 소값은 한 마리에 15-18냥 이었다, "심양장계" 에 따르면 인조 20년에 농사로 거둔 곡식은 3319석 이었다, 강빈은 점차 한인 농군을 노예시장에서 속환한 조선인으로 바꾸었다,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조선인 농부들이 더욱 열심히 일했을 것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이 덕에 수확물은 더욱 많아졌다. 강씨는 조선의 농법이 가미된 이 농산물들을 만주 귀족들에게 팔았는데 큰 인기를 끌면서 비싼 값으로 팔았다. 무역만 하던 단일체재에서 생산과 무역을 하는 복합체재로 발전 한 것이다.
강빈의 무역수완덕에 인질생활초기 울며호소하는 조선인으로 가득찼던 심양관 앞거리는 무역하는 인파로 북적 거렸다, '인조실록23년'6월조'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은 인질생활에 좌절하는 대신 대규모 영농과 국제무역을 주도하는 경영가로 변신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택이었다.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맥락 이었다. 이제 이들 부부가 귀국헤서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되면 조선은 변화할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런 강빈과 소현세자를 의심했다.
그는 강씨가 청나라와 짜고 자신을 폐한후 소현세자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소현세자 부부는 인조 23년 1645년 2월 9년간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부푼가슴으로 귀국했다. 이때 심양관에는 4700석의 곡식이 남어있었다 하니 그녀의 경영수완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경영수완으로 조선을 부강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자는 귀국 두 달만에 인조에 의해 독살됐다,
그녀 또한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 인조는 재위 24년 3월 강빈을 폐출해 친정으로 쫓아냈다, 인조실록은 강빈이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에 실려 선인문을 나갔는데, 길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면서 한탄하였다 고 적고 있다, 인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당일로 사약을 내려 강빈을 죽였다. 당시 사관이 '단지 추측만으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안팍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정도로 무고한 죽음 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시대를 앞서 나갔던 실용주의적 여성 경영자의 죽음이자
그녀가 만들어내려던 개방의 나라, 실용의 나라 조선의 죽음이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1612-1645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닌 맏아들이다,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세자의 인질을 요구 했다. 그로인해 강화가 결렬되자 세자는 '내가 비록 잘못되어도 아들이 있으니 괜찮다" 며 스스로 인질을 자처했다. 이에 따라 세자는 동생 봉림대군을 비롯한 186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당시 청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끌려갔다
세자는 남진하는 청군을 따라 북경에 가서 예수회 선교사 DKEKATIF을 만나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을 접한 후 조선을 개방하기로 결심한다 9년간의 인질생활 끝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李邦訟이방송 등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 궁녀를 대동하는 한편 서양의 각존 과학기구와 서적을 갖어왔는 것은 이 때문 이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조실록'에 일곱구멍에서 피가나와 독약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고 기록된대로 그는 귀구구 두달만에 독살 당한다, 조선의 종법은 장자가 죽으면 동생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인데 인조는 세자의 장남 석철이 아니라 동생 봉림대군(효종)에게 뒤를 잇게 했다, 뿐만아니라 석철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죽었고 강빈의 친정 어머니와 두 친정 오빠까지 죽었다, 자신이 소현세자의 독살을 주도 했음을 드로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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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빈 강씨
역사속에 그 여자
박은봉/ 책과함께출판사 기획실장
경기도 광명에서 안산 가는 길쪽엔 제법 큰 저수지가 있다.
낚시 좋아하는 이들은 웬만큼 아는 애기능 저수지다. 저수지를 오른편에 두고 1킬로미터쯤 걸어 산을 오르면 아담한 무덤이 외로이 솟아 있다. 애기능이다. 정확한 이름은 영회원(永懷園).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의 맏며느리 소현(昭顯)세자빈 강씨의 묘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맏아들이요, 효종 임금의 형 아닌가. 그이의 아내 강씨가 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묻혀 있을까? 무슨 사연이 있지 싶다.
우리 역사의 비극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8년 만에 돌아왔다. 세자빈 강씨도 함께였다. 귀국한 지 석 달 만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사망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록은 인조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둘러 장례를 치루며 사건을 봉합하려 한 데서, 인조가 죽음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얼마 후 인조는 수라상에 오른 생선회를 먹고 탈이 났는데, 생선회에 독이 있었다고 했다. 인조는 남편의 죽음에 앙심을 품은 며느리 세자빈 강씨를 범인으로 몰아 별당에 가뒀다. 인조는 강씨를 역모죄로 처형할 셈이었다. 인조는 어린 세손을 보아 처형만은 면해 주자는 신하들의 상소를 차갑게 물리치고, 강씨를 사가로 내쫓아 사약을 내렸다. 남편 소현세자가 죽은 지 일 년이 채 못 돼서였다. 검은 가마에 실려 나가는 강씨의 최후를 사람들은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인조의 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강씨의 세 형제와 칠순 노모를 처형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강씨의 아버지를 삭탈관직했다. 강씨 일문을 풍비박산 낸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강씨가 낳은 세 아들, 12살, 8살, 4살 난 친손자들마저 제주도로 귀양보내 버렸다. 그 중 둘은 병들어 죽고 막내만 살아 강화도에서 목숨을 이어갔다. 세자빈 강씨의 시신은 왕가의 땅이 아닌 사가의 땅, 서울 남서쪽에 있는 강씨 집안의 사유지에 묻혔다. 지금 누워 있는 바로 그곳에.
세자빈의 죽음은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시작된 비극의 제2막이다. 물론 소현세자의 죽음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소현세자는 당시 조선 지배층 가운데 보기 드물게 열린 눈과 앞선 생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이는 급변하는 극동 아시아 정세에 눈뜨고 지구 반대편의 서양 문물까지 받아들였다. 당시 지배층이 신봉하는 성리학 말고도 다른 가치와 이념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이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일찌감치 자주적 근대화를 준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총명하고 민첩하고 적극적인 세자빈
세자빈 강씨는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딸로, 정묘호란이 일어난 해에 소현세자와 결혼하여,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을 지냈다. 소현세자 부부는 만주 심양, 지금의 봉천에 거처를 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심관이라 했다. 당시 소현세자 부부는 명이 망하고 청이 서는 격변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청군이 명나라 수도 북경에 입성할 때, 부부는 청군과 함께 했다. 부부는 조선이 그토록 믿어 온 명이 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조선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친명배청(親明背淸)’의 깃발이 허깨비일 뿐이라는 현실을 확인한 것이다.
소현세자는 조선이 ‘오랑캐’라 하며 멸시하던 청나라가 실은 수준 높은 문화와 포용력을 갖춘 명실상부한 강대국임을 발견했다. 청은 소현세자를 후하게 대접했다. 나라의 중요한 제사나 황제와 중신들이 모이는 조회에 세자를 참석시키고 요직의 인물들과 사귀게 했다. 소현세자는 비록 인질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고 바깥출입을 할 수 있었다. 청은 명과 최후 결전을 앞두고 조선과 관계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어 다리 구실을 할 세자를 정중히 대접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청은 심관을 조선 정부를 대리하는 현지 기관으로 여겼다. 조선에 해야 할 연락 사항, 통보 사항은 으레 심관을 상대로 했다. 그러니 세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청 조선 대사요, 심관은 대사관인 셈이었다.
인조는 왕권을 소현세자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아들을 죽였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소론들과 노론들의 당쟁의 산물이라 할것이다. 왕이 당쟁에 놀아난것이다.